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아나의 한마디☆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찰나, 인간은 자신의 가장 깊은 공포와 마주하게 됩니다. 에도가와 란포가 설계한 이 비정한 미스터리 속에서, 우리가 믿는 진실이 얼마나 나약한 것인지 서늘하고도 차분한 목소리로 전해드립니다.소설 원고 텍스트 전문 (全文)
몽유병자의 죽음
에도가와 란포
히코타로가 일하던 면직물 도매상에서 쫓겨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3개월이 지났다. 옛 영주였던 M 백작 저택에서 잡역부 같은 일을 하며 근근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쉰이 넘은 아버지에게 신세를 지는 것은 그로서도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일자리를 찾아보려고 남에게 부탁도 하고 스스로도 뛰어다녔지만, 가뜩이나 불경기에 학력도 없고 이렇다 할 기술도 없는 그 같은 사내를 고용해 주겠다는 곳은 없었다. 숙식을 제공하는 조건이라면 오라는 곳이 한 군데 있기는 했으나, 그쪽은 히코타로가 거절했다. 그에게는 도저히 숙식하며 일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히코타로에게는 어릴 적부터 잠꼬대를 하며 돌아다니는 몽유병 증세가 있었다. 아주 또렷한 목소리로 잠꼬대를 하는데, 곁에 있는 사람이 잠꼬대인 줄 모르고 대답을 하면 그 말을 받아 또 중얼거렸다. 그렇게 끝도 없이 문답을 되풀이하다가도 막상 아침에 눈을 뜨면 자신은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는 말이 너무나 또렷해서 섬뜩할 정도라고 동네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시작했을 무렵에는 한동안 증세가 멎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스무 살을 넘기면서 재발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눈에 띄게 병세가 악화되어 갔다.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주변을 걸어 다니는 것 정도는 약과였다. 심할 때는 무의식 중에 앞문의 자물쇠를 열고—숙식하며 일하던 도매상의 문이었다—동네를 한 바퀴 삥 돌고 와서는 다시 문을 잠그고 잔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저 그 정도 기행으로 끝났다면 '기분 나쁜 녀석' 정도로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꿈속을 헤매는 동안 남의 물건을 가져오는 일이 생겼다는 점이다. 즉,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도둑질을 한 셈이다.
게다가 그런 일이 두 번 세 번 반복되자, 아무리 무의식중의 행동이라 해도 도둑을 고용해 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쫓겨나고 만 것이다. 앞으로 3년만 더 기한을 채우면 독립을 허락받을 수 있었던 아까운 시점에 결국 그 도매상에서 해고당하고 만 것이다.
처음 자신이 몽유병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얼마나 놀랐던가. 얼마 없는 용돈을 털어 의사에게 진찰도 받았다. 각종 의학 서적을 사들여 자가 치료도 해보았다. 신불에게 기도하며, 가장 좋아하는 떡을 끊으면서까지 병이 낫기를 빌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끔찍한 악습은 도무지 낫질 않았다.
아니, 낫기는커녕 나날이 심해져만 갔다. 그리고 마침내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무의식중의 범죄까지. 아아, 나는 어쩌면 이리도 기구한 놈일까. 그는 그저 자신의 불행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는 다행히 법적인 범죄자가 되는 것만은 면해왔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일로 더 끔찍한 죄를 저지르지 말란 법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무의식중에 사람을 죽이는 일조차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책을 찾아보아도,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몽유병자의 살인이라는 것은 간혹 있는 일인 듯했다. 아직 도매상에 있을 무렵, 밥 짓는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 고향에서 있었던 실화라며 섬뜩한 이야기를 해준 것을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을에서도 소문난 열녀였던 어떤 여자가, 잠결에 들일할 때 쓰는 낫을 휘둘러 남편을 죽이고 말았다는 이야기였다.
그 생각을 하면 그는 이제 밤이라는 것이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하루의 피로를 푸는 안식의 잠자리가 그에게만은 마치 지옥처럼 느껴졌다. 물론 집으로 돌아온 후로는 발작이 조금 멎은 듯했지만, 그렇다고 결코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숙식하며 일하는 직장 같은 것은 두 번 다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모처럼 찾은 일자리를 아무런 이유도 없이 거절해 버리는 아들의 태도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직 다 커서 재발한 아들의 병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아들이 어떤 잘못으로 도매상에서 쫓겨났는지조차 사실 명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어느 날, 수레 한 대가 M 백작의 문간방으로 들어와 세 평 남짓한 아버지의 비좁은 거처 앞에 멈춰 섰다. 그 수레 위에서 아들 히코타로가 묘하게 실실 웃으며 짐을 들고 내린 것이다. 깜짝 놀란 아버지가 어찌 된 일이냐고 묻자, 그는 그저 코웃음을 치며 조금 면목 없는 일이 있어서 그렇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다음 날, 도매상 주인으로부터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거기에는 '이번에 사정이 생겨 잠시 아드님을 댁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만, 결코 아드님께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니…' 하는 식의, 이런 경우에 흔히 쓰는 판에 박힌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필시 이 녀석이 술집이나 들락거리다 가게 돈을 축내기라도 했으려니 하고 섣불리 짐작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틈만 나면 그를 앞에 앉혀놓고 '이 나약한 놈아' 하는 식의 옛날 방식으로 훈계를 늘어놓곤 했다.
히코타로가 처음 돌아왔을 때 사실은 이러저러하다고 털어놓았다면 쉽게 끝날 일이었겠지만, 말할 기회를 놓친 데다 아버지에게 이상한 오해를 받고 훈계까지 듣게 되자, 그의 성격상 이제 와서 진실을 털어놓을 마음이 싹 가셔버렸다.
그의 어머니는 3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형제도 없는, 그야말로 혈혈단신 부자지간이었지만, 그런 사이일수록 그 묘한 혈육에 대한 증오심 같은 감정 때문에 서로 어딘지 모르게 벽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고집스럽게 병을 숨긴 것도 이런 감정이 한몫했기 때문이다.
물론 한편으로는 스물세 살의 그에게 그런 사실을 털어놓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수치스럽기도 했겠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모처럼의 일자리를 거절해버린 아들을 아버지는 점점 더 못마땅해했고, 그것이 히코타로에게도 전해져 그 역시 묘하게 신경질이 났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요즘 들어서는 서로 입만 열면 금세 싸울 듯이 달려들거나, 아니면 몇 시간이고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고만 있는 형편이었다.
오늘도 역시 그랬다.
며칠째 비가 계속 내린 탓에 히코타로는 일과처럼 하던 산책도 나가지 못했고, 근처 대본소에서 빌려온 소설책도 다 읽어버려 도무지 몸 둘 바를 모르는 심정으로 멍하니 아버지의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세 평 남짓한 좁은 집이 방바닥부터 벽, 천장까지 모조리 눅눅하게 젖어 금세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퀴퀴한 냄새가 훅 코를 찔렀다. 게다가 8월 한여름이라 비가 와도 견딜 수 없이 무더웠다.
"에잇, 뒈져버려, 뒈져버려, 뒈져버려……."
그는 거기에 있던, 납 부스러기를 뭉쳐놓은 듯한 무겁고 볼품없는 문진으로 책상 위를 마구 내리치며 자포자기한 듯이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또 오랫동안 꿀먹은 벙어리처럼 생각에 잠겨 있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는 틀림없이 십만 엔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아아, 십만 엔이 있으면 좋겠어. 그러면 일하지 않아도 되잖아. 이자만으로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어. 내 병도 돈을 듬뿍 들여 좋은 의사에게 가면 고칠 수 있을지도 몰라. 아버지도 그래. 그 나이에 구질구질한 노동을 할 필요가 없다고. 이러나저러나 다 돈이야, 돈. 십만 엔만 있으면 돼. 가만 보자, 십만 엔이면 은행 이자가 6푼이라고 치면 1년에 6천 엔, 한 달에 5백 엔인가. 굉장하군……."
그러자 그의 머릿속에 언젠가 도매상 지배인을 따라갔던 요정의 풍경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자기 곁에 앉았던 눈썹 짙은 기생의 모습과 그 목소리, 여러 가지 요염한 자태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근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아, 그래. 십만 엔. 하지만 대체 그런 돈이 어디 있다는 거야. 에잇 젠장, 뒈져버려, 뒈져버려, 뒈져버려……."
그러면서 또다시 쾅쾅 문진으로 책상을 내리치는 것이었다.
그가 그런 짓을 반복하고 있을 때, 어느새 전등이 켜지고 아버지가 돌아왔다.
"나왔다. 아이구, 비 참 지독하게도 오는군."
요즘 들어 그는 그 목소리만 들으면 오싹하고 한기를 느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비에 젖은 구두를 정리하고 나자, 피곤하다는 듯 비좁은 방의 초라한 화로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젖은 감색 스탠드칼라 윗도리를 벗고 셔츠 차림이 되어서는 바지 주머니에서 꺼낸 놋쇠 담뱃대로 우선 담배부터 한 모금 피우는 것이었다.
"히코타로, 뭐 좀 끓여 놨냐?"
그는 아버지로부터 취사를 맡으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거의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아침에도 아버지가 투덜거리며 직접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날이 많았다. 오늘 역시 당연히 아무런 준비도 해놓지 않았다.
"어이, 왜 말이 없어. 이런, 물도 안 끓여 놨잖아. 몸을 닦을 수도 없겠군."
뭐라 말해 봐도 히코타로가 묵묵부답이자, 아버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에구구" 소리를 내며 일어나 부엌으로 내려가 부스럭거리며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그 기척을 느끼며 우두커니 책상 앞 벽만 응시하고 있는 히코타로의 가슴속은, 증오인지 슬픔인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으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이럴 때 아무 말 없이 휙 밖으로 나가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녔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도 없으니 그저 비 새는 얼룩진 벽만 하염없이 노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구운 연어로 초라한 밥상을 차린 아버지가 유일한 낙인 반주를 시작했다. 술병을 반쯤 비울 때쯤이면 슬슬 기운이 나서 늘 하던 훈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히코타로, 이리 좀 와 봐라. ……넌 어째서 내가 하는 말에 대답이 없는 거냐. 오라면 올 것이지."
그제야 그는 어쩔 수 없이 책상 앞에 앉은 채로 몸만 돌려 처음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벗겨진 머리와 주름살을 빼면 자기 자신과 쏙 빼닮은 얼굴이 술기운에 벌겋게 달아올라, 풀린 눈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넌 매일 그렇게 빈둥거리고 있으면서 도대체 부끄럽지도 않냐……." 그러고는 장황하게 남의 자식 칭찬을 늘어놓더니, "내가 말이다, 너보고 날 먹여 살리라고는 안 해. 그저 이 늙은이 등골을 빼먹으며 빈둥거리는 짓만은 제발 그만둬 다오. 어떠냐, 알아들었어? 알아들었어, 못 알아들었어?"
"알았다고요!" 그러자 히코타로가 험악한 기세로 쏘아붙였다. "그래서 죽어라 취직자리를 찾고 있잖아요. 찾아도 없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없을 리가 있나. 요전에 XX 씨가 소개해 준 자리는 왜 거절한 거냐. 난 도무지 네가 하는 짓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건 숙식하며 일하는 거라서 싫다고 했잖아요."
"숙식하는 게 왜 안 된다는 거냐. 출퇴근이나 숙식이나 다를 게 뭐가 있어."
"……."
"그런 배부른 소리를 할 처지라고 생각하느냐. 예전 직장에서 쫓겨난 건 다 뭣 때문이야. 다 네 그 제멋대로인 성격 때문이야. 넌 속으로 네가 제법 컸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어림없는 소리. 아직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른다. 남이 추천해 주는 곳에 네네 하고 가면 되는 거야."
"그런 말씀 하셔 봐야 이미 거절한 걸 이제 와서 어쩌겠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넌 건방지다는 거다. 도대체 그걸 내게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거절한 게 누군데. 네가 멋대로 거절해 놓고서 이제 와서 어쩔 수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어떡하라는 겁니까. ……제가 그렇게 방해가 되신다면 나가면 될 거 아닙니까. 네, 내일부터라도 당장 나가겠습니다."
"이, 이 빌어먹을 놈! 그게 애비한테 할 소리냐!"
순식간에 아버지의 손이 앞의 술병을 낚아채더니, 히코타로의 미간을 향해 날아왔다.
"무슨 짓이에요!"
그렇게 외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그가 아버지에게 덤벼들었다. 미친 짓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볼썽사나운 부자간의 난투극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오늘 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요 근래에는 거의 매일 밤 벌어지는 일상 중 하나였다.
그렇게 뒤엉켜 싸우다 보면 언제나 히코타로 쪽에서 먼저 견디기 힘들다는 듯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무엇이 서글픈 걸까. 무어라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슬펐다. 허름한 양복을 입고 일하는 쉰 살의 아버지도, 그 아버지 집에 얹혀 빈둥거리는 자기 자신도, 거지 소굴 같은 이 비좁은 집도, 모든 것이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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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던가.
아버지가 화로 서랍에서 목욕표를 꺼내 대중목욕탕에 다녀온 것 같았다. 한참 뒤에 돌아와서는 아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
"비가 싹 그쳤다. 어이, 벌써 자냐. 달빛이 참 좋구나, 마당에 안 나가볼래?"
같은 소리를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툇마루를 통해 마당으로 내려갔다.
그동안 히코타로는 방 벽 쪽에 엎드린 채, 울기 시작했을 때의 자세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모기장도 치지 않고 온몸을 모기에게 뜯기며, 토라진 아내처럼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입버릇처럼 '뒈져버려. 뒈져버려'를 염불처럼 머릿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새 잠이 들고 만 것이다.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던가.
다음 날 아침, 활짝 열어둔 툇마루로 쏟아져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에 일찌감치 잠에서 깬 히코타로는, 방 안이 이상하리만치 텅 비어 있고 어젯밤 그대로 모기장도 치지 않은 채 이불도 깔려 있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벌써 아버지가 출근하셨나 싶어 벽시계를 보니 아직 겨우 6시를 넘긴 참이었다.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문득 마당 쪽을 내다본 그는,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일까. 아버지가 그곳 등나무 의자에 기대어 축 늘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설마 자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히코타로는 묘한 불길함을 느끼며 툇마루에 있던 나막신을 꿰어 신고 서둘러 등나무 의자 쪽으로 다가갔다. —독자 여러분, 인간의 불행이란 어디서 올지 모르는 법이다. 그때 툇마루에는 두 켤레의 나막신이 있었고, 그가 신은 것은 그중 굽이 높은 맑은 날씨용 나막신이었지만, 만약 그것이 아니라 다른 오동나무로 된 굽 낮은 나막신을 신었다면 어쩌면 그런 사달이 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까이 다가간 히코타로가 기겁을 한 것은, 아버지가 그곳에서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양팔을 등나무 의자 팔걸이에서 축 늘어뜨리고, 허리 부분에서 반으로 꺾인 것처럼 몸을 구부려 머리와 무릎이 거의 맞닿을 지경이었다. 그렇기에, 보지 않으려 해도 보일 수밖에 없었지만, 뒤통수에 끔찍한 상처가 나 있었다. 피는 나지 않았지만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이 치명상임에 틀림없었다.
마치 붙박이 인형처럼 가만히 멈춰 있는 아버지의 기묘한 모습을, 여름 아침의 찬란한 햇살이 무색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등에 한 마리가 둔탁한 날갯짓 소리를 내며 시체의 머리 위를 맴돌고 있었다.
히코타로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동안 넋을 잃고 서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꿈일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저택과 이어진 백작 댁 현관으로 달려가 마침 그곳에 있던 서생에게 자초지종을 알렸다.
백작 가의 전화 신고로 곧 경찰 일행이 들이닥쳤고, 그중에는 경찰의도 끼어 있어 우선 시체 검안부터 이루어졌다. 그 결과, 히코타로의 아버지는 '둔기 타격에 의한 뇌진탕'을 일으킨 것이며, 절명한 시간은 어젯밤 10시 전후인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히코타로는 경찰서장 앞으로 불려 가 여러 가지 조사를 받았다. 백작 가의 집사 역시 심문을 받았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경찰 수사에 참고가 될 만한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곧바로 현장 조사가 시작되었다. 서장 외에 사복 차림의 형사 두 명이 이런저런 의견을 주고받으면서도, 과연 전문가답게 척척 조사를 진행해 나갔다. 히코타로는 백작 가의 하인들과 함께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 엄청난 일에 사고력을 잃어버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긴 했지만,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스스로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현장이라고는 하지만 그곳은 히코타로 집 뒷문 밖의 사방 칠팔 미터쯤 되는 삭막한 공터여서, 히코타로의 집과 마주 보며 백작 가의 3층짜리 서양식 건물이 서 있었고, 오른쪽은 높은 콘크리트 담장을 사이에 두고 큰길과 맞닿아 있으며, 왼쪽은 백작 댁 현관으로 통하는 넓은 길이었다. 그 거의 한가운데에 본채에서 쓰다 버린 부서진 등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다.
물론 타살에 무게를 두고 조사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시신 주변에서는 가해자의 유류품으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공터를 구석구석 수색했지만, 서양식 건물을 따라 심어진 대여섯 그루의 삼나무를 제외하고는 나무 한 그루, 화분 하나 없는 휑한 모래바닥이라 돌멩이나 막대기, 그 밖에 흉기로 쓰일 만한 물건은커녕 의심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단 하나, 등나무 의자에서 2미터 남짓 떨어진 삼나무 밑동 풀숲 사이에 다알리아 꽃 한 다발이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아무도 그런 들꽃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혹 알아차렸다 해도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수건 한 장이나 지갑 하나 같은, 소위 유류품이라 부를 만한 결정적 단서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유일한 단서는 발자국뿐이었다. 다행히 며칠째 내린 비로 땅이 매끄러워져 있어 전날 밤 비가 그친 뒤의 발자국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비록 오늘 아침부터 이미 많은 사람이 다녀가 그것들을 일일이 감식해 내는 것은 꽤나 뼈 빠지는 작업이었지만, 이것은 누구 발자국, 저것은 누구 발자국 하고 꼼꼼하게 대조해 나가자,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에 주인을 알 수 없는 발자국 하나가 남았다.
그것은 볼이 넓은 낮은 굽의 나막신 같은 것으로, 그 주변을 함부로 돌아다닌 듯 이리저리 종횡무진 자국이 나 있었다. 그래서 형사 중 한 명이 그 흔적을 따라가 보니, 신기하게도 발자국은 히코타로네 툇마루에서 시작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툇마루의 형식뿐인 섬돌 위에는 그 발자국과 정확히 일치하는 낡은 오동나무 나막신이 가지런히 벗겨져 있었다.
처음 형사가 발자국을 조사하기 시작했을 무렵, 히코타로는 이미 그 오동나무 낡은 나막신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하고 나서 단 한 번도 집 안으로 들어간 적이 없으니 그 발자국은 어젯밤에 생긴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저 나막신을 신었단 말인가.
그 순간, 그는 퍼뜩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하마터면 정신을 잃고 쓰러질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머릿속에서 끈적끈적한 액체가 소용돌이치듯 돌기 시작했다. 카메라 렌즈의 초점이 나간 것처럼 주변의 풍경이 눈앞에서 흐릿해져 갔다. 그리고 그 뒤로, 책상 위의 무거운 문진을 치켜들고 아버지의 정수리를 내리치려 하는 자기 자신의 무시무시한 환영이 떠올랐다.
'도망쳐, 도망쳐. 자, 빨리 도망쳐야 해.'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서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는 필사적으로 태연한 척 가장하며 백작 가 하인들의 무리에서 조금씩 조금씩 멀어져 갔다. 그것이 그에게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이었을까. 당장이라도 "거기 서!" 하고 불러 세울 것만 같아 이미 산목숨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무도 이 기묘한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고, 그는 무사히 집 뒤편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거기서 그는 단숨에 대문 쪽으로 내달렸다. 보니 문 앞에 경찰용 자전거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는 다짜고짜 자전거에 올라타 행선지도 정하지 않은 채 무아지경으로 페달을 밟았다.
양옆의 집들이 쌩쌩 뒤로 밀려났다. 수없이 길 가는 사람과 부딪혀 넘어질 뻔했다.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달렸다. 지금 무슨 동네를 달리고 있는지 당연히 알 턱이 없었다. 번화한 전차 도로 같은 곳이 나올라치면 피해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인적이 드문 곳으로만 핸들을 꺾었다.
그 후 뙤약볕 아래를 얼마나 달렸을까. 히코타로의 체감으로는 십 리도 넘게 도망친 것 같았지만 도쿄 시내는 끝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같은 곳을 빙빙 맴돌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 갑자기 펑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자전거가 그만 고장 나버리고 말았다.
그는 자전거를 내팽개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하얀 카스리 무늬 기모노가 땀에 젖어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다리는 막대기처럼 감각이 없어졌고 조그만 장애물에도 걸려 넘어졌다.
심장이 가슴 속에서 미친 듯이 요동쳤다. 목구멍은 바싹바싹 타들어가 천식 환자처럼 쌕쌕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이제 자신이 왜 달려야만 하는지 처음의 목적마저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저 눈앞에 떠오르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친부 살해의 환영이 그를 달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100미터, 200미터, 300미터를 그는 술 취한 사람처럼 쓰러졌다가 일어나고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며 달렸다. 그러나 그 눈물겨운 사투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윽고 그는 쓰러진 채 움직이지 못했다. 땀과 먼지투성이가 된 그의 몸 위로 한여름의 태양이 지글지글 내리쬐고 있었다.
잠시 후, 지나가던 행인의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관이 그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우려 했을 때, 그는 움찔하며 뿌리치고 도망치려는 시늉을 했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그렇게 경관의 품에 안긴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사이, 백작 저택의 아버지 시신 곁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경관들이 히코타로의 도주를 눈치챈 것은 그가 이미 2킬로미터 가까이 달아났을 때였다. 서장은 지금 뒤쫓아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지체 없이 백작 가의 전화를 빌려 본서에 이 사실을 알리고 히코타로 체포 수배를 내렸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계속해서 현장 조사를 진행하며 겸사겸사 검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물론 그들은 히코타로가 범인이라고 굳게 믿었다. 현장에 남은 유일한 단서인 오동나무 나막신이 히코타로 집 툇마루에서 발견된 점, 그 나막신의 주인으로 볼 수밖에 없는 히코타로가 도주한 점, 이 두 가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그의 유죄를 증명하고 있었다.
다만, 히코타로가 어째서 친아버지를 살해했는지, 그리고 범인인 그가 왜 경관이 출동할 때까지 도망치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었는지 이 두 가지 의문이 남았으나, 그것 역시 그를 체포해 보면 다 밝혀질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사건이 일단락되는가 싶었던 순간, 실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 사람을 죽인 것은 접니다. 저예요."
백작 저택 쪽에서 새파랗게 질린 사내 하나가 서장 앞으로 달려오더니 다짜고짜 이런 말을 꺼낸 것이다. 그 사내는 마치 열병 환자처럼 "접니다, 저예요"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서장을 비롯한 형사들은 어안이 벙벙하여 이 기묘한 불청객을 바라보았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설마 이 남자가 히코타로 집에 있던 나막신을 신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어떻게 살인을 저지를 수 있었단 말인가. 그래서 그들은 어찌 됐든 남자의 진술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것은 참으로 기막힌 사실이었다. 경찰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기상천외한 사실이었다. 자, 그 남자(그는 백작 가의 서생 중 한 명이었다)가 털어놓은 고백은 이러했다.
어제 백작 저택에 손님 몇 명이 찾아와 서양식 건물 3층 대연회장에서 만찬이 열렸다. 만찬이 끝나고 손님들이 돌아간 것이 마침 밤 9시경이었다. 그는 그곳의 뒷정리를 지시받고 방 안을 분주히 오가며 일하던 중, 실수로 카펫 자락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방구석에 놓여 있던 꽃병을 올려두는 높은 받침대를 쓰러뜨렸고, 받침대 위의 물건이 활짝 열려 있던 창밖으로 튕겨 나간 것이다.
만약 그 물건이 꽃병이었다면 이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꽃병 받침대에 올려져 있긴 했으나 꽃병이 아니라 서너 시간만 지나면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는 얼음덩어리였다. 장식용 얼음 조각이었던 것이다. 물을 받기 위한 장치는 받침대에 고정되어 있었으므로 위에 있던 얼음만 떨어진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낮부터 방에 장식되어 있었기에 대부분 녹아버려 알맹이만 남은 상태였지만, 노인에게 뇌진탕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던 모양이다.
그는 화들짝 놀라 창밖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달빛에 비친 잡역부 노인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기겁을 했을까. 비록 실수라곤 하나 나는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에게 알릴까, 어쩔까 우물쭈물 망설이는 사이 시간이 흘렀고, 만약 이대로 내일 아침까지 아무도 모른다면 어떻게 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말할 것도 없이 얼음은 녹아 없어진다. 그 안의 다알리아 꽃만 남겠지만 어쩌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갈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금 내려가 얼음 조각을 주워올까. 아니, 그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살인범으로 몰릴 것이다. 그는 이불 속에 들어가서도 밤새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런데 아침이 되자 사건은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동료들에게서 자세한 상황을 전해 듣고 한때는 '이거 운이 좋았군' 하고 기뻐했지만, 역시나 선량한 그는 계속 모른 척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대신해 아무 죄도 없는 남자가 무시무시한 살인 누명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끔찍했다. 게다가 당장은 위기를 모면했다 치더라도 언젠가 진실이 탄로 날 때가 올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그는 굳게 결심하고 서장을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고 허무한 사실에 한동안 그저 서로 얼굴만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그나저나 히코타로는 참으로 섣부른 짓을 하고 말았다. 그때는 그가 도망친 지 아직 30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니, 그가 아니더라도 형사들이나 백작 가 사람들이 그 삼나무 밑동에 떨어져 있던 다알리아 꽃다발에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리고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면, 히코타로는 결코 억울한 죽음을 맞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군." 잠시 후 경찰서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 발자국은 대체 어찌 된 일일까. 그리고 죽은 영감의 아들은 왜 도망을 친 거지?"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마침 그때 문제의 오동나무 나막신을 직접 신어보고 있던 한 형사가 대답했다. "발자국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나막신을 신어보니 알겠군요. 쪼개져 있어요.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신어보면 한가운데가 금이 가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자칫하면 뚝 부러질 것 같아요. 누구라도 이런 나막신을 신고 다니면 영 찜찜하겠죠. 필시 피해자가 마당을 걷다가 그걸 눈치채고 다른 신발로 갈아 신은 겁니다."
만약 이 형사의 추측이 맞다면, 그들은 지금까지 피해자 자신의 발자국을 보고 범인의 것이라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던 셈이다. 참으로 얄궂은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살인이 일어났으니 범인의 발자국이 있어야 한다는 그럴듯한 논리가 그들의 눈을 가렸을 테지만.
이틀 뒤, M 백작 가의 대문으로 두 구의 관이 나갔다. 말할 것도 없이 불행한 몽유병자 히코타로와 그의 아버지를 모신 것이다. 소문을 들은 세상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 부자의 변사를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때 히코타로가 도대체 왜 도망을 쳤는지 그 이유만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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