2026년 5월 4일 월요일

(소설 원고) [메라 박사의 기묘한 범죄_에도가와 란포] 텍스트 전문(全文) 수록 [일본 미스터리 소설] 거울과 달빛이 만든 완벽한 살인 | #원아나의책읽는TV #원기범아나운서 #오디오북



☆원아나의 한마디☆

거울 속의 내가 나와 다른 미소를 짓는 순간, 당신은 그 기이한 유혹을 뿌리칠 수 있습니까? 달빛이 빚어낸 잔혹한 예술과 인간의 모방 본능이 만나는 그 서늘한 경계선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오직 목소리로만 닿을 수 있는 미스터리의 심연을 함께 확인해 보시죠.

소설 원고 스크립트 전문(全文)

메라 박사의 기묘한 범죄
에도가와 란포


나는 추리 소설의 구상을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일이 있는데, 도쿄를 벗어나지 않을 때는 대개 가는 곳이 정해져 있다. 아사쿠사 공원, 유원지, 우에노 박물관, 그리고 동물원, 스미다강의 유람선, 료고쿠의 국기관. (그 둥근 지붕이 옛날의 파노라마 극장을 떠올리게 해서 나의 마음을 끈다.) 오늘도 그 국기관의 '도깨비 대회'라는 것을 보고 돌아가는 길이다. 오랜만에 '미로'를 빠져나오며, 어릴 적 그리운 추억에 잠길 수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의 시작은 역시나 원고 독촉이 심해서 집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일주일 정도 도쿄 시내를 배회하고 있던 어느 날, 우에노 동물원에서 우연히 묘한 인물과 마주친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어느덧 해가 질 무렵, 폐장 시간이 다가오자 구경꾼들은 대부분 돌아가 버렸고, 동물원 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연극이나 공연에서도 그렇지만, 마지막 막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신발장 앞의 혼잡함만 신경 쓰는 도쿄 사람들의 성향은 아무래도 내 취향과 맞지 않는다.

동물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도쿄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서둘러 돌아가려 한다. 아직 문이 닫힌 것도 아닌데, 장내는 텅 비어 인기척도 없는 상태였다.

나는 원숭이 우리 앞에 우두커니 서서, 불과 조금 전까지 붐비던 동물원 안의 기묘한 고요함을 즐기고 있었다.

원숭이들도 장난을 걸어주던 상대가 사라진 탓인지 조용하고 쓸쓸해 보였다.

주변이 너무나 조용했기 때문에, 잠시 후 문득 뒤에서 사람의 기척을 느꼈을 때는 왠지 오싹해질 정도였다.
그는 머리를 길게 기른 창백한 얼굴의 청년으로, 주름진 낡은 옷을 입어 이른바 '부랑자' 같은 느낌을 주는 인물이었지만, 얼굴 생김새에 비해 쾌활하게 우리 안의 원숭이에게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동물원에 자주 오는 모양인지, 원숭이를 다루는 솜씨가 능숙했다. 먹이를 하나 줄 때도 마음껏 재주를 부리게 하고 실컷 즐긴 뒤에야 마지못해 던져주는 식이라 아주 재미있었기 때문에, 나는 씩 웃으며 그 모습을 한참이나 구경했다.

"원숭이란 녀석은 어째서 상대방의 흉내를 내고 싶어 하는 걸까요?"
남자가 문득 내게 말을 건넸다. 그는 그때 귤껍질을 허공으로 던졌다가 받고, 던졌다가 받고 있었다. 우리 안의 원숭이 한 마리도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귤껍질을 던지고 받고 있었다.
내가 웃어 보이자 남자는 다시 말했다.

"흉내를 낸다는 건, 생각해보면 무서운 일입니다. 신께서 원숭이에게 그런 본능을 주셨다는 게 말이죠."
나는 이 남자가 철학자 같은 부랑자라고 생각했다.

"원숭이가 흉내 내는 건 우습지만, 인간이 흉내를 내는 건 결코 우스운 일이 아니죠. 신은 인간에게도 원숭이와 같은 본능을 어느 정도 주셨습니다. 그건 생각해보면 꽤 무서운 일이에요. 선생님, 깊은 산속에서 커다란 원숭이와 마주친 나그네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남자는 말하기를 좋아하는지 점점 말이 많아졌다. 나는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타인이 말을 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남자에게는 묘한 흥미를 느꼈다. 창백한 얼굴과 덥수룩한 머리카락이 내 마음을 끌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의 철학자 같은 말투가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모릅니다. 그 큰 원숭이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는 기꺼이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려 했다.
"인가와 멀리 떨어진 깊은 산속에서, 홀로 여행하던 남자가 커다란 원숭이와 마주친 겁니다. 그리고 차고 있던 단도를 원숭이에게 빼앗기고 말았죠. 원숭이는 칼을 뽑아 들고 장난삼아 마구 휘두르며 덤벼들었습니다. 나그네는 평범한 상인이었기에 칼 한 자루를 빼앗기자 당장 목숨마저 위태로워졌습니다."

해 질 녘 원숭이 우리 앞에서 창백한 남자가 묘한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상황 자체가 나를 즐겁게 했다. 나는 "흠, 흠" 하며 맞장구를 쳤다.
"되찾으려 했지만, 상대는 나무 타기의 명수인 원숭이라 손을 쓸 도리가 없었죠. 하지만 나그네는 꽤 기지가 있는 사람이라 기가 막힌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는 주변에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를 주워 칼처럼 쥐고서 여러 가지 동작을 취해 보였습니다. 원숭이 쪽에서는, 신에게 남을 흉내 내는 본능을 부여받은 슬픈 운명 탓에 나그네의 몸짓을 하나하나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나그네가 원숭이가 한껏 흥이 오른 것을 눈치채고 나뭇가지로 연신 자신의 목을 내리치는 흉내를 냈기 때문입니다. 원숭이는 그것을 따라 진검으로 자신의 목을 쳤으니 버틸 재간이 없었죠.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계속 자신의 목을 치다가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나그네는 칼을 되찾은 데다가 커다란 원숭이 한 마리까지 덤으로 얻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하하..."

남자는 이야기를 마치고 웃었지만, 묘하게 음침한 웃음소리였다.
"하하하... 설마요."
내가 웃자 남자는 문득 진지해지며 말했다.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원숭이란 녀석은 그런 슬프고도 무서운 숙명을 타고났습니다. 한번 시험해 볼까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근처에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를 원숭이 한 마리에게 던져주고, 자신은 짚고 있던 지팡이로 목을 베는 흉내를 내보였다.
그러자 어찌 된 일인가. 이 남자, 원숭이를 다루는 데 이골이 난 모양인지, 원숭이 녀석은 나뭇가지를 줍더니 다짜고짜 자신의 목을 쓱쓱 문지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보시죠. 만약 저 나뭇가지가 진짜 칼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저 꼬마 원숭이는 진작에 황천길로 갔을 겁니다."
넓은 동물원 안은 텅 비어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무성한 나무들 아래 그늘에는 벌써 밤의 어둠이 음침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왠지 온몸이 오싹해졌다. 내 앞에 서 있는 창백한 청년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마법사나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흉내라는 것의 무서움을 아시겠습니까?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역시 흉내를 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슬프고도 무서운 숙명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타르드라는 사회학자는 인간의 생활을 '모방'이라는 두 글자로 정리하려고 했을 정도 아닙니까?"
지금은 일일이 다 기억나지 않지만, 청년은 그 후로 '모방'의 공포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을 늘어놓았다. 그는 또한 거울이라는 것에 비정상적인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무서워지지 않습니까? 저는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무서운가? 거울 반대편에 또 한 명의 내가 있어서, 원숭이처럼 사람 흉내를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기억난다.

동물원의 폐장 시간이 되어 관리인의 재촉을 받고 우리는 그곳을 나섰지만, 밖으로 나와서도 헤어지지 않고 이미 어두워진 우에노의 숲을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 알고 있습니다. 에도가와 선생님이시죠? 추리소설 쓰시는."
어두운 나무 밑 길을 걷다가 갑자기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흠칫 놀랐다. 상대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서운 남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에 대한 흥미도 한층 더 커졌다.
"애독하고 있습니다. 최근 작품들은 솔직히 말해 별로 재미가 없지만, 예전 작품들은 참신해서 아주 즐겨 읽었죠."
남자는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다. 그 점도 마음에 들었다.

"아, 달이 떴군요."
청년의 말은 때때로 급격하게 비약했다. 문득 이 녀석, 미치광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늘이 보름이었던가요? 거의 만월이네요. 쏟아질 듯한 달빛이라는 건 바로 이걸 두고 하는 말이겠죠. 달빛이란 참 이상하죠. 달빛이 요술을 부린다는 문구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똑같은 풍경인데도 낮과는 전혀 다르게 보이지 않습니까? 선생님의 얼굴도 마찬가지예요. 조금 전 원숭이 우리 앞에 서 계시던 선생님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자 나도 묘한 기분이 들어, 짙은 그늘이 진 상대의 두 눈과 거무스름한 입술이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쁘고 무서운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달이라고 하면 거울과 인연이 깊죠. '수월(물에 비친 달)'이라는 단어나 '달이 거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문구가 생겨난 것은 달과 거울 사이에 어딘가 공통점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보시죠, 저 풍경을."

그가 가리키는 발아래에는, 그을린 은빛으로 안개에 휩싸여 낮보다 두 배는 더 넓어 보이는 시노바즈 연못이 펼쳐져 있었다.
"낮의 풍경이 진짜고, 지금 달빛에 비치고 있는 저것은 그 낮의 풍경이 거울에 비친, 거울 속의 그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청년은 그 자신 또한 거울 속의 그림자처럼 희미한 모습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선생님, 소설의 소재를 찾고 계신 것 아닙니까? 제가 선생님께 어울릴 만한 소재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만. 제 자신이 직접 겪은 실화인데, 이야기해 드릴까요? 들어보시겠습니까?"
사실 나는 소설의 소재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걸 다 떠나서 이 묘한 남자의 경험담을 들어보고 싶었다. 지금까지의 말투로 미루어 보아 결코 흔해 빠진 지루한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았다.
"듣겠습니다. 어디 가서 식사라도 같이하시겠습니까? 조용한 방에서 천천히 들려주십시오."
내 제안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식사를 사양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예의 차리거나 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제 이야기는 밝은 전등 밑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선생님만 괜찮으시다면 여기서, 이 벤치에 앉아 요술을 부리는 달빛을 맞으며 거대한 거울에 비친 시노바즈 연못을 바라보면서 이야기하죠. 그리 긴 이야기는 아닙니다."

나는 청년의 취향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숲속에 버려진 돌 위에 그와 나란히 앉아 청년의 기이한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코난 도일의 소설 중에 '공포의 계곡'이라는 게 있었죠."
청년은 불쑥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건 어딘가 험준한 산과 산이 만들어낸 협곡을 말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공포의 계곡이 대자연의 협곡에만 있는 건 아닙니다. 이 도쿄 한복판, 마루노우치에도 무서운 계곡이 있습니다.
높은 빌딩과 빌딩 사이에 끼어 있는 좁은 도로. 그곳은 자연의 협곡보다 훨씬 험준하고 훨씬 음침합니다. 문명이 만들어낸 유곡이죠. 과학이 만들어낸 골짜기입니다. 그 골짜기 밑바닥 도로에서 올려다본 양쪽의 6, 7층짜리 삭막한 콘크리트 건물은 자연의 절벽처럼 푸른 잎도, 계절마다 피는 꽃도, 눈을 즐겁게 하는 기복도 없이, 글자 그대로 도끼로 쪼개놓은 듯한 거대한 잿빛 틈새에 불과합니다. 올려다보이는 하늘은 띠처럼 가느다랗죠. 해나 달도 하루 중 고작 몇 분 동안만 제대로 비출 뿐입니다. 그 밑바닥에서는 한낮에도 별이 보일 정도니까요. 기묘하고 차가운 바람이 끊임없이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관동 대지진 이전까지, 저는 그런 협곡 중 한 곳에 살았습니다. 건물의 정면은 마루노우치의 S 거리를 향해 있었죠. 정면은 밝고 훌륭합니다. 하지만 일단 뒤쪽으로 돌아가면, 다른 빌딩과 등을 맞대고 있어서 서로 삭막하게 콘크리트가 그대로 드러난, 창문 뚫린 절벽이 고작 3~4미터 남짓한 통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습니다. 도심의 유곡이라는 건 결국 그 부분을 말하는 겁니다.

빌딩의 방들은 가끔 주거를 겸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낮에만 사용하는 사무실이라 밤이 되면 다들 퇴근해 버립니다. 낮에 붐비는 만큼 밤의 적막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마루노우치 한복판에서 부엉이가 우는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정말 깊은 산속 같은 느낌이죠. 그 뒤쪽의 협곡도 밤에는 글자 그대로 진짜 협곡이 됩니다.
저는 낮에는 수위 노릇을 하고, 밤에는 그 빌딩의 지하실에서 먹고 자고 했습니다. 대여섯 명의 숙식하는 동료가 있었지만, 저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틈만 나면 혼자 틀어박혀 캔버스를 칠하고 있었죠. 자연히 다른 사람들과는 입도 뻥긋하지 않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 사건이 일어난 곳은 방금 말한 뒤쪽 협곡이었기 때문에, 그곳의 상황을 조금 설명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곳은 건물 자체에 정말 불가사의하고 기분 나쁜 우연의 일치가 숨어 있었습니다. 우연이라기엔 너무나 완벽하게 똑같아서, 저는 그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의 짓궂은 장난이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 두 개의 빌딩은 크기도 엇비슷하고 양쪽 다 5층짜리였는데, 정면이나 측면은 벽의 색깔이나 장식이 완전히 다른 주제에, 협곡을 마주한 뒷면만큼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구조로 되어 있었던 겁니다. 지붕의 형태부터 잿빛 벽의 색깔, 각 층마다 네 개씩 나 있는 창문의 구조까지 마치 사진으로 찍어낸 것처럼 똑같았습니다. 어쩌면 콘크리트의 금 간 모양까지 똑같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협곡을 마주한 방은 하루에 단 몇 분(이건 좀 과장이지만)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밖에 볕이 들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세입자가 없었고, 특히 가장 불편한 5층 같은 곳은 늘 비어 있었기 때문에, 저는 한가할 때면 캔버스와 붓을 들고 그 빈방에 자주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창문 밖을 내다볼 때마다 건너편 건물이 마치 이쪽의 사진처럼 쏙 빼닮은 것을 보며 섬뜩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언가 무서운 사건이 일어날 전조처럼 느껴졌죠.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적중하는 순간이 찾아온 겁니다. 5층 북쪽 끝 창문에서 목을 매단 시체가 발견된 겁니다. 게다가 약간의 시차를 두고 그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첫 번째 자살자는 중년의 향료 브로커였습니다. 그 사람은 처음 사무실을 구하러 왔을 때부터 왠지 인상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장사꾼치고는 어딘가 상인 같지 않고 음침하며, 늘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남자였죠. 이 사람이라면 혹시 뒤쪽 협곡을 마주한, 볕도 안 드는 방을 빌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곳 5층 북쪽 끝의 가장 외진(빌딩 안에서 외지다는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정말 속세와 뚝 떨어진 느낌의 방이었습니다), 가장 음침하고 따라서 방세도 가장 싼 방 두 개가 이어진 곳을 택했습니다.

글쎄요, 이사 오고 나서 일주일 정도 있었던가요. 좌우간 아주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그 향료 브로커는 독신이었기 때문에 한쪽 방을 침실로 삼아 싼 침대를 놓고, 밤에는 그 유곡이 내려다보이는 음침한 절벽의, 인적 드문 동굴 같은 방에서 혼자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달 밝은 밤, 창문 밖으로 튀어나온 전선 인입용 작은 가로대에 밧줄을 걸고 목을 매 자살해 버린 겁니다.
아침이 되어 그 일대를 담당하던 도로 청소부가 아득히 높은 절벽 꼭대기에서 대롱대롱 흔들리는 목맨 시체를 발견했고, 한바탕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왜 자살을 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리저리 조사해 봐도 딱히 사업이 안 좋았던 것도 아니고 빚에 시달렸던 것도 아니었으며, 독신인 터라 가정적인 고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치정 얽힌 자살, 예컨대 실연 같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뭔가에 씌었던 게야. 처음 왔을 때부터 묘하게 우울해 보이는 이상한 남자라고 생각했지.'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결론지어 버렸습니다. 한 번은 그렇게 넘어갔죠. 그런데 얼마 후 그 똑같은 방에 다음 세입자가 들어왔고, 그 사람은 거기서 숙식을 하던 건 아니었지만 어느 날 밤 철야로 조사할 게 있다며 방에 틀어박히더니, 다음 날 아침 또 대롱대롱 소동이 벌어진 겁니다. 완전히 똑같은 방법으로 목을 매어 자살한 거죠.

역시나 원인은 조금도 알 수 없었습니다. 이번 자살자는 향료 브로커와 달리 아주 쾌활한 성격이었고, 그 음침한 방을 고른 것도 단지 방세가 저렴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공포의 계곡에 뚫린 저주의 창문. 그 방에 들어가면 아무런 이유 없이 스스로 죽고 싶어진다는 괴담 같은 소문이 은밀하게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세 번째 희생자는 평범한 세입자가 아니었습니다. 그 빌딩 사무원 중에 호걸이라 불리는 사내가 있었는데, 자신이 직접 시험해 보겠다고 나선 겁니다. 흉가 탐험이라도 하려는 듯한 기세였죠."
청년이 거기까지 이야기를 이어갔을 때, 나는 그의 이야기가 조금 지루해져서 말을 끊었다.
"그래서, 그 호걸도 똑같이 목을 매단 겁니까?"
청년은 조금 놀란 듯 내 얼굴을 보더니,
"그렇습니다."
하고 불쾌한 듯 대답했다.
"한 사람이 목을 매면 같은 장소에서 몇 번이고 사람들이 목을 맨다. 즉 그것이 모방 본능의 무서움이라는 뜻이 되는 건가요?"
"아, 그래서 지루해지신 거군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런 시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청년은 안도한 듯 나의 오해를 정정했다.
"마의 건널목에서 늘 사망 사고가 일어난다는 둥 하는, 그런 흔해 빠진 종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계속 말씀해 주시죠."
나는 정중하게 나의 오해를 사과했다.



"사무원은 혼자서 사흘 밤이나 그 마의 방에서 밤을 새웠습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죠. 그는 악령이라도 물리친 듯한 얼굴로 으스댔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해 주었죠.
'당신이 잤던 밤은 사흘 내내 흐리지 않았습니까? 달이 안 뜨지 않았냐고요.'라고 말입니다."
"호오, 그 자살과 달빛이 무슨 관련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나는 약간 놀라서 되물었다.
"네, 있었습니다. 첫 번째 향료 브로커도, 그다음 세입자도 달이 밝은 밤에 죽었다는 걸 저는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달이 뜨지 않으면 그 자살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도 좁은 협곡에 단 몇 분 동안, 백은빛의 요사스러운 빛이 비쳐 드는 그 짧은 시간에 일어나는 것이다. 달빛의 요술이다. 저는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죠."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어스름하게 하얀 얼굴을 들어 달빛에 휩싸인 발아래 시노바즈 연못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청년이 말한 거대한 거울에 비친 연못의 풍경이 희뿌옇고 요사스럽게 누워 있었다.
"이겁니다. 이 불가사의한 달빛의 마력. 달빛은 차가운 불꽃 같은, 음침한 격정을 유발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인화성 물질처럼 타오르는 겁니다. 그 기묘한 격정이 이를테면 '월광곡'을 낳는 것이겠죠. 시인이 아니더라도 달을 보면 무상함을 느끼게 됩니다. '예술적 광기'라는 말이 허락된다면, 달은 사람을 '예술적 광기'로 이끄는 것이 아닐까요."
청년의 현학적인 화술에 나는 조금 질려버렸다.

"그래서, 요컨대 달빛이 그 사람들을 목매달게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절반은 달빛의 죄였죠. 하지만 달빛이 사람을 곧장 자살하게 만들 리는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온몸으로 달빛을 맞고 있는 우리는 벌써 목을 맸어야 할 시간 아니겠습니까?"
거울에 비친 것처럼 창백한 청년의 얼굴이 씩 하고 웃었다. 나는 괴담을 듣는 어린아이처럼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호걸 사무원은 넷째 날 밤에도 마의 방에서 잤습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날 밤은 달이 유난히 밝았습니다.

저는 한밤중 지하실 이불 속에서 번쩍 눈을 떴고, 높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보자 왠지 모르게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어 무심결에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잠옷 차림 그대로 엘리베이터 옆의 좁은 계단을 정신없이 5층까지 뛰어 올라갔습니다. 한밤중의 빌딩이 낮의 번화함과는 정반대로 얼마나 적막하고 소름 끼치는지 상상조차 못 하실 겁니다. 수백 개의 작은 방을 품은 거대한 무덤입니다. 말로만 듣던 로마의 카타콤이죠. 완전한 암흑은 아니고 복도 요소요소에 전등이 켜져 있지만, 그 희미한 불빛이 오히려 더 공포스럽습니다.

이 소설의 오디오북 듣기

겨우 5층의 그 방에 다다르자, 저는 몽유병자처럼 폐허 같은 빌딩을 헤매고 있는 제 자신이 무서워져 미친 듯이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 사무원의 이름을 불렀죠.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습니다. 제 목소리만 복도에 메아리치다 쓸쓸히 사라져 갈 뿐이었죠.
손잡이를 돌리자 문은 맥없이 열렸습니다. 방 안에는 구석의 큰 테이블 위에 푸른 갓을 씌운 탁상시계가 초라하게 켜져 있었습니다. 그 불빛으로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침대는 텅 비어 있었죠. 그리고 그 문제의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창밖에는 건너편 빌딩이 5층 중간부터 지붕에 걸쳐 사라지려 하는 달빛의 마지막 자락을 받으며 흐릿한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쪽 창문 정면으로 완전히 똑같은 모양의 창문이 역시 활짝 열린 채 뻥 뚫린 검은 입을 벌리고 있었죠. 모든 것이 똑같았습니다. 그것이 요사스러운 달빛을 받아 한층 더 똑같이 보이는 겁니다.

저는 무서운 예감에 떨면서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지만, 당장 그쪽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아 우선 아득한 골짜기 밑바닥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달빛은 건너편 건물의 꼭대기 부분만 살짝 비추고 있을 뿐, 건물과 건물이 만들어낸 틈새는 새까맣게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이로 보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말을 듣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조금씩 오른쪽으로 비틀어 갔습니다. 건물의 벽은 그늘에 가려 있었지만, 건너편의 달빛이 반사되어 사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시야를 서서히 옮겨감에 따라 과연, 예상했던 것이 거기에 나타났습니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의 다리. 축 늘어진 손목. 꼿꼿이 펴진 상반신. 깊게 파인 목. 두 동강 난 것처럼 푹 꺾인 머리. 호걸 사무원은 결국 달빛의 요술에 홀려 그곳 전선 가로대에 목을 매달고 있었던 겁니다.

저는 황급히 창문에서 고개를 집어넣었습니다. 저 자신도 요술에 걸릴까 봐 겁이 났던 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습니다. 고개를 움츠리려다 힐끗 건너편을 보았는데, 그곳의 똑같이 열린 창문에서, 새까만 사각형 구멍에서, 사람의 얼굴이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 얼굴만 달빛을 받아 또렷하게 떠올라 있었습니다. 달빛 속에서도 누렇게 보이는, 쪼그라든 듯한, 오히려 기형적인, 아주 기분 나쁜 얼굴이었습니다. 그 녀석이 빤히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던 겁니다.
저는 흠칫 놀라 한순간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뜻밖이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 건너편 빌딩은 소유자와 담보를 잡은 은행 간에 복잡한 재판이 벌어져 당시에는 완전히 빈 건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살지 않았으니까요.
한밤중의 빈 건물에 사람이 있다. 게다가 문제의 목맨 창문 바로 정면 창문에서, 누런 요괴 같은 얼굴을 내밀고 있다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죠. 어쩌면 내가 환영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저 누런 녀석의 요술에 걸려 당장이라도 목을 매고 싶어지는 건 아닐까?

등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오싹한 공포를 느끼면서도, 저는 건너편의 누런 녀석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 녀석은 삐쩍 마르고 체구가 작은 50대 정도의 노인이었습니다. 노인은 가만히 제 쪽을 보고 있었는데, 이내 자못 의미심장하게 씩 하고 크게 웃나 싶더니 훅 하고 창문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웃는 얼굴이 어찌나 흉측하던지. 마치 이목구비가 뒤틀리며 얼굴 전체가 쭈글쭈글해지고, 입만 찢어질 듯 양옆으로 좍 늘어났습니다."




"다음 날 동료나 다른 사무실의 심부름꾼 할아버지 등에게 수소문해 보았지만, 그 건너편 빌딩은 빈 건물이고 밤에는 경비원조차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습니다. 역시 저는 환영을 보았던 걸까요?
세 번이나 연달아 일어난, 아무런 이유도 없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자살 사건에 대해 경찰에서도 일차적인 조사는 했지만, 자살이라는 사실에는 일말의 의심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상식 밖의 이치를 믿을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 방에서 잔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다들 미쳐버렸다는 식의 황당무계한 해석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 누런 녀석이 수상하다. 그놈이 세 사람을 죽인 거다. 마침 목맨 사건이 일어난 밤에 똑같이 맞은편 창문에서 그놈이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씩 웃고 있었다. 거기에 뭔가 무서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 저는 그렇게 확신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 지나, 저는 놀라운 발견을 했습니다.
어느 날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에 문제의 텅 빈 빌딩 앞 큰길을 걷고 있는데, 그 빌딩 바로 옆에 옛날식 벽돌로 지어진 소형 연립형 임대 사무실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그중 어느 한 곳의 돌계단을 껑충껑충 뛰어 올라가는 한 신사가 제 주의를 끌었습니다.
모닝코트를 입은 체구가 작고 약간 새우등을 한 노신사였는데, 옆모습이 어딘지 낯익은 느낌이 들어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지켜보았습니다. 신사는 사무실 입구에서 구두를 닦다가 휙 하고 제 쪽을 뒤돌아봤습니다. 저는 '헉' 하고 숨이 멎을 듯한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그 훌륭한 노신사가 바로 언젠가 밤에 텅 빈 빌딩 창문으로 엿보던, 그 누런 얼굴의 괴물과 영락없이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신사가 사무실 안으로 사라지고 난 뒤 그곳의 금빛 간판을 보니, '메라 안과, 의학박사 메라 료사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근처에 있던 인력거꾼을 붙잡고, 방금 들어간 사람이 메라 박사 본인임을 확인했습니다.
의학박사나 되는 사람이 한밤중에 텅 빈 빌딩에 숨어 들어가, 그것도 목맨 시체를 보며 씩 웃고 있었다는 이 불가사의한 사실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저는 격렬한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은밀하게,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서 메라 박사의 이력이나 일상생활에 대해 캐내려 애썼습니다.

메라 박사는 경력이 오래되었음에도 별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고, 돈 버는 재주도 없었는지 노년에 이르러서도 그런 임대 사무실에서 개업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굉장히 별난 성격이라 환자를 다룰 때도 몹시 불친절하고, 때로는 미치광이처럼 보일 때조차 있다고 하더군요. 부인도 자식도 없이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지금도 그 사무실을 거처 겸용으로 사용하며 거기서 숙식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엄청난 독서광이라 자기 전공 외의 낡은 철학 서적이나 심리학, 범죄학 등의 책을 잔뜩 가지고 있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그 병원 진찰실 안쪽 방에는 말이야, 유리 상자 안에 온갖 모양의 의안이 쫙 진열되어 있는데, 그 수백 개의 유리 눈알이 가만히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고. 가짜 눈이라도 그렇게 잔뜩 늘어놓으니 정말 기분 나쁘더군. 그리고 안과에 그런 게 왜 필요한지 몰라도, 해골이라든가 사람 크기만 한 밀랍 인형 같은 게 두세 개씩이나 쑥쑥 서 있다고.'

저희 빌딩의 어느 상인이 메라 박사의 진찰을 받았을 때 겪은 기묘한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그 후 틈만 나면 박사의 동태를 살피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텅 빈 빌딩의 예의 5층 창문도 이쪽에서 이따금 엿보았지만 특별히 달라진 점은 없었습니다. 누런 얼굴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죠.
아무리 생각해도 메라 박사가 수상했습니다. 그날 밤 맞은편 창문에서 엿보던 누런 얼굴은 박사가 틀림없었습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수상한 걸까요? 만약 그 세 번의 목맴이 자살이 아니라 메라 박사가 꾸민 살인 사건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럼 어째서, 어떤 수단을 썼느냐를 생각해 보면 꽉 막혀버리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역시 메라 박사가 그 사건의 가해자인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매일매일 저는 그 생각만 했습니다. 어느 날은 박사 사무실 뒤쪽 벽돌 담장 위로 기어 올라가 창문 너머로 박사의 개인 방을 몰래 들여다본 적도 있습니다. 그 방에 문제의 해골이나 밀랍 인형, 의안이 든 유리 상자 같은 게 놓여 있었죠.
그래도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협곡을 사이에 둔 맞은편 빌딩에서 대체 어떻게 이쪽 방의 사람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단 말인가. 최면술? 아니, 그건 불가능합니다. 죽음과 같은 중대한 암시는 전혀 효과가 없다고 들었으니까요.
그런데 마지막 자살 사건이 일어난 지 반년쯤 지나, 드디어 제 의심을 확인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 마의 방에 세입자가 들어온 겁니다. 세입자는 오사카에서 온 사람이라 흉흉한 소문을 전혀 몰랐고, 빌딩 관리처에서도 방세 수입을 조금이라도 올릴 심산으로 아무 말 없이 빌려주고 만 겁니다. 설마 반년이나 지난 지금 또다시 똑같은 일이 반복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죠.

하지만 적어도 저만큼은 이 세입자도 틀림없이 목을 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내 힘으로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었습니다.
그날부터 일은 뒷전으로 미루고 메라 박사의 동태만 살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마침내 냄새를 맡았습니다. 박사의 비밀을 알아낸 겁니다."
**5**
"오사카 사람이 이사 온 지 사흘째 되던 날 저녁, 박사의 사무실을 지켜보던 저는 그가 남의 눈을 피해 왕진 가방도 없이 걸어서 외출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물론 미행을 했죠. 그랬더니 박사는 뜻밖에도 근처 대형 빌딩 안에 있는 유명한 양복점에 들어가 수많은 기성복 중에서 양복 한 벌을 골라 사더니 그대로 사무실로 돌아갔습니다.

아무리 환자 없는 의사라지만 박사 본인이 기성복을 입을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조수에게 입힐 옷이라면 주인이 직접 남몰래 사러 갈 이유가 없죠. 이거 이상한데. 대체 저 양복을 어디다 쓸 작정일까. 저는 박사가 사라진 사무실 입구를 원망스럽게 지켜보며 잠시 서 있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아까 말씀드린 뒤쪽 담장 위로 올라가 박사의 방을 엿보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방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저는 이미 사무실 뒷골목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담장에 올라가 살짝 엿보니, 역시 박사는 그 방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정말로 기괴한 짓을 하고 있는 게 생생하게 보였습니다.

누런 얼굴의 의사 영감님이 거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아십니까? 밀랍 인형에게요. 예, 아까 말씀드린 사람 크기만 한 밀랍 인형 말입니다. 거기에다 방금 사 온 양복을 입히고 있었던 겁니다. 그 광경을 수백 개의 유리 눈알이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고요.
추리소설가이신 선생님께서는 여기까지 말씀드리면 모든 걸 다 눈치채셨겠죠. 저도 그때 번쩍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늙은 의학자의 너무나도 기괴한 발상에 경탄하고 말았습니다.
밀랍 인형에게 입힌 양복은 놀랍게도 색깔부터 줄무늬 패턴까지, 그 마의 방에 들어온 새 세입자의 양복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았던 겁니다. 박사는 수많은 기성복 속에서 그것을 기어이 찾아내 사 온 것이죠.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마침 달 밝은 밤이었으니, 오늘 밤 당장 그 끔찍한 참사가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어떻게든 해야 해, 막아야 해. 저는 발을 구르며 머리를 쥐어짜 냈습니다. 그리고 아, 스스로도 놀랄 만큼 기가 막힌 수단을 떠올렸습니다. 선생님께서도 분명 그 이야기를 들으시면 무릎을 치며 감탄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커다란 보따리를 안고 마의 방으로 올라갔습니다. 새로 온 세입자는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에 문은 잠겨 있었지만, 준비해 둔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책상에 앉아 밤샘 작업을 하는 척 꾸몄습니다. 푸른 갓을 씌운 탁상시계 불빛이 그 방의 세입자로 변장한 제 모습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옷은 그 사람의 것과 매우 흡사한 줄무늬 양복을 동료 한 명이 가지고 있어서, 제가 그걸 빌려 입고 있었죠. 머리 가르마 타는 방향까지 그 사람처럼 보이도록 신경 쓴 건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문제의 창문을 등지고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맞은편 창문의 누런 얼굴 녀석에게 내가 거기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지만, 내 쪽에서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애쓰며 상대에게 마음껏 틈을 내주는 작전을 썼습니다.
세 시간이나 그렇게 있었을까요. 과연 내 예상이 적중할까? 그리고 내 계획이 멋지게 성공할까? 정말 기다려지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세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돌아볼까, 지금 돌아볼까 참기가 힘들어서 몇 번이나 고개를 돌리려 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마침내 그 타이밍이 온 겁니다.
손목시계가 10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부엉, 부엉 하고 두 번,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하, 이게 신호구나. 부엉이 우는 소리로 창밖을 내다보게 만들려는 속셈이구나. 마루노우치 한복판에서 부엉이 소리가 나면 누구든 조금 내다보고 싶어질 테니까. 그렇게 직감한 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유리문을 열었습니다.

맞은편 건물은 달빛을 흠뻑 받아 은회색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것이 이쪽 건물과 완전히 똑같은 구조인 겁니다. 얼마나 기묘한 기분인지. 이렇게 말로 들어서는 그 미칠 것 같은 기분을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갑자기 시야 가득히 터무니없이 거대한 거울 벽이 생겨난 느낌입니다. 그 거울에 이쪽 건물이 그대로 비치고 있는 느낌이죠. 구조의 유사함 위에 달빛의 요술이 더해져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겁니다.
제가 서 있는 창문은 정면에 똑똑히 보입니다. 유리문이 열려 있는 것도 똑같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은... 어라, 이 거울은 이상한데. 내 모습만 쏙 빼놓고 비춰주지 않는 건가? ...문득 그런 기분이 드는 겁니다.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함정이 있는 겁니다.
이상하다, 나는 어디로 갔을까? 분명 이렇게 창가에 서 있는데. 두리번두리번 맞은편 창문을 찾습니다. 찾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죠.

그러다 헉 하고 내 그림자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창문 안이 아닙니다. 바깥쪽 벽 위입니다. 전선용 가로대에서 밧줄에 목을 매단 나 자신의 모습.
'아아, 그랬구나. 나는 저기에 있었구나.'
이런 식으로 말하면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그 기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악몽입니다. 맞아요. 악몽 속에서 그럴 생각이 없는데도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버리는, 그런 기분입니다. 거울을 보고 있는데 자신은 눈을 뜨고 있지만 거울 속의 자신은 눈을 감고 있다면 어떨까요? 자기도 모르게 거울 속 모습처럼 눈을 감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지 않겠습니까?
즉, 거울 속 그림자와 똑같이 맞추기 위해 목을 매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는 겁니다. 맞은편에서는 나 자신이 목을 매달고 있다. 그런데 진짜 내가 태평하게 서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죠.

목을 매단 모습이 조금도 무섭거나 흉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아름답습니다.
한 폭의 그림인 겁니다. 자신도 그 아름다운 그림이 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겁니다.
만약 달빛의 요술이 거들어 주지 않았다면 메라 박사의 이 기괴한 트릭은 전혀 힘을 쓰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짐작하셨겠지만 박사의 트릭이라는 건, 그 밀랍 인형에게 이쪽 방 거주자와 똑같은 양복을 입히고 이쪽의 전선 가로대와 똑같은 위치에 나뭇가지를 설치한 뒤, 거기에 밧줄을 매달아 대롱대롱 매달리게 해 보이는 아주 간단한 수법에 불과했습니다.
완전히 똑같은 구조의 건물과 요사스러운 달빛이 거기에 엄청난 효과를 부여한 것이죠.
이 트릭의 무서움은 미리 그것을 알고 있었던 저조차 자기도 모르게 창틀에 한쪽 발을 올려놓고는 흠칫 놀라 정신을 차렸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마취에서 깨어날 때와 같은 그 끔찍한 고통과 싸우며, 준비해 둔 보따리를 풀고 가만히 맞은편 창문을 주시했습니다.

정말 길게 느껴진 수초. 하지만 제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제 동태를 살피기 위해 맞은편 창문에서 그 누런 얼굴이, 즉 메라 박사가 불쑥 얼굴을 내민 겁니다.
잔뜩 벼르고 있던 저입니다.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칠 리 있겠습니까.
보따리 속의 물건을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려 창틀 위에 척 하니 걸터앉혔습니다.
그게 뭐였는지 아십니까? 그것 역시 밀랍 인형이었습니다. 저는 양복점에서 마네킹을 빌려온 겁니다.
거기다가 모닝코트를 입혀두었죠. 메라 박사가 늘 입고 다니는 것과 똑같은 옷으로 말입니다.
그때 달빛은 골짜기 밑바닥 가까이까지 비쳐 들고 있어서, 그 반사광 덕분에 이쪽 창문도 희부옇게 사물의 윤곽이 뚜렷이 보였습니다.
저는 마치 결투라도 하는 기분으로 맞은편 창문의 괴물을 쏘아보았습니다. 이 빌어먹을 놈, 이래도 버틸 테냐, 이래도. 속으로 힘을 잔뜩 주면서요.

그러자 어찌 되었을까요. 인간 역시 원숭이와 똑같은 숙명을 신에게 부여받았던 겁니다.
메라 박사는 자신이 고안해 낸 트릭과 똑같은 수법에 당하고 말았습니다. 체구가 작은 노인은 참담하게도 비척비척 창틀을 넘어, 이쪽의 마네킹과 똑같은 자세로 거기에 걸터앉는 게 아닙니까!
저는 인형 조종사였습니다.
마네킹 뒤에 서서 손을 번쩍 들면, 맞은편 박사도 손을 들었습니다.
발을 흔들면 박사도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제가 뭘 했을 것 같습니까?

하하하... 살인을 저지른 겁니다.
창틀에 걸터앉아 있는 마네킹을 등 뒤에서 있는 힘껏 밀어버렸습니다. 인형은 우당탕 소리를 내며 창밖으로 사라졌습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맞은편 창문에서도, 이쪽의 그림자처럼 모닝코트 차림의 노인이 휙 하고 바람을 가르며 아득히 먼, 아주 까마득한 골짜기 밑바닥을 향해 추락해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퍽 하고 무언가 짓눌리는 듯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습니다.
..................메라 박사는 죽은 겁니다.

저는 지난밤 누런 얼굴이 지었던 그 흉측한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에 쥐고 있던 끈을 잡아당겼습니다. 스르르 당겨진 끈을 따라 빌려온 마네킹이 창틀을 넘어 방 안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것마저 밑으로 떨어뜨려 버려서 살인 혐의를 뒤집어쓰면 큰일이니까요."
이야기를 마치고 청년은 그 누런 얼굴의 박사처럼 소름 끼치는 미소를 띠며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메라 박사의 살인 동기 말입니까? 그건 추리소설가이신 선생님께는 말씀드릴 것도 없는 일이겠죠. 아무런 동기가 없어도 사람은 살인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존재라는 걸 누구보다 꿰뚫고 계신 선생님께는요."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일어서더니, 나를 만류하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휙휙 저편으로 걸어가 버렸다.

나는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배웅하며, 쏟아지는 달빛을 온몸으로 맞은 채 우두커니 돌 위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청년과 마주친 일도, 그의 이야기도, 끝내는 청년 그 사람조차도, 그가 말한 '달빛의 요술'이 만들어낸 기괴한 환영은 아니었을까 하고 의심하면서. (끝)


더 많은 명작 오디오북(1000편)을 생생한 목소리로 듣고 싶으시다면, 유튜브 '원아나의 책 읽는 TV'를 방문해 주세요!


본 포스팅의 번역 및 각색 원고는 '원아나의 책 읽는 TV'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무단 도용 및 상업적 배포를 금하며, 인용 시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에도가와란포 #메라박사의기묘한범죄 #일본추리소설 #추리소설추천 #소설텍스트공개 #소설전문읽기 #소설원고확인 #원아나의책읽는TV #원기범아나운서 #꿀잠오디오북 #미스터리소설 #오디오북추천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