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15일 금요일

(소설 원고) [백혈구_도요시마 요시오] 텍스트 전문(全文) 수록 [일본 미스터리 소설] ​새집 벽장 밑에서 발견된 끔찍한 진실... | 원아나의 책 읽는 TV 꿀잠 오디오북


☆원아나의 한마디☆

겉보기엔 완벽하고 평온해 보이는 새집, 하지만 그 벽장 깊숙한 곳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잔혹한 진실이 숨어 있었습니다. 현미경 속 '백혈구'라는 기이한 단서가 들추어내는 인간 욕망의 가장 서늘한 이면을 아나운서의 깊이 있는 목소리로 마주해 보시죠.


소설 원고 스크립트 전문(全文)

백혈구 (白血球)
도요시마 요시오 (豊島与志雄)


드르륵…… 쾅!
평소와 다르게 거칠게 현관문을 여닫는 소리가 나더니, 허둥지둥 신발을 벗기 무섭게 아야코가 거실로 뛰어 들어왔다. 잔뜩 상기된 얼굴에 두 눈은 놀란 듯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엄마 아키코는 하던 바느질을 멈추고 조용히 딸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니, 그렇게 허둥대고. ……오늘따라 좀 늦었구나."
"네, 오늘 당번이었거든요."
아야코는 손에 든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겉옷도 벗지 않은 채 털썩 주저앉더니, 이내 낮고 강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엄마!"
"응?"
아키코는 일감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엄마!" 아야코는 다시 부르며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우리 집, 이상한 집이라면서요?"

아키코는 잠자코 있었다.
"오늘요, 구로다 아줌마가 '너희 집에 뭐 이상한 일 없니?' 하고 묻는 거예요. 무슨 소린지 몰라서 자세히 들어보니까, 이 집이 예전부터 소문난 집이래요. 뭔가 수상한 일이 일어난다고요. 그래서 들어오는 사람마다 얼마 못 버티고 이사를 가버리는 바람에 비어 있을 때가 더 많았대요. 그런데 우리가 이사 와서 너무 멀쩡하게 살고 있으니까, 아는 사람들은 다들 신기하게 생각한대요. ……진짜로 아무 일도 없냐고 끈질기게 물어보길래, '그런 거 없어요. 설령 있다고 해도 요새 세상에 귀신을 누가 믿어요?'라고 쏘아붙여 줬어요. 하지만……."

"사모님!"
그때 닫힌 방문 너머로 가정부인 키요 아주머니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키코는 순간적으로 매서운 눈초리를 해 보였다. 아야코는 영문을 모른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키코는 키요의 물음에 대충 대답을 얼버무려 돌려보내고는, 잠시 후 진지한 얼굴로 딸을 돌아보았다.
"그런 얘기는 밖에서 함부로 하고 다니면 안 돼. ……그리고 누가 이상한 일 없냐고 물어보면, 무조건 아무 일도 없다고 대답해."
"왜요?"
"왜냐니, 만약 동네에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져봐라……."
아키코는 왜 안 되는지 딱 잘라 말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치만 서양 동화에 나오는 꼬마 유령 같은 거라면 나와도 상관없잖아요."
입을 비쭉 내밀고 장난스럽게 눈을 굴리는 아야코의 얼굴을 보자, 아키코도 그제야 긴장을 풀고 피식 웃었다.
그러나……. 정말 그런 소문이 도는 집이라면, 마냥 마음을 놓고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2층에 방 두 개, 1층에 방 세 개. 구조도 편하고 볕도 꽤 잘 드는 데다 자재는 투박해도 지은 지 얼마 안 된 새집이었다. 무엇보다 집세가 의외로 싸서 '이게 웬 떡이냐' 하며 단번에 계약하고 이사를 온 터였다. 하지만 현관에서 바로 이어지는 계단 오른쪽의 넓은 방과 달리, 왼쪽 부엌으로 통하는 복도 옆의 좁은 가정부 방만은 유독 어둑어둑하고 음침했다.

그저 그뿐이라면 어차피 일하는 아주머니가 쓰는 방이니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었지만, 이사 온 첫날 밤 키요는 그 방에서 자다가 기분이 너무 나빠서 도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환기가 잘 안 돼서 그렇겠지."
남편 신사쿠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혹시 몰라 구석구석 살펴보았지만, 어디에서도 수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해질녘, 북향으로 난 창문을 통해 들어오던 햇빛이 희미하게 스러질 즈음이었다. 아키코는 무심코 그 방에 들어갔다가 벽장 앞에 섰는데, 순간 오싹하고 뼛속까지 시린 기운이 훅 끼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묘하게 섬뜩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벽장문을 열어보아도 키요의 이부자리와 짐, 안 쓰는 잡동사니들만 들어 있을 뿐 조금도 이상한 건 없었다. 기분 탓이려니 하고 그녀는 입을 다물었지만, 그날 밤도 키요는 기분이 나빠 잠을 잘 수 없다고 했다. 그 이후로 키요는 현관 쪽 작은 방으로 잠자리를 옮겼다.

그 일이, 방금 아야코가 들려준 흉흉한 소문과 딱 맞아떨어졌다.
"여보,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아요?"
남편과 단둘이 남았을 때, 아키코는 그간의 일들을 털어놓으며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이마 양쪽은 꽤 벗겨졌지만 콧수염만은 숱이 많고 새까만 남편 신사쿠는, 수염 끝을 비비 꼬며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이참에 진짜 귀신이라도 나온다면 딱 좋겠군."
"네?"
아키코는 남편의 농담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뭐, 진짜 흉가로 소문이 나면 집세가 뚝 떨어질 테니 우리야 좋다는 뜻이지."
"참, 사람은 심각해 죽겠는데 농담이 나오세요? 정말이지 저 방은 좀 이상하다고요."
"그럼, 내가 오늘 밤에 거기서 한숨 자보도록 할까."

워낙 타고난 성격이 낙천적인 데다 미신이나 귀신 따위는 코웃음도 치지 않는 그였다. 아내의 걱정도 대수롭지 않게 한 귀로 흘려들었고, 당연히 그 음침한 방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는 수고 따위는 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중충한 비가 축축하게 내리던 오후였다. 그 문제의 방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거실에 있던 아키코와 부엌에 있던 키요가 기겁하며 동시에 달려갔다. 막내아들 신키치가 창문 아래에 이쪽을 등진 채 막대기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아키코가 제일 먼저 달려갔다. 신키치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한동안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겨우 입을 열었지만, 창문 밖으로 하얀 무언가가 휙 날아갔다는 둥 횡설수설할 뿐이었다. 아이 스스로도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거 보세요, 제가 뭐라고 했어요!" 아키코는 옳다구나 싶어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짐짓 더 섬뜩한 표정을 지으며 남편을 다그쳤다. "초등학생인 우리 애가 저렇게 기절초풍할 정도면 예삿일이 아니라고요."
신사쿠도 그제야 슬쩍 구미가 당겼다. 귀신을 믿진 않았지만, 우연이 겹치면 영적인 현상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쯤은 부정하지 않는 그였다. 그는 시험 삼아 그 방에 들어가 이리저리 서성여도 보고, 쭈그려 앉아도 보며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복도와 방의 미닫이문을 두 번이나 거쳐 들어온 빛이 북쪽 창문에서 떨어지는 빛과 섞여 방 안은 희뿌옇게 가라앉아 있었다. 창밖으로는 옆집과의 경계인 함석 담장과 그 위로 뻗어 나온 벚나무 가지가 보였다. 햇볕이 직접 들지 않아서인지 방 공기는 발밑부터 싸늘했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쳐도, 벽장 쪽에서 왠지 모를 불쾌한 기운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콕 집어 말할 순 없지만 계속 신경을 긁는, 바보 같지만 무시할 수 없는 찜찜한 기분이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벽장의 미닫이문이 기둥과 맞닿는 틈새가 어딘가 뒤틀린 탓인지 위쪽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손을 대 보았지만 딱히 찬 바람이 새어 들어오진 않았다. 문을 열어보니 키요의 짐과 낯익은 잡동사니들만 꽉 들어차 있었다. 상하좌우 벽면의 합판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려 보았지만 못질도 단단히 되어 있는 듯했다. 그런데, 벽장 안으로 쑥 집어넣었던 머리와 팔을 빼내는 순간, 훅 하고 코끝을 찌르는 냄새처럼 기분 나쁜 기운이 스윽 감도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쾅 하고 벽장문을 닫아버렸다.

형언할 수 없이 찝찝한 기분이었다. 서둘러 복도로 빠져나온 그는 벽장의 반대편 벽 쪽을 둘러보았다. 부엌의 그을린 벽이었다. 이상하다 싶어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부엌 바닥의 널빤지를 두세 장 들어 올리고 벽장 바로 아래쪽을 들여다보았다. 굴러다니는 장작더미 너머로 낡은 거미줄이 엉켜 있었고, 곰팡내 나는 흙바닥이 컴컴하게 깔려 있을 뿐, 아무런 이상도 없었고 찝찝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거실로 돌아왔다.
"어땠어요?" 아키코가 눈빛으로 재촉하며 남편의 안색을 살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스스로에게 타이르듯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역시 영 찜찜했다. '스산하고 불쾌한 벽장이다.'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거미줄처럼 엉겨 붙었다.
그 무렵 가정부 키요가 기묘한 소동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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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WylJn4Gy_B4


어느 날 밤, 거실 전등 불빛이 썰물 빠지듯 스르륵 약해지더니 툭 하고 꺼졌다. 어라? 하는 순간 다시 불이 팟 하고 들어왔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전에 이번에는 아예 새까맣게 정전이 되어버렸다. 아키코는 더듬거리며 불단에 있던 양초를 찾아 불을 붙였다. 2층에서는 신사쿠가, 현관에서는 키요가 벽을 더듬으며 모여들었다. 아키코와 신키치까지 식구들이 모두 희미하게 흔들리는 붉은 촛불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전기가 확 들어왔다. 뭐야, 싱겁게. 다들 허탈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따뜻한 차나 한잔 마시자고 했으나 주전자의 물이 미지근했다. 키요가 물을 다시 끓이겠다며 부엌으로 향했다. 슬리퍼를 끈 발소리가 복도에서 철퍼덕, 철퍼덕 두세 번 울렸을까. 꺄아악! 하는 단발마의 비명과 쨍그랑! 주전자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쭈뼛 선 키요가 사색이 되어 거실로 뛰어 들어왔다.

키요의 말인즉슨, 복도를 걷다가 무심코 옆을 돌아보았는데 그 하녀 방 미닫이문 너머로 새까맣고 거대한 괴물이 스윽 하고 솟아올랐다는 것이다. 그 뒤로는 무서워서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키요가 너무 벌벌 떨며 진지하게 말하는 바람에 식구들 모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어쨌든 확인은 해야 했기에, 신사쿠가 앞장서고 아키코가 뒤를 따르며 문제의 방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현관 쪽에서 복도로 나서자, 과연 장지문에 새까맣고 거대한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하지만 그것은 현관 전등 불빛에 비친 신사쿠 본인의 그림자였다.

맥이 탁 풀리며 헛웃음이 났다.
"야, 다들 와서 구경해라. 괴물이 여기 있네."
신사쿠의 여유로운 목소리에 거실에 있던 아이들도 안도하며 다가왔다. 장지문에 여러 개의 커다란 그림자가 겹쳐 비쳤다.
"우와, 괴물이 엄청 많다!" 신키치가 신이 나서 외쳤다.
"네 그림자는 꼬마 괴물이잖아."
방금 전까지 벌벌 떨던 키요만 쏙 빼놓고, 온 식구가 장지문에 그림자를 비추며 장난을 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묘하게 분위기가 싸해지면서 다들 우두커니 선 채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신사쿠가 미닫이문을 확 열어젖혔다. 맞은편 높은 창문이 마치 죽은 사람의 허연 눈동자처럼 흐리멍덩하게 떠올라 있었다. 오싹하고 으스스한 냉기가 훅 끼쳤다.

"어머, 왜 이 방 불만 안 켜진 거죠?"
아키코의 말에 다들 그제야 눈치를 챘다. 신사쿠가 안으로 들어가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방 안이 환해졌다. 하지만 식구들은 약속이나 한 듯 말없이 뒤돌아 거실로 돌아왔다.
"무슨 놈의 그림자 소동이람!"
신사쿠는 짐짓 껄껄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마저 어색하게 굳어질 때쯤, 키요가 새로운 폭탄 발언을 했다.
"그치만... 처음에 제가 부엌으로 갈 땐 이 방 불이 확실히 켜져 있었는데요……."
그랬다. 그 방 전등은 원래 항상 켜두었었다. 정전이 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불이 들어와 있었다.
"거 보세요! 진짜 이상하잖아요." 아야코가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식구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무언의 시위를 했다.
"그것도 저 거인 괴물 짓인가 보지."
"야호, 여기도 괴물 있다!"

눈치 없는 신키치만 신이 나서 까치발을 든 채 맞은편 벽에 제 그림자를 비추며 놀고 있었다. 웃어야 할지 무서워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 숨 막히게 기묘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 불길한 그림자놀이는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신키치는 밤만 되면 전등 위치를 바꾸거나 온갖 기괴한 자세를 취하며 벽에 비치는 제 그림자를 연구하는 데 푹 빠졌다. 양팔을 벌리고 펄쩍 뛰어 비행기를 만들기도 하고, 고개를 꺾고 한 발로 서서 처녀 귀신 흉내를 내기도 했다.

"그만 좀 해. 그러다 진짜 그림자한테 잡아먹힌다?" 아야코가 핀잔을 줬다.
'그림자에게 잡아먹힌다'는 말은 그냥 툭 내뱉은 말이었지만, 묘하게 섬뜩한 울림으로 가족들의 뇌리에 박혔다.
"흥, 잡아먹히긴 누가 잡아먹혀? 내가 누나를 꿀꺽 삼켜버릴 테다!"
신키치는 탈춤이라도 추듯 기괴한 몸동작으로 벽에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그 우스꽝스러운 꼴에 키요마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오그라들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다. 해가 지면 그 하녀 방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아키코 역시 겉으로는 가족들과 웃고 떠들었지만, 단둘이 남았을 때 남편에게 못을 박았다.

"여보, 안 되겠어요. 당장 집 알아봐요. 나 이 집에서 단 하루도 더 살기 싫어요."
"음, 그러지 뭐." 신사쿠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탓이라 우기려면 못 할 것도 없었지만, 솔직히 그 벽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소름 끼쳤다. 게다가 그림자놀이에 미쳐가는 신키치의 모습마저 어쩐지 불길하고 섬뜩하게 느껴졌다.
'에이, 설마 진짜 귀신이겠어?' 하다가도, '아니야, 그래도 영 찜찜한데…' 하며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렸다.
'괜찮은 집이 나오면 바로 이사해야지.' 낮에는 그렇게 느긋하게 생각하다가도, 밤만 되면 문제의 방 주변이 무덤처럼 음산하게 느껴졌다. 몰래 아주 밝은 50와트짜리 전구로 갈아 끼워봤지만, 소용없었다. 특히 그놈의 벽장 근처가…….

"알았어, 내일부터 당장 집 알아볼게." 신사쿠는 아내를 달랬다.
하지만 말뿐이었고, 이사는 하루 이틀 계속 미뤄졌다. 참다못한 아키코가 집에 드나드는 상인들에게 몰래 빈집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요일, 신사쿠의 집에 갑자기 형사가 찾아왔다.
오후 1시쯤이었다. 집 보러 나가자고 성화를 부리는 아내에게 미적지근한 대답만 늘어놓으며, 신사쿠는 오전 내내 뒹굴거렸다. 그사이 몰래 혼자 그 방에 들어가 보기도 했지만, 역시나 소름이 쫙 돋을 만큼 기분이 더러웠다. 점심을 먹은 뒤 2층 거실에 누워 유리창 너머로 화창한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곱씹어보니 어처구니없으면서도, 마냥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묘한 공포심이 밀려왔다.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허공만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가정부 키요가 누군가의 명함을 들고 왔다. '○○경찰서 소속 형사 나카이 우헤이'.
경찰이 도대체 왜? 신사쿠는 영문을 몰라 명함만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일단 형사를 안으로 모시라고 했다.
수수한 겉옷에 단정한 바지 차림, 짧게 깎은 스포츠머리를 한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순박한 인상의 사내였다. 그의 겉모습과 '형사'라는 직함이 도무지 매치되지 않았다. 나카이 형사는 깍듯이 인사를 건넨 뒤, 주말에 불쑥 찾아와 죄송하다며 장황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말끝을 흐리는 품새가 묘하게 찜찜했다. 신사쿠가 단도직입적으로 무슨 일로 오셨냐고 물었다.

"실은, 동네에 좀 이상한 얘기가 돌아서 찾아뵈었습니다……."
나카이 형사는 정중함과 직업적인 날카로움이 교차하는 묘한 어조로 입을 뗐다. 신사쿠네 집에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는 것이었다. 원래부터 흉흉한 소문 때문에 세입자들이 금방금방 도망쳐 나가던 집인데, 신사쿠 일가가 꽤 오래 버티고 있으니 동네 사람들이 신기해하던 차에, 결국 또 이상한 일들이 터지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본인도 우연히 그 소문을 주워들었는데, 형사 짬밥상 이런 괴담에서 오래된 미제 사건의 단서를 찾는 경우가 꽤 있어서, 도대체 무슨 '수상한 일'을 겪었는지 직접 확인차 들렀다는 설명이었다.

"절대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냥 수사에 참고만 할 테니, 부담 갖지 마시고 겪으신 일들을 편하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비공식적으로 묻는 겁니다."
신사쿠는 허탈하게 웃으며 잠시 망설였다.
"혹시 곤란하시다면 무리해서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형사의 그 한마디가 신사쿠의 심기를 묘하게 건드렸다. 자기가 무슨 괴기스러운 범죄에라도 연루됐다고 의심받는 건가 싶어 불쾌했지만, 이내 어이없는 헛웃음이 났다. 에라 모르겠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속 시원하게 다 털어놔 버리자 싶었다.
"수상하다고 해봐야 뭐 확실하게 본 건 없습니다. 다 기분 탓이겠지만, 그저 그 방……"

그는 그 문제의 '벽장'이 얼마나 소름 끼치게 불쾌한지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았다.
신사쿠의 하소연을 진지하게 듣고 있던 형사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혹시 그 벽장을 직접 조사해 봐도 되겠냐고 물었다. 찝찝한 원인을 확실히 밝혀내는 게 가족들을 위해서도 좋지 않겠냐는 설득이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신사쿠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내 아키코의 의견도 물어야 했기에 그녀를 2층으로 불렀다.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아키코는 의아한 표정으로 형사를 쳐다보더니 이내 미간을 팍 찌푸렸다.
"하지만 경찰까지 집에 들락거리면, 애들이나 도우미 아주머니가 지레 겁먹고 더 불안해하지 않을까요?"
지극히 당연한 걱정이었다.
"그럼 가족분들이 다 외출하셨을 때 나중에 따로 들르겠습니다." 형사가 물러섰다.

하지만 멍석이 깔리자 신사쿠는 오히려 마음이 급해졌다. 이왕 시작한 거 한시라도 빨리 그 벽장의 정체를 까발리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는 아내를 설득해 식구들을 당장 집 밖으로 내보내기로 했다. 키요에게 아이 둘을 맡겨 동물원으로 놀러 보냈다. 아야코는 입을 삐죽이며 귀찮아했지만, 막내 신키치와 키요는 웬 떡이냐며 좋아라 집을 나섰다.

집에 단 셋만 남자, 신사쿠 부부는 형사를 문제의 방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막상 경찰과 함께 방에 들어서자 언제 그랬냐는 듯 불길한 기운이 싹 가시고 평범한 방처럼 느껴졌다. 벽장 안의 짐을 하나둘 빼내면서 신사쿠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역시 다 내 기분 탓이었어.' 그는 머쓱함에 묻지도 않은 변명을 연신 늘어놓았다.

그러나 방안을 훑는 형사의 눈빛은 매처럼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이마를 잔뜩 구긴 채 사냥개처럼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벽장 안을 샅샅이 뒤지고, 방 안팎을 꼼꼼히 살피더니, 급기야 부엌 바닥 널빤지 틈으로 상반신을 반쯤 쑤셔 넣고는 긴 막대기로 벽장 밑바닥 흙을 파헤치기까지 했다. 한참을 그렇게 뒤지던 형사는 마침내 벽장 앞으로 돌아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부부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거봐, 아무것도 없잖아.' 머쓱함을 넘어, 내심 무언가 대단한 비밀이라도 밝혀질까 기대했던 마음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형사가 갑자기 벽장 구석의 특정 널빤지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지만 부부는 심드렁할 뿐이었다. 형사가 장도리와 망치를 가져다 달라고 했을 때도 그저 기계적으로 움직여 건네주었다.
형사는 벽장 구석에 박힌 합판 한 장에 온몸을 던지듯 매달려 뜯어냈다. 나무 쪼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러더니 주변에 굴러다니던 엉뚱한 판때기를 주워와 그 빈자리를 대충 쿵쾅거리며 막아버렸다. 땀범벅이 된 채 일어난 형사는 복도로 걸어 나와 바지 먼지를 툭툭 털더니, 아까 뜯어낸 그 합판을 눈이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옆에서 슬쩍 훔쳐보니, 그 널빤지 끄트머리에는 불에 그슬린 자국이 시커멓게 남아있었고, 표면에는 곰팡이인지 뭔지 모를 작고 허연 반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냥 썩은 나무판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주말에 소란 피워 정말 죄송합니다." 형사가 고개를 숙였다. "일단 이 널빤지만 증거물로 가져가 보겠습니다."
"벌써 다 끝난 겁니까?" 신사쿠가 물었다.
"네, 다른 특이사항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다 썩은 판때기가 수사에 무슨 도움이라도 됩니까?"
"글쎄요……." 형사 본인도 확신이 없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럼에도 형사는 차를 한 잔 얻어 마시더니, 신문지에 칭칭 감싼 널빤지를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양 소중히 끌어안고 쏜살같이 돌아갔다.
"형사님, 혹시 뭐라도 밝혀지는 게 있으면 저희한테도 꼭 좀 알려주십시오." 신사쿠가 배웅하며 신신당부했다.

"이유라도 확실히 알아야 두 다리 뻗고 잘 것 같아서 그럽니다."
"알겠습니다." 형사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힘차게 대답했다. "결과가 나오면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형사가 폭풍처럼 다녀간 뒤, 그 하녀 방의 벽장은 마법이 풀린 것처럼 허무할 정도로 평범해졌다. 방 특유의 서늘하고 음침한 분위기는 여전했지만, 형사가 원래 있던 널빤지를 뜯어가고 엉뚱한 나무토막으로 대충 기워놓은 꼴을 보고 있자니, 그동안 느꼈던 섬뜩한 공포심이 아침 햇살에 증발해 버린 이슬처럼 우스워졌다.
"이것 봐, 역시 아무것도 아니었잖아."
"그러게 말이에요. 우리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나 봐요."
부부는 흉물스럽게 기워진 벽장 앞에서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 소설을 오디오북으로 감상해보세요.
https://youtu.be/WylJn4Gy_B4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또 다른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근데 도대체 경찰은 그 썩은 널빤지를 가져가서 뭘 어쩌려는 걸까?"
눈에 보이지 않던 귀신이나 미신 따위의 허상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과학수사'와 '경찰'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차가운 공포가 대신 채우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는 '진짜' 범죄의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에이,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신사쿠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보란 듯이 그 방 한가운데 떡하니 주저앉아 외출에서 돌아온 식구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얘들아, 다들 걱정할 거 없어! 벽장 바닥에 구멍이 나서 마루 밑 찬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바람에 기분이 나빴던 거였어. 경찰관 아저씨가 이렇게 판자로 튼튼하게 막아주고 갔으니까 이제 안심해도 돼!"

그는 벽장 안의 짐들을 확 치우며 보란 듯이 덧대어 놓은 판자를 가리켰다. 하지만 식구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키요는 여전히 불신 가득한 눈초리였고, 아야코는 미간을 팍 구긴 채 의심을 거두지 않았으며, 막내 신키치는 딴청을 피웠다. 아내 아키코마저 억지웃음을 짓고 있었다. 무언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찜찜하고 기분 나쁜 응어리가 여전히 그 방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단 1분도 그 방에 편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한밤중에 화장실이라도 갈라치면, 적막한 어둠 속에서 누군가 뚫어지게 등골을 쳐다보는 것 같은 서늘한 기척에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섰다. 이제 그것은 처녀 귀신이나 괴물 같은 유치한 공포가 아니었다. '저 벽장 뒤에 어떤 끔찍한 사연이 얽혀있는 건 아닐까…….' 피할 수 없는 끔찍한 진실을 예감하는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새집이라는 사실이 더욱 소름 끼쳤다.

"이 집, 신축 건물이라고 하지 않았어?"
"네, 지은 지 3년밖에 안 됐대요."
아키코는 대답하면서 남편의 눈빛에서 '괜찮다'는 확신을 찾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남편의 눈동자 역시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결국 아키코는 다시 짐을 싸자고 남편을 들볶기 시작했다.
"그래도 형사가 연락 주기로 했잖아……."
신사쿠는 경찰 핑계를 대며 버텼지만, 나카이 형사는 그 뒤로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렇다고 제 발로 경찰서에 찾아가 "우리 집 벽장 판때기 어떻게 됐습니까?" 하고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부부가 거실 화로 앞에 마주 앉아 땅이 꺼져라 한숨만 푹푹 쉬고 있을 때였다. 신키치가 좁은 현관 방에서 누나와 도우미 아주머니를 앉혀놓고 또 그림자놀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토끼니 여우니 하는 건 진작에 졸업했고, 처녀 귀신 흉내도 질린 모양이었다. 녀석은 연신 기괴한 몸짓을 섞어가며 새로운 괴물 그림자를 만들어내려 낑낑대고 있었다.
"짜잔! 이번엔 두꺼비 괴물이다!"
신사쿠가 빼꼼히 들여다보니, 녀석은 엎드린 채 벽을 노려보며 양서류처럼 기괴하게 관절을 꺾고 있었다. 그 꼴이 하도 우스꽝스러워 피식 웃음이 났다.
"야, 아빠가 진짜 무서운 거 하나 보여줄 테니까 거기 가만히 있어 봐."
신사쿠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두 손을 겹쳐 벽 쪽으로 불쑥 내밀었다. 두꺼비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뱀을 만들 생각이었지만, 손가락이 뻣뻣해 영 모양이 안 났다.
"아유, 아빠 진짜 못한다!" 신키치가 코웃음을 쳤다. "귀신 그림자는 내가 최고라니까!"
녀석은 보란 듯이 손가락을 기괴하게 뒤틀어 온갖 흉측한 유령 흉내를 냈다.
"어머머, 도련님 제발 그만 좀 하세요! 자꾸 그러면 진짜 귀신 붙어요."
아주머니가 사색이 되어 말렸지만, 사실 지금 이 집에서 공포에 질린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날 새벽. 날카롭고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온 집안을 뒤흔들었다. 부부와 아야코가 혼비백산하여 깨어났다. 비명 소리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신키치였다. 녀석은 방 한가운데에 시체처럼 뻣뻣하게 굳어 서 있었다.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텅 비어 있었다. 부부가 아이를 끌어안고 겨우 진정시켜 자리에 눕혔지만, 아이는 무언가에 홀린 듯 허공만 부릅뜨고 쳐다봤다.

아이는 덜덜 떨며 꿈자리를 털어놓았다. 꿈속에서 자기 그림자가 통째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무리 불빛을 비춰봐도 바닥에 그림자가 안 생기길래 미친 듯이 온 집안을 헤집으며 그림자를 찾아다녔는데, 그 순간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공포가 밀려와 비명을 질렀다고 했다.
"그림자만 사라진 게 아니야. 조만간 너도 그림자 속에 빨려 들어가서 잡아먹힐걸."
아야코가 파리하게 질린 입술로 섬뜩한 말을 툭 던졌다.

숨소리조차 내기 힘든 끔찍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무도 잠들지 못한 채 눈만 껌벅이는 사이, 거실 괘종시계가 '댕- 댕- 댕- 댕-' 네 번 울렸다. 규칙적인 시계추 소리가 귓가를 미친 듯이 긁어대어 신사쿠는 아침 해가 뜰 때까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젠장, 나까지 미쳐 돌아가는 건가.'
신키치가 꾼 악몽이 끈적끈적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녀 방에 매일 밤 불을 훤하게 켜두는 게 오히려 귀신을 부르는 짓은 아닐까, 하는 미신 같은 헛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불을 켜두든 말든 키요는 해만 지면 그 방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고, 아키코 역시 신경쇠약에 걸린 사람처럼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이대로는 다 미쳐버릴 거야. 당장 무슨 수를 내야 해…….'
신사쿠는 짐을 싸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주 일요일 아침.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아니 내심 나타나지 않길 바랐던 나카이 형사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반쯤 넋이 나가 있던 신사쿠는 뛸 듯이 기뻐하며 버선발로 현관까지 뛰어나갔다. 형사의 얼굴도 신사쿠 못지않게 상기되어 있었다. 중절모를 가볍게 쥔 손, 당당하게 벌린 어깨, 까무잡잡한 얼굴 위로 번지는 환한 미소까지. 무언가 거대한 건수를 해결한 형사 특유의 승리감에 도취해 있었다.
두 사람은 반갑게 인사를 나눴고, 형사는 2층 거실로 안내되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형사의 태도는 180도 돌변해 엄숙해졌다. 피우다 만 담배를 재떨이에 꾹꾹 눌러 끄며, 마치 엄청난 기밀을 털어놓듯 은밀하고 예리한 눈빛으로 신사쿠를 쳐다보았다.

"사실 이걸 선생님께 말씀드려도 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 흉흉한 소문 속에서도 의연하게 버티시는 걸 보고, 진실을 아셔도 크게 동요하지 않으실 거라 판단했습니다. 게다가 지난번에 꼭 알려달라고 신신당부하기도 하셨고요. 하지만 이 이야기는 철저히 무덤까지 가져가셔야 합니다. 때가 되면 뉴스에 대문짝만하게 날 테지만, 아직 사건이 검찰로 넘어가기 전 극비 수사 단계라서요."
신사쿠는 침을 꼴깍 삼키며 자세를 고쳐 앉았고,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형사가 입을 연 이야기는 그의 상상을 완전히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 썩은 널빤지에 묻어 있던 불에 그슬린 자국과 정체 모를 허연 반점들. 경찰 감식반이 1차 조사를 해보니 미심쩍은 정황이 쏟아져 나왔다. 곧바로 법의학 권위자인 다카야마 박사에게 정밀 감정을 넘겼다.

박사의 현미경 분석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그 허연 반점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모기 배설물'이었다. 그리고 그 배설물 안에서 무수히 많은 인간의 백혈구가 검출되었다. 심지어 그 썩은 널빤지 자체에도 다량의 '인간의 지방(기름)'이 흠뻑 스며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경찰 수사망이 순식간에 좁혀졌다. 그 널빤지의 출처를 역추적해 보니, 놀랍게도 몇 년 전 화재가 발생했던 어느 끔찍한 현장에서 흘러나온 폐자재였다. 지금 신사쿠가 살고 있는 이 집을 3년 전 신축할 당시, 인건비를 아끼려던 목수 놈이 불탄 집에서 남은 목재를 주워와 몰래 벽장 자재로 섞어 쓴 것이었다.
더 소름 끼치는 사실은, 그 널빤지가 원래 불타버린 집에서도 똑같이 '벽장 바닥'으로 쓰였던 나무라는 점이다. 형사들이 그 화재 사건을 털어보니, 불탄 집의 주인은 이미 다른 중범죄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집이 불탈 당시 주인의 늙은 아버지가 방 안에서 타죽었고, 주인은 아버지 몫으로 나온 1만 엔이라는 거액의 생명보험금을 꿀꺽 삼켰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여기서 베테랑 형사들의 촉이 발동했다.
첫째, 방이 다 타버렸는데 어떻게 '벽장 널빤지'만 멀쩡하게 타다 남았는가?
둘째, 벽장 널빤지에 어떻게 인간의 피를 빤 모기 똥과, 사람 몸에서 흘러나온 시체 기름(지방)이 떡칠 되어 있는가?
1만 엔이라는 거액의 보험금을 퍼즐의 중심에 놓자, 3년 전 그날 밤의 소름 끼치는 진실이 영화 필름처럼 선명하게 재생되기 시작했다.
3년 전 초여름 밤.
단칸방 한가운데 60대 노인이 홀로 곯아떨어져 있었다. 숨소리 하나 안 들리는 고요한 새벽이었다. 미닫이문이 스르륵 소리 없이 열리더니, 살기가 번뜩이는 두 눈을 가진 건장한 사내가 바닥을 기어 방 안을 살폈다.

사내는 벌떡 일어나 짐승처럼 소리 없이 발끝으로 다가갔다. 모기장을 들치고 들어가 주머니에서 질긴 검은색 천 띠를 꺼냈다. 노인은 입을 쩍 벌린 채 역겨운 술 냄새를 훅훅 풍기며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사내는 노인의 등 뒤로 바짝 다가가, 목덜미 아래로 천 띠를 슥 밀어 넣었다. 노인이 잠결에 뒤척였다. 그 찰나의 순간, 사내는 띠를 양손으로 교차해 노인의 목을 미친 듯이 졸랐고, 동시에 무릎으로 노인의 척추를 쾅 짓눌렀다. 짐승처럼 어깨를 한껏 치켜세우고 온 체중을 실어 노인의 숨통을 끊어버릴 듯 웅크렸다. 노인은 고통에 발버둥 치며 발치의 이불을 걷어찼지만, 짐승의 덫에 걸린 듯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컥컥거렸다.

노인의 팔다리가 미친 듯이 허공을 휘젓고 파르르 떨렸다. 발작이 멈췄나 싶더니 다시 격렬하게 요동쳤다. 하지만 발악은 점점 힘을 잃어갔고, 끔찍한 경련의 간격도 길어지더니, 마침내 '툭' 하고 온몸의 힘이 빠지며 축 늘어졌다. 완전히 숨이 끊어졌다.
3분…… 5분. 사내는 확인을 마치고 일어섰다. 노인은 목이 꺾인 채 고개를 떨구었다. 충혈된 눈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부릅떠 있었고 입은 기괴하게 벌어져 있었다. 사내는 역겨운 듯 시선을 피했다.

그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소매로 닦아냈다. 모기장을 빠져나와 곁에 있던 벽장문을 소리 없이 열었다. 안에 사람 하나 구겨 넣을 만한 빈 공간이 있었다. 사내는 모기장 밖에서 노인의 발목을 잡아 개 끌듯 질질 끌어냈다. 아직 온기가 남은 시체를 가뿐히 들어 올려 컴컴한 벽장 안에 처박았다.
문짝을 닫고, 이불을 칼같이 정리하고, 범행 도구인 천 띠를 품에 숨겼다. 방안에 자신의 흔적이 남지 않았는지 살기 어린 눈으로 스캔한 뒤 황급히 현장을 빠져나갔다. 이 모든 끔찍한 짓거리는 머릿속으로 수십 번 리허설을 거친 듯,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완벽하고 기계적으로 끝났다. 단 하나, 벽장문이 채 닫히지 않고 두세 뼘 정도 틈이 벌어져 있었다는 사실만 빼고.

방 안은 다시 무덤처럼 고요해졌다. 옆방에서 이따금 웅얼거리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왔다. 벌어진 벽장 틈새 안쪽의 풍경은 지옥 그 자체였다. 눈을 부릅뜬 채 입을 벌리고 코에서 역겨운 진물을 줄줄 흘리는 노인의 교살 시체. 풀어헤쳐 진 잠옷 사이로 뻗어 나온 뻣뻣한 팔다리가 차갑게 굳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피비린내 나는 시체 위로 굶주린 여름 모기 떼가 새까맣게 달라붙었다.
괘종시계가 새벽 3시를 알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 그 사내가 성큼성큼 다시 들어왔다. 손에는 인화성 알코올 병과 성냥이 들려있었다. 벽장으로 다가간 그는, 자신이 문을 덜 닫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흠칫 놀라 멈춰 섰다. 어깨를 흠칫 떨며 문을 열어젖히고 노인의 시체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방바닥과 벽장에 알코올을 처바르기 시작했다. 성냥을 긋자 시퍼런 불길이 순식간에 방안을 집어삼켰다. 불길이 천장까지 치솟는 것을 확인한 사내는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불기둥이 온 집안을 집어삼켰다. 지붕이 무너져 내릴 즈음, 맹렬한 불길 속에서 노인의 시체는 마치 조각배 위에 누운 것처럼 벽장 밑바닥 널빤지에 엎어진 채 지글지글 고기로 구워져 갔다. 시체 기름이 바닥에 스며들고, 백혈구를 가득 머금은 모기 똥들이 재와 엉겨 붙었다. 그 처참한 시체는 집이 잿더미가 되기 직전, 출동한 소방관들의 곡괭이에 의해 파헤쳐졌다.
형사가 영웅담처럼 늘어놓은 그 끔찍한 살인 사건의 재구성은, 신사쿠 부부에게 그 어떤 기괴한 귀신 이야기보다 수백 배는 더 소름 끼치고 토악질이 나오는 현실적인 공포였다. 내가 밟고 자던 그 바닥이 끔찍한 살해 현장의 토막이었다니.

부부는 바로 다음 날 아침, 눈에 띄는 허름한 빈집을 대충 계약해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야반도주하듯 이사해 버렸다. 그 끔찍했던 벽장을 떠올리기만 해도 한겨울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온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이사 온 집은 볼품없고 누추했지만, 이삿짐이 널브러진 거실 한가운데 털썩 주저앉은 부부는 비로소 숨을 돌렸다. 여전히 그 불에 탄 널빤지와 핏발 선 노인의 환영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그들은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짐 정리도 안 하고 혼이 나간 듯 주저앉은 부부의 얼굴을, 아야코와 신키치, 키요가 의아한 표정으로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집이 좀 더러우면 어떠랴. 적어도 이 집 바닥엔 끔찍한 핏자국 따위는 없을 테니까.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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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12일 화요일

(유튜브 국내 최초 공개작) [추리소설] 악녀 에가와 란코 - 에도가와 란포가 그려낸 광기와 탐닉의 초상 #추리소설 #오디오북 #원아나의책읽는tv




일본 추리소설의 거장, 에도가와 란포의 초기 수작인 ‘악녀 에가와 란코’를 소개합니다. 비극적인 유년 시절의 환경이 한 인간을 어떻게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지, 그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파멸의 과정을 전문과 함께 만나보세요. 


​1. 작품 개요
​작가: 에도가와 란포 (江戸川乱歩)
​제목: 악녀 에가와 란코 (江川蘭子)
​특징: 공포 반응과 환경적 요인이 인간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탐미주의적 추리 단편.

​2. 줄거리 

(※ 이하는 스포일러 주의해주세요)

​[제1부: 붉은 샘]
아파트 7층, 소음과 추락의 공포 속에서 태어난 란코. 그녀의 부모는 젊고 혈기 왕성한 악당과 미인계의 명수였습니다. 어느 날 밤, 괴한의 침입으로 부모는 살해당하고, 두 살배기 란코는 부모의 피웅덩이 속에서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그 피를 마시는 기행을 보입니다. 이 끔찍한 사건은 그녀의 무의식 속에 '추락'과 '붉은색'에 대한 비정상적인 쾌락을 각인시킵니다.

​[제2부: 곡예사]
양부모 밑에서 아름답게 자란 란코는 학교의 우등생이자 만인의 연인이 되지만, 평범한 삶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본능적인 '위험'에 대한 갈증을 채우기 위해 서커스단의 공중 곡예사가 됩니다. 관객이 죽어나가는 끔찍한 사고 현장에서 그녀는 공포가 아닌 환희를 느끼며, 점차 자신의 내면에 잠재된 악마성을 깨닫게 됩니다.

​[제3부: 수면제]
자산가 노인의 애인이 된 란코는 그곳에서 혼혈 청년 시로를 만납니다. 그녀는 거기서... (이하는 직접 감상하시길요^^)

​▶ [오디오북으로 직접 감상해 보세요] 원아나의 책 읽는 TV - 에가와 란코 영상 보기

​3. 오디오북 스크립트 (낭독 가이드)

​(BGM: 긴장감 넘치는 미스터리한 클래식 음악으로 시작)

​(나레이션 - 차분하고 신뢰감 있는 목소리로) "행동주의 신심리학에 따르면, 인간의 운명은 유전이나 교육보다 생후 몇 달간의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고 합니다. 요부 에가와 란코의 악마 같은 생애도, 그녀가 아기였을 때의 그 기이한 환경 때문이었을지 모릅니다."

​(톤을 조금 낮추며, 기괴한 분위기를 강조) "두 살배기 아이가 부모의 시신 곁에서 피 연못을 찰박거리며 까르르 웃고 있다면, 여러분은 믿으시겠습니까? 란코는 어머니의 상처에서 솟아나는 붉은 액체를 젖 대신 마셨습니다. 그것은 비극의 시작이자, 악녀의 탄생이었습니다."
​(중략 - 스포일러 주의)

​(엔딩 - 여운을 남기며) "그녀는 이제 열여섯 살. 앞으로 그녀가 어떤 요부가 되어 세상을 뒤흔들지, 작가조차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란코의 눈동자에서 무엇을 보셨나요? 지금까지 에도가와 란포의 ‘악녀 에가와 란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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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소설 원고 텍스트 전문 (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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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더 많은 명작 오디오북(1000편)을 생생한 목소리로 듣고 싶으시다면, 유튜브 '원아나의 책 읽는 TV'를 방문해 주세요! https://www.youtube.com/@WonAudioBook


​"본 포스팅의 번역 및 각색 원고는 '원아나의 책 읽는 TV'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무단 도용 및 상업적 배포를 금하며, 인용 시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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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원고) [흉기_에도가와 란포] 텍스트 전문(全文) 수록 [일본 미스터리 소설] 명탐정 아케치 코고로가 파헤친 완벽 범죄의 실체 | 원아나의 책 읽는 TV 꿀잠 오디오북


☆원아나의 한마디☆

​"가장 투명한 것이 때로는 가장 치명적인 흉기가 됩니다. 인간의 일그러진 욕망이 빚어낸 이 기묘한 미궁 속에서, 명탐정 아케치 코고로가 찾아낸 유리 파편 뒤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요? 서늘한 미스터리의 끝에서 여러분은 진정한 인간의 민낯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소설 원고 텍스트 전문 (全文) 

보이지 않는 흉기

에도가와 란포 


​"사람 살려!" 하는 귀청을 찢는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쨍그랑' 하는 커다란 소리가 나고 와그작와그작 하면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나더라는 거예요. 그래 남편이 재빨리 달려가서 아내 방을 열어 보니까, 이 아내인 미야코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습니다. 상처는 왼쪽 어깨 근처로 상처 부위가 쩍 벌어지고 피가 철철 흐르더랍니다. 다행히 동맥을 비껴간 터라 분수처럼 뿜어 나올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대단한 출혈이라서 남편은 곧장 근처에 의사를 불러 처치를 한 다음에 그다음에야 경찰서에 전화를 했다는군요.

​수사과의 기노시타와 내가 출동을 해서 사정을 들었습니다. 웬놈이 창을 넘어 방으로 들어와서 뒤쪽을 보고 있던 미야코를 단도로 찌르고 달아난 거예요. 달아날 때 창틀에 부딪히는 바람에 그 한 장이 빠져서 바깥으로 떨어졌고 이 유리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창밖에는 폭 2m 가량의 좁은 공터가 있고 그 바로 코앞을 콘크리트 벽이 가로막고 있지요. 콘크리트 판을 옆으로 세워 놓은 조립식 벽입니다. 그 바깥쪽은 스미다의 인적 드문 길이고요. 우리는 벽 안쪽과 바깥쪽을 손전등으로 조사를 해 보았지만 뚜렷한 발자국도 없었고 이렇다 할 발견도 없었어요.

​그 뒤 남편인 사토 도라오, 35세 전후의 졸부지요. 영어가 좀 돼서 미군과 친해졌고 이런저런 물건을 납품하면서 돈을 좀 번 모양이더라고요. 뭐 지금은 뚜렷한 장사도 하지 않고 놀고 있습니다만 꽤 영리한 남자라서 간판 없이 금융업 비슷한 것을 해서 재산을 불리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 사토 도라오와 마주 앉아서 물어보았는데 아내인 미야코는 27살이라고 합니다. 니가타 출신의 미녀인데 카바레에서도 일한 적이 있대요. 바람기가 좀 있다고 그래요. 남자관계가 복잡해서 사토와 결혼하자 곧바로 전 남자가 집요하게 미야코를 쫓아다녔고, 또 한 사람 더 수상한 자가 있답니다. 범인은 둘 중 하나가 틀림없다고 사토가 주장하더군요.

​저는 경찰에 들어간 지 5년이 되었지만 일하면서 그렇게 매력적인 여자는 처음 보았습니다. 사토가 그녀에게 아주 홀딱 반한 나머지 그 전까지 동거하던 남자에게서 빼앗다시피 해서 결혼을 한 모양이에요. 그 전 남자란 '세키네 고로'라고 하는 요리사입니다. 상당한 연륜에 솜씨도 좋은 프랑스 음식 요리사인데요. 이 친구와 동거하고 있는 미야코를 사토가 돈을 미끼로 손에 넣었던 거 같아요.

​또 한 명의 용의자는 '아오키 시게루'라고 하는 불량 청년입니다. 미야코는 이 청년하고도 예전에 관계가 좀 있었는데 아오키 쪽이 좀 반한 상태죠. 사토와 결혼한 뒤로 미야코는 피하는데 이 아오키가 졸졸 따라다니면서 떨어지질 않았다고 합니다. 불량 청년이다 보니까 뻔뻔스럽게 사토의 집까지 쳐들어오기도 하고 협박 비슷한 것도 하고 아주 성가셔 죽겠다고 그래요. 아오키는 외모는 귀공자처럼 곱상하지만 무지막지한 친구예요. '아카가와파'라고 하는 폭력 집단의 일원으로 경찰 신세를 진 적도 있습니다. 이 친구, 미야코가 쌀쌀맞게 나오자 최근에는 무시무시한 협박장도 보낸 모양이에요. 미야코가 살해당할지도 모르겠다면서 겁을 내고 있었답니다.

​남편인 사토는 이 두 사람 말고는 짚이는 데가 없고 녀석들 중에 하나가 분명하다, 이 둘 중에 하나가 분명하다고 합니다. 미야코는 뒤에서 당했기 때문에 상대 얼굴을 보지 못한 데다가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창밖으로 튀어나가 어둠 속에 사라진 뒤라서 옷차림도 잘 모른다지만, 역시 그 두 사람 중에 하나라고 주장을 합니다. 아주 단언을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이 두 사람을 만나 보았어요.

​아니 그 전에 잠깐 말해 둘 게 있습니다. 선생님은 항상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것이 있으면 설령 사건과 무관해 보이더라도 잘 기억해 두라'고 하셨잖아요. 남편인 사토는 미야코의 치료를 끝낸 뒤에 의사를 다른 방에 재우고 사건이 있던 방을 꼼꼼히 살폈다고 합니다. 칼을 찾은 거지요. 미야코가 찔린 칼은 평범한 단도가 아니라 아무래도 좀 색다른 양날의 흉기인 모양인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더라고 하더군요.

​"근처에 없다면 당연히 범인이 가지고 달아났겠죠. 뭘 그리 열심히 찾습니까?" 하고 제가 말했더니, "아니 그게 아니다. 어쩜 미야코의 자작극일지도 모른다. 미야코는 아주 특이하고 히스테릭한 여자라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모르니까, 만약을 위해서 칼을 어디 감춰 놓은 것은 아닌지 찾아보았다"는 거예요. 하지만 미야코가 있던 방의 벽장과 장롱을 다 뒤져도 가위 하나, 바늘 하나 나오지 않았고 정원에도 아무것도 떨어져 있지 않기에, 그제야 비로소 창을 통해 웬놈이 숨어들었구나 하고 확신을 했다는 겁니다.

​상대 이야기가 끝나자 안락의자에 푹 파묻혀서 듣고 있던 아케치 고고로가 손으로 머리카락을 들쑤시며 맞장구를 쳤다.

"재밌네, 재밌어. 거기에 뭔가 의미가 있지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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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명탐정은 이미 쉰 고개를 넘었건만 옛날과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얼굴이 다소 길어져서 길고 야윈 팔다리와 더욱 조화로워졌다는 것만 빼면 눈에 띄는 변화도 없고 머리에도 여전히 까치집을 짓고 있다. 아케치 고고로는 멋쟁이로 보이지 않는 멋쟁이였다. 늘 깔끔하게 면도를 했고, 옷도 그 특유의 취향대로 공이 잔뜩 들어간 맞춤복을 아주 아무렇게나 걸쳤다. 예나 지금이나 부스스한 머리도 말하자면 그의 멋 중에 하나였다.

​이곳은 아케치 고고로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아파트의 응접실이다. 고지마치 우네메초에 도쿄 유일의 서양식 고지마치 아파트가 들어섰을 때 아케치는 그 건물 2층에 한 구획을 빌려서 사무실 겸 주택으로 삼았다. 아파트 외관은 제국 호텔과 닮았고 3층 건물이다. 아케치가 빌린 2층에는 넓은 응접실과 서재, 침실 외에 욕조가 달린 화장실과 작은 부엌이 있다. 식당을 서재로 바꿔 버렸기 때문에 손님과 밥을 먹을 때는 가까운 레스토랑을 이용한다. 아케치의 부인은 가슴에 병을 앓아 요양소에서 지낸 지 오래되었기에 그는 독신이나 매한가지였다. 잡다한 일거리나 식사 시중은 소년 조수인 고바야시 요시오가 혼자 도맡아 한다. 널찍한 아파트에 달랑 두 사람이 산다. 식사 시중이라고 해 보아야 근처 레스토랑에서 가져온 것을 식탁에 차리거나 빵을 굽고 차를 끓이는 것이 전부로 소년 혼자 못할 일도 아니다.

​그 응접실에서 아케치와 마주 앉아 있는 사람은 미나토구 S서 감식반의 순사 부장인 쇼지 센타로다. 1년 전에 서장의 소개를 받아 아케치의 사무실에 드나들게 되었는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의견을 물으러 온다.

​"사토가 둘 중 하나가 틀림없다고 한 이 요리사 세키네와 불량 청년인 아오키를 만나 보았지만 아무래도 아닌 거 같아요. 왜냐하면 둘 다 알리바이가 확실하거든요. 분명 집에는 없었지만은 현장 부근을 어슬렁거렸다는 제보는 아직 받지 못했어요. 뭐 슬쩍 을러대 보기도 했지만 두 사람 다 워낙에 만만찮은 상대들이라 빈틈이 없습니다."

"자네의 감으로는 누구 같나?"

"아무래도 아오키가 좀 수상하죠. 뭐 요리사인 세키네는 주인이 다 되어 가는 나이인데다가, 처는 없지만 조모를 모시고 있거든요. 효심이 지극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그에 비하면 아오키는 천하의 못된 건달입니다. 어울리는 친구들도 질이 안 좋고 살인을 밥 먹듯 하는 놈들이거든요. 슬쩍 떠 보니까 아오키는 확실하게 미야코를 증오하고 있더군요. 푹 빠져 있었던 만큼 그런 취급을 받다 보면 폭발하기도 하겠죠. 정말 죽일 작정이었어요. 근데 일이 잘못돼서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그만 겁을 먹고 달아난 거겠죠. 세키네였다면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걸요. 두 사람이 사는 곳은 아주 가깝습니다. 둘 다 공동주택에 살고 있는데 세키네는 사카시타초, 아오키는 기쿠이초입니다. 세키네 쪽은 사토의 집에서 300m 남짓, 아오키는 500m 남짓입니다."

​"흉기를 찾아내는 일, 이 세키네와 아오키의 그날 밤 행동을 다시 한번 상세히 조사하는 일. 이게 상식적인 선이로군. 그 밖에도 한 가지 자네가 좀 해 줬으면 하는 게 있어."

아케치의 눈이 웃고 있었다. 마치 개구쟁이처럼. 쇼지 순사 부장은 이 눈빛을 잘 안다. 아케치는 자신만이 눈치챈 무언가 기묘한 착안점을 즐기고 있다.

​"범인이 달아날 때 이 창의 유리가 정원으로 떨어져서 유리가 깨어져 있었다면서, 그 유리 파편은 어쨌나?"

"사토의 집 그 늙은 가정부가 주워 모았다고 하는데요. 이미 버렸을 수도 있겠지만..."

"만약에 그 유리 파편을 모두 모을 수만 있다면 뭔가 자료가 될 거네. 한번 찾아보게. 창틀에 남아 있는 파편까지 모두 합해서 복원을 한번 시켜 보자고."

아케치의 눈이 역시 웃고 있다. 쇼지도 아케치의 얼굴을 보면서 싱긋 웃어 주었다. 아케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는 뜻이었다. 실은 전혀 몰랐지만.

​열흘째 되는 날 오후, 쇼지 순사 부장이 다시 아케치를 방문했다.

"벌써 아시죠? 큰일 났습니다. 사토 도라오가 살해당했어요. 범인은 요리사인 세키네였습니다. 확실한 증거가 있어서 곧바로 연행했어요. 지금 경시청에서 조사 중입니다. 저도 그 자리에 입회했다가 방금 돌아오는 길이에요."

"으음, 라디오에서 얼핏 들었네만 자세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네. 요점을 좀 말해 주게."

"저도 우연히 어젯밤 그 살인 현장에 있었습니다. 밤 9시가 넘은 시각에 집에서 쉬고 있는 저한테 서에서 연락이 왔어요. 사토가 긴히 할 말이 있다면서 곧장 와 달라는 전화를 했다는 겁니다. 저는 뭔가 솔깃한 정보라도 있나 해서 서둘러 사토의 집으로 달려갔지요. 바깥주인인 사토와 미야코가 안방에서 기다리고 있더군요. 미야코는 2, 3일 전에 상처를 봉합한 실을 뽑았다는데 이미 외출도 하는 모양이었어요. 두 사람 다 유카타를 입고 있었죠.

​사토는 노여운 표정으로 '저녁에 배달된 우편물 중에 이런 편지가 있었던 걸 방금 전까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면서 갱지에 쓴 이상한 편지를 싸구려 봉투에서 꺼내 주더라고요. 편지에는 6월 25일 밤, 다시 말해서 어젯밤이죠. 6월 25일 밤에 엄청난 일이 벌어질 테니 조심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연필로 썼는데 무진장 악필이더군요. 보아하니 왼손으로 쓴 거 같았어요. 봉투의 글 역시 연필로 쓴 같은 필적이었습니다. 보낸 사람 이름은 없었고요. 짚이는 데가 없냐고 물으니까 남편인 사토가 필적은 다르지만 보낸 사람은 세키네, 아오키 둘 중에 하나가 분명하다고 또 단언을 하더군요. 그리고 말입니다, 참 낯도 두껍지 않습니까? 놈들 두 명 다 미야코의 병문안을 왔었대요. 만약 둘 중 하나가 범인이라면 정말 대단한 배짱이죠. 이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한 30분쯤 지나서 10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입니다. 미야코가 '서재에 위스키가 있다, 그걸 좀 대접해라' 하고 말하니까 사토가 마루 끝에 있는 서양식 방에 위스키를 가지러 갔는데 한동안 기다려도 오지를 않더군요. 미야코는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린 게 분명해요.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남편을 찾으러 그 방으로 갔지요.

​저는 방문 쪽에 앉아 있던 터라 몸을 조금만 움직이면 마루 끝에 있는 서양식 방 안이 보입니다. 다다미 방이 하나 있고 그 앞으로 마루가 지나가기 때문에 제가 앉아 있던 곳에서 서양식 방까지는 10m 가량이나 떨어져 있었어요.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저는 멍하니 그 방의 문만 바라보고 있었지요. 갑자기 '어머, 누가 좀 와 봐요!' 하는 비명이 서양식 방 쪽에서 들려왔습니다. 문이 닫혀 있다 보니까 어쩐지 아주 먼 곳에서 들리는 소리 같았어요.

​저는 그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순간 서양식 방으로 날아가 문을 열었는데 아니, 캄캄하더군요. 스위치는 어디 있느냐고 고함을 쳐도 아무도 대꾸를 안 하더라고요. 저는 스위치가 있음 직한 벽 쪽을 더듬대다가 겨우 스위치를 찾아서 눌렀어요. 불이 들어오자마자 바로 눈에 들어온 광경은 정면 창가에 쓰러져 있는 사토의 모습이었습니다. 유카타의 가슴 부위가 시뻘겋게 물들어 있더군요. 미야코도 피투성이가 돼서 남편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는데, 저를 보더니 한 손으로 창을 가리키면서 쉴 새 없이 뭐라고 입을 움직였는데 무섭게 흥분한 터라 무슨 말을 하는지 통 못 알아듣겠더라고요.

​보니까 들창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범인이 그쪽으로 도망친 게 분명합니다. 저는 순간 창밖으로 튀어나갔어요. 정원이 그리 넓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숨을 만한 풍성한 덤불도 없고요. 10m쯤 앞쪽에 전에 말한 그 콘크리트 담이 희끄무레하게 보이더군요. 범인은 그 담을 넘어서 잽싸게 달아나 버린 거겠죠. 아무리 찾아도 주변에 사람이라고는 없었습니다.

​나온 창으로 다시 들어가서 서양식 방에 돌아와 보니까, 제가 튀어나갈 때 거의 동시에 달려왔던 늙은 가정부와 식모가 미야코를 보살피고 있더군요. 미야코에게는 별 이상이 없었습니다. 다만 사토에게 달라붙어 있던지라 유카타가 피범벅이 되어 있었을 뿐이죠. 사토의 몸을 검사해 보니까 가슴을 깊이 찔려서 이미 맥박이 뛰지 않았습니다. 저는 전화가 있는 방으로 달려가서 서의 숙직원에게 급히 보고를 했지요. 잠시 뒤에 서장님을 비롯한 대여섯 명의 직원들이 쫓아왔어요.

​손전등으로 정원을 살펴보았더니 창에서 담 있는 곳까지 범인의 발자국이 수두룩하게, 그리고 또렷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아주 명료한 발자국이었어요. 오늘 아침에 저희 직원이 세키네와 아오키의 아파트로 가서 두 사람의 신발을 받아왔는데, 대조해 보니까 세키네의 신발과 꼭 맞게 일치하더군요. 세키네는 범행 시간에 마침 외출을 했는데 알리바이가 없어요. 그래서 곧바로 연행해서 경시청으로 데리고 갔지요."

​"그런데도 세키네가 자백을 하지 않는구먼."

"네, 완강히 부인하고 있습니다. '사토나 미야코에게 앙심이 있기는 하다. 밤에 몇 번이나 사토의 집 근처를 어슬렁댄 적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담을 넘은 기억 따위 없다. 범인은 따로 있다. 그 녀석이 내 신발을 훔쳐가서 거짓으로 발자국을 찍은 것이다.' 이렇게 끝까지 주장하고 있습니다."

"거짓 발자국도 물론 고려는 해 봐야지. 하지만 세키네에게는 강한 동기가 있어요. 알리바이는 없고요. 그럼 아오키의 알리바이는?"

"네, 그것도 알아봤지요. 아오키도 그때 외출을 했는데 역시 알리바이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오키가 세키네의 신발을 신고 담을 넘었다는 가정도 할 수 있는 건가?"

"예, 그건 이미 조사해 보았습니다. 세키네는 신이 한 켤레뿐이에요. 그 신발을 신고 범행 시간에 외출을 했으니까 같은 시간에 아오키가 세키네 신발을 신을 수는 없겠죠."

"그렇다면 진범이 세키네의 신을 훔쳐 거짓 발자국을 찍었다는 세키네의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구먼."

​아케치의 눈에 또 그 기이한 웃음이 떠올랐다.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더니 문득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자네 말이야. 미야코가 다쳤을 때 그 깨진 유리창의 파편을 좀 모아보라고 그랬잖아. 어떻게 됐나?"

"네, 그저 말씀하신 대로 다 모았습니다. 늙은 가정부가 빠짐없이 주워서 신문지에 싸서 쓰레기통 옆에 놓아두었더군요. 저는 창틀에 남아 있던 유리도 뽑아서 그 파편들과 함께 복원을 해 보았지요. 그랬더니 이상한 점이 있었어요. 깨진 유리는 모두 석 장인데 파편을 연결해 보니까 완전한 석 장이 복원된 것 외에도 이 남는 파편이 있더군요. 이전에 깨진 유리 파편이 정원에 떨어져 있었고 그것까지 함께 섞은 것이냐 하고 늙은 가정부에게 물어보았지만 절대로 아니라고 하더군요. 정원은 매일 청소한답니다."

"그 남은 파편들의 형태는 어땠지?"

"조각조각 깨져 있기는 했지만 다 이어 보니까 불규칙하고 길쭉한 삼각형이 되더군요. 유리의 질감은 눈으로 보아서는 유리창과 같은 재질이었어요."

​아케치는 이쯤에서 다시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연신 담배를 빨아대는데 연기를 시원하게 뿜어내지 않다 보니 얼굴 앞에서 연막처럼 자욱하게 흰 연기가 흔들거렸다. 아케치 고고로와 쇼지 순사 부장의 대화가 이어졌다.

"사토의 상처도 미야코의 상처와 비슷했지?"

"네, 그렇습니다. 역시 예리한 양날의 단도로 보여요. 그 단도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고..."

"네, 발견이 안 되네요. 어디에 숨겼는지 세키네의 아파트를 뒤져 보았지만 없었습니다."

"살인이 일어난 방 안은 물론 조사를 했겠지."

"그러믄요. 조사했습니다. 근데 그 방에도 흉기는 남아 있지 않았어요."

"그 방의 가구라든가 구조는 좀 어떤가. 하나하나 떠올려 보게."

"커다란 책상과 가죽 의자가 하나, 안락의자가 둘, 흙으로 빚은 서양 인형으로 장식한 코너장, 커다란 책장, 그리고 창 옆에 받침대가 있고 그 위에 유리로 된 커다란 어항이 얹혀 있습니다. 사토는 금붕어를 좋아해서 그 유리 어항을 항상 서재에 둔답니다."

"어항의 형태는?"

"지름 45cm 가량의 사각형 유리 어항입니다. 뚜껑은 없고 위쪽이 뻥 뚫려 있습니다. 뭐 자주 볼 수 있는 평범한 어항 중에 큰 놈이죠."

"그 안도 자세히 들여다보았나?"

"어... 아니요, 뭐 딱히. 투명한 유리 어항이라서 흉기를 숨길 만한 장소가 아니거든요."

​그때 아케치는 오른손을 머리 위로 올리더니 손가락 빗을 만들어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휘젓기 시작했다. 쇼지는 아케치의 이 이상한 버릇이 어떤 때 나타나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깜짝 놀라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 금붕어 어항에 뭔가 의미가 있었던 건가요?"

"난 가끔 공상가가 되거든. 지금 좀 얄궂은 상상을 하고 있어. 하지만 증거가 전혀 없지는 않아."

그러더니 아케치는 상반신을 앞으로 쑥 빼며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듯한 자세를 잡았다.

"실은 말이야, 쇼지 군. 요전에 자네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우리 고바야시에게 탐문과 미행을 좀 하라고 시켰는데 말일세. 사토 도라오에게는 미야코 말고도 전처가 있었어. 근데 병으로 죽었지. 아이는 없고. 그리고 사토는 대단한 부자잖아. 자네 방금 아오키가 미야코의 병문안을 왔었다고 그랬지. 마침 그때 고바야시가 아오키를 미행하고 있었어. 숨어서 보니까 미야코가 아오키를 현관까지 배웅을 했고 그곳에서 둘이 뭔가 속닥속닥 말을 나눴다고 하더군. 마치 애인 사이처럼 말이야."

​쇼지는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기다렸지만 아케치가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리기에 결국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근데 그거하고 금붕어 어항이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

"쇼지 군, 만약 내 상상이 옳다면 이건 정말 신기한 범죄야. 서양의 소설가가 그런 공상을 한 적은 있지.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전례가 없는 살인 사건이야."

"저... 무슨 말씀이신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자, 그럼 문제의 발자국부터 생각을 해 보세. 그게 만약 거짓으로 찍은 발자국이라면 굳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찍지 않고 사전에 찍어 놓아도 상관이 없지 않나? 그렇다면 아오키도 할 수가 있어. 기회를 엿보다가 세키네의 집에서 신을 훔친 다음에 사토의 정원에 숨어 들어가 발자국을 찍고 다시 세키네의 집에 돌려놓는 거지. 세키네의 집과 사토의 집은 300m밖에 안 떨어져 있으니까 시간은 얼마 안 걸려. 뭐, 만약 들킨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신발 좀 훔친 것으로는 죄가 크지 않으니까 말이야. 또 한 가지 더 깊이 파고들자면 가짜 발자국을 찍은 자가 꼭 아오키라는 법도 없지.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었어."

​쇼지 순사 부장은 여전히 아케치의 말뜻을 깨닫지 못했다. 고혹스러운 표정으로 아케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미처 깨닫지 못한 맹점이 있네."

아케치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예의 그 의미심장한 눈웃음은 온 얼굴에 번져 있었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피우다 만 담배를 재떨이에 버리더니, 근처에 굴러다니던 연필을 들고 메모지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자네에게 재밌는 수수께끼 문제를 하나 내지. 자, 이거야. 잘 보게. O는 원의 중심이야. OA는 이 원의 반지름이고 OA 위의 점 B에서 수직으로 선을 내려 원주와 만나는 점이 C야. 다시 O에서 수직으로 선을 내려서 OBCD라고 하는 직사각형을 만드는 거지. AB가 3, 사선인 BD가 7인 이 도형에서 길이를 아는 것은 이 둘뿐이네. 자, 이 원의 지름은 몇 인치이겠는가. 이게 문제일세. 30초 안에 대답하게."

​쇼지 순사 부장은 당황했다. 옛날 중학교 다닐 때 기하를 배우기는 했지만 이미 까맣게 잊어버린 터다. 지름은 반지름의 두 배니까 우선 OA의 반지름 길이부터 계산하면 된다. OA 중에서 AB가 3인치니까 나머지 OB는 몇 인치냐가 문제다. 또 아는 것은 BD가 7인치라는 사실. 이 BD를 빗변으로 하는 삼각형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니까 밑변이 7인치인 OBD라고 하는 직각삼각형의 한 변의 길이는 안 되겠구먼. 벌써 한참 전에 30초가 지났어.

​"자네 말이야. 어렵게 생각하니까 안 되는 거야. 아마 AB가 3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겠지. 거기에 말려들고 나면 끝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거든. 문제는 사실 풀고 말고 할 것도 없어. 잘 듣게. 이 도형의 O에서 C까지 직선을 그어 보는 거야. 이렇게 말이야, 알겠지? 직사각형은 대각선이 서로 길이가 같잖아. 반지름은 7인치니까, 그러니까 지름은 14인치지."

"그렇군요. 이렇게 쉬운 문제를... 이거 재밌는 수수께끼인데요." 쇼지는 감탄을 하면서 도형을 바라보았다.

"쇼지 군, 자네는 이번 사건에서도 이 A라는 선에 얽매이고 있어. 교활한 범인은 언제나 이 A라는 선을 준비해 놓지. 수사관이 거기에 걸려들도록 말이야. 자, 이번 사건의 A선은 과연 무엇일까. 잘 생각해 보라고."

​쇼지 순사 부장이 세 번째로 아케치의 아파트를 찾아온 것은 나흘이 지난 뒤였다.

"선생님 추측하신 대로였습니다. 미야코가 자백을 했어요. 사토의 재산이 목적이었습니다. 재산을 상속받으면 아오키와 합칠 작정이었다는군요. 미야코가 아오키에게 푹 빠진 거였어요. 근데 아오키에게 협박을 받는다는 식으로 연기를 해서 사토를 안심시켰던 겁니다."

아케치는 침울한 표정이었다. 여느 때와 달리 웃음기도 없었고 눈은 우울한 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AB선은 미야코가 스스로 자신의 팔에 상처를 내고 마치 피해자인 양 연기했던 부분입니다. 피해자가 범인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흉기는 선생님 말씀대로 유리였어요. 기다랗고 얇은 삼각형의 유리 조각이었죠. 미야코는 그것으로 자신의 팔을 찌른 다음에 핏자국을 깨끗이 닦아내고 정원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 다음 유리창을 깨서 정원으로 떨어뜨리고 그 유리 파편으로 흉기인 유리를 위장하려 한 것이죠. 그 유리 파편을 모두 모아서 세심하게 복원을 하는 경찰이 있을 줄은 뭐 그녀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겠지. 사토도 상당히 빈틈없는 남자였기 때문에 미야코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그렇게까지 흉기를 찾아 헤맨 거겠죠. 자신이 살해당할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해도 어렴풋이 의심하고는 있었던 겁니다."

​"사토를 살해한 흉기도 유리였어요. 부서져서 상처에 파고드는 일이 없도록 하려 했는지 조금 두꺼운 유리를 썼는데 역시 단도처럼 길쭉한 삼각형이었습니다. 사토를 방심하게 만든 다음 그 유리로 가슴을 찌르고 피를 닦아낸 뒤에 그 금붕어 어항 바닥에 가라앉힌 거였어요. 시간은 충분했지요. '누구 좀 와 보세요'라고 외친 것은 이미 모든 일을 마치고 난 뒤였습니다. 사토가 살해되었을 때 신음 소리 정도는 냈을 텐데, 제가 앉아 있던 방과 멀었던 데다가 두꺼운 문이 닫혀 있던 터라 저는 알아채지 못했던 겁니다. 어항에다가 유리의 흉기를 넣다니 정말 기발한 생각이죠. 바닥에 유리 한 장 가라앉아 있어도 뭐 얼핏은 모르니까요. 무언가를 찾을 때 투명한 어항 따위는 처음부터 신경도 쓰지 않을 테고 단도 대신 유리를 사용했으리라는 생각 따위도 못 할 테니까요. 근데 곧바로 그걸 알아채셨다니 선생님 정말 놀랍습니다."

​"정원의 가짜 발자국도 미야코가 찍은 거였어요. 상처에 실밥을 뽑은 다음 날, 너무 집에만 있어도 몸이 안 좋으니까 잠깐 산책을 하고 오겠다면서 집을 나갔다고 해요. 그리고 가까운 세키네 집으로 가서 세키네의 신을 보자기에 싸고 들고 정원에 찍은 다음에 돌려놓기 위해서 다시 세키네의 집으로 갔어요. 미야코는 세키네가 늦잠을 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자는 사이에 이 모든 일을 해치웠던 겁니다. 예전에 세키네와 동거를 했으니까 세키네의 생활 습관은 세세한 부분까지 모조리 다 알고 있었던 거죠. 협박 편지도 미야코가 왼손으로 써서 자기 손으로 우편함에 넣었다고 자백을 했어요. 협박 편지는 첫째로는 저를 범행 현장에 불러들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을 아주 우습게 본 거지요. 유리 흉기를 쓴다는 트릭은 목격자가 없으면 위력을 발휘할 수 없으니까요. 물론 아오키도 불러서 조사를 했지만 공범은 아니었습니다. 미야코가 연인인 아오키에게도 알리지 않고 단독으로 계획하고 실행한 거였어요."

​"정말 억센 여자죠. 미야코는 가난을 저주하고 있었어요. 자신은 가난 때문에 숱한 고통을 겪어 왔고 여러 남자 품을 거쳐야만 했던 것도 다 가난 때문이니까, 무슨 수를 써서든 가난과는 연을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런 즈음에 사토라고 하는 큰 부자가 나타났기에 돈 때문에 결혼을 승낙했다고 해요. 세키네한테는 빌린 돈이 있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동거를 했지만 몹시 참혹한 꼴을 당했다나요. 도망치고 싶어도 워낙 빈틈이 없는 데다가 걸핏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통에 오도 가도 못했다지요. 근데 사토가 그 빚을 갚아 준 덕분에 가까스로 벗어났지만, 세키네한테 받은 학대는 언젠가 꼭 복수하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답니다. 사토와 결혼하기 전부터 아오키에게 마음이 있었고 결혼 후에 사토의 눈을 속여서 서서히 깊은 관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자 단 하루도 사토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이혼을 하자니 돈이 궁하고 가난은 지긋지긋하고... 이렇게 해서 사토의 재산을 모조리 제 것으로 만든 다음 좋아하는 아오키와 함께 살아야겠다는 뻔뻔한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리고 유리로 살인을 한다는 아주 기발한 방법까지 생각해 낸 겁니다. 여자란 참 무섭네요."

​"내 상상이 옳았군. 정말 터무니없는 상상이었지만 세상에는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생각해 내고 실행까지 하는 이들이 있는 법이야."

아케치는 팔짱을 끼고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 좋아하는 담배조차 잊어버린 듯이 보였다.

"그래도 선생님도 신기한 분이세요. 신기한 범죄는 신기한 탐정이 아니면 간파할 수 없으니까요."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겠지. 하지만 아무리 내가 신기한 탐정이라고 해도 자네 이야기만 들어서는 그런 결론이 나오지 않았을 거야. 내막을 밝히자면 말이야. 난 고바야시한테 미야코의 과거를 좀 알아오도록 했지. 그리고 미야코와 친했지만 지금은 사이가 좋지 않은 두 명의 여자를 따로따로 이곳까지 오게 한 다음에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어. 그래서 미야코라는 여자의 성격을 알게 되었지. 내가 어항에 생각이 미친 것은 그런 과정을 밟았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지. 내 힘만으로는 사전에 그것까지 예상하지 못했어. 나중에야 신기한 살인 흉기를 깨달은 것이 고작이었어."

​아케치는 그렇게 말하더니 말을 뚝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쇼지 순사 부장이 이렇게 침울하게 가라앉은 아케치의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끝)


 


 본 작품 오디오북 링크: https://youtu.be/6IGNXrMTDzA?si=E1M0EtBMYVji5X7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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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 안내]

본 포스팅의 번역 및 각색 원고는 '원아나의 책 읽는 TV'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무단 도용 및 상업적 배포를 금하며, 인용 시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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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10일 일요일

(유튜브 국내 최초 공개작) ​[재미있는 소설 추천] ‘노(の)’ 자 모양의 칼자국 - 하야시 후보 | 명탐정 구기누키 도키치 시리즈 #추리소설 #오디오북 #원아나의책읽는tv



(유튜브 국내 최초 공개작)

오늘은 일본 장르 소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거장, 하야시 후보(林不忘)의 수작이자 명탐정 구기누키 도키치가 활약하는 ‘노(の)’ 자 모양의 칼자국을 소개해 드립니다.

​완벽한 밀실에서 발견된 시신, 그리고 그 몸에 새겨진 의문의 글자... 텍스트와 함께 생생한 목소리로 이 기괴하고도 매혹적인 미스터리 속으로 빠져보시기 바랍니다.

​작품 요약 
​제목: ‘노(の)’ 자 모양의 칼자국
​작가: 하야시 후보 (林不忘)
​시리즈: 명탐정 구기누키 도키치
​장르: 클래식 본격 추리, 밀실 미스터리

​[줄거리]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느 날 밤, 굳게 잠긴 저택의 부엌에서 참혹한 시신 한 구가 발견됩니다. 현관은 안에서 빗장이 걸려 있었고, 모든 창문 역시 단단히 잠긴 완벽한 '밀실' 상태. 경찰은 이를 명백한 자살로 결론지으려 합니다.

​하지만 시신의 배 위에는 날카로운 칼로 새겨진 일본어 히라가나 '노(の)' 자 모양의 기묘한 칼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자살하는 사람이 자신의 몸에 이런 정교하고 기괴한 표식을 남길 수 있을까요? 

현장의 기묘한 위질감을 포착한 명탐정 구기누키 도키치가 사건에 개입하면서, 완벽해 보였던 밀실 자살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 이 소설 오디오북으로 감상하기




​📜 오디오북 스크립트 
​(도입부)
(나지막하고 신비로운 목소리로) "사람의 원한은 죽음의 순간, 어떤 형태로 남게 될까요? 여기,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밀실에서 죽음을 맞이한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몸에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기괴한 흔적이 새겨져 있었죠."

​(전개부)
"빗장이 걸린 현관문, 안에서 잠긴 창문들. 외부인의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탐정 구기누키 도키치의 눈은 시신의 복부에 새겨진 선명한 '노(の)' 자 칼자국을 향합니다. 이건 누군가에게 보내는 메시지일까요, 아니면 죽은 자의 마지막 저주였을까요?"

​(이하는 스포일러 주의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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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부)
"모두가 자살이라 믿었던 그 순간, 구기누키는 현장의 아주 작은 모순을 지적합니다. 칼자국이 시작된 방향과 깊이, 그리고 현장에 남은 핏방울의 궤적. 범인은 밀실을 만들기 위해 치밀한 트릭을 사용했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남긴 '노(의)' 자 표식이야말로 이 사건이 정교하게 설계된 살인임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습니다."

​감상 포인트: 왜 '명작'인가?
​이 작품은 단순히 범인을 찾는 것을 넘어, 당시 일본 사회의 어두운 이면과 인간의 뒤틀린 심리를 날카롭게 꿰뚫어 봅니다. 

하야시 후보 특유의 감각적인 묘사와 구기누키 도키치의 냉철한 추리는 독자로 하여금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듭니다. 

특히 '글자 모양의 칼자국'이라는 시각적 장치는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오래도록 잔상을 남깁니다.





🎧 원기범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더 깊은 몰입감을 느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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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원고) [악인의_에도가와 란포] 텍스트 전문(全文) 수록 [일본 미스터리 소설] 에도가와 란포 '화승총' - 어느 맑은 날의 완벽한 알리바이와 범인 없는 살인 | 원아나의 책 읽는 TV 꿀잠 오디오북

☆원아나의 한마디☆
​​"정적만이 감도는 한낮의 별채,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총구가 스스로 불을 뿜으며 비극을 완성합니다. 인간의 악의가 아닌, 태양과 물병이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사물이 빚어낸 이 기묘한 '범인 없는 살인'은 과연 우연일까요, 혹은 운명의 장난일까요? 거장 에도가와 란포가 설계한 정교하고도 서늘한 미스터리의 실체를 지금 만나보시죠."

소설 원고 텍스트 전문

화승총 (火縄銃)
에도가와 란포 (江戸川乱歩)

​어느 해 겨울 방학, 나는 친구 하야시 이치로에게서 초대장 한 통을 받았다. 동생 지로와 함께 일주일쯤 전부터 이곳에 와서 매일 사냥을 하며 지내고 있는데, 둘이서만 있으니 재미가 없어서 시간이 나면 놀러 오지 않겠냐는 내용이었다. 봉투는 호텔 것이었고, 'A 산기슭 S 호텔'이라는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긴 겨울 방학을 어떻게 보낼지 막막해하며 지루한 나날을 주체하지 못하던 참이라, 나에게 그 초대는 무척 기뻤고 때마침 잘 됐다 싶어 당장 응하기로 했다. 평소 사이가 좋지 않은 의붓동생과 함께 있다는 점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다치바나를 꼬드겨서 둘이서 가기로 했다.

​며칠 전 내리던 비가 말끔히 개고 맑게 갠 12월의 포근한 날이었다. 딱히 차려입을 필요도 없었던 우리는 여행이라곤 하지만 아주 간편하게 몸만 기차에 오르면 그만이었다. 이날 다치바나는 제 취향인 듯 교복 위에 인버네스(소매 없는 외투)라는 이상한 차림을 하고 객실 구석에 깊숙이 파묻혀, 끊임없이 에드거 앨런 포의 '갈가마귀' 같은 것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인버네스 한쪽 소매에서 튀어나온 팔꿈치를 창틀에 얹고 스쳐 가는 창밖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무시무시한 괴조의 시를 흥얼거리는 그의 모습이 내게는 왠지 몹시 신비롭게 보였다.

​세 시간쯤 뒤 기차는 A 산기슭 역에 도착했다. 미리 알리지 않고 온 데다 역에는 당연히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곧장 역 앞의 인력거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 도착하자 우리를 맞이한 호텔 보이가 대답했다.

​"하야시 님이신가요? 동생분은 어디론가 나가셨고, 형님은 뒤쪽 별채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낮잠인가요?"
"네, 매일 점심때부터 한동안 주무시거든요. 그럼 별채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 별채는 본채에서 정원을 가로질러 십여 칸 정도 안쪽에 덩그러니 홀로 세워진 작은 양옥이었는데, 본채에서부터 긴 복도가 곧장 이어져 있었다.

​우리들을 방 앞까지 안내한 보이는 "항상 주무실 때는 안에서 자물쇠를 채워 두십니다"라고 말하며 굳게 닫힌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하지만 깊이 잠들었는지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번에는 조금 세게 두드렸지만, 그래도 하야시의 깊은 잠을 깨울 수는 없었다.

​"어이, 하야시! 일어나지 않을래?"
​그래서 이번엔 내가 큰 소리로 외쳐 보았다. 이쯤 되면 아무리 깊이 잠들었어도 깨어날 줄 알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다치바나도 합세해서 문을 더욱 세게 두드리며 소리쳤지만, 역시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왠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이, 아무래도 이상해. 무슨 일 생긴 거 아닐까?"
​내가 다치바나에게 그렇게 말하자, 그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보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하야시가 이 안에서 자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까?"
"네, 그야 뭐… 아무튼 안에서 열쇠도 잠겨 있으니까요."
"마스터키는 따로 없나요?"
"있습니다. 가져오겠습니다."
"이 정도로 두드려도 일어나지 않는 걸 보면 예사 일이 아닌 것 같아. 어쨌든 열쇠로 열고 안을 살펴보자고."
그래서 보이는 다시 돌아가 본채에서 예비 열쇠를 가져왔다.
​문이 열리자 맨 먼저 다치바나가 뛰어들어갔는데, 입구 정면 벽 쪽에 놓인 침대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던 그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앗!" 하고 작은 비명을 질렀다.

​침대 위에는 상의를 벗은 조끼 차림의 하야시 이치로가 왼쪽 가슴에 관통 총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었다. 생생한 핏물은 조끼에서 흘러내려 하얀 시트를 붉게 물들였고, 아직 채 마르지 않아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나는 이 뜻밖의 하야시의 모습을 보자,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멍하니 다치바나의 행동만 지켜보고 있었다.

​다치바나는 잠시 참혹하게 변해버린 하야시의 시신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끔찍한 일에 말문이 막혀 그저 파랗게 질린 채 떨고 있는 보이에게 어서 경찰에 알리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침대 곁을 떠나 다시 한번 방 안을 꼼꼼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앞서 말했듯이 이 별채는 독채로 된 양옥이었는데, 방의 구조를 대략 설명하자면 동쪽과 북쪽은 벽이고 그 구석에 침대가 놓여 있으며, 그 옆으로 양복장이 세워져 있다. 그 정면, 즉 서쪽 북쪽으로 치우친 곳이 이 방의 유일한 출입구로, 긴 복도를 지나 본채와 통하게 되어 있었다. 남쪽으로 향한 쪽에는 두 개의 창문이 있고, 그 서쪽 창문 아래에 커다란 테이블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묵직한 책꽂이가 놓여 있고 양서 몇 권이 꽂혀 있었다.

​그 책꽂이 옆에는 받침대에 올려진, 화병이겠지만 좀 특이하게 생긴, 둥근 공 모양의 유리병이 있었고 거기에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앞에는 아주 구식인 사냥총 한 자루가 무심하게 내던져져 있었다. 그 밖에는 펜과 잉크, 그리고 편지 한 통. 이것이 책상 위에 놓인 전부였다. 테이블 앞과 옆에는 정석대로 두 개의 의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창문은 양쪽 다 불투명 유리였는데 한쪽, 즉 책상 앞 창문은 어찌 된 일인지 반쯤 열려 있었고, 그곳으로 햇빛이 눈부실 정도로 책상 위를 가득 비추고 있었다.

​다치바나는 한동안 방 안을 둘러보다가 책상 앞 반쯤 열린 창가로 다가가서는 훌쩍 고개를 내밀어 창밖을 내다보고는, 고개를 들이밀고 책상 위 사냥총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다음엔 봉투를 집어 들어 슬쩍 훑어보고, 이번에는 양복 주머니를 뒤져 시곗줄에 달린 나침반을 꺼내더니, 그 나침반을 보며 또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하늘을 쳐다보거나 책상 위를 빤히 바라보거나, 뒤를 돌아 방구석 침대 쪽을 보거나 했다.

​그런 행동을 몇 번인가 반복하고 있을 때, 본채 쪽에서 복도를 타고 허둥지둥 뛰어오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치바나는 갑자기 서두르며 주머니에서 꺼낸 연필로 부리나케 책상 위 사냥총과 유리병 위치를 표시해 두었다. 반쯤 열린 창문에도 그 열린 정도를 똑같이 연필로 표시해 두었다.

​이윽고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방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온 것은, 보이의 다급한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 일행이었다. 제복 차림의 경부와 순경, 양복 차림의 형사와 경찰의, 그리고 그 뒤에는 이 호텔 주인과 우리를 처음 이 방으로 안내했던 아까 그 보이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대기하고 있었다.

​경찰의와 형사는 들어오자마자 곧장 침대 쪽으로 다가가 무언가 꼼지락꼼지락 조사하더니, 형사가 시신의 가슴팍에서 사슬이 달린 회중시계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당한 건 한 시 반이군."

​총알에 맞은 시곗바늘이 한 시 반에서 멈춰 있었던 모양이다. 형사가 그렇게 시신을 살피는 동안 경부는 보이를 불러 심문을 시작하고 있었다.
​"피해자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방으로 돌아갔다는 거지? 흠, 그래서 너는 무슨 총소리 같은 거 못 들었느냐?"
"그러고 보니 점심 지나서 뭔가 큰 소리가 났던 것 같기도 한데, 워낙 바로 뒷산에서 허구한 날 총소리가 나는 터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이 책상 위 총은… 화승총인 것 같은데 이건 어찌 된 거냐? 피해자의 것인가?"

​그렇게 말하며 경부는 그 화승총을 집어 들어 총구를 코에 가까이 대더니 무심코 중얼거렸다.
​"흥, 아직 화약 냄새가 남아 있군."
"아, 그거 말씀이십니까. 그건 이분 동생분 거라서요..."
​호텔 주인이 옆에서 거들었다.
​"동생?"
"네, 지로 님이라고, 역시 저희 호텔에 묵고 계신데 지금은 안 계십니다만, 본채 쪽에 방이 있습니다."
"그럼 저건? 저 총은?"
​경부는 몸을 반쯤 돌려 침대 위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최신식 연발총이 겨우 손이 닿을 만한 높이에 걸려 있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때까지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저건 형님 것으로, 저 총을 들고 매일 뒷산으로 사냥을 가셨습니다."
​그때 시신에서 떨어져 창밖을 바라보던 형사가 무얼 발견했는지 외쳤다.
​"앗, 이거다!"
​나도 그 소리에 이끌려 형사 뒤에서 창문 밑을 내려다보니, 어제 내린 비로 축축해진 그리 넓지 않은 마당에 나막신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형사는 무척이나 흡족한 듯 경부를 향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범행 경로는 아주 간단한 것 같습니다. 즉, 범인은 피해자의 낮잠 습관을 알고 있어서 딱 피해자가 잠들 무렵 이 창밖으로 몰래 다가와, 조용히 이 창문을 열고 저 화승총으로 저격한 겁니다. 그리고 총을 책상 위에 둔 채로 도주했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피해자의 일상생활을 잘 아는 자를 조사해 보면 범인은 금방 밝혀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때 복도에서 우당탕 다급한 발소리가 나더니 한 청년이 뛰어 들어왔다. 지로였다. 들어오자마자 침대 위 형의 시신 쪽으로 눈길을 돌렸는데, 그 얼굴은 공포로 심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왠지 지로의 모습을 보자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와서는 안 될 곳에 그 사람이 온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이 한 사람을 향해 '네가 범인이다'라고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화승총은 지로의 것이고, 창밖 발자국은 나막신 자국인데 지금 눈앞에 있는 지로는 기모노 차림에 나막신을 신고 있다. 게다가 나는 그들 형제의 가정 내 불화도 잘 알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들어오자마자 지로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소리쳤다.
​"당신이 지로 군이오?"
​형사가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지로는 거기에 늘어선 극도로 긴장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더니 더욱 파랗게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이건, 이 화승총은 당신 거겠죠?"

​형사는 책상 위 사냥총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것을 보자 지로는 흠칫 놀라는 듯했지만 그래도 태연하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게 왜요?"
​형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그쳤다.
​"지금까지 당신은 어딜 갔었소?"
​이 질문에 지로는 잠시 말문이 막혔으나, 이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또 말씀드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례지만 두 분, 친형제가 맞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형사의 얼굴에는 비꼬는 듯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아니요, 그렇진 않습니다."

​그 후로도 이래저래 많은 심문이 이어졌고, 경찰의의 검시가 있었고, 방 안팎의 현장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결국 지로는 끝내 그 자리에서 연행되고 말았다.

​그날 저녁, 다치바나와 나는 같은 호텔 방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시신 수습이나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우리는 호텔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너 아까 한참 안 보이던데, 어디 갔었어?"
​먼저 내가 입을 열었다. 평소 탐정 놀이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다치바나가 이런 사건에 맞닥뜨리고서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다. 오랫동안 모습을 감췄던 건 그사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칠 단서를 잡았거나 증거를 굳히기 위해 뛰어다녔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다치바나의 탐정 이야기가 듣고 싶어 그쪽으로 화제를 돌려본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나는 진지하게 다치바나의 명탐정 행세를 경청하려던 게 아니라, 이런 뻔한 살인 사건을 탐정광 다치바나가 얼마나 거들먹거리며 설명할지 내심 그게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자 다치바나는 갑자기 입을 쩍 벌리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하!"

​나는 영문을 몰라 도깨비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다치바나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혹시나 하야시의 급사로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 의심마저 들었다.
​"시골 형사치고는 재빠르게 움직여서 조사를 잘하는 것 같긴 하던데, 이 사건은 꼬치꼬치 캐기 좋아하는 시골 탐정 나리에게는 너무 간단한 사건 같아. 그래, 완전히 지나칠 정도로 너무나 단순한 사건이야."
​다치바나가 여전히 말을 이어가려던 참에, 보이의 안내를 받아 방금 소문을 올렸던 다치바나의 이른바 '시골 탐정'이 불쑥 나타났다.

​"아깐 실례했습니다. 잠시 여쭤볼 게 있어서요."
​형사가 인사를 건넸다.
​"아, 어떠십니까. 지로 군은 자백했나요?"
​내가 이렇게 묻자 형사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시치미를 뚝 뗐다.
​"그걸 당신들에게 말할 필요는 없소."
"그럼 무슨 용건으로 오신 겁니까?"
"그때의 정황을 한 번 더 자세히 듣고 싶어서요."
​형사가 그렇게 말하며 내게 다가오자, 곁에 있던 다치바나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꼬는 듯한, 또 득의양양한 알 수 없는 웃음을 띠며 형사에게 대꾸했다.

​"자세히 조사하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
​이 모욕적인 말은 명백히 형사의 화를 돋우었다.
​"뭐요? 조사할 필요가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난 직권을 가지고 조사하러 온 거요."
"조사하시는 건 자유지만, 전 그럴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어째서요?"
"당신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이 사건은 범죄가 아닙니다. 따라서 범인도 없고 범행을 조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다치바나의 뜻밖의 말에 형사도 나도 펄쩍 뛸 듯이 놀랐다.
​"범죄가 아니라고? 흠, 그럼 당신은 자살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군."

​형사의 말에는 '이 애송이가 무슨 건방진 소리냐' 하는 멸시의 울림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물론 자살도 아닙니다."
"그럼 과실사라도 된다는 거요?"
"그것도 아닙니다."
"아하하하하, 이거 참 재밌군. 타살도 아니고 자살도 아니고, 과실사도 아니다? 그럼 대체 그 남자는 어떻게 죽은 거요. 설마 당신이…."
"아니요, 전 그저 범죄가 아니라고 했을 뿐입니다. 타살이 아니라고는 안 했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군. 내 참…."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형사의 얼굴에는 여전히 다치바나를 조롱하는 듯한 비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 형사의 안색을 본 다치바나는 발끈했는지 매섭게 형사를 쏘아보며 말했다.

​"여기서 지금 제가 설명해 봤자 당신은 납득하지 못할지도 모르니, 내일 그 증거를 보여 드리죠."
"증거? 호오, 그런 진기한 증거가 있다면 꼭 한번 보고 싶군. 하지만 왜 하필 내일이요?"
"거기엔 중대한 이유가 있습니다. 내일이 아니면 보여드릴 수 없거든요. 어쨌든 내일 1시에 이곳으로 오십시오. 반드시 납득할 만한 증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설마 농담은 아니겠지. 좋소. 내일 1시라."
"하지만 만약 내일 비가 오거나 조금이라도 흐리면 안 된다고 알아두십시오."
"헤에, 흐리면 안 된다?"
"그렇습니다. 오늘처럼 맑은 날씨가 아니면 증거를 보여드릴 수 없습니다. 아, 그리고 오실 때 반드시 그 화승총을 가져오십시오."
"참 까다로운 조건이구려. 그럼 내일을 기대하도록 하고 오늘은 이만 가보겠소."

​형사는 버리는 말인지 뭔지 모를 말을 내뱉더니, 묘하게 씩 웃으며 나갔다. 형사가 나가자 다치바나는 나를 향해 중얼거렸다.
​"시골 형사 놈, 이번엔 날 의심하기 시작했군."
​비단 시골 형사뿐 아니라 사실 나조차도 다치바나의 언동이 너무나도 뜻밖이라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치바나가 말하는 증거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
​"너, 증거라니 도대체 뭘 말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 점을 묻자 다치바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 방 테이블 위에 특이한 꽃병이 있었지? 그게 바로 증거야."
​다치바나가 그렇게 확실히 말해주었음에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캐묻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나는 자신의 무능함을 한탄하며 자기혐오를 느낀 채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날 밤,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 방의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는데, 그때 창가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수상한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다음 날은 다행히도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였다.
어제 그 형사는 두 명의 순경을 대동하고 약속대로 1시 정각에 찾아왔다. 오른손에는 문제의 화승총을 꽉 쥐고 있었다. 다치바나는 형사 뒤를 따라오는 한 순경의 모습을 보더니 그쪽으로 다가가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며 웃으며 말했다.
​"간밤엔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 말을 듣자 형사는 당황하며 변명하듯 말했다.
​"사실 아직 이 호텔 안에 범인이 숨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망을 보게 했던 거요."

​알고 보니 내가 보았던 수상한 남자는 바로 이 순경이었던 모양이다.
​자, 사람들이 모두 별채에 모이자―이 안에는 호텔 주인과 보이도 있었다―오늘의 주역인 다치바나는 방 남서쪽 구석에 있는 테이블로 다가가서 그 위 물건들을 어제와 똑같이 나란히 놓았다. 형사에게 건네받은 화승총에는 미리 준비한 탄환과 화약을 장전하고 표시해 둔 원래 위치에 정확히 올려놓았고, 꽃병과 받침대도 예전 위치 그대로―이 부분은 가장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세팅했다.
​책상 위 물건들이 어제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자리에 놓이자, 이번에는 책상 앞 창문을 표시해 둔 곳까지 열어젖혔다. 그런 뒤 다치바나는 보이에게 무언가 귓속말을 했다. 보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을 나갔고 이내 사람 크기만 한 짚 인형을 안고 돌아왔다. 짚 인형에는 엉성하게 조끼가 입혀져 있었다. 다치바나는 보이에게서 인형을 건네받아 방구석 침대 위에 어제 하야시가 자고 있던 모습 그대로 눕혔다.

​준비가 모두 끝나자 다치바나는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걸로 이 방의 모습은 물건 하나하나 모두 어제 참극이 벌어졌을 때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중요한 물건 위치는 전부 표시를 해두었으니까요. 자, 저는 지금부터 어제 하야시 군이 어떻게 살해되었는지, 아니, 어떻게 가슴에 총탄을 맞았는지 그 상황을 여러분께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다치바나의 이토록 자신만만한 말을 듣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긴장했다.

​"그전에 저는 이 사건에 대해 제가 믿는 바를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경찰 분들은 지로 군을 범인으로 확신하는 듯하지만, 이는 사건의 진상을 단단히 오해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로 군뿐만 아니라 이 사건에는 하야시 이치로를 살해한 범인이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로 군에게 혐의를 둔 첫 번째 이유는 이 화승총이 그의 소유물이라는 점 때문인 것 같은데, 이는 털끝만큼도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아무리 멍청한 인간이라도 자기 총으로 사람을 죽이고 그것도 현장에 버려둔 채 도망가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겠죠. 오히려 이 사실은 지로 군의 무죄를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저 마당에 난 발자국인데, 이 역시 정반대의 증거를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나중에 조사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오가는 보폭이 똑같을 뿐만 아니라 그 보폭이 아주 좁습니다. 살인을 저지른 인간이 그렇게나 침착하게 걸어갈 수 있을까요? 혹시나 해서 어젯밤 그 발자국을 따라가 조사해 보았더니 어처구니없게도 이 호텔 뒷산의 미친 여자가 뒤쪽 생울타리를 빠져나와 마당에 숨어든 발자국으로 밝혀졌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지로 군이 사건 시간에 마침 부재중이었고 그 행선지를 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너무 자세한 이야기는 피하고 싶습니다만, 그저 보이의 말에 따르면 지로 군이 외출하자마자 2층에 머물고 있는 노신사의 따님이 외출했고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돌아왔다는 사실만 말씀해 두겠습니다. 이 일은 어쩌면 지로 군이 이미 경찰에 털어놓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러고서 다치바나는 말을 끊고 형사 쪽을 바라보았다. 형사는 고개를 끄덕여 암묵적으로 다치바나의 추측을 긍정했다. 다치바나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마지막으로 이치로 군과 지로 군이 친형제가 아니라는 사실도 의심하는 이유 중 하나인 것 같은데, 이 역시 근거로 삼기엔 너무나 빈약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설령 지로 군이 이치로 군에게 살의를 품고 있었다 쳐도 굳이 호텔같이 보는 눈이 많은 장소를 택하지는 않았을 테지요. 형제는 매일같이 뒷산으로 사냥을 갔으니 만약 해치우려 마음먹었다면 거기서 얼마든지 기회는 있었을 겁니다. 혹 재수 없게 현장을 누군가에게 들켰다 하더라도 그런 장소라면 새나 짐승 같은 걸 쏘려다 실수로 죽였다고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겠죠. 이렇게 파고들면 지로 군을 의심할 만한 이유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래도 지로 군이 살인범이겠습니까?"

​다치바나의 달변과 추리의 명쾌함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었고, 나는 마음속으로 '과연, 과연 그렇군' 하고 연신 외치고 있었다. 다치바나는 분위기를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처음엔 저도 화승총이 책상 위에 놓여 있거나 죽은 자의 조끼가 화약으로 까맣게 그을려 있었던 탓에 혹시 자살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책상 위에 있던 두 물건의 어떤 무서운 인과관계를 깨닫고는 이내 제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습니다. 다음으로 발자국이 이 사건과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므로, 이 사건에 범인이 존재한다고 상상할 수는 없게 된 셈이죠. 그렇다면 하야시 군의 죽음은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요. 범인 없는 타살 말고는 달리 생각할 방법이 없지 않을까요?"

​아아, 범인 없는 타살이라니. 그런 기묘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좌중은 침을 꼴깍 삼키며 다치바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제 상상이 틀리지 않았다면, 하야시 군은 어제 정오, 점심을 먹고 지로 군의 방에서 총알이 장전된 화승총을 들고나와 이 방으로 돌아왔고 책상에 기대어 그것을 만지작거렸을 겁니다. 그러다 문득 친구에게 편지를 써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라 총을 책상 위에 둔 채 편지를 쓰기 시작한 거죠.
 
그때 총의 개머리판이 마침 이 책꽂이 모퉁이에 닿아 있었다는 사실이 이 사건에 중대한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편지를 다 쓰고는 곧장 습관처럼 낮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웠습니다. 그 후 얼마나 지났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1시 30분이 되어 참으로 무서운 참극이 일어난 겁니다. 세상에도 신기한, 범인 없는 살인이 일어난 거죠."

​그렇게 말하며 다치바나는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자, 지금 1시 28분입니다. 이제 1~2분만 있으면 범인 없는 살인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의 진상이 명백히 밝혀지는 거죠. 책상 위 꽃병을 잘 주시해 주십시오."
​사람들은 마술사의 요술을 보듯 열두 개의 눈동자를 일제히 유리병에 쏟았다.

그때 내 머릿속에 어떤 사실이 번개처럼 스쳤다. 그렇다! 마술의 트릭을 알겠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다.
​아아, 그것은 태양과 유리병이 만들어낸 세상에서 가장 기이한 살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보라! 유리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강렬한 햇빛을 받아 불꽃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둥근 모양에 물이 가득 담긴 그 유리병을 관통한 태양 광선은 한층 강렬해져 책상 위 화승총을 향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저주의 초점을 만들기 시작했다.

​초점은 태양의 이동과 함께 조금씩 자리를 옮기더니 이제 막 점화구 정중앙에 백열의 빛을 쏘아내렸다.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총성이 방 안을 가득 울렸고 총구에서는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사람들은 일제히 시선을 침대 쪽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가슴에 총을 맞은 짚 인형이 매캐하게 연기를 내뿜으며 나뒹굴고 있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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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의 번역 및 각색 원고는 '원아나의 책 읽는 TV'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무단 도용 및 상업적 배포를 금하며, 인용 시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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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9일 토요일

(국내 최초 공개작) (소설 원고) [‘노(の)’ 자 모양의 칼자국_하야시 후보 | 명탐정 구기누키 도키치 시리즈] 텍스트 전문(全文) 수록 [일본 추리소설] 명탐정 구기누키 도키치 시리즈 #원아나의 책 읽는 TV #꿀잠오디오북

​☆원아나의 한마디☆

"완벽한 밀실 속에서 새겨진 정교한 기호, 그것은 죽은 자의 마지막 절규였을까요 아니면 범인이 남긴 오만한 예고장이었을까요? 거장 하야시 후보가 설계한 차가운 미스터리의 심장을 생생하게 마주해 보시기 바랍니다."


소설 원고 스크립트 전문(全文)

​구기누키 도키치 체포 비망록
'노(の)' 자 모양의 칼자국
하야시 후보


1
꽃 소식이 가장 빠르다는 아스카야마.
그 벚꽃 소문에 골목 목욕탕까지 북적이고, 에도 팔백팔 정(町) 사람들의 마음이 아지랑이처럼 들떠 피어오르던 안세이(安政) 3년의 봄. 아직은 쌀쌀한 비 갠 다음 날 아침, 진시(오전 8시경) 무렵이었다.

당잔(唐桟) 무명옷에 높은 나막신을 꿰어 신은 '간벤' 간지는, 산야(山谷)에 있는 숙부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침 일찍 돌아가는 상인들 무리에 섞여 우마미치에서 류센지 거리로 빠져나가려던 참에, 질퍽거리는 진흙탕을 피해 뒷골목을 따라 서둘러 걷고 있었다.

이세겐 전당포 모퉁이를 돌아, 기네야 스케사부로라는 문패가 걸린 현등 아래, 기름이 다 타버린 샤미센 스승의 집 앞까지 오자 심상치 않은 인파가 오캇피키(밀정) 간지의 시선을 끌었다.

"뭐야, 싸움이냐? 가만둘 수 없지."
별명조차 '간벤(가만둘 수 없다)'으로 불리는 그는, 입버릇처럼 "가만둘 수 없지"를 연발하며 직업의식에 이끌려 인파를 헤치고 살짝 열린 격자문 앞에 섰다.

에도의 명물인 꼬리 없는 말이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그 말끝에서도, 예사롭지 않은 사건이 터졌음을 엿볼 수 있었다.

"아니, 핫초보리의 간 형님이 아니십니까."
그때 안에서 나오며 이렇게 말한 자는, 얼마 전까지 가텐 연립주택에 있는 도키치의 수하에서 한솥밥을 먹던 가게보시 산키치였다. 

그는 도키치의 주선으로 지금은 이 일대를 관리하는 꽤 비중 있는 인물이 되어 있었으나, 수하에 있던 시절부터 간지와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물며 구역이 이렇게 멀리 떨어지고 나서는 길이 엇갈리기만 할 뿐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칠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다.

"뭐야, 싸움이냐? 가만둘 수 없지."
간지는 품 안에서 양손을 꺼내지도 않은 채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여전히 기세가 좋으십니다그려."
조소하듯 웃으며, 산키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덧붙였다.

"다름이 아니라, 자결 사건이 있어서 말입니다."
"자결? 재미없군. 그래서, 여자냐, 사내냐?"
그래도 어느 정도 호기심이 동했는지 이렇게 되물으며, 문득 간지는 격자문 안쪽 흙바닥 재떨이에 시선을 고정했다.
"피군."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습죠. 이 자리에서 배를 찌른 모양인지, 제가 왔을 때는 이미 검게 굳어가는 피바다라 발 디딜 틈도 없을 난리였소."

들어가서 검안하고 싶은 마음에 간지의 몸이 근질거렸지만, 먼저 부탁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 낌새를 눈치챘는지 옛 정을 생각해서인지, 산키치는 간지를 안으로 불러들여 부엌으로 안내했다. 가는 길에, 다다미 위로 검붉은 반점이 마루턱에서부터 이어져 있는 것을 간지는 놓치지 않았다.

부엌 널빤지 바닥에는 표주박 자루를 쥔 채 사내가 쓰러져 있었다. 곁에는 무쇠 주전자가 뒹굴고 있었고, 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탓인지 사내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물러 있었다. 

복부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널빤지 이음새를 타고 뒷문에 벗어 던진 나막신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쇠녹 같은 비릿한 피 냄새에 좁은 집 안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무명 유우키 천에 깨소금 무늬 당잔 한텐을 걸치고, 백목 삼척 띠를 아래로 묶은 옷차림이, 아무리 보아도 요시와라 유곽 주변의 건달이거나 여하튼 평범한 양민은 아니었다. 

오른편 배를 왼손으로 누른 채, 오른손은 개수대 물독 쪽으로 뻗어 있었다. 물을 마시려고 부엌까지 기어 온 듯했다. 손이 닿을 만한 곳에는 피투성이가 된 데바(식칼)가 떨어져 있었다.

"이 집 스승님의 형님 되시는 에이타라는 건달입죠. '가마꾼 에이타'라고 불리는, 질 나쁜 도박꾼이었습니다. 어차피 예정된 업보겠지만, 참으로 끔찍하게도 죽었군요."

곁에 서 있던 관리인 이세겐이 감개무량하다는 말투로 설명했다.

이 집의 주인은 기네야 스케사부로라는 나가우타(샤미센 음악) 스승인데, 그저께 초저녁에 이웃에게 집을 부탁하고 아내 오긴과 함께 고후에 있는 처가로 놀러 가 부재중이었다. 에이타의 시신이 낫토 장수의 신고로 발견된 것은 오늘 동틀 무렵으로, 흙바닥 현관의 핏물 고인 것을 보고 꼬마가 수상히 여긴 터였다.

집은 안에서 굳게 문단속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일단 자살이라는 데 산키치를 비롯한 입회인 전원의 의견이 일치했지만, 각오한 자결이라면 왜 하필 길가에 가까운 앞 현관을 택했는지, 게다가 할복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흉기가 현장에서 부엌까지 옮겨져 있는 것도 미스터리 중 하나로 꼽혔다. 입구에서 배를 찌른 인간이 칼을 쥔 채 뒷문까지 기어 왔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 법하지 않았다. 

물론 무심코 쥐고 있었다고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찌른 뒤 기운이 빠져 바로 그 자리에 떨어뜨리는 편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하고 간지는 생각했다.

어쨌든 창문에는 안에서 빗장이 닫혀 있었고, 앞뒤 문 모두 안에서 버팀목이 받쳐져 있던 사실로 보아 자살이라는 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형제라지만 사람 좋은 스케사부로와는 달리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던 에이타의 죽은 얼굴을, 코끝을 찡그린 채 간지는 날카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참하게 데인 얼굴은 목구멍 아래까지 피부가 벗겨져 있어, 언뜻 보아서는 누구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가마꾼 에이타'라는 것은 관리인 이세겐과 이웃 세입자들의 증언으로 판명된 것이었다.

오늘 아침 일찍 여느 때처럼 이 동네를 지나가던 미카와시마의 낫토 파는 아이가, 졸린 듯한 목소리로 아침 안개 속을 헤치며 이 집 앞까지 왔을 때 격자문 안에서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틈새로 들여다보니 검붉은 무언가가 현관에 질척하게 흘러나와 있었다. 격자문 안쪽에도 튄 자국이 있었다. 

틀림없는 피라고 생각한 아이는 기겁을 하여 가게보시 산키치의 초소로 달려간 것이었다.

산키치는 지체 없이 솜씨 좋은 수하들을 데리고 출동했다. 흙바닥의 피가 점점이 이어져 부엌까지 닿아 있었고, 그곳 널빤지 위에 에이타가 죽어 있었다. 고통을 견디다 못해 물을 마시러 개수대까지 왔지만, 펄펄 끓고 있던 무쇠 주전자의 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것이 낙명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듯했다.

간지는 엎드린 시신을 바로 뉘어 상처 자국을 살피려 했다. 시신의 촉감이나 피의 색깔로 보아, 아무리 못해도 스무 시간 이상은 지났다고 생각했다. 그저께 한밤중, 스케사부로 부부가 고후를 향해 출발한 뒤에 자결한 것 같았다. 사람이 없는 빈집을 스케사부로가 형인 에이타에게 부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소부터 형제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간지는 넌지시 귓등으로 들었다.

"관원 나리가 오시기 전에 시신을 움직이는 건, 간 형님, 죄송하지만 삼가 주십쇼."
산키치가 떫은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그때, 바깥쪽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웅성거리며 검시 관원이 왔음을 알렸다. 그것을 기회로 간지는 말없이 돌아섰다. 기세등등하던 그의 마음조차 어두워질 만큼, 에이타의 시신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가는 거요? 그래요, 도키치 형님께 안부나 전해주쇼."
뒤쫓듯 등 뒤로 들려오는 산키치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간지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터덜터덜 밖의 진흙탕으로 내려섰다. 하지만 나서는 길에, 그는 근처 격자문 중 하나에 작고 새로운 흠집이 나 있는 것을 재빠르게 눈치챘다.

동네에서 넌지시 무언가를 탐문한 뒤, 그는 핫초보리에 있는 도키치의 집을 향해 오로지 발걸음을 재촉했다.


2
"실례합쇼!"
드르륵, 에비토코(이발소)의 미닫이문을 연 간지는 그곳 문턱 근처에서 구기누키 도키치의 모습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간지, 어젯밤엔 산야의 숙부 댁에서 묵었느냐."

늘 그렇듯 동네 젊은이들을 상대로 아침부터 장기판을 마주하고 있던 도키치는, 간지 쪽을 힐끗 보더니 툭 내뱉듯 말했다. 요시와라 유곽에서 돈 좀 펑펑 쓰고 왔노라 허풍을 떨려던 간지는, 그만 기세가 꺾여 머뭇거렸다.

"어떻게 아셨수?"
옷자락을 내리며 그는 도키치 곁에 걸터앉았다. 도키치는 특유의 호탕한 어조로 웃음을 터뜨렸다.
"네 나막신에 붉은 흙이 묻어 있지 않으냐."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도로 공사를 하고 있는 료고쿠 쪽을 지나왔다는 건데, 그 방향은 여기서 북쪽에 해당하지. 북쪽이라 하면 바로 북곽(요시와라 유곽)이겠지만, 너와 돈은 원수지간이니, 결국 산야 숙부 댁 밥상머리에서 긴 훈계에 지쳐 빠져나왔다고밖에 볼 수 없지 않으냐. 안 그러냐, 간지. 이런 식으로 이래저래 짐작을 세워보고, 그걸 하나씩 부숴 나가다가 마지막 남은 하나에 쐐기를 박아 추리를 결정짓는 것. 네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이게 바로 이 메아카시(탐정) 장사의 요령이라는 거다."

그 무렵 핫초보리의 구기누키 도키치라 하면, 넓은 에도에서도 어깨를 나란히 할 자가 없는 대단한 수완의 메아카시(포교)였다. 어느 하타모토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정해진 수순처럼 방탕한 생활로 몸을 망친 끝에 칠 대를 이어질 절연을 당했고, 한동안 고향을 떠나 운수의 탁발승 흉내를 내며 일본 전국 방방곡곡을 유랑했다. 

그러다 이내 에도로 다시 돌아와 혈기 왕성한 무리 속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지금은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짓테와 포승줄을 쥔 대두목이 되어 있었다.

다리가 못뽑이(구기누키)처럼 휘어 있는 데서 '구기누키 도키치'라는 이명을 얻었지만, 실제로 그의 얼굴 어딘가에는 못뽑이처럼 정확하고 집요한 강인함이 드러나 있었다. 체구는 작고 왜소했지만 팔에만은 불가사의한 금강의 힘이 있어, 기둥에 박힌 못을 쑥 뽑아낸다는 것이 에도 전역에 파다한 소문이었다. 

이것이 그를 구기누키로 불리게 한 진짜 원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도키치 본인은 그 이름을 내심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 측근들은 도키치의 명치에 솔잎 모양의 작은 못뽑이 문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요즘 말로 치면 대단히 추리력이 발달한 사내로, 당시 민심을 서늘하게 했던 이키도노 고개의 삼인 살인사건이나 아사쿠사 나카미세의 외팔이 사건 등을 깔끔하게 해결하여 이름을 떨쳤다. 

그뿐만 아니라 그 무렵 에도 전역에 흩어져 있던 크고 작은 메아카시 탐정와 오캇피키 밀정 무리는 대개 한 번쯤 도키치의 방에서 신세를 진 기억이 있는 자들뿐이었다. 

사실 그들 세계에서는 그런 경험이 무엇보다 큰 자랑거리였고, 동시에 머리와 솜씨에 대한 하나의 보증 수표이기도 했다. 그래서 구역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만은 어느 문제에든 조건 없이 개입하는 것이 암묵적으로 허용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 나서서 개입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대신 부탁을 받으면 언제든 팔을 걷어붙이고 침식을 잊는 것이 예사였다. 이곳저곳에서 어려운 사건들이 끊임없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추리 하나로 쾌도난마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나고야의 금빛 샤치호코에 해가 비치지 않는 날은 있어도, 구기누키 도키치가 노려본 범인이 빗나가는 일은 없다'라는 노래가 지어져 에도 거리의 유행가가 되었고, 철모르는 자장가 소녀조차 공기놀이 장단에 맞춰 흥얼거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이 작품을 오디오북으로도 감상해 보세요^^


에도 토박이 중에서도 성미가 급하고 괄괄한 무리들이 모여 있는 핫초보리 가텐 연립주택 안쪽의 한 동이, 도키치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의 '가마를 모셔두는 곳'이었다. 

하지만 도키치에게 볼일이 있는 사람은 모퉁이의 에비토코(이발소)로 가서 "형님 계슈?" 하고 얼굴을 내미는 편이 훨씬 빠른 길이었다. 이발소 마루턱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동네 젊은이나 오래된 가게의 은퇴한 영감들을 상대로 하루 종일 장기를 두며 세상 돌아가는 잡담을 나누는 것이 도키치의 일과였다. 

그 곁에 길게 누워 가끔 더듬거리며 강담 책을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가는 것이 한가한 날 간벤 간지의 일이기도 했다. 또 한 명의 하급 관원인 '장례식' 히코베는 휴지통을 어깨에 메고 에도 팔백팔 정을 매일 바람 부는 대로 걷는 것이 타고난 도락이었다.

집에도 들르지 않고 그 길로 에비토코로 달려간 간지는, 예상대로 태평해 보이는 도키치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바싹 다가가 무언가를 귓가에 속삭였다.

"주고받는 섣달그믐의 모치떡이라 할까..."
이런 말을 하며 도키치는 딴생각 없이 장기판을 두드리고 있었지만, 간지의 이야기가 끝나자 휙 돌아보며 말했다.

"너, 그 격자문의 흠집이라는 거, 확실하냐?"
간지는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가슴팍을 툭 쳐 보였다.
"산키치 녀석이 자결로 확신하고 있다면, 이제 와서 초를 칠 이유도 없지 않겠느냐."

도키치의 시선은 상대가 두는 장기 알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간지는 서둘러 다시 귀 가까이 입을 가져다 댔다.
"음."
한마디를 남기고 구기누키 도키치는 벌떡 일어섰다. 다리가 휜 탓인지 앉아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체구가 작아 보였다.

"히코도 낮에는 돌아올 터. 그럼, 어디 한번 파헤치러 나가 볼까."
이발소 문을 나서며 그는 간지를 돌아보았다.

"소굴에 들러 배부터 채우자꾸나. 간지, 참으로 지독한 길이구나."
그리고 반 시간 후. 두 사람은 목덜미까지 진흙을 튀겨가며, 팥죽 같은 진흙탕 길을 류센지 쪽으로 걷고 있었다. 바로 뒤에는, 이것만은 한시도 떼어놓지 않는 휴지통을 둘러멘 장례식 히코베가 재미없다는 듯 꼬리표처럼 따라붙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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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에이타의 시신은 동네 초소로 옮겨졌지만, 흉사가 일어난 기네야의 집은 이웃 사람들이 인부를 고용해 통제하고 있었다. 얼굴이 널리 알려진 구기누키 도키치는 간지를 데리고 곧장 안으로 통과해 들어갔다. 입구의 군중 속에 섞인 히코베는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신이 쓰러져 있던 부엌에서는 그저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볼 뿐이었다. 곧바로 격자문으로 되돌아와서는, 냄새를 맡는 개처럼 코를 하나하나의 빗살에 바짝 대고 살피기 시작했다. 정중앙에서 바깥을 향해 오른쪽으로 네 번째 격자 빗살에, 이를테면 무명바늘만 한 가느다란 흠집이 있었는데, 새로 깎인 듯 하얀 나무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흙바닥 구석으로 쓸어 모아 재를 덮어둔 핏자국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은 도키치는, 그 손끝을 품속 종이에 찍어보며 중얼거렸다.

"음, 그저께 자시(밤 11시~새벽 1시)로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뒤, 격자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직 자리를 뜨지 못하고 서성이는 한가한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길을 비켜주며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사람과 말의 왕래조차 끊길 정도로 하루 꼬박 내린 어제 비에 꽤 씻겨 내려가긴 했지만, 그럼에도 격자 중앙의 아랫부분에 발자국으로 보이는 진흙 자국이 찍혀 있는 것이 희미하게나마 확인되었다.

도키치는 바깥쪽에 서서 손가락을 펴 그 치수를 재더니, 이번에는 격자문에서 한 자(약 30cm) 정도 떨어져서 그 지점과 격자문의 진흙 자국을 눈으로 일직선으로 연결하고는 쪼그려 앉아 옆에서 바라보았다.

"범인은..."
말을 꺼내며 간지의 귀를 잡아당겼다.
"...체구가 작은 자다. 갸름한 체형에, 키는 대충 넉 자 칠팔 촌(약 142~145cm)쯤 되려나."
새삼스레 아연실색한 채 간지는 도키치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군중 너머로 장례식 히코베의 얼굴을 발견하자, 성큼성큼 다가가 도키치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한발 먼저 초소로 가서 산키치에게 귀띔을 해 두어라. 나도 곧장 네 뒤를 따라갈 테니."
하지만 다시 집 안으로 발길을 돌린 구기누키 도키치는 부엌 널빤지 바닥에 못 박힌 듯 꼿꼿이 선 채, 천장을 올려다보며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얼어붙은 듯 천장 널빤지의 한 지점에서 그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곳, 비가 샌 얼룩에 섞여 널빤지 이음새에 남아 있는 것은 틀림없는 피 묻은 엄지손가락 자국이었다.

관원들이 물러간 뒤라 초소는 비교적 조용했다. 담뱃불로 조개탄을 묻어둔 사기 화로를 가운데 두고, 산키치, 이세겐, 그리고 죽은 에이타와 친분이 있었다는 호칸(기생집의 남자 접대부) 사쿠라이 모씨가, 흙바닥 구석에 거적을 덮어둔 에이타의 시신을 돌아보며 한창 고인의 험담을 나누는 듯했다.

그곳에 간지를 대동한 구기누키 도키치가 눈인사를 하며 들어섰다.
"산키치, 오랜만이구나."
말과 함께 그는 이미 거적을 들치고 시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일행은 새삼스레 그 주위로 모여들었다. 불쾌한 듯한 산키치의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소맷자락으로 코끝을 쓱 비비며 간지는 태연하게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고깃덩어리처럼 짓물러버린 죽은 얼굴을 한참 바라보던 도키치는, 다짜고짜 죽은 이의 소매를 이두박근까지 걷어 올리며 등 뒤의 호칸을 돌아보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이 에이타 씨의 단골이라는 게, 아마 나카노초 이와모토루의 우메노이 오이란이었지?"
"천만에요," 하고 호칸은 주먹을 치는 듯한 손짓을 한 번 하고서 말을 이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더니, 실망입니다요. 이치몬지의 우타에몬 누님과 평생을 기약한 사이잖습니까."

끝까지 듣지도 않고, 도키치는 장례식 히코베에게 명령했다.
"너, 요시와라까지 단숨에 달려가서 그 우타에몬인가 뭔가 하는 여자에게 알리고 오너라. ─그리고."
히코베의 뒤를 쫓아가며 도키치는 무언가 두세 마디 귀띔을 했다.

그 사이 간지는 시신의 옷을 풀어 헤쳐 상처 자국을 내놓았다. 정면으로 돌아선 도키치는 그 석류처럼 터진 찔린 상처를 이리저리 뜯어보고는, 몸을 더 숙여 손가락으로 상처 입구를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글씨 연습을 하듯 자신의 손바닥에 무언가 적고 있었다.

"데바(식칼)로 저질렀다고 했나?"
산키치를 돌아보며 물었다. 산키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친김에 품속에서 관아의 시말서 문건을 꺼내 보였다. 하지만 도키치는 거기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축시(새벽 1~3시) 가까운 한밤중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끓는 물을 뭣 하러 또 데워 놓았단 말이냐."
시신에서 물러서며 도키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이렇게 말하더니, 돌연 생기를 띠며 말했다.
"간지, 너 보았느냐, 저것을."
"뭘 말입쇼?"
"딴청 피우지 마라, 천장 널빤지의 손가락 자국 말이다."
"예, 봤습죠. 틀림없이 봤습죠."
"흐음." 도키치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관리인 이세겐 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흑백을 분명히 가려내야 직성이 풀리는 게 내 성미라서 말이지, 공무란 말이오. 천장 널빤지 한 장쯤 상황에 따라 뜯어낼지도 모르겠는데, 당신,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 입장은 아니겠지."
"이러쿵저러쿵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형님 일에 도움이 된다면, 예, 몇 장이든..."
이세겐은 당황하며 대답했다.

도키치는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간지, 다녀오너라."
"알겠습쇼."
대답과 함께 간벤 간지는 지척에 있는 기네야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 후 도키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여러 가지 사실을 넌지시 알아냈다. 스케사부로 부부가 가끔 개도 안 먹을 만큼 심하게 부부 싸움을 했다는 것. 죽은 에이타는 스케사부로의 친형으로 기네야 집에 자주 드나들었으나 온화한 동생과는 닮은 구석이라곤 없이 구제 불능의 악당이었다는 것.
 
에이타가 자결한 그저께 저녁 무렵, 스케사부로 부부는 아내 오긴의 친정이 있는 고후로 길을 떠났다는 것 등이었다.

에이타의 자살이 그저께 한밤중에 벌어졌다고 한다면, 밖에서 침입한 흔적이 없는 이상 스케사부로 부부가 출발할 때 에이타는 이미 빈집에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애당초 무슨 이유로 자기 배를 찔렀단 말인가.
"고후의 스케 씨네로 파발을 띄우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이세겐이 좌중의 침묵을 깼다.
"하하하하..."
돌연 도키치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일동은 아연실색하여 그를 지켜보았다.
"우선 그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요."
그는 재미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무렴, 지금 당장 알 수 있는 일이지마는, 파발을 띄울 거면 삼도천 건널 뱃삯을 쥐여 보내야 할 게야. 이봐 산키치, 너도 가텐 연립주택에서 둥지를 틀고 나간 놈 아니더냐. 똑똑히 알맹이를 봐라, 이건 데바에 찔린 상처가 아니야. 비수다. 

아홉 치 오 푼(약 28cm)짜리 예리한 칼날이란 말이다! 상처 곁에 데바를 놓아둔 것이야말로, 하하하, 이게 바로 진짜 얕은수라는 거지. 그저께부터 썩어간 불상(시신)이라는 건 피부 빛깔과 피의 끈적임만 봐도 등신이라도 알 만한 일이다. 어제는 그 비 때문에 하루 종일 발견되지 않고 넘어갔을 뿐이야."

그때 간지가 숨을 헐떡이며 돌아왔다.
"형님, 그 널빤지를 뜯어내고 다락방 채광창을 통해 도망친 게 틀림없습쇼. 먼지 위에 새빨간 발자국이 남았습디다."
"헉." 자리에 있던 자들이 놀라움의 탄성을 내뱉었다.
"흥. 대충 그런 연극일 거라 짐작한 참이다."

도키치는 새삼 사람들의 얼굴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 동네에 왼손잡이 없소?"
이세겐과 호칸이 동시에 소리쳤다.
"오긴 아주머니!"
"그럴 줄 알았지."
도키치가 웃었다.

"격자문 밖에서 찔러놓고, 문에 발을 걸치고 칼을 빼냈다는 건 격자의 흠집만 봐도 짐작할 수 있지. 그 발자국으로 보아 오긴이라는 여자는 키 넉 자 칠팔 촌의 갸름한 체형에, 여자의 몸가짐을 몰라 칼날을 아래로 향하게 쥔 탓에 왼손잡이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 칼자국이 '노(の)' 자 모양이 된 거야."

"형님!" 문가에서 큰 소리가 났다.
"히코냐, 마침 좋은 때 돌아왔다. 그래, 수미쌍관은 맞췄느냐?"
"아유, 형님도 참." 요시와라에서 돌아온 히코베는 통쾌한 듯 특유의 쓴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이치몬지의 우타에몬과 에이타 녀석은, 단골은커녕 이제 겨우 두 번 얼굴을 익힌 얄팍한 사이라 캅디다. 그보다 귀가 번쩍 뜨일 소식은, 에이타의 이두박근에..."
"'오긴 목숨'이라는 문신 말이냐."
도키치가 뒷말을 이었다.

"앗."
소리를 지르며 가게보시 산키치는 토끼처럼 구석으로 뛰어올라가 시신의 소매를 찌지직 찢어발겼다. 기네야 스케사부로의 팔은 여자처럼 하얗고 점 하나 없었다.

사람들은 경악하여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에이타와 오긴이 짜고 친 연극이었군그래. 오긴이 밖에서 남편 스케사부로를 찌른 뒤에, 에이타 녀석이 안으로 기어 들어와 안에서 모조리 문단속을 하고, 데바에 피를 묻혀 버려두고는, 뜨거운 물을 끼얹어 얼굴을 숨겼지. 그리고 네년은 천장을 통해 줄행랑을 친 것일 뿐. 뭐, 그리 멀리 도망가지는 못했을 게다. 산키치, 범인을 잡는 건 네 녀석 몫이다. 난 이만 에비토코로 돌아가마, 헤헷. 아주 시끄럽게 해드려 죄송하외다. 여러분, 수고들 하십쇼."

도키치의 꽁무니를 따라가며 간벤 간지는 히코베를 돌아보았다.
"히코, 휴지통 잊지 마라."
장례식 히코베는 눈으로만 웃으며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아, 몸도, 아녀자의 마음도 어질지 못한 욕망이 늘 문제로다. 참으로 도리에 어긋난 간계였구나."


4
후카가와 기바의 뱃사공 숙소 '지바야' 이층에서 오긴과 에이타 두 사람이 가게보시 산키치 수하의 포졸들에게 붙잡힌 것은, 이듬해 안세이 4년 늦가을, 예리한 낫 같은 달빛이 오카와(스미다강) 수면에 차갑게 빛나고 강가의 버드나무도 쓰쿠바 강풍에 비스듬히 나부끼던 무렵이었다.

관아 마당으로 끌려 나오자, 아무리 그들이라 한들 두려움에 떨며 낱낱이 자백하고 말았다.

예전부터 두 사람 사이를 수상쩍게 여겨 온 스케사부로는, 싫다는 오긴을 억지로 이끌고 잠시 에도를 떠나 있으려 고후를 향해 길을 나섰다. 하지만 한 정(町)도 채 못 가 뒤에서 쫓아온 에이타에게 덜미를 잡혔고, 남들 보는 앞에서의 말다툼이 꺼려져 자기 집으로 발길을 되돌린 것이었다. 

에이타의 억지는 늘 그렇듯 돈 요구에서 비롯되었다. 여행길에 돈이 필요한 데다, 그렇다고 거절하자니 뒤탈이 두려웠던 스케사부로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 시키는 대로 입고 있던 위아래 옷을 벗어 에이타와 바꿔 입었다.

하지만 에이타의 가세에 힘을 얻은 오긴은 한층 더 고후행을 거부했다. 평소의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지는 듯한 기분에 스케사부로는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추악한 말다툼이 심야까지 이어진 뒤, 마침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대비 속으로 오긴은 토라진 채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뒤를 쫓아 스케사부로가 격자문에 손을 얹은 순간, 비에 젖은 차가운 흉기가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모든 소리는 폭우가 삼켜버렸다.

그 후 간부와 간부(姦夫姦婦)의 행동은 구기누키 도키치의 추리와 부절을 맞추듯 정확히 일치하여, 당시의 관원도 새삼 도키치의 추리력에 혀를 내둘렀다.

> 안세이 4년 12월 관아 마당에서 내린 판결은 다음과 같다.
> 우마미치 무숙자 (馬道無宿) 에이타, 36세.
> 그대는 제수되는 오긴과 밀통하고 그 위에 오긴의 악행에 가담한 바 그 죄가 몹시 무거우므로 시중을 끌고 다닌 뒤 아사쿠사에서 효수형(獄門)에 처한다.
> 류센지초 (竜泉寺町) 오긴, 24세.
> 그대는 남편의 형 에이타와 밀통하고 그 위에 남편 스케사부로를 살해한 바 그 죄가 몹시 무거우므로 시중을 끌고 다닌 뒤 아사쿠사에서 효수형에 처한다.
> 류센지초 건물 관리인 이세야 겐베에.
> 그대는 불법을 저지른 바가 없으므로 무죄로 방면한다.

위에는 노란 하치조 비단, 아래에는 흰옷을 두 벌 겹쳐 입고 포승줄에 묶인 채, 옷깃에는 수정 염주를 걸고 입으로는 법화경 보문품을 외며 말에 실려 흔들리는 오긴의 모습이, 에이타와 함께 에도 시내를 끌려다니던 먼지 풀풀 날리는 어느 날 정오 즈음. 핫초보리의 가텐 연립주택으로 꺾어지는 모퉁이 에비토코에서, 구기누키 도키치는 간지를 상대로 비차니 장군이니 하며 장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가로이 담배 연기 고리를 내뿜으며, 도키치는 손에 쥔 장기 알로 판을 톡톡 두드렸다.
"안 그러냐, 간지. 주고받는... 섣달그믐의 모치떡이라 할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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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8일 금요일

(소설 원고) [아내에게 실연당한 남자_에도가와 란포] 텍스트 전문(全文) 수록 [일본 미스터리 소설] 완벽한 밀실 자살의 충격적 진실 | 원아나의 책 읽는 TV 꿀잠 오디오북


☆원아나의 한마디☆
​"사랑이라는 이름의 지독한 집착이 빚어낸 비극, 그 서늘한 이면을 들여다봅니다. 에도가와 란포의 밀실 미스터리—완벽해 보였던 죽음 뒤에 숨겨진 소름 돋는 진실을 지금 확인해 보시죠."


소설 원고 스크립트 전문(全文)

​아내에게 실연당한 남자 (妻に失恋した男)
​에도가와 란포 (江戸川乱歩)


​나는 그 무렵 세타가야 경찰서의 형사였습니다. 자살한 사람은 관내 S초에 사는 미나미다 슈이치라는 서른여덟 살의 남자입니다. 기묘한 이야기지만, 이 미나미다라는 남자는 자신의 아내에게 실연당해서 자살한 것입니다.

​"나는 죽고 싶어. 아니면 그 여자를 죽여버리고 싶어. 이봐, 비웃어도 좋아. 나는 내 아내 미야코에게 반해 있어. 반하고 반하고 푹 빠져있지. 하지만 그 여자는 나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아. 시키는 건 다 하고 조금도 반항하지는 않지. 하지만 요만큼도 나를 사랑하지는 않는단 말이야.

흔히들 말하잖아, 천장의 옹이구멍을 센다고. 그 여자가 딱 그래. '어이!' 하고 화를 내면 깜짝 놀란 듯이 상냥하게 굴지만, 그런 건 다 꾸며낸 것에 불과해. 나는 진심으로 미움받고 있는 거야.

그럼 다른 남자가 있느냐 하면, 그런 흔적은 조금도 없어. 나는 의심이 많아져서 꽤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지만, 그런 낌새는 미동도 없어. 태어날 때부터 얼음처럼 차가운 여자인가? 아니, 그렇지 않아. 나 말고 사랑할 수 있는 남자를 찾는다면 격렬한 정열을 뿜어낼 여자야. 그 여자는 상대를 잘못 만난 거야. 중매결혼이 서로의 불행의 씨앗이 된 거지.

결혼하고 1년 정도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어. 이런 건가 보다 했지. 2년, 3년 지나면서 점점 알게 되었어. 그 여자가 나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야. 불행하게도 내 쪽에서는 반대로 해가 갈수록 점점 더 그 여자에게 빠져들었지. 그리고 반년 전쯤부터 그 불만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해졌어. 이렇게까지 미움받을 수 있을까. 하지만 아무리 미움받아도, 나는 그 여자를 놓아줄 수가 없어. 반한 상대에게 대용품 따위가 있을 리 없잖아. 아아, 난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나는 그 여자를 죽여버리겠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인지 몰라. 하지만 죽인다고 어떻게 되겠어. 상대가 없어졌다고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나는 실연으로 죽고 말 거야.
하지만 더 이상 하루도 이대로 있을 순 없어. 그 여자를 죽일 수 없다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지 않나. 난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이런 푸념을 제가 직접 들은 것은 아닙니다. 미나미다 슈이치가 취김에 눈물을 흘리며 고래고래 소리친 적이 종종 있었다고, 미나미다의 친한 친구에게 나중에 전해 들은 것입니다. 그 친구는 목소리까지 흉내 내며 이야기해 주었는데, 뭐 이런 식이었을 것이라고 제가 상상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어느 날 밤, 미나미다 슈이치는 자신의 서재 문을 안에서 잠그고 소형 권총으로 자살해 버렸습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즉시 동료와 함께 S초의 미나미다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때는 아직 자기 아내에게 실연당해 자살했다는 사실을 조금도 몰랐기 때문에, 자살 동기를 찾아내는 데 꽤 애를 먹었습니다.

​미나미다의 아버지는 전후의 혼란기를 틈타 재산을 모은 사람으로, 미나미다 슈이치는 그 재산을 불리며 살면 그만이었습니다. 부모는 돌아가셨고 형제도 없으며, 귀찮은 친척도 없는 부러운 처지였습니다. 교제 범위도 넓지 않아 부부가 함께 여행을 하거나 영화, 연극을 보는 정도가 낙이어서, 이웃에서는 정말 금슬 좋은 행복한 부부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변고를 알리는 연락이 온 것은 밤 9시 반이었습니다. 달려가서 부인 미야코 씨에게 물어보니, 그때 하녀는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오후에 센주의 본가로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남편은 충치가 아프다며 코토우라라는 근처 치과의원에 갔다가 돌아왔나 싶더니 그대로 양식 서재에 틀어박혀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는 겁니다. 부인은 무료해서 거실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서재 쪽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났답니다. 밖의 큰길에서 오토바이 등의 폭음이 자주 들려와서 이상한 소리에는 익숙해져 있었지만, 방금 것은 왠지 느낌이 달랐다는 것이죠. 게다가 남편이 매일 몹시 우울해하던 것도 마음에 걸려, 서재로 가서 문을 열려고 했지만 안에서 잠겨 있었습니다.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이 없었죠. 예비 열쇠 같은 것은 만들어 두지 않아서, 밖으로 돌아가 유리창 너머로 들여다보니 남편이 위를 향해 쓰러져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창문 유리를 깨고 서재로 들어가, 책상 위에 있던 열쇠로 문을 열었습니다.

미나미다 슈이치는 검은색 양복을 입고 위를 향해 쓰러져 있었습니다. 입과 뒤통수가 피투성이라서 숨이 끊어졌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경시청 감식과 의사가 조사했지만, 미나미다는 소형 권총의 총구를 입속에 넣고 발사한 것이었습니다. 뒤통수가 깨져서 끔찍한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관통 총상이니 권총 탄환이 어딘가에 있어야만 합니다. 실내를 조사해 보니, 그 탄환은 한쪽 회반죽 벽에 깊이 박혀 있었습니다. 미나미다는 그 벽 앞에 서서 자살한 것입니다. 유서 같은 것은 아무리 찾아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권총의 출처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허가를 받고 소지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전쟁 직후 미나미다의 아버지가 미국인에게 받은 것으로, 총알과 함께 책상 서랍 깊숙이 넣어둔 채 부인 등은 잊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밀실 안에서의 자살이고, 권총은 미나미다가 오른손에 쥐고 있었으므로, 이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자살이 틀림없다고 판단되었습니다.

​아무리 의심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라도 경찰의 일이 그걸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살 동기를 조사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부인에게 그것을 묻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사건 다음 날, 조금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미나미다 집의 거실에서 마주 앉아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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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코 씨는 미나미다가 그토록 사랑한 것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매력적인 여성이었습니다. 나이는 스물여덟 살, 미나미다가 깡마른 체구에 키가 작은 것에 비해, 훤칠한 키에 풍만한 몸매를 가진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저는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깊이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고인의 친구들을 알아내어 차례로 접촉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말씀드린 친한 친구를 찾아내어, 미나미다의 기묘한 실연 이야기를 듣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부인을 만나 교묘하게 말을 이끌어가 보니, 부인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남편의 그런 마음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으로서는 그 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고 합니다. 남편은 정신이상자가 아니었겠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미야코 씨가 이른바 차가운 여자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여자에게 냉대를 받는다면 미나미다가 괴로워한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이로써 자살 동기는 추정되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일로 자살하지 않겠지만, 병적인 신경의 소유자라면 그런 마음을 먹지 말란 법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일단락이 난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결론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아내에게 실연당해 자살했다는 것은 인간 심리의 하나의 극단적인 케이스로서 소설에나 쓰면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 형사 생활을 해온 경험에서 우러나온 '감'이라는 녀석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이 경찰의 손을 떠난 뒤에도, 저는 여가를 이용해 좀 더 깊이 파헤쳐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사실 그런 식으로 남몰래 공을 세우려 하는 일은 금지되어 있지만, 여가를 이용해 개인 자격으로 하는 것이라면 상관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미나미다 집 근처에서 탐문 수사를 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미야코 씨와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찾아가서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아무것도 끌어낼 수 없었습니다.

​미야코 씨는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넓은 집에서 하녀와 단둘이 검소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물론 미나미다의 재산은 미야코 씨 차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 액수는 3천만 엔을 밑돌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었습니다.

​저는 문득, 미나미다가 자살 직전에 코토우라라는 근처 치과의원을 찾아갔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그곳을 방문해 보았습니다. 

사건 당시에도 "자살할 사람이 치아를 치료한들 무슨 소용이람" 하고 생각했기에 미야코 씨에게 물어보았으나, 이 부부는 둘 다 치아가 좋지 않아 수시로 근처 코토우라 치과의원을 다녔고, 미나미다는 자살하기 전에도 충치가 심하게 아파오기 시작해서 어쨌든 그 통증을 멎게 하려고 치과로 달려간 것일 거라고 했습니다. 

치과에 갔을 때는 아직 충분히 결심이 서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서재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끝내 자살할 마음을 먹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미묘한 점은 상식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법입니다.

​코토우라라는 치과의사는 미나미다 집 뒤편인 T초의 큰길에 있었습니다. 걸어서 3분 정도 거리입니다. 코토우라 의사는 1년 전쯤 부인과 사별하고 자식도 없이, 출퇴근하는 간호사와 하녀하고만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마흔 살 정도의 다부진 남자로, 눈썹이 짙고 뼈대가 굵은 가무잡잡한 얼굴에 키도 크고 어깨도 딱 벌어져 스포츠로 단련한 듯한 듬직한 체격입니다. 물어보니 미나미다가 자살 직전 충치 통증을 멎게 해달라며 찾아온 것은 사실인데, 치아 통증뿐만 아니라 왠지 몹시 우울한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 후 3개월 정도, 저는 집요하게 이 사건에 매달렸습니다. 고인의 교우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방면을 조사했습니다. 코토우라 치과의원에 드나드는 약장수나 의료기기 상점까지 찾아갔을 정도입니다.

그러자 K라는 의료기기 상점 점원에게서 이상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사건 직후, 코토우라 의원의 진료실에 있는 수술용 의자의, 끼워 넣게 되어 있는 머리받침만 한 개 시급히 가져오라는 주문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럼 헌 것과 교환했느냐고 물으니, 헌 것은 약품으로 더러워져서 버렸다고 하길래 교환하지 않고 새것만 건네주었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저는 이 사소한 사실에 매달렸습니다. 매달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코토우라 의사 몰래 하녀에게 낡은 머리받침을 버린 적은 없는지, 쓰레기통에 그런 것이 들어 있지 않았는지 따져 묻고, 또 그 근방을 도는 쓰레기차 인부를 붙잡아 캐물으려 하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조사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낡은 머리받침을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코토우라 의사가 그 낡은 머리받침을 불태워 버린 것은 아닐까 상상했습니다. 수술용 의자의 머리받침을 왜 불태워 버려야만 했을까.

저는 하나의 가설을 세워두고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엉뚱한 가설이지만, 거기에 이 사건의 맹점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코토우라 씨가 머리받침을 불태워버렸다는 상상은 이 저의 가설과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미야코 씨도 종종 코토우라 의사에게 치아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저는 한 가지 의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미야코 씨는 코토우라 의사에게서 처음으로 진정 사랑할 수 있는 남성을 발견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은 공모하여 미나미다를 살해하기에 이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진료용 의자의 머리받침을 새것으로 바꿨다는 사실이 이 생각을 강력하게 뒷받침했습니다.

​저는 코토우라와 미야코 씨의 신변을 더욱 집요하게 맴돌았습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 나누고 있는 방 밖에서 엿들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미나미다가 죽은 지 정확히 석 달째 되던 날, 두 사람은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제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미야코는 미나미다에 대해 극도로 조심스럽게 행동했습니다. 미나미다가 살아있을 때는 코토우라와 끝내 육체적인 관계에 이르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간호사의 눈을 피해 속삭임과 애무만으로 참으면서, 그 참아내는 괴로움 때문에 비로소 이 완전 범죄라고도 할 수 있는 살인을 계획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3천만 엔의 상속이라는 것도 강한 동기였습니다.

​코토우라는 왜 진료용 의자의 머리받침을 불태워버렸을까. 그 머리받침은 권총 탄환에 꿰뚫려 핏자국으로 얼룩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서운 타살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범인이 피해자의 입속에 권총의 총구를 넣고 발사한다는 것은 전혀 불필요한 일이며, 일반적인 경우 거의 불가능한 방법입니다. 따라서 입속에 권총을 쏜 시체를 본다면 누구나 자살로밖에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허점을 찌른 것이 이 범죄였습니다.

​치과의사는 여러 가지 금속 기구를 환자의 입속에 넣고 치료합니다. 그때 환자는 대개 눈을 감고 있기 마련입니다. 설령 눈을 뜨고 있다 하더라도, 시야를 벗어나 아래쪽에서 권총을 다가간 뒤 그 끝을 입속에 넣는다면, 역시 치료용 기구려니 생각하고 환자는 가만히 있을 것입니다. 그때 재빨리 발사하면 되는 것이었죠.

​그때 간호사는 이미 집으로 돌아간 뒤였고, 하녀는 핑계를 만들어 심부름을 보낸 상태였습니다. 또한 문제의 권총은 미야코가 남편의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꺼내어 미리 코토우라에게 건네두었던 것입니다.

권총 탄환이 미나미다의 두개골을 관통하고 머리받침 나무를 뚫어 바닥에 떨어진 것을, 나중에 미나미다 집 서재의 벽에 박아 넣었다고 합니다. 부드러운 것을 대고 망치로 두드렸던 것입니다.

​이 범죄에는 또 하나 유리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미나미다 집과 치과의원은 앞으로 돌아가면 3분이나 걸리지만, 뒷문은 풀이 무성한 공터를 사이에 두고 엎어지면 코 닿을 데 마주 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코토우라와 미야코는 진료실의 시체를 어둠을 틈타 뒷문으로 미나미다 집 서재로 옮겼고, 지문을 닦아낸 권총을 시체의 손에 쥐여준 뒤 예비 열쇠로 문을 잠갔습니다. 열쇠는 정말로 하나밖에 없었지만, 치과의사이다 보니 미야코에게 본을 뜨게 해서 예비 열쇠를 주조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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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소설 추천] 아내에게 실연당한 남자 - 에도가와 란포 | 완벽한 밀실 자살의 충격적 진실 (원아나의 책 읽는 TV) 꿀잠 오디오북 (스포일러 주의)

아내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철저히 외면받는 남편. 끝없는 짝사랑과 시련의 고통 속에서 그는 자신의 서재에서 권총을 입에 물고 자살한 채 발견됩니다. 완벽한 밀실 자살로 종결될 뻔한 사건 뒤에 숨겨진 소름 돋는 진실은 무엇일까요? 일본 추리 소설의 거장 에도가와 란포의 명작 단편을 몰입감 넘치는 오디오북으로 만나보세요.



안녕하세요! '원아나의 책 읽는 TV'입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작품은 일본 추리 미스터리 문학의 아버지, 에도가와 란포의 단편 소설 『아내에게 실연당한 남자』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단 한 줌의 애정도 받지 못하고 겉도는 남편의 절망적인 심리 묘사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초반부터 독자를 숨 막히는 긴장감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아내를 향한 광적인 집착, 그리고 스스로 OO할 수밖에 없었던 남자의 처절한 고백이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묘미는 평범한 치정극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상식을 뒤엎는 기발한 트릭과 소름 돋는 반전, 그리고 치밀한 심리 묘사가 어우러져 에도가와 란포 특유의 기괴하고도 매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오디오북으로 직접 감상해 보세요! 활자로 읽는 것을 넘어 생생한 목소리로 들을 때 그 서늘함이 배가 됩니다.

 

■ 줄거리

세타가야 경찰서 형사였던 화자는 한 남자의 자살 사건을 회상합니다. 죽은 남자는 S 상회 이사인 38세의 미나미다 슈이치. 그는 아름다운 아내 미야코를 병적으로 사랑했지만, 철저히 외면당하는 '실연당한 남편'이었습니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그는 결국 자신의 서재에서 문을 안으로 잠근 채, 입안에 권총을 쏘아 자살합니다.

​아내 미야코의 증언, 사라진 유서, 치과 치료 직후의 사망 등 여러 정황 속에서도 사건은 명백한 밀실 자살로 결론 내려집니다. 하지만 담당 형사였던 화자는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직감으로 이 사건을 끈질기게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이하는 스포일러 주의해주세요)


​형사는 미나미다가 죽기 직전 방문했던 이웃 치과 의사 고토우라를 파헤칩니다. 그리고 치과 진료 의자의 '머리 받침대'가 사건 직후 새것으로 교체되었다는 사소한 사실에서 충격적인 진실을 발견합니다. 


남편의 집착에 시달리던 아내 미야코가 고토우라와 사랑에 빠져 치밀한 살인극을 공모했던 것입니다. 진료 중 입안에 총을 쏘아 자살로 위장하고, 복제한 열쇠를 이용해 시신을 서재로 옮겨 완벽한 밀실을 만들어낸 섬뜩한 전말이 밝혀집니다.


■ 오디오북 스크립트 (일부 발췌)

"난 죽고 싶다. 그게 아니면 그녀를 죽여버리고 싶다. 날 비웃으라지. 난 마누라인 미야코에게 푹 빠졌어. 빠지고 또 빠지고 홀딱 빠져 있어. 하지만 아내는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아. 모든 고분고분하게 듣고 반항은 전혀 하지 않지. 하지만 손톱만큼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 아 난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아내를 죽여버릴까 하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 이대로는 단 하루도 더 못 견뎌. 아내를 죽일 수 없다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잖아."

​이런 두서없는 넋두리를 직접 들은 것은 아닙니다. 미나미다 슈이치가 술에 취해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고래고래 떠들어 댄 일이 종종 있었다고 나중에 그의 친구들이 말하더군요... 어느 날 밤, 미나미다 슈이치는 서재 문을 안에서 잠근 채 소형 권총으로 자살을 했습니다.


(이하는 스포일러 주의해주세요)

​"미야코 씨는 고토우라 의사에게서 난생처음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남성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 아닐까. 끝내는 두 사람이 공모를 해서 미나미다를 살해하기에 이른 것이 아닐까..."

잘 아시다시피 치과 의사는 여러 가지 금속 기기를 환자의 입안에다 넣고 치료를 하지요. 그때 환자들은 대부분 눈을 감게 마련입니다... 시선의 각도에서 벗어나 아래쪽에서 권총을 가까이 가지고 간 다음, 총 부리를 입안에 넣는다면 역시 치료 기기라고 생각을 하고 환자는 그냥 얌전히 있겠지요. 그때 재빨리 발사를 하면 됩니다.


경찰의 예리한 추리와 기발한 살인 트릭의 대결!

사건의 전말과 디테일한 심리 묘사를 오디오북으로 직접 감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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