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30일 목요일

(국내 최초 공개_소설 원고) [선인장의 꽃_야마모토 기타로] 텍스트 전문(全文) 수록 [일본 미스터리 소설] 야마모토 기타로 '선인장의 꽃' - 남편의 서재에서 발견된 소름 돋는 진실... | 원아나의 책 읽는 TV 오디오북 추리소설 전문(全文)

♡원아나의 한마디♡
​"우연히 배달된 한 통의 연서와 핏빛 선인장, 그 속에 담긴 지독한 연모의 끝은 어디일까요? 평온했던 일상이 남편의 서재에서 발견된 낡은 일기장 하나로 무너져 내릴 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가장 잔혹하고도 슬픈 기만의 진실입니다. 즐겁게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추리소설 
선인장의 꽃 - 소설 전문(全文)
야마모토 기타로

(1)
시즈에는 북쪽의 이 작은 온천 마을로 요양을 온 뒤부터, 해 질 녘 호숫가를 산책하는 것을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언덕 너머 동해 바다로 해가 지면 호수면은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고, 반대편 기슭의 불빛은 더욱 선명해졌다.

해가 뉘엿뉘엿 저문다. 갈대 스치는 소리, 둔탁한 노 젓는 소리, 푹신한 모래흙을 밟는 펠트 슬리퍼의 감촉. 이 모든 것들이 요양 중인 시즈에에게는 유난히 쓸쓸하게 다가왔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처지와 잘 맞아떨어져 마음에 드는 고독이기도 했다.

시즈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듯 살그머니 이층으로 올라갔다. 책상 앞에 앉아 가벼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창문 가득 검게 드리워진 버드나무 잎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책상 위에는 막 도착한 두 통의 편지가 있었지만 시선만 잠시 던졌을 뿐 손을 대지는 않았다. 

그녀는 방금 뜯은 약봉지와 컵에 담긴 물을 지그시 응시했다. 유리잔 너머로 찰랑이는 물을 보고 있자니, 마치 날 선 칼날처럼 섬뜩하고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자살!'
문득 그런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이 약이 독약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자, 피를 토하며 괴로워하는 자신의 모습이 환각처럼 눈앞에 아른거렸다.

시즈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음속에 검은 호수가 끝없이 펼쳐지고, 갈대 스치는 소리와 둔탁한 노 젓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기 때문이다.

"자살, 자살."
시즈에는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다시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들었다. 유서를 쓰기 위해서였다.
글을 다 쓰고 봉투에 넣자, 마치 큰일을 끝마친 것처럼 온몸에 피로가 몰려왔다.

그제야 책상 위에 있던 편지 두 통을 집어 들었다.
한 통은 새어머니가 보낸 것이었고, 다른 한 통은 새하얀 가로형 편지 봉투였다. 발신인 이름도 없었고 글씨체도 낯선 것이었다.

>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까지 제가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릅니다. 편지를 보낸다는 건 저라는 존재를 당신 눈앞에 드러내는 것과 같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이 마음속 기쁨을 더 이상 혼자서만 간직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호숫가 작은 온천 마을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었다는 그 기쁨을…….

> 앞으로 당신에게 편지 쓰는 일을 제 일과로 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기쁨이 당신을 불쾌하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같은 요양객 처지로서,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위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

> 방금 전까지 자살을 생각했던 시즈에의 마음속에 이 편지는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볼까 하던 찰나, 언니가 방으로 올라왔다.

"언제 들어왔어? 호숫가에 너무 오래 있으면 안 좋을 것 같아서 걱정했잖아."
언니는 창문을 조금 열어 환기를 시키고, 벽장에서 이부자리를 꺼내며 말했다.

"내일 이키리 해변에 같이 안 갈래? 형부도 쉬는 날인데, 거기 꽤 괜찮아."
시즈에는 편지를 슬그머니 책상 밑으로 숨기며 대답했다.

"응, 좋아. 하지만 저번처럼 또 무리하면……."
"에이, 이젠 괜찮아. 병도 많이 좋아졌고, 거긴 자동차도 타고 갈 수 있으니까."
"형부는 오늘 밤에 안 와?"

언니는 방 한구석에 이부자리를 깔고 화로 곁에 앉으며 탁상시계를 힐끗 보았다.
"아침에 가나자와에 갔으니까 8시쯤 올 거야. 이제 올 때가 됐네."

마침 정거장에 전차가 도착했는지,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어지럽게 집 앞을 지나갔고 이내 다시 고요해졌다. 방금 전차로 돌아온 듯, 형부 특유의 조용한 헛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2층으로 올라왔다.

"다녀오셨어요."
"다녀왔어."
형부가 옷 갈아입는 것을 도우며 언니가 말했다.
"내일 시즈에랑 이키리 해변에 데려가 줘요."

"그것도 좋지. 하지만 낮에는 꽤 덥지 않을까? 그나저나 시즈에, 너 야요이 사진관에서 사진 찍었다며?"
"네, 오늘 그 앞을 지나가다 보니 갑자기 찍어보고 싶어져서요……."

"오늘 전차에서 사진관 아저씨를 만났는데, '처제분 사진을 찍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라며 엄청 좋아하시더군. 근데 이 동네 사진관 실력은 영 별로라서 말이야."
형부 내외가 저녁을 먹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시즈에는 책상 밑에서 다시 편지를 꺼냈다.

별 내용 없는 편지였지만, 그녀에게서 자살할 기회를 빼앗아 버렸다. 다시 읽어보니 병마와 싸우는 이의 쓸쓸함이 묻어나면서도, 삶의 기쁨을 노래하는 듯한 활기가 느껴졌다. 

무엇보다 이 편지의 주인이 대체 누구일까 하는 호기심이 가장 강하게 일었다.


(2)
다음 날은 언니 부부와 함께 이키리 해변으로 향했다. 바다 없는 도시인 교토에서 자라 바다라고는 오사카 항구밖에 가본 적 없는 시즈에에게 끝없이 펼쳐진 동해 바다는 너무나도 웅장했다. 

초여름의 눈부신 햇살이 바다 위로 부서지고, 수평선 너머는 잿빛으로 아스라이 물들어 있었다. 그 잿빛 안개 속에서 검고 거대한 파도가 괴물처럼 밀려와 화를 내듯 해안가를 세차게 때렸다.

시즈에의 마음은 또다시 알 수 없는 고독에 사로잡혔다.

돌아오는 길에는 자동차를 탔다.
햇빛에 반짝이는 갯바위,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어둡고 희미한 잿빛 수평선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책상 서랍 속에는 그녀의 유서와 낯선 이가 보낸 편지가 나란히 들어 있었다.

'그렇게 거창하게 적어놨지만, 그저 한순간의 변덕으로 장난삼아 보낸 거겠지.'

애써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하면서도, 이따금 서랍을 열어 그 편지를 바라보곤 했다. 딱히 큰 기대를 건 건 아니었지만, 현재 그녀의 삶에 유일한 자극이 되어주는 이 익명의 남자가 이대로 영영 사라져 버리면 무척 아쉬울 것 같았다.

그러나 며칠 뒤, 시즈에는 책상 위에서 또다시 보낸 이의 이름이 없는 하얀 봉투를 발견했다.

> 저는 매일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것이 요즘 제가 하는 일의 전부입니다. 세상에 나서기 부끄러운 몸을 가진 저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죽음을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죽을 용기조차 없어 그저 관성처럼 목숨을 부지한 채 이 온천 마을로 도망쳐 왔습니다. 

교토에서 내려올 때 책을 잔뜩 가져왔지만 아직 3분의 1도 읽지 못했습니다. 책을 읽을수록 고통만 커질 뿐,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더군요. 이 조용한 마을에도 점점 외지인들이 밀려들고 있습니다. 

저는 또 수없이 호숫가에 서서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살아있었기에 당신이라는 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살아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뼈저리게 느낍니다. 

당신의 병이 하루빨리 낫기를 기도하면서도, 완치되는 날이 곧 당신이 이 마을을 떠나는 날이라고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옵니다. 그러나 그날이 오더라도 저는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제 마음속에 새겨진 당신의 모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요.

목숨 걸고 몰두할 그 어떤 것도 없던 시즈에에게, 이 익명의 편지는 엄청난 감정적 자극제였다.

원고지에 펜으로 조그맣게 적어 내려간 글씨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획 하나하나에서 왠지 모를 그리움마저 느껴졌다. 시즈에는 무심코 편지지를 코끝에 가져다 댔다. 

종이와 잉크 특유의 은은한 향기가 났다. 봉투를 다시 살펴보았다. 정갈한 글씨체로 시즈에의 이름이 제법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낯선 사람의 손에 쓰인 내 이름. 그 사실이 마치 숙명이나 인연 같은 강력한 끈으로 자신과 이 남자를 이어주고 있는 것만 같아, 묘하게 매혹적이면서도 불안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봉투 왼쪽 위에 반듯하게 붙어 있는 우표에는 '야마시로 우체국'이라는 소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3)
다음 날, 시즈에는 혼자 야마나카 온천 쪽으로 가 보았다. 구로타니 다리에서 단교 계곡을 따라 고오로기 다리까지 올라갔다. 바위에 부딪히며 거칠게 흐르던 물살이 곳곳에서 깊은 웅덩이를 이루며 잔잔한 소용돌이를 치고 있었다. 

그곳에는 등이 까만 작은 민물고기들이 평화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바위 위에 우두커니 서서 그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또다시 죽음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러나 그 허무하고 공허한 죽음의 풍경 한가운데, 미지의 편지 속 남자의 실루엣이 환각처럼 또렷하게 떠올랐다.

돌아오는 길, 야마시로 선 전차를 기다리며 시즈에는 야마시로 거리를 거닐었다. 역 앞 도로를 두 블록 정도 걸었을까, 길 오른편에 '야마시로 우체국'이 보였다. 익명의 편지는 항상 이곳 소인이 찍혀서 왔다. 

가타야마즈에도 우체국이 있는데, 그는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편지를 부치는 걸까. 그런 가벼운 의문을 품으며 안 그래도 느린 걸음을 더 늦췄을 때, 흰 페인트로 '야마시로 우체국'이라 적힌 낡은 문이 안쪽에서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계단 위로 젊은 남자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즈에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몹시 당황한 채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다음 날 저녁, 평소처럼 호숫가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시즈에의 책상 위에는 여지없이 하얀 봉투가 놓여 있었다.

> 저의 첫 편지를 받으시고 당신은 어떤 기분이셨을까요……. 굳이 여쭤보지 않아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 당신은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매던 제 삶에 한 줄기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오랜 시간 캄캄한 밤에 갇혀 있던 사람이 갑자기 빛을 발견했을 때 느끼는 환희, 그것이 저로 하여금 첫 편지를 쓰게 만들었습니다. 

제 마음에 켜진 작은 불씨는 점점 더 밝아졌습니다. 세상을 원망하고 제 처지를 비관하던 깊은 절망에서 벗어나, 살아있다는 기쁨마저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제 착각이자 덧없는 기쁨에 불과했습니다. 당신이라는 빛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제 고통 또한 커진다는 사실을, 미련한 저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 아침에 눈을 뜨나 밤에 잠자리에 드나, 당신에게 부칠 편지를 일기장에 적어보는 것이 제 유일한 일과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저는 제 모습을 도저히 당신 앞에 드러낼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차라리 당신을 몰랐더라면 더 행복했을 텐데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 저는 지금 그림 한 점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그림이 완성되면 당신께 보내드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편지를 쓰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 편지를 다 읽은 시즈에는 깊은 상실감에 빠졌다. 사랑이나 연정 같은 감정과는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쓸쓸함이었다. 

어느새 시즈에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미지의 남자는 점차 뚜렷한 형태를 갖추며 그녀의 영혼에 깊숙이 각인되고 있었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시즈에는 또다시 창문 너머 어둡게 우거진 버드나무 잎을 우두커니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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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시즈에가 교토로 돌아갈 날이 다가왔다. 병도 꽤 호전되었고, 이런 외딴곳에 계속 혼자 두면 오히려 우울증이 깊어질 수 있다는 형부의 권유 때문이었다.

교토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시즈에는 딱히 기쁘지도, 이 마을에 미련이 남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남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그 정체만큼은 꼭 알고 싶었다.

하지만 형부나 언니에게 캐묻기도 민망했고, 각지에서 요양객이 몰려드는 온천 여관 거리에서 그 사람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두 번째 기차편으로 떠나기로 한 출발 전날 오후 3시경, 작은 소포와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포장을 뜯어보니 얇은 액자에 담긴 8호 크기만 한 유화 한 점과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 내일 드디어 이곳을 떠나신다고 들었습니다. 교토로 돌아가시면 부디 건강 잘 챙기시고 행복하게 지내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그림을 보냅니다. 보시다시피 '선인장'을 그린 것입니다. 이 선인장은 칙칙하고 가시가 돋친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꼭대기에 피어난 작은 꽃은 핏빛처럼 새빨간 색을 띠고 있습니다.
 
당신과 작별하는 이 마당에 왜 하필 선인장 꽃을 그렸는지, 아마 평생 제 입으로 그 이유를 말씀드릴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언젠가는—제가 세상을 떠난 뒤일지도 모르지만—당신도 그 의미를 알게 되실 날이 올 거라 믿습니다.

> 동봉한 『다쿠보쿠 시집』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당신께 선물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모쪼록 건강하시고, 행복한 삶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시즈에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무척 몸이 아픈 사람인 게 틀림없다.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나서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다쿠보쿠 시집을 훌훌 넘겨보았지만 인쇄된 글씨 외에 어떤 메모도 없었다. 그림에도 서명이 없었다. 봉투 우표에는 늘 그렇듯 '야마시로 우체국' 소인과 함께 6월 18일이라는 날짜가 찍혀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시즈에는 전차를 타고 가타야마즈를 떠났다. 차창 밖으로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호수와 작은 온천 마을이 스쳐 지나갔다. 저 마을 어딘가에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차를 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5)
교토로 돌아오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 형부에게서 편지가 왔다. 편지 내용 중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 ……처제가 돌아가고 나서 좀 황당한 일이 있었어. 그때 처제 사진 찍었던 야요이 사진관 있지? 그 사진관 아저씨가 처제 사진을 찍은 걸 엄청 자랑스러워했잖아. (본인 딴에는 아주 마음에 드는 걸작이었던 모양이야.) 그걸 작은 명함 크기로 인화해서 바깥 진열장에 걸어뒀대. 알다시피 사진관이 골목 안쪽에 있어서, 자기네 집 앞 골목 모퉁이에 있는 호라이 여관 벽면에다가 진열장을 달아놨었잖아.

> 그런데 처제가 떠나고 3일째 되던 아침에, 아저씨가 확인해 보니 처제 사진만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거야. 애초에 진열장이라는 게 작은 유리 상자 같은 거라 쇠장식만 살짝 건드려도 쉽게 열리는 구조였다더군. 

아저씨가 사색이 돼서 우리 집까지 달려와 굽신거리며 사과하고 갔어. 하필 사진을 도둑맞았다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겠지만, 이 시골 동네에 흉악한 범죄자 같은 건 없으니 아마 근처 호수에서 일하는 젊은 어부 녀석이 예쁜 여자 사진을 보고 탐이 나서 훔쳐 간 거겠지. 필시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을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나…….

> 시즈에는 그 사진을 훔친 사람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처음엔 살짝 불쾌했지만, 금세 자신을 그토록 절절하게 그리워하는 그 낯선 남자가 한없이 가엾게 느껴졌다. 만약 그의 주소만 알았다면 "그 사진은 그냥 가지세요"라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로부터 2년이 흘렀다. 시즈에가 결혼한 지는 1년이 다 되어갔다.
온천에서 돌아와 본가에서 지낸 1년, 그리고 결혼 후의 1년. 그 2년 내내 미지의 남자는 시즈에의 마음속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의 상상 속에서 남자는 여러 모습으로 변주되었다. 기침 발작을 일으키며 힘겹게 붓을 쥐고 있는 모습, 어스름한 호숫가에 쓸쓸히 뒷모습을 보이며 서 있는 모습, 때로는 불편한 다리를 목발에 의지해 걷는 모습이기도 했다.

시즈에의 결혼은 아주 구식이었고, 다분히 희생을 강요받은 정략결혼이었다. 결혼식 날 밤, 아직 병이 완전히 낫지도 않은 몸으로 차 뒷좌석에 흔들리며 앉아 있을 때, 그녀의 눈앞 차창 유리에 미지의 남자 얼굴이 아른거렸다. 시즈에는 그 환영을 향해 희미하고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라스마의 고풍스러운 다다미 집에서 히가시야마의 화려한 서양식 저택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시즈에는 자신의 방에 항상 '선인장 꽃' 그림을 걸어두었다. 세월이 흐른 탓인지 그림 속 선인장은 몹시 칙칙하게 변색되어 그 기괴한 모습이 한층 더 흉측해 보였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꼭대기에 핀 단 한 송이의 작은 붉은 꽃은 갈수록 선명한 핏빛을 띠며 섬뜩하리만치 아름답게 도드라져 보였다.

결혼식 날 밤, 차창 유리에 비쳤던 낯선 남자의 얼굴은 그 선인장 속에 고스란히 숨 쉬고 있었다.

가끔 하녀들은 시즈에가 선인장 그림을 빤히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모습을 목격하곤 했다.


(6)
남편은 방금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서재를 나섰다. 그가 어딜 가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지만, 시즈에는 남편의 행적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저 만사가 귀찮은 듯 거실 의자에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가을의 붉은 서쪽 햇살이 커튼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카펫 위를 비추고 있었다.

무심코 남편의 책상을 쳐다보니 노트 한 권이 눈에 띄었다. 남편의 개인 장서 목록표였다. 아무 생각 없이 페이지를 훌훌 넘기던 시즈에의 시선이 한곳에 못 박힌 듯 멈췄다. 종이 위에는 '다쿠보쿠 시집'이라는 글씨가 활자판처럼 튀어나와 보였다. 게다가 그 '시집' 항목에는 빨간 줄이 찍 그어져 있었고, 비고란에는 같은 붉은 잉크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S씨에게 선물함. K 온천에서. 쇼와 2년 6월 18일.]

순간 시즈에의 텅 빈 마음은 거대한 바위에 짓눌린 듯한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창백했던 얼굴에 뜨거운 피가 몰렸다.

시즈에는 미친 듯이 노트 페이지를 넘겼다. 목차에서 남편의 일기장 위치를 찾으려 했지만 장서 목록에 일기장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녀는 목록을 움켜쥔 채 남편의 서재로 뛰어 들어가 책장 칸칸을 이 잡듯 뒤졌다. 

고급 양장본 책등에 새겨진 금박 글씨들이 초조한 시즈에의 눈앞에서 어지럽게 번쩍거렸다. 구석에 있는 작은 책장에 자물쇠가 걸려 있었지만, 열쇠는 책상 서랍에서 금방 찾아냈다.

제일 아래 칸 구석에서 열 권 남짓한 노트 뭉치를 발견했다. 펼쳐보니 남편의 일기장이 맞았다. 표지에 적힌 날짜 순서대로 한 권씩 꺼내 보았는데, 일기는 9월까지만 정리되어 있었다. 

1월, 2월 순으로 차근차근 넘겨 보았다. 시즈에의 가슴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거칠게 요동쳤고, 일기장을 넘기는 손끝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5, 6, 7, 8월, 이 넉 달 치의 일기가 통째로 빠져 있었다. 9월 일기장도 첫 두 페이지만 쓰여 있을 뿐 나머지는 전부 백지였다. 아무리 다시 찾아보아도 사라진 넉 달 치의 기록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9월 일기장 중간에 엽서 한 장이 끼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남편 앞으로 온 엽서였고, 보낸 곳은 '가가 가타야마즈 온천 호라이 여관'이었다. 뒷면을 뒤집어 보았다.

> 안녕하십니까. 머무시는 동안 부족했던 점이 많아 거듭 사과드립니다. 오랫동안 앓으시던 병도 호전되시어 저희로서도 더할 나위 없이 기쁩니다. 건강한 안색으로 기차에 오르시는 모습을 배웅하며, 저희의 간호가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 것 같아 아버님을 뵐 면목이 생겼습니다. 앞으로도 모쪼록 건강 유의하시기를 바랍니다.

> 아울러 지난번 챙겨주신 두둑한 사례금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내년에도 꼭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온천을 찾아주시기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 추신: 저희가 보관하고 있는 물건(책과 그림 도구 등)은 댁으로 부쳐드려야 할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회신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9월 27일


어느새 날이 저물어 방 안에 불이 켜져 있었다.

남아 있는 일기를 대조해 보니, 그가 야마나카에 갔던 날은 5월 12일이었다. 야마시로 우체국 문을 열고 나오던 그 남자. 비록 찰나의 순간 스치듯 얼굴을 마주쳤을 뿐이지만, 시즈에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그 남자의 윤곽은 지금 남편의 이목구비와 묘하게 겹쳐졌다. 

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녀의 가슴속에만 존재하던 환상 속의 남자가, 너무나도 잔인하게 현실로 튀어나와 눈앞에 서 있었다.
 
그 남자가 바로 남편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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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는 남편이 썼던 것으로 보이는 네 통의 편지가 놓여 있었다.
시즈에는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윽고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화산처럼 끓어올랐다. 지난 2년간 자신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 고이 품고 정성스레 어루만져 온 소중한 보석을, 누군가 더러운 진흙 묻은 구두 발로 무참히 짓밟아버린 듯한 처참함과 배신감이었다.

시즈에는 자신이 그토록 수없이 읽고 또 읽었던 네 통의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갈가리 찢긴 종이 조각들을 화로에 던져 넣고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붉고 연약한 불꽃이 타오르더니 이내 사그라들었다. 

까맣게 탄 편지의 잔해들은 화로 속에서 흉측하게 부풀어 올랐고, 재가 된 부스러기들은 허무하게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장 위에 걸려 있던 '선인장 그림'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내 동작을 멈추고 그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림 속 선인장의 얼굴이 비웃듯 웃고 있었다. 시즈에는 마치 홀린 사람처럼 창백한 뺨에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아주 낮은 목소리로 그림을 향해 알 수 없는 말들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림에 대고 중얼거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시즈에의 얼굴은 밀랍 인형처럼 하얗게 질려갔다.

선인장의 기괴한 형상이 점점 남편의 얼굴로 변해가는 것 같았다.
시즈에는 다시 거칠게 액자를 뜯어내려다 또다시 흠칫하며 손을 거두었다.

'남편이 과연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7)
결혼 후 1년 동안 남편이 붓을 잡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남편이 그림을 그린다는 말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남편이 만약 내게 편지를 보냈던 그 미지의 남자가 맞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그 사실을 철저히 숨겼을까.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남편의 평소 필체와 편지의 필체가 언뜻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묘하게 다른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즈에는 필체를 꼼꼼히 대조해 진실을 파헤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남편을 다그쳐 사실을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평화롭고 고요한 시간 속에서 혼자 마음껏 피워올렸던 아름다운 공상의 꽃이 이토록 무참히 짓밟히고 찢겨나갔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 분노,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지독한 불쾌감뿐이었다.

남편은 그날 밤 끝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많은 추억과 악몽이 교차한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시계를 보니 벌써 9시였다.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시즈에는 씻을 기력조차 없어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핏기 없이 핼쑥해진 두 뺨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조심스레 방문이 열리며 하녀가 들어왔다.
"일어나셨습니까. 방금 주인어른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래……."
시즈에는 소파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우물쭈물 서 있었다.
"저기…… 어떻게 할까요?"
"글쎄……."
체념한 듯 힘없는 발걸음으로 전화기 앞으로 간 시즈에가 수화기를 귀에 댔다. 남편의 들뜬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시즈에, 나야. 오늘 아침 교토 신문 봤어? 나도 당신 병을 낫게 해주려고 그동안 꽤나 머리 굴리느라 고생했는데, 이제 앞으로는 우리 둘 다 마음 편히 행복해질 수 있어. 빨리 봐봐, 오늘 신문 사회면 말이야……."

방으로 돌아온 시즈에는 귀찮은 듯 멍한 눈으로 신문 페이지를 넘겼다. 사회면에 도달한 순간, 그녀는 숨이 턱 막히는 충격에 사로잡혀 무의식적으로 신문을 얼굴 가까이 끌어당겼다.

거기에는 2년 전 가타야마즈 온천 마을에서 도둑맞았던 자신의 흑백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사시나무 떨리듯 요동치는 마음을 억누르며 기사 제목을 읽어 내려갔다.

『등이 굽은 남자의 실연 비관 자살』
부제목으로는 '미인의 사진을 끼워 둔 일기장을 남기고' 라는 문구가 작게 적혀 있었다. 기사 말미에는 사망자의 신원이 파악되지 않아 유품으로 남겨진 사진 뒷면의 '가가 가타야마즈 야요이 사진관'이라는 단서를 바탕으로 관할 경찰서에 신원 조회를 요청 중이라고 쓰여 있었다.

선인장 속 기괴한 얼굴이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시즈에는 한참 동안 그 그림을 향해 멈추지 않고 무언가를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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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원고) [악녀 에가와 란코_에도가와 란포] 텍스트 전문(全文) 수록 [일본 미스터리 소설] 에도가와 란포 '악녀 에가와 란코' - 작가가 그려낸 광기와 탐닉의 초상, 악녀의 탄생 | 원아나의 책 읽는 TV 꿀잠 오디오북 #추리소설

☆원아나의 한마디☆
​"7층 높이의 고립된 방과 붉게 솟구치던 선명한 샘물. 순수했던 아기는 어떤 과정을 거쳐 매혹적인 악녀로 변모했을까요? 에도가와 란포가 설계한 치밀한 광기의 미로, 그 서늘한 진실 속으로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소설 텍스트 전문(全文)

악녀 에가와 란코(江川蘭子)
에도가와 란포


1. 붉은 샘
행동주의 심리학에 따르면 인간의 운명은 유전이나 교육보다는 생후 몇 개월간의 환경에 의해 거의 결정된다고 한다. 그러니 희대의 악녀 에가와 란코의 악마 같은 생애도, 아마 그녀가 갓난아기였던 시절의 그 기이하기 짝이 없는 환경 탓이었음이 틀림없다.

심리학자 존 왓슨에 따르면, 아기에게는 "언뜻 보기에 단 두 가지의 자극만이 이른바 '공포 반응'이라는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그중 하나는 크고 날카로운 소리이며, 다른 하나는 갑작스러운 추락이다."

아기가 날카로운 소리에 겁을 먹거나, 누워 있던 이불이 갑자기 당겨졌을 때, 혹은 목욕물에 닿는 찰나에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전문 용어로 말하자면, 이때 아기에게 관찰되는 반응은 갑작스러운 호흡 정지, 심장 박동과 호흡의 급격한 변화, 통곡, 그리고 양팔을 위로 허우적거리는 행동이다.

세상의 부모들은(적어도 어머니들은) 육아 본능에 따라 아기에게 이 두 가지 공포를 주지 않으려 애를 쓴다. 아기가 곤히 잠들었을 때는 발소리를 죽이고, 목욕을 시킬 때는 아기의 몸을 수건으로 감싸 안심하도록 꼭 껴안아 주는 식이다.

그런데 아기 에가와 란코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반드시 젊은 어머니만의 잘못은 아니었으나, 첫 번째 불행은 가족이 사는 집이 너무 높았다는 점이다. 란코는 유명한 대형 아파트 7층에서 태어났다. '소리의 공포'를 대표하는 것으로는 매일 세 번씩 아파트 옆 제과 공장에서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가 있었다. 란코는 그 기괴한 굉음이 들리는 창가에서 불과 2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누워 지냈다.

'추락의 공포'를 대표하는 것은, 어머니가 하루에도 몇 번씩 외출할 때마다 그녀를 안고 타는 아파트의 고속 엘리베이터였다. 그때마다 란코의 심장은 엘리베이터 바닥과 함께 순식간에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리는 듯했다.

두 번째 불행은 그녀의 부모가 너무 젊고(아버지는 23세, 어머니는 18세였다) 혈기가 넘쳐 감정을 억누르는 데 서툴렀던 탓에, 집안에서 쉴 새 없이 철없는 싸움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부모는 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우거나, 그게 아니면 노래를 불렀다. 노래만 불렀다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젊은 어머니의 바이올린 반주가 곁들여졌다. 그것이 아기 란코에게 얼마나 끔찍한 소음이었을지 상상해 보라.

그래도 합창은 참을 만했다. 불쌍한 아기에게는 아무리 그 소리가 시끄럽다 한들 이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평화로운 자장가였을 테니까. 부모가 본격적으로 싸움을 시작할 때 뿜어내는 험악한 기세는 바이올린이 자아내는 소음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격렬했기 때문이다.

부부 싸움이 격해지면 아기는 더 이상 하나의 생명체가 아니었다. 서양식으로 비유하자면 그저 밀가루 반죽을 미는 나무 밀대 하나에 불과했다. 심할 때는 부모가 1~2미터 거리에서 란코라는 연약한 핏덩이를 고무공처럼 서로에게 집어 던지기까지 했다. 그때야말로 란코는 '추락의 공포'를 뼛속 깊이 맛보아야만 했다.

만약 이런 환경이 전부였다면 에가와 란코는 훗날 자라서 다이빙 국가대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는, 이 이야기를 흔한 성공 스토리로 끝나지 않게 만드는 꽤나 독기 서린 것들이 섞여 있었다.

첫째로, 스물세 살의 아버지는 미국 갱스터 흉내를 내는 말쑥한 양아치였고, 어머니는 빼어나게 아름답지만 정조 관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여자였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미국 배우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처럼 귀족같이 살거나, 그게 안 되면 전설적인 대도가 되겠다"고 떠들고 다녔다. 현실은 소매치기나 좀도둑질 같은 좀스런 범죄로 겨우 입에 풀칠하는 신세였지만 말이다.

젊은 어머니는 남편의 그런 대책 없는 가치관을 맹목적으로 떠받들었다. 그녀는 남편의 범죄를 돕는 것은 물론, 남편이 시키면 다른 남자에게 몸이라도 바칠 만큼 비뚤어진 희생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 부부 싸움이 일어났느냐 하면, 젊은 아내는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한눈파는 꼴은 단 1초도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남편을 몇 배는 더 사랑했던 탓이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란코 역시 범죄자인 아버지를 우상처럼 동경하게 되었다. 이른바 심리학에서 말하는 '파더 콤플렉스'였다. 어린 딸은 어머니를 연적으로 삼아 아버지의 사랑을 두고 다투었다. 그렇게 란코는 아주 어릴 때부터 '대부호가 아니면 대도'라는 비뚤어진 사상을 물려받았다.

둘째는, 란코가 겨우 두 살 때 철없던 부모가 허망하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이다.
어느 날 밤, 어떤 아저씨가(20대 청년이었지만) 란코네 침실로 숨어들었다. 란코는 그 남자를 두세 번 본 기억은 있었지만, 갓난아기가 그 사람의 이름이나 정체를 알 리 없었다. 당연히 그날 밤 벌어진 끔찍한 살인의 동기도, 살인 자체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건 침대 위에서 번개처럼 번쩍이던 무언가와, 이어서 들려온 이상한 신음뿐이었다. 아무리 평소에 고함과 기괴한 바이올린 소리에 익숙해진 두 살배기라 해도, 그때 부모의 몸에서 터져 나온 처절한 비명 소리만은 평생 잊지 못할 만큼 깊게 각인되었다.
다음 순간, 란코는 부모의 커다란 몸뚱이와 함께 침대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하지만 그녀에게 추락은 더할 나위 없는 쾌감이었다. 란코는 어머니의 시체에 짓눌려 허우적거리면서도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사실이 너무 즐거워 까르르 웃고 있었다.

앞서 말한 기이한 환경 덕분에, 란코는 그때 이미 '추락'을 일상으로 여기고 오히려 최상의 쾌락으로 즐기는 비정상적인 아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침대에서 떨어지자마자 꽃처럼 새빨간 색이 눈길을 사로잡았고, 미끈거리는 액체가 몸을 적셨다. 어머니의 하얀 몸에서 젖이 아닌 붉고 매혹적인 샘이 콸콸 솟구치고 있었다. 평소 푹 빠져 있던 아버지의 구릿빛 피부를 돌아보았다. 그곳에서도 똑같은 붉은 샘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두 살배기 아기가 알 리 없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맨 콘크리트 바닥 위로 새빨갛고 끈적한 웅덩이가 고였다. 란코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평소 물장난을 치듯 조그만 두 손으로 핏물 웅덩이를 찰박찰박 내려쳤다.

그러고는 젊은 어머니의 시신 가슴팍에 피투성이 손자국을 꾹꾹 찍어대며, 나오지도 않는 젖을 쪽쪽 빨았다. 아무리 빨아도 젖이 나오지 않자, 상처 부위에 입을 대고 젖 대신 붉은 피를 반 컵이나 삼켜버렸다.

맛도 별로 없고 배도 어느 정도 부르자, 아이는 곧 상처에서 입을 떼고 방 안을 기어 다니며 놀기 시작했다. 피 연못을 뒹굴고, 부모의 시신을 타고 넘고, 쩍 벌어진 상처를 걷어차며 놀았다. 하얀 벽을 짚고 일어서려다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다음 날 아침, 아래층 주민이 아이가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를 이상하게 여겨 올라온 덕분에 비로소 이 끔찍한 살인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란코의 아버지는 떳떳하지 못한 직업 탓에 일부러 입주민이 없는 7층을 골라 살았고, 그 층 전체가 텅 비어 있었다. 그 덕에 범인은 여유롭게 도망칠 수 있었고 사건 발견도 늦어진 것이다.

사람들이 현장을 열었을 때 목격한 것은, 젊고 아름다운 부부의 참혹한 시신과 피투성이가 된 채 요괴처럼 울부짖고 있는 작은 괴물, 그리고 방 안 벽과 바닥 구석구석에 점점이 찍힌 아기의 앙증맞은 피 손자국이었다.
고아가 된 아이는 마침 자식이 없던 아파트 관리인 노부부가 거두어 입양했다.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란코의 아버지는 평소 아름다운 아내를 미끼로 남자들의 돈을 뜯어내는 '미인계'를 자주 썼다고 한다. 아마 범인도 란코 어머니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간 남자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진짜로 사랑에 빠져버렸고, 자신이 속았다는 걸 알고도 포기하지 못해 결국 두 사람 모두를 죽여버린 것 아니겠냐는 소문만 무성했다.

죽은 부부의 평소 행실이 워낙 나빴던 터라 동정하는 이도 없었고, 사건은 크게 화제가 되지도 않았다. 경찰이 범인을 못 잡아도 무능하다고 욕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 자연히 이 사건은 경찰의 관심에서도 멀어지며 흐지부지 묻히고 말았다.
훗날 에가와 란코가 세상의 무관심에 분노하여 스스로 진상을 파헤치고 부모의 복수에 나서지 않는 이상, 범인은 영원히 죗값을 치르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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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곡예사
아파트 관리인 에가와 사쿠헤이와 부인 오코마 아주머니는 평소 월세를 깐깐하게 받아내 주민들에게 징글징글한 구두쇠 소리를 들었지만, 사실 속정은 깊은 사람들이었다. 고아가 된 란코가 범죄자의 자식이라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더 가엾게 여겨 친딸처럼 애지중지 키웠다. 이때부터 란코가 '에가와'라는 성을 쓰기 시작했고 평생 이 이름으로 불렸기에, 이 글에서도 편의상 처음부터 에가와 란코라 부른 것이다.

란코를 거두자마자 부인은 두 살배기의 기이한 성향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글쎄, 애가 너무 떼를 쓰길래 홧김에 뺨을 한 대 쳤거든요. 그런데 자지러지게 울던 애가 갑자기 뚝 그치더니 까르르 웃는 게 아니겠어요? 정말 소름 끼칠 정도로 묘한 애예요."
이상한 일이었지만 사실이었다. 부인은 란코를 달래는 특별한 방법을 터득해야 했다. 무릎에 앉혀 흔들어주거나, 업어주거나, 자장가를 불러주는 흔한 육아법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작은 괴물의 심기만 거스를 뿐이었다. 

자장가 대신 깜짝 놀랄 만한 소음이, 다정한 스킨십 대신 매질이 직빵이었다. 소음 중에서도 부엌에서 접시끼리 부딪히는 소리, 특히 바닥에 떨어져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란코를 가장 즐겁게 했다. 어느 날 아파트 앞에서 자동차 타이어가 총소리처럼 펑 터졌을 때, 그 소리를 듣고 란코는 세상을 다 가진 듯 웃음을 터뜨렸다.

또 하루는 아파트 뒷문을 기어 다니다가 돌계단에서 굴러떨어진 적이 있었다. 부인은 애가 죽는소리를 낼 줄 알고 기겁해서 달려갔다가, 란코의 표정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란코는 계단 밑에 벌렁 누운 채로, 새로 난 귀여운 앞니를 훤히 드러내고 속눈썹이 긴 눈을 황홀하게 반짝이며 너무나 행복하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 천진난만한 미소란!
"아이고, 요 녀석. 예뻐서 확 깨물어 주고 싶네."

부인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란코를 번쩍 안아 올려 볼을 마구 비벼댔다.
이런 기괴한 취향만 빼면, 란코는 머리도 똑똑하고 몸도 건강하게 쑥쑥 자랐다. 특히 부모의 뛰어난 외모만 쏙 빼닮아 해가 갈수록 미모에 물이 올랐다. 누구든 란코를 한 번 보면 "어쩜 저리 예쁠까" 하고 감탄을 내뱉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였다.

"우리 란코는 대체 얼마나 더 예뻐지려는 걸까. 겁이 날 정도야."
양부모는 입만 열면 란코 자랑이었다. 그들은 벌써부터 열여덟 살이 된 란코가 눈부신 드레스를 입고 시집가는 달콤한 망상에 빠져 있었다.

학교에 들어가서도 란코는 단연 전교 1등이었다. 특히 수학, 음악, 댄스, 체육 시간엔 선생님이 100점 만점에 200점을 주지 못해 안달을 낼 정도였다. 기계 체조는 웬만한 남학생들보다 훨씬 날랬고, 수영장 다이빙대에서 몸을 날릴 때면 전교생과 교사들이 넋을 잃고 구경하러 몰려들었다.

미모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남학생, 남교사 할 것 없이 학교 안의 모든 남자가 그녀를 짝사랑했다. 그리고 란코는 그 수백 명의 남자들에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완벽하게 애교를 흘리고 어장 관리를 하는 무서운 재능을 타고났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열네 살 때, 두 번의 아찔한 사건이 있었다. 한 번은 선생님, 친구들과 함께 공연장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멀쩡히 옷을 입은 채로 료고쿠 다리 위에서 강물로 몸을 던진 것이고, 또 한 번은 백화점 옥상에서 뛰어내리려다 마침 순찰 중이던 형사에게 뒷덜미를 잡혀 미수에 그친 것이었다.

물론 란코가 죽으려고 자살을 시도한 건 아니었다. 아기 때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며 웃었던 것이나, 아찔한 다이빙을 미치도록 즐기는 것과 똑같은 억눌릴 수 없는 충동 때문이었다.

그녀는 죽음과 종이 한 장 차이인 아슬아슬한 위험을 본능적으로 사랑했다. 겨우 열네 살짜리 소녀 주제에 이 세상에서 느끼는 쾌락이라고는 오직 이 '위험' 하나뿐이었다. 아찔하게 높은 건물 옥상에 서거나 깊은 강물을 내려다보면, 온몸에 소름이 쫙 돋으면서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짜릿한 쾌감이 밀려와 기어코 뛰어내리고 마는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부모는 규율이 빡빡하기로 소문난 사립 여학교에 란코를 입학시키려 했다. 하지만 란코는 지루한 모범생 생활에 진작 신물이 나 있었다. 그렇다고 비행사가 되려니 허락을 받을 리도 없고, 돈이나 절차도 복잡했다. 그래서 란코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자신의 본능을 채워줄 완벽한 직업을 선택했다. 

어느 날 밤 무단가출을 감행해, 도시 외곽에 텐트를 친 유랑 서커스단에 합류한 것이다. 그곳엔 입학원서도, 학비도, 부모의 동의서도 필요 없었다.

서커스 단장은 란코의 미모에 홀려 즉석에서 그녀를 받아주었다. 곡예 같은 건 못해도 얼굴마담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란코가 제발 공중 곡예를 시켜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관객이 다 빠져나간 뒤 빈 무대에서 공중그네에 올려보았다.

처음 두세 번은 타이밍을 못 맞춰 아래 그물망으로 떨어졌지만, 란코는 단 하루 만에 수십 미터 상공에서 그네와 그네 사이를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곡예를 완벽하게 마스터해 버렸다.

다음 공연부터 란코는 단숨에 서커스단의 간판스타로 무대에 섰다. 그녀의 공중 묘기는 눈 깜짝할 새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란코는 수십 년 경력의 선배들보다 훨씬 더 대담하고 미친 듯이 허공을 날아다녔다. 급기야 나중에는 스릴이 부족하다며 바닥에 깔린 안전 그물망마저 치워달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부모는 당연히 눈에 불을 켜고 딸을 찾아 헤맸지만, 무슨 조화인지 란코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다.
란코는 유랑 극단을 따라 전국을 떠돌며 열여섯 살의 봄을 맞았다. 조숙한 그녀의 몸놀림은 소년처럼 날렵하면서도, 속눈썹이 길게 늘어진 두 눈에는 이미 남자를 홀리는 성숙한 관능미가 짙게 배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공중 묘기 따위는 아무런 위험도, 짜릿함도 주지 못하는 지루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란코와 친하게 지내던 어린 소녀 단원이 대나무 장대 꼭대기에서 추락해 즉사하는 사고가 터졌다.

열한 살짜리 아이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밀가루 반죽처럼 납작해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창백하게 질려 식은땀을 흘리는 단원들이 아이 곁으로 몰려들었고, 객석에서는 끔찍한 비명과 비명 섞인 욕설이 쏟아졌다.
누군가 아이의 머리를 조심스레 들어 올리자, 아이의 입과 땅바닥 사이에 새빨간 핏줄기가 이어졌다. 속에서 엄청난 피를 토해낸 것이다. 바닥에는 금세 붉은 웅덩이가 고였다.

란코는 그 피를 보는 순간, 2년 전 다리 위나 백화점 옥상에서 아득한 바닥을 내려다보았을 때와 똑같은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무섭기도 했지만, 동시에 박살 난 시신과 흘러내리는 붉은 피에서 숨이 막힐 듯한 짜릿한 매력을 느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아기였을 때 참혹하게 죽은 부모의 시신 사이에서 핏물을 철벅거리며 까르르 웃었던 그 기괴한 기억이 무의식 속에 남아 있다가, 이 비슷한 광경을 보고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육체는 다 자랐을지언정 열여섯 살 소녀였던 란코는 아직 '살인'이나 '범죄'의 진짜 매력을 깨달을 만큼 악에 성숙하지는 않았다. 방금 느낀 이 짜릿함이 얼마나 독하고 위험한 쾌락인지 명확히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사람의 피는 어쩜 저렇게 아름다울까' 생각하며 넋을 잃고 죽은 소녀의 새하얀 시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어린 시절 부모의 참혹한 죽음에 대해 양부모가 철저히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가끔 악몽을 꿀 때마다 귓가를 맴돌던 그 소름 끼치는 비명소리가 대체 무엇이었는지 그녀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눈앞에서 죽은 동료의 피를 보며 무의식은 춤을 췄을지언정, 이성은 별다른 죄책감이나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대도시 공연 중에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란코에게 돈 많고 늙은 스폰서가 생긴 것이다. 돼지처럼 뒤룩뒤룩 살찐 늙은 부자의 탐욕스러운 손길이 란코의 몸과 마음에 어떤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는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 노인이야말로 란코가 희대의 악녀로 폭주하게 만드는, 인생의 선로를 바꿔놓은 기폭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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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면제
늙은 스폰서 토야마 사다스케의 손에 이끌려 고급스러운 양식 별장에 발을 들일 때까지만 해도, 란코는 그저 이 돼지 같은 영감 앞에서 자신의 주특기인 곡예나 몇 번 보여주면 끝날 줄 알았다.

"제가 뭐 재밌는 거 하나 보여드릴까요?"
발코니에 나선 란코는 정원에 솟은 까마득한 나무를 올려다보며 천진하게 물었다. 아직 그녀에겐 저런 나무 꼭대기까지 원숭이처럼 기어올라가 보고 싶은 야생적인 충동이 남아 있었다.

"곡예 말이냐? 그것도 좋지. 하지만 벌써 해가 지잖니. 일단 방으로 들어가서 맛있는 것부터 먹자꾸나."
노인은 느끼한 미소를 한껏 흘리며 그녀를 방 안으로 이끌었다.

주방장이 화려한 요리와 독한 술을 내왔다. 노인이 쉴 새 없이 잔을 권하는 바람에 란코는 금세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취해버렸다. 사실 그녀는 이미 술맛을 알고 있었고, 취하는 기분을 꽤나 좋아했다.

방 안이 핑핑 돌고 귓가에선 왁자지껄한 밴드 음악이 환청처럼 울리는 와중에, 무언가 끈적하고 묵직한 것이 란코의 목덜미를 훅 덮쳐왔다. 그것이 지방 덩어리 같은 노인의 털투성이 팔뚝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란코의 가슴속에서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이 솟구쳤다.

내심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론 미치도록 기다려왔던 그 순간이 마침내 찾아온 것이다. 게다가 상대가 세상에서 제일 혐오스러운 돼지 영감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그녀를 짜릿하게 만들었다. 남몰래 숨어서 즐기는, 이토록 역겹고 타락한 변태적인 쾌감!
"영감님, 나 지금 너무 기분 좋아."
란코는 노인의 품에 기댄 채 뒤로 팔을 뻗어 그의 번쩍이는 대머리를 찰싹찰싹 때리며, 사르르 녹아내릴 듯한 눈웃음을 쳤다.

욕정으로 눈이 뒤집힌 늙은 돼지는 흥분한 나머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아무 말 없이 미끌거리는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짓눌렀다.

이윽고 란코는 자신의 치아 사이로 물컹한 고깃덩어리 같은 입술이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그 구역질 나는 감각이 소름 끼치도록 황홀했다. 오한이 일어 란코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꽉 깨물어버렸다.
"아악!"
노인은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어올랐다. 피가 줄줄 흐르는 갈색 돼지의 입술을 보며 란코는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춤출까? 영감님, 노래 한 곡 뽑아봐!"
란코는 입고 있던 겉옷을 훌렁 벗어 던지고 방 한가운데로 뛰어갔다. 그러고는 전설적인 댄서 조세핀 베이커의 파격적인 춤을 추기 시작했다. 흑인 무용수의 야성적인 춤을 고귀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의 소녀가 추고 있는 꼴이라니. 그 기괴한 부조화가 노인을 완전히 미쳐버리게 만들었다.
 
그는 피를 뚝뚝 흘리는 입을 헤벌쭉 벌린 채, 30년 전 유행가를 미친 듯이 고래고래 부르기 시작했다.
서커스 단장이 돈을 받고 란코를 완전히 넘겨버린 탓에, 그녀는 당분간 이 노인과 동거할 수밖에 없었다.

함께 지내다 보니 노인의 정체가 속속 드러났다. 그는 셀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재산을 굴리는 은퇴한 회장님이었고, 그의 아들은 오사카에서 제일가는 대형 제약회사의 사장이었다. 노인은 옷이든 보석이든 란코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건 모조리 사다 바쳤다. 란코는 가장 비싸고 화려한 신상 드레스를 휘날리며 고베의 번화가를 거드름 피우며 산책하는 취미가 생겼다.

얼마 후, 란코는 단골 찻집에서 '아담스 시로'라는 스물세 살의 혼혈 청년과 눈이 맞았다. 시로의 베일 듯이 오뚝한 코와 속을 알 수 없는 짙은 푸른 눈, 코잔등에 흩뿌려진 주근깨가 란코의 묘한 취향을 자극했다.
얼마 안 가 시로는 란코와 노인이 동거하는 별장까지 버젓이 드나들게 되었다.

"너, 저 할아버지 친딸이야?"
어느 날 거실에서 노인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소다수를 홀짝이던 시로가 물었다. 그는 길거리 양아치 특유의 건들거리는 말투였다.
"아닌데? 나 저 영감 스폰받는 애인이야. 왜, 그 소리 들으니까 나랑 놀기 싫어졌어?"
"놀기야 놀겠지만... 넌 저런 징그러운 돼지 영감이 진짜 좋냐?"
"뭐, 싫진 않아. 근데 너만큼 좋진 않지."
"말은 잘하네. 난 저 영감처럼 뜯어먹을 돈도 없는데."
"그럼 증거를 보여줄까? 내가 널 더 좋아한다는 증거."
"뭔데?"
시로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란코는 테이블 위에 유리잔 세 개를 나란히 놓고 소다수를 따랐다. 그러고는 품속에서 작게 접은 종이 하나를 꺼내 시로에게 내밀었다.
"이 잔들 중에 아무 데나 그 약을 털어 넣고 잘 저어."
시로는 종이를 펼쳐 하얀 가루를 손가락으로 살짝 찍어 맛보더니 확 미간을 찌푸렸다.
"젠장, 엄청 쓰네."
"응, 엄청 쓰지."
"이거 누구 먹이려고?"
"누구긴, 저 영감님이지!"
"허..."

시로는 장난스럽게 과장된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 속으로는 잔뜩 쫄아 약을 쥔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빨리 안 해? 영감님 화장실에서 나온단 말이야."
"야, 그만하자. 이딴 장난 쳐서 뭐 하게."
"왜? 쫄았어?"
란코는 머뭇거리는 시로의 손을 억지로 끌어당겨 유리잔 위에서 종이를 탁탁 털었다. 하얀 가루가 소다수 위로 떨어지더니 거품을 내며 바닥으로 스르르 가라앉았다.

"어이쿠, 란코. 뭘 그렇게 열심히 젓고 있나?"
기분 좋게 돌아온 노인이 물었다.
"영감님 드실 소다수요! 맛있으라고 달달하게 저어드리고 있었지. 자, 다 같이 건배해요!"
노인과 시로, 란코가 각자 잔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영감님, 내가 미리 경고하는데 그 잔 안에 독약 들었어요. 방금 내가 탔거든. 그치, 시로?"
시로는 공포에 질린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안면 근육에 쥐가 날 정도로 버티고 있었다.
"허허! 네가 독약을 탔다고? 이 늙은이를 독살하고 거기 있는 시로 군이랑 야반도주라도 할 셈이냐? 껄껄껄."

노인은 열여섯 살짜리 맹랑한 꼬맹이와 애송이 혼혈 녀석의 귀여운 장난쯤으로 치부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거, 시로 군. 란코가 저렇게 협박을 하는데 이 잔을 마셔, 말아?"
노인은 징그러운 지방 덩어리 팔로 시로의 마른 어깨를 덥석 감싸 쥐고는 끈적하게 어루만졌다.

결국 노인은 자신이 쥔 소다수를 짐승처럼 꿀떡꿀떡 목을 울리며 단숨에 비워버렸다.
"자, 란코. 분위기도 좋은데 한바탕 춤이나 춰 봐라."
노인은 시로의 어깨를 꽉 껴안은 채 소파에 푹 기대앉아 란코에게 춤을 요구했다.
"당연하지!"
란코는 신이 나서 축음기를 틀고, 보란 듯이 겉옷을 확 벗어 던진 뒤 끈적한 재즈 선율에 맞춰 광란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노인도 기분이 달아올라 걸걸한 목소리로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악을 쓰며 불렀다. 란코의 몸은 짐승처럼 선정적이면서도 곡예사처럼 날렵하게 빙글빙글 돌아갔다.

소파에 묶인 시로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퇴폐적인 춤사위의 쾌락과, 방금 자신이 약을 탄 소다수를 마신 노인에 대한 공포 사이에서 미칠 것 같은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게다가 노인의 돼지 같은 팔뚝이 자신의 어깨를 옥죄어오는 그 끔찍한 감촉까지 견뎌야 했다.

그는 차마 노인의 손을 뿌리치지도 못한 채, 숨을 죽이고 악을 쓰는 노인의 옆얼굴만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란코의 춤이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노인의 노랫소리는 서서히 힘을 잃었고, 시로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팔도 스르르 힘이 풀려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시로는 튀어나올 듯 커진 눈으로 노인을 살피며, "영감님? 영감님?" 하고 잔뜩 부풀어 오른 뱃살을 쿡쿡 찔러보았다.
노인의 대답은 코 고는 소리와 두툼한 입술 밖으로 흘러내리는 끈적한 침뿐이었다. 보름달 같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해졌고 이마엔 식은땀이 비 오듯 맺혀 있었다.
시로는 미친 듯이 춤을 추는 란코에게 달려가 그녀를 확 잡아챘다. 그리고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손가락으로 축 늘어진 돼지 영감을 가리켰다.
"헐, 진짜 죽었나 봐."

란코는 태연하게 방문으로 걸어가 문을 철컥 잠가버렸다. 시로는 그녀의 그 소름 끼치도록 차분한 태도에 기겁을 했다.
"야! 란코! 너 지금 제정신이야? 어떡할 거냐고!"
"어떡하긴! 자, 이제 귀찮은 방해꾼도 뻗었으니 우리끼리 밤새 놀자!"
란코는 축음기 판을 경쾌한 음악으로 바꿔 끼우더니, 시로의 목을 끌어안고 막무가내로 몸을 비비며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색소폰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시로도 극도의 공포와 흥분이 뒤섞인 감정에 완전히 이성을 잃고 란코와 엉겨 붙어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댔다.

"아, 재밌는 거 생각났다!"
란코가 시로를 휙 밀쳐내더니 소파로 달려가 축 늘어진 돼지 영감의 푹신한 몸뚱이를 바닥으로 질질 끌어내려 길게 눕혔다. 그러고는 산처럼 솟아오른 뱃살 위로 훌쩍 올라타 엉덩이를 통통 튕기며 시로에게 손짓했다.
시로는 이게 미친 짓인 줄 알면서도,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쾌감과 흥분에 취해 비틀거리며 노인의 배 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두 사람이 시체의 배 위에 앉아 음악에 맞춰 다리를 흔들 때마다, 뱃속에 찬 물이 출렁출렁 요동을 쳤다.
"너, 이 영감탱이가 진짜 죽은 줄 알았어?"
란코가 시로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거 수면제야. 영감이 맨날 먹는 아달린 가루약 알지? 그거 평소보다 아주 쪼오금 더 탔어. 자, 저기 봐봐. 벌써 눈 뜰락 말락 하잖아."

두 사람이 나란히 배 위에 앉아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내려다보자, 약기운에 취해 곯아떨어졌던 노인이 배 위에서 쿵쾅거리는 충격에 반강제로 의식이 깨어나고 있었다. 노인은 초점 없는 흐리멍덩한 눈을 반쯤 뜬 채 배 위에 올라탄 두 사람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어머머, 웃고 있네? 저 영감탱이, 우리한테 이렇게 능욕당하는 게 진짜로 좋은가 봐!"

그건 농담이 아니었다. 노인은 황홀경에 빠진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뺨 근육이 다 풀린 채로 헤벌쭉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기괴한 미소를 보자 시로는 등골이 서늘해져 벌떡 일어났다.
"야, 죽어가는 게 아니라 기분 좋은 변태 꿈이라도 꾸나 보지. 괜찮아, 다시 앉아!"
란코가 말렸지만, 시로는 영감이 진짜로 정신을 차리기 전에 당장 이 집에서 나가야겠다며 도망치듯 문으로 향했다.

"그래, 그럼 가든가."
현관까지 따라 나온 란코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쏘아붙였다.
"근데 어쩌지? 난 너보단 저 돼지 영감이 쥐꼬리만큼 더 낫다. 넌 핏줄만 혼혈이지 배알도 없는 쫄보 새끼잖아."

이날 밤의 사건 이후, 란코의 내면에서는 또 한 번 소름 끼치는 진화가 일어났다.
그녀는 비로소 성에 눈을 떴고, 이와 동시에 '악(惡)'의 쾌락에도 눈을 번쩍 떴다.

어릴 적 그토록 집착했던 '추락의 공포'도 제아무리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들 반복하다 보면 시시해지기 마련이다. 목숨을 건 곡예비행도 더 이상 스릴을 주지 못해 이 세상에 재밌는 건 다 끝난 줄로만 알았다. 그때 나타난 것이 늙고 역겨운 부자 스폰서였다. 란코는 인간의 타락한 정사(情事) 역시 고공 곡예 못지않게 심장을 터질 듯 뛰게 만드는 쾌락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란코를 미치게 만든 건, 시로와 벌인 그 '살인 유희'와 '밀회'가 안겨준 마약 같은 쾌감이었다.

소다수 잔에 독약을 탄다고 속이며 수면제 가루를 털어 넣을 때의 그 짜릿한 배덕감. 속은 줄도 모르고 그것을 들이켜는 늙은 돼지를 지켜볼 때 온몸에 흐르던 아찔한 전율. 약에 취해 뻗어버린 노인의 몸뚱이 위에서 젊은 남자와 질펀하게 뒹구는 은밀한 정복감.

그 모든 것들은 그 어떤 목숨 건 공중 묘기보다도 그녀의 피를 미친 듯이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아, 세상에 이렇게 재밌고 짜릿한 짓이 있었다니!' 란코는 이제 악의 쾌락에 완전히 미쳐버렸다.

하지만 잊지 말자. 그녀는 아직 창창한 열여섯 살 소녀에 불과했다.
앞으로 나이를 먹어가며 그녀의 가슴속에 피어날 악의 꽃은 대체 얼마나 치명적이고 매혹적일까. 어른이 되어서는 어떤 무시무시한 요부가 되고, 늙어서는 또 어떤 피도 눈물도 없는 마녀가 될 것인가. 그녀가 저지를 첫 번째 진짜 살인은 과연 누구를 향할 것인가. 

그리고 이 미치광이 여자 악마를 막아서고 싸울 자는 과연 세상에 존재하기나 할까.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개과천선하여 천재적인 여탐정으로 돌변할까. 그도 아니면, 어느 날 에가와 란코라는 이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완전히 다른 인물로 신분을 세탁해 세상 꼭대기에 군림할 것인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해, 작가인 나조차도 아는 것이 전혀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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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29일 수요일

(소설 원고) [한 장의 기차표(영수증)_에도가와 란포] 전문(全文) 수록 [일본 미스터리 소설] 에도가와 란포 '한 장의 기차표(영수증)' - 한 장의 기차표는 사랑의 복수인가, 완벽한 알리바이인가? | 원아나의 책 읽는 TV 꿀잠 오디오북



 

소설 텍스트(원고)전문(全文) 

한 장의 기차표 (영수증)
​에도가와 란포

​상 (上)

​"아니, 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 그건 최근에 일어난 꽤 드문 사건이었으니까. 세상 사람들은 다 그 소문으로 떠들썩하잖아. 하지만 아마 자네만큼 자세히 알지는 못할 거야. 이야기 좀 해 주지 않겠나?"
한 청년 신사가 이렇게 말하며,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조각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럼, 한 번 얘기해 볼까. 어이, 웨이터. 여기 맥주 한 잔 더."
단정한 옷차림과는 어울리지 않게 머리를 덥석덥석 길러둔 상대방 청년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때는 19XX년 10월 10일 오전 4시, 장소는 OO 마을 외곽, 도미다 박사 저택 뒤편 철도 선로. 여기가 무대야. 늦가을(아니, 가을이려나,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아직 어둑어둑한 새벽의 정적을 깨고 상행 제O호 열차가 맹렬히 달려왔다고 생각해 보게.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갑자기 날카로운 기적 소리가 울리더니 비상 브레이크로 열차가 급정거했어.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차가 멈추기 전에 한 부인이 치여 죽고 말았지. 내가 그 현장을 직접 봤다네. 처음 겪는 일이었지만, 정말이지 끔찍한 기분이었어.
그 사람이 바로 문제의 박사 부인이었던 거야. 차장의 긴급 신고로 관할 경찰들이 달려오고 구경꾼들이 모여들었지. 그사이 누군가 박사 저택에 소식을 알렸고, 깜짝 놀란 주인 박사와 하인들이 뛰어나왔어. 마침 그 소동이 벌어지던 와중에, 자네도 알다시피 당시 OO 마을에 놀러 와 있던 내가 평소 습관대로 이른 아침 산책을 하던 길에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게 된 거지. 이윽고 검시가 시작됐어. 경찰의로 보이는 사내가 상처 부위를 조사했지. 대충 조사가 끝나자 시신은 곧바로 박사 저택으로 옮겨졌어. 구경꾼들 눈에는 사건이 아주 간단하게 마무리된 것처럼 보였을 거야.

​내가 직접 본 건 여기까지야. 나머지는 신문 기사들을 종합하고 거기에 내 상상을 덧붙인 이야기니까, 그런 줄 알고 들어주게. 자, 경찰의의 소견에 따르면 사인은 물론 역사(轢死, 열차에 치여 죽음)이고, 오른쪽 허벅지가 밑동부터 절단된 것이 원인이라는 거야. 그런데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는 아주 유력한 단서가 죽은 이의 품속에서 나왔어. 그건 부인이 남편인 박사에게 남긴 유서였는데, 내용인즉슨 오랜 폐병으로 자신도 고통스럽고 주변에도 폐를 끼치는 것을 더는 견딜 수 없어서 이렇게 자살을 결심한다는 거였어. 대충 이런 내용이었지.
정말 흔해 빠진 사건이야. 만약 여기에 한 명의 명탐정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었을 테고, 박사 부인의 염세 자살이니 뭐니 하며 사회면 구석에 작은 기사 하나 남기는 것에 불과했을 거야. 하지만 그 명탐정 덕분에 우리도 아주 기막힌 이야깃거리가 하나 생겼단 말씀이지.

​그건 구로다 세이타로라는, 신문에서도 대단히 찬양하던 형사 순사인데, 이 사람이 아주 기특한 위인이라 평소 탐정 소설 쯤은 한두 권 읽고 있었던 모양이야. 뭐, 비전문가인 내 생각일 뿐이지만 말이야. 그 사내가 번역판 탐정 소설에나 나올 법하게 개처럼 네발로 기어 다니며 그 주변 땅바닥의 냄새를 맡듯 샅샅이 뒤지고 다녔거든. 그러고는 박사 저택 안으로 들어가서 주인이나 하인들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거나, 각 방의 구석구석을 하나도 빠짐없이 돋보기로 들여다보는 등, 아무튼 최신 탐정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생각하면 돼.
그리고 그 형사가 상관 앞에 나가서 하는 말이, 『이건, 좀 더 조사해 봐야겠습니다』 하는 거였어. 그러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고, 우선 시신 해부부터 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지. 대학 병원에서 아무개 박사의 집도 아래 해부를 해보니, 구로다 명탐정의 추리가 빗나가지 않았다는 게 증명된 거야. 열차에 치이기 전에 이미 어떤 독약을 마신 듯한 흔적이 나온 거지. 즉, 누군가가 부인을 독살해 놓고 그 시신을 철도 선로까지 옮겨서 자살로 위장한, 사실은 끔찍한 살인 사건을 저질렀다는 얘기가 되는 거야. 그 당시 신문은 『범인은 누구인가』 같은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우리 호기심을 한껏 부추겼지. 그래서 담당 검사가 구로다 형사를 불러 증거 조사 단계에 들어간 거야.

​자, 형사가 거드름을 피우며 내놓은 증거물이라는 것은, 첫째로 단화 한 켤레, 둘째로 석고로 뜬 발자국 모형, 셋째로 구겨진 휴지 조각 몇 장. 꽤 로맨틱하지 않나? 이 세 가지 증거품을 내밀며 이 사내가 주장하기를, 박사 부인은 자살한 게 아니라 살해당했다는 거야. 그리고 그 살인자는 놀랍게도 남편인 도미다 박사 본인이라는 거지. 어때, 제법 흥미진진하지?"
​이야기를 하던 청년은 약간 얄궂은 미소를 지으며 상대방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안주머니에서 은빛 담배 케이스를 꺼내 아주 능숙하게 옥스퍼드 담배 한 개비를 집어 들고는 찰칵 소리가 나게 뚜껑을 닫았다.

"그래." 듣고 있던 청년, 즉 마쓰무라가 이야기꾼을 위해 성냥불을 그어 주며 말했다. "거기까지는 나도 대충 알고 있어. 하지만 그 구로다라는 사내가 어떤 방법으로 살인자를 찾아냈는지, 그게 들어볼 만한 대목이겠지."
"아주 훌륭한 탐정 소설이지. 그래서 구로다 씨가 설명하기를, 타살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된 건 시신의 상처 부위 출혈이 의외로 적다며 경찰의가 갸우뚱했던 아주 사소한 점 때문이었다는 거야. 지난 19XX년 O월 O일 OO 마을 노모 살인 사건에도 그런 전례가 있다더군. 의심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의심하고, 그 의심 하나하나를 가능한 한 면밀히 탐색하라는 게 탐정술의 모토라던데, 이 형사도 그 요령을 제대로 터득하고 있었던지 하나의 가설을 세워 본 거야. 누군지 모를 남자나 여자가 이 부인에게 독약을 먹였다, 그리고 부인의 시신을 선로까지 가져와서 기차 바퀴가 모든 것을 엉망진창으로 뭉개 주기를 기다렸다, 라고 가정한다면 선로 근처에 시신 운반으로 인해 남겨진 어떤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추정한 거지.

그런데 형사에게 어찌나 행운이었는지, 사고 전날 밤까지 비가 계속 내린 덕분에 땅바닥에 여러 가지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어. 그것도 전날 한밤중쯤 비가 그친 후부터 사건이 발생한 오전 4시 몇 분 사이에 그 근처를 지나간 발자국만이 아주 안성맞춤으로 남아있었다는 얘기야. 그래서 형사는 아까 말한 개 흉내를 내기 시작한 거지. 자, 여기에 잠시 현장 약도를 그려 볼게."
소다(이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청년의 이름이다)는 이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소형 수첩을 꺼내 연필로 대강의 도면을 그렸다.
​"철도 선로는 땅보다 약간 높게 솟아 있고, 그 양쪽 경사면에는 잔디가 쫙 깔려 있어. 선로와 도미다 박사 저택 뒷문 사이에는 꽤 넓은, 그래, 테니스 코트 하나 정도 들어갈 만한 공터, 풀 하나 없는 잔자갈이 섞인 공터가 있지. 발자국이 찍혀 있던 건 그쪽이고, 선로의 반대쪽, 즉 박사 저택과는 반대편은 온통 논바닥에 저 멀리 어떤 공장의 굴뚝이 보이는 변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야. 동서로 뻗은 OO 마을의 서쪽 끝이 박사 저택 등 몇 채의 문화주택식 집들로 끝나니까, 박사 저택 라인에는 선로와 거의 평행하게 쭉 민가가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돼.

자, 네발로 기어 다닌 구로다 형사가 이 박사 저택과 선로 사이의 공터에서 무엇을 냄새 맡아 찾아냈냐 하면, 거기에는 열 개가 넘는 발자국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게 역사(轢死) 지점으로 집중되어 있는 형태라 언뜻 봐서는 뭐가 뭔지 몰랐을 게 틀림없어. 하지만 이걸 일일이 분류해서 조사해 낸 결과, 짚신(지카타비) 자국이 몇 종류, 나막신(게타) 자국이 몇 종류, 구두 자국이 몇 종류 하는 식으로 대충 알아낸 거지. 그래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머릿수와 발자국의 수를 비교해 보니, 딱 하나 발자국 쪽이 남는다는 걸 알게 됐어. 즉, 소속 불명의 발자국이 하나 발견된 거야. 게다가 그게 구두 자국이었지. 그 이른 아침에 구두를 신고 있는 사람은 일단 경찰 관계자들 외에는 없을 텐데, 그 사람들 중에는 아직 한 명도 돌아간 사람이 없었으니 조금 이상한 노릇이지. 더 자세히 조사해 보니, 그 의문의 구두 자국이 놀랍게도 박사 저택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걸 알아냈어."
"엄청나게 자세히도 아네." 듣고 있던 청년, 즉 마쓰무라가 이렇게 끼어들었다.

​"아니, 이 부분은 황색 신문(흥미 위주의 신문)에 신세를 진 바가 커. 거긴 이런 사건이 터지면 흥미 위주로 길게 보도하니까, 때론 도움이 되거든. 그래서 이번에는 박사 저택과 역사 지점 사이를 왕복한 발자국을 조사해 보니 네 종류가 있었어. 첫째는 방금 말한 소속 불명의 구두 자국, 둘째는 현장에 와 있는 박사의 짚신 자국, 셋째와 넷째는 박사 하인들의 발자국. 이것뿐이고, 정작 죽은 부인이 선로까지 걸어온 흔적이라는 게 보이지 않았어. 아마 그건 작은 버선발이나 맨발 자국이어야 할 텐데, 그게 어디에도 없었던 거야. 그렇다면 죽은 사람이 남자의 구두를 신고 선로까지 왔는가.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 이 구두 자국과 일치하는 자가 부인을 선로까지 안고 왔는가. 이 두 가지 중 하나지. 물론 전자는 말이 안 돼. 일단 후자의 추정이 확실하다고 봐도 무방한데, 그건 그 구두 자국에 묘한 특징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야. 그 구두 자국은 뒤꿈치 쪽이 땅에 아주 깊이 파고들어 있었거든. 어느 발자국을 보나 똑같은 특징이 있었지. 이건 무언가 무거운 것을 들고 걸었다는 증거야. 짐의 무게 때문에 뒤꿈치가 더 깊이 파고든 거지, 라고 형사가 판단했어. 이 점에 대해 구로다 씨는 황색 신문에서 한껏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는데, 그 사람 말이 이래. 『인간의 발자국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법이다. 이런 발자국은 절름발이고, 이런 발자국은 맹인이며, 이런 발자국은 임산부다』라며 대대적으로 발자국 탐정법을 설파하고 있어. 흥미가 생기면 어제 신문을 한 번 읽어 보게나.

​이야기가 길어지니 세세한 부분은 생략하기로 하고, 그 발자국을 통해 구로다 형사가 고심하여 탐정한 결과, 박사 저택 안방 마루 밑에서 문제의 구두 자국과 일치하는 단화 한 켤레를 발견해 냈어. 그게 불행히도 그 유명한 학자가 평소에 신던 것이라고 하인들의 증언으로 판명되었지. 그 외에도 세세한 증거는 여러 가지가 있어. 하인들의 방과 박사 부부의 방이 꽤 떨어져 있다는 점이나, 그날 밤 하인들은(여자 두 명이었는데) 깊이 잠들어 있어서 아침 소동이 일어나서야 눈을 떴고 한밤중의 일은 전혀 몰랐다는 점, 그리고 당사자인 박사가 그날 밤 드물게 집에 머물러 있었다는 점, 게다가 구두 자국의 증거를 뒷받침하는 듯한 박사 가정의 사정이라는 게 있었지.
그 사정이라는 건, 도미다 박사가 자네도 알다시피 고(故) 도미다 노(老)박사의 사위라는 사실이야. 즉, 부인은 집안의 재산을 물려받은 응석받이 외동딸인데다 고질적인 폐결핵을 앓고 있었고, 외모도 그리 뛰어나지 못한 데다 극심한 히스테리까지 부렸다는 거지. 그로 인해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는 건 누구나 상상할 수 있지 않겠나. 실제로 박사는 몰래 첩의 집을 마련해 두고 기생 출신이라는 여자를 끔찍이 아끼고 있었지. 뭐, 난 이런 사실이 박사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깎아내린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말이야. 아무튼, 히스테리라는 놈은 웬만한 남편을 미치게 만들어버리는 법이지. 박사의 경우도 이런 불편한 관계가 쌓이고 쌓여서 그 참사를 불러일으켰을 거다, 라는 추론은 꽤 논리정연하잖아.

​그런데 여기에 하나 남겨진 난제가 있어. 바로 처음에 말했던, 죽은 사람 품속에서 나왔다는 유서야. 이리저리 조사해 본 결과, 그건 틀림없이 박사 부인의 필적이라고 판명되었는데, 어떻게 부인이 마음에 없는 유서 같은 걸 쓸 수 있었을까? 그게 구로다 형사에게는 하나의 난관이었지. 형사 본인도 이 부분에서 꽤나 애를 먹었다고 털어놨지만 말이야. 아무튼 온갖 고생 끝에 발견해 낸 것이 바로 구겨진 몇 장의 휴지 조각이었어. 이게 뭐냐 하면 글씨 연습을 한 종이였는데, 박사가 부인의 필적을 어떤 이면지 같은 데다가 연습한 거였지. 그중 한 장은 부인이 여행 중인 박사에게 보낸 편지였고, 이걸 본보기 삼아 범인이 자기 아내의 필체를 연습했다는 뜻이야. 꽤 치밀하게 꾸민 거지. 그걸 형사가 박사의 서재 휴지통에서 발견했다는 거야.

​그래서 결론은 이렇게 돼. 눈엣가시이자 연애의 방해물이며 감당하기 힘든 광기를 가진 부인을 없애 버리자. 그것도 박사인 자신의 명예에 조금도 흠집이 나지 않는 방법으로 실행하자고 깊이 마음먹은 박사는, 약이라 속여 어떤 독약을 부인에게 먹인 뒤,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어깨에 둘러메고 문제의 단화를 꿰신고 뒷문을 나서서 마침 가까이 있는 철도 선로까지 옮겼어. 그리고 희생자의 품속에 미리 준비해 둔 그럴듯한 유서를 넣어 두었지. 이윽고 역사 사건이 발견되자 대담한 죄인은 몹시 놀란 표정을 지으며 현장으로 달려왔다. 대충 이런 사연이야.
왜 박사가 부인과 이혼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이런 위험한 길을 택했는가 하는 점은 아마 신문 기자 자신의 생각인 듯싶은데, 어떤 신문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더군. 첫째는 고(故) 노박사에 대한 의리상 세상의 비난이 두려웠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 잔혹한 짓을 감행한 박사에게는 어쩌면 이쪽이 주된 이유였을지도 모르지만, 박사 부인에게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꽤 쏠쏠한 재산이 있었다는 것. 이 두 가지를 들고 있어.
​그리하여 박사는 연행되고, 구로다 세이타로 씨의 명예는 치솟았으며, 신문 기자들에게는 뜻밖의 수확이 되었고, 학계에는 일대 불상사가 되어 자네 말대로 세상은 지금 이 소문으로 들끓고 있는 형국이지. 꽤 드라마틱한 사건임에는 틀림없으니까 말이야."


 

[오디오북으로 직접 감상해 보세요]


​소다는 이렇게 이야기를 끝맺고는, 앞에 놓인 유리잔을 단숨에 비웠다.
"현장을 직접 목격해서 흥미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참 자세히도 알아봤군. 그나저나 그 구로다라는 형사는 경찰관치고는 머리가 아주 비상한 사내네."
"뭐, 일종의 소설가라 할 수 있지."
"어, 그래 맞아. 아주 훌륭한 소설가야. 오히려 소설 이상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창작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하지만 내 생각에 그는 소설가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보네."
한 손을 조끼 주머니에 넣고 무언가 더듬으면서 소다가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마쓰무라는 담배 연기 속에서 눈을 끔벅이며 반문했다.
"구로다 씨는 소설가일지는 몰라도 탐정은 아니라는 얘기지."
"어째서?"

마쓰무라는 깜짝 놀란 듯했다. 무언가 엄청난, 전혀 예상치 못한 사실을 기대하는 듯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았다. 소다는 조끼 주머니에서 작은 종잇조각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리고,
"이게 뭔지 아나?" 하고 말했다.
"그게 어쨌다는 건가. PL 상회의 영수증이잖아." 마쓰무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래. 3등 급행열차의 대여 베개 대금 40전짜리 영수증이야. 이건 내가 역사 사건 현장에서 우연히 주운 거지만, 난 이걸로 박사의 무죄를 주장하려는 거네."
"바보 같은 소리 마, 농담이겠지."
마쓰무라는 아주 부정하는 것도 아닌, 반신반의하는 투로 말했다.
​"애초에 증거 따위에 얽매일 것 없이 박사는 무죄여야만 해. 도미다 박사 같은 대학자를 고작 히스테리 여자 하나의 목숨 때문에 이 세계――그래, 박사는 세계적인 인물이야. 전 세계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사람이라고.――이 세계에서 매장해 버리다니, 대체 어느 멍청이가 그런 짓을 생각한단 말인가. 마쓰무라 군, 실은 내가 오늘 1시 반 기차로 박사의 빈집을 방문할 작정이라네. 가서 집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 물어볼 게 있거든."
이렇게 말하며 손목시계를 힐끗 쳐다본 소다는 냅킨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박사는 스스로 변명하실 테지. 박사에게 동정하는 법률가들도 박사를 위해 변호할 거고. 하지만 내가 여기 쥐고 있는 이 증거물은 다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아. 이유를 말해 달라고? 조금만 기다려 주게. 좀 더 알아보지 않으면 완벽하지 않으니까. 내 추리에는 아직 약간의 빈틈이 있거든. 그걸 채우기 위해 잠깐 실례하고 다녀오겠네. 웨이터, 자동차 좀 불러 주게. 그럼, 내일 다시 만나기로 하지."



​하 (下)

​그다음 날, OO시에서 발행 부수가 가장 많다고 알려진 OO 신문 석간에, 아래와 같이 5단에 걸친 장문의 투고가 실렸다. 제목은 "도미다 박사의 무죄를 증명함"이었고, 소다 고로라고 서명되어 있었다.
​저는 이 투고와 동일한 내용을 담은 서면을, 도미다 박사 심문을 담당하고 계신 예심 판사 OO 씨에게 이미 제출했습니다. 아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만, 만에 하나라도 그분의 오해나 기타 다른 이유로 인해 일개 서생에 불과한 저의 이 진술이 어둠 속에 묻혀버릴 경우를 염려하여, 또한 유력한 담당 형사에 의해 증명된 사실을 뒤집는 저의 진술이 가령 채택된다 하더라도 사후에 제가 존경하는 도미다 박사님의 억울한 누명이 세상에 널리 알려질 만큼 명확하게 당국의 손으로 발표될 수 있을지를 염려하여, 여기에 여론을 환기할 목적으로 이 글을 싣는 바입니다.

​저는 박사님에 대해 어떠한 개인적인 은원도 없으며, 그저 그분의 저서를 통해 그 두뇌를 존경하는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눈뜨고 코 베이듯 잘못된 추리에 의해 죄를 뒤집어쓸 위기에 처한 우리 학계의 거장을 구원할 자는, 우연히도 그 현장에 있었고 조그만 증거물을 손에 넣게 된 저밖에 없다고 믿기에, 당연한 의무로서 이런 행동을 취하게 된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자, 어떤 이유로 저는 박사의 무죄를 믿는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사법 당국이 형사 구로다 세이타로 씨의 조사를 통해 추정한 박사의 범죄라는 것이 너무나도 유치하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어설픈 연극 같은 냄새가 짙게 풍긴다는 것입니다. 티끌만 한 미세함조차 놓치지 않는 그 투철하고 비할 데 없는 대학자의 두뇌와 이번 소위 범죄 사실이라는 것을 비교해 볼 때, 우리들은 어떤 느낌을 받게 됩니까? 그 사고방식의 엄청난 괴리에 오히려 쓴웃음을 금할 수 없지 않습니까?

경찰 당국은 박사님의 두뇌가 어설픈 구두 자국을 남기고, 가짜 필체 연습지를 남기고, 독약이 든 컵조차 남겨서 구로다 아무개 씨가 이름을 날리게 해 줄 정도로 노망이 났다고 말하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그 박식한 용의자가 독약이 시신에 흔적을 남기리라는 것조차 미리 알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겁니까? 저는 어떠한 증거를 제출할 필요조차 없이, 박사님은 당연히 무죄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단순한 추측만으로 이 진술을 결심할 만큼 무모한 자는 아닙니다.

​형사 구로다 세이타로 씨는 지금 혁혁한 무공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세간 사람들은 그분을 일본이 낳은 셜록 홈즈라고까지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 의기양양한 절정에 있는 분을 여기서 나락의 밑바닥까지 떨어뜨리는 것은, 저로서도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 실제로 저는 구로다 씨가 우리나라 경찰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수완가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번의 실패는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가 너무 좋았던 탓에 생긴 화근입니다. 그분의 추리법에는 오류가 없었습니다. 단지 그 재료가 되는 관찰에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즉, 치밀하고 주도면밀한 점에서 저라는 일개 서생보다 뒤떨어졌다는 것을 그분을 위해 깊이 애석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제가 제공하고자 하는 증거물이란 다음의 두 가지, 지극히 하찮은 물건들입니다.
​제가 현장에서 습득한 한 장의 PL 상회 영수증(3등 급행열차에 비치된 대여 베개 대금 영수증)
​증거품으로 당국에 보관되어 있는 박사님의 단화 끈.
​단지 이것뿐입니다. 독자 여러분에게는 이것이 너무나 가치 없게 보일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방면의 전문가들은 머리카락 한 올조차 중대한 범죄의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우연한 발견에서 출발했습니다. 사건 당일 현장에 있던 저는 검시관들의 활동을 지켜보던 중, 마침 제가 깔고 앉아 있던 돌멩이 하나 밑에서 하얀 종잇조각의 끝자락이 살짝 삐져나와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만약 그 종잇조각에 찍힌 날짜 도장을 보지 못했다면 아무런 의심도 생기지 않았겠지만, 박사님을 위해서는 다행스럽게도 그 날짜 도장이 제 눈에 어떤 계시처럼 아로새겨졌습니다. 19XX년 10월 9일, 즉 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전날의 날짜가 말입니다.
저는 20킬로그램은 족히 넘을 법한 그 돌멩이를 치우고, 비 때문에 찢어질 듯한 종잇조각을 주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PL 상회의 영수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호기심을 자극한 것입니다.
​자, 구로다 씨가 현장에서 간과한 점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우연히 저에게 주어진 PL 상회의 영수증이므로 이것을 제외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두 가지 점에 있어서 허술함이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영수증이라 하더라도 만약 구로다 씨가 대단히 치밀한 주의력을 갖고 있었다면 저처럼 우연이 아니라 능히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영수증을 누르고 있던 돌이라는 것이 박사 저택 뒤에 반쯤 완성된 하수구 옆에 잔뜩 굴러다니는 돌멩이 중 하나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데, 유독 그 돌멩이 단 하나만 멀리 떨어진 선로 쪽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은 구로다 씨 이상의 주의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무언가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져 주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저는 당시 그 영수증을 현장에 있던 경찰관 한 사람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제 호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방해되니 비켜 있으라고 호통치던 그 사람을, 저는 지금도 현장에 있던 수많은 경찰들 사이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점은, 소위 범인의 발자국이라는 것이 박사 저택 뒷문에서 출발하여 선로까지는 와 있었지만 다시 선로에서 박사 저택으로 돌아간 흔적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구로다 씨는 어떻게 해석하셨는지는――이 중대한 사실에 대해 생각 없는 신문 기자는 아무런 보도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범인이 희생자의 몸을 선로에 내려놓은 뒤 어떤 사정으로 선로를 따라 길을 돌아 저택으로 돌아갔다고 판단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조금만 우회하면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박사 저택까지 돌아갈 수 있는 장소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발자국과 일치하는 단화 자체가 박사 저택 안에서 발견된 사실을 통해, 설령 돌아간 발자국은 없을지언정 돌아갔다는 증거는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일견 그럴듯한 생각입니다만, 거기에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점이 있지 않습니까?

​세 번째 점은 대개 사람들의 주의에서 벗어나기 쉬운, 실제로 그것을 목격한 사람조차 전혀 신경 쓰지 않을 만한 종류의 것입니다. 바로 개 한 마리의 발자국이 그 주변 일대에, 특히 소위 범인의 발자국과 나란히 찍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왜 이것을 주의 깊게 보았느냐 하면, 사람이 열차에 치여 죽은 마당에 그 근처에 있던 개가, 더구나 발자국이 박사 저택 뒷문으로 사라진 것을 감안하면 필시 죽은 사람의 애견일 그 개가 이 소란스러운 현장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상으로 저는 소위 저의 증거라는 것들을 남김없이 열거했습니다. 예리한 독자라면 제가 앞으로 서술하고자 하는 바를 대략 짐작하셨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사족일지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저는 결론까지 진술해야만 합니다.
​그날 귀가했을 때만 해도 저는 아직 아무런 의견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점에 대해서도 각별히 깊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독자의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 일부러 명확하게 서술했을 뿐이지, 제가 당일 그 자리에서 이 모든 것을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튿날, 또 그다음 날 매일 아침 신문을 통해 제가 존경하는 박사님이 용의자로 연행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구로다 형사의 소위 탐정 무용담이라는 것을 읽게 되면서, 저는 이 진술 서두에 말씀드린 것과 같은 상식적인 판단에서 구로다 씨의 탐정에 어딘가 잘못된 점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당일 목격한 여러 가지 점을 종합해 보고, 그래도 남는 의문점에 대해서는 오늘 박사님 댁을 방문하여 집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캐물어본 결과, 마침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래에 순서를 따라 저의 추리의 궤적을 적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출발점은 PL 상회의 영수증입니다. 사건 전날, 아마도 전날 밤 깊은 시각에 급행열차 창밖으로 버려졌을 이 영수증이 왜 20킬로그램이나 되는 무거운 돌멩이 밑에 깔려 있었을까? 이것이 첫 번째 착안점이었습니다. 이것은 전날 밤 PL 상회의 영수증을 떨어뜨리고 간 열차가 통과한 후, 누군가가 그 돌멩이를 그곳으로 가져왔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차 선로에서, 혹은 돌을 싣고 통과하던 무개 화차 위에서 굴러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은 그 위치를 보면 명백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이 돌을 가져왔을까요? 꽤 무거운 것이니 먼 곳일 리는 없습니다. 당장 생각할 수 있는 곳은, 박사 저택 뒤편에 하수구를 쌓기 위해 놓아둔 수많은 돌멩이 중 하나라는 것인데, 쐐기 모양으로 깎인 그 생김새만 보아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즉, 전날 늦은 밤부터 그날 아침 역사가 발견될 때까지의 시간 사이에 박사 저택에서 역사가 발생한 장소까지 그 돌을 운반한 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발자국이 남아있어야 합니다. 전날 밤에는 비도 가늘어졌고 자정 무렵에는 그쳤으므로 발자국이 씻겨나갔을 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발자국이라는 것은, 현명하신 구로다 씨가 조사하신 대로 그날 아침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발자국 외에는 '범인의 발자국' 단 하나뿐입니다. 여기서, 돌을 운반한 자는 바로 그 '범인' 본인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 기묘한 결론에 도달한 저는, 어떻게 '범인'이 돌을 운반하는 일에 가능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고심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아주 교묘한 트릭이 농간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아연실색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을 안고 걸어간 발자국과 돌을 안고 걸어간 발자국, 그것은 숙련된 탐정의 눈을 속이기에 충분할 만큼 서로 비슷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이 놀라운 트릭을 눈치챈 것입니다. 즉 박사에게 살인 혐의를 씌우기를 바라는 누군가가, 박사의 구두를 신고 부인의 몸 대신 돌멩이를 안고 선로까지 발자국을 냈다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끔찍한 트릭의 제작자가 그 발자국을 남겼다고 한다면, 열차에 치여 죽은 당사자, 즉 박사 부인은 어떻게 선로까지 갔을까요? 그 발자국이 하나 모자라게 됩니다.

이상의 추리가 낳은 당연하고도 유일한 귀결로서, 저는 유감스럽게도 박사 부인 그 자신이 남편을 저주하는 끔찍한 악마였음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전율할 만한 범죄의 천재. 저는 질투에 미쳐버린, 게다가 폐결핵이라는――그것은 오히려 환자의 두뇌를 병적일 정도로 명석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불치병에 걸린 한 어두운 여인을 상상했습니다. 모든 것이 암흑입니다. 모든 것이 음습합니다. 그 암흑과 음습함 속에서 눈만 섬뜩하게 빛나는 창백한 여인의 환상, 수십 일 수백 일 동안의 환상, 그 환상의 실현을 생각하며 저는 나도 모르게 오싹함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차치하고 다음으로 두 번째 의문점입니다. 발자국이 박사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점은 어찌 된 것일까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열차에 치인 당사자가 신고 간 구두 자국이니 돌아가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게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와 같은 범죄적 천재성을 지닌 박사 부인이 왜 선로에서 박사 저택까지 발자국을 되돌려 놓는 것을 잊어버렸을까요? 그리고 만약 PL 상회의 영수증이 우연히도 열차 창밖으로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유일한 단서가 되었을 법한 어설픈 흔적을 어찌하여 남겼을까요?

​이 의문에 대해 해결의 열쇠를 던져 준 것은, 세 번째 의문점으로 제기했던 개의 발자국이었습니다. 저는 그 개의 발자국과 박사 부인의 이 유일한 실수를 결부시켜 보고는 미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부인은 박사의 구두를 신은 채 선로까지 왕복할 예정이었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다른 발자국이 찍히지 않을 만한 길을 골라 선로로 향할 작정이었겠지요.
하지만 우습게도 여기서 뜻밖의 방해꾼이 나타났습니다. 부인의 애견인 존이――이 '존'이라는 이름은 제가 오늘 그 집의 하인 아무개 씨로부터 알아낸 것입니다――부인의 기이한 행동을 눈치 빠르게 발견하고는 옆으로 다가와 맹렬하게 짖어댄 것입니다. 부인은 개의 짖는 소리에 식구들이 잠에서 깨어 자신을 발견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우물쭈물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죠. 설령 식구들이 깨지 않더라도 존의 짖는 소리에 동네 개들이 몰려오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그래서 부인은 이 난관을 역이용하여 존을 쫓아버리는 동시에 자신의 계획마저 수행할 수 있는 기발한 방법을 그 짧은 순간에 생각해 낸 것입니다.

​제가 오늘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존이라는 개는 평소에 가벼운 물건을 물고 심부름을 하도록 훈련받아 왔습니다. 주로 주인을 따라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저택으로 무언가를 가져다 놓는 식의 일에 익숙해져 있었죠. 그리고 그럴 경우 존은 가져온 물건을 반드시 안방에 놓아두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박사 저택을 방문하여 알아낸 또 다른 사실은, 뒷문에서 안방 퇇마루로 가기 위해서는 안뜰을 둘러싸고 있는 판자울타리의 쪽문을 통과하는 것 외에는 통로가 없었으며, 그 쪽문은 양실의 문 등에 있는 스프링 장치처럼 안쪽으로만 열리도록 만들어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박사 부인은 이 두 가지 점을 교묘하게 이용한 것입니다. 개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경우에 그저 말로 쫓아버리려 해서는 물러가지 않지만, 무언가 심부름을 시키면――예를 들어 나뭇가지를 멀리 던지고 주워 오게 하는 것 같은――반드시 그것을 따른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동물 심리를 이용하여 부인은 구두를 존에게 내주어 그 자리를 떠나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두가 적어도 안방 퇇마루 근처에 놓여 있을 것과――당시에는 덧문이 닫혀 있었을 테니 존도 평소 습관대로 하지는 못했을 겁니다――안쪽에서는 밀어도 열리지 않는 쪽문에 가로막혀 다시는 개가 그곳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상은 구두 자국이 돌아가지 않았다는 점과, 개의 발자국 등 기타 정황들, 그리고 박사 부인의 범죄적 천재성을 서로 결부시켜 제가 상상력을 발휘해 본 것에 불과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너무 억측이 아니냐는 비난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염려합니다. 오히려 발자국이 돌아가지 않은 것은 실제로 부인의 실수였고, 개의 발자국은 처음부터 부인이 구두 처리를 위해 계획한 바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쪽이 정답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제가 주장하고자 하는 '부인의 범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자, 여기에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개 한 마리가 한 켤레, 즉 두 짝의 구두를 어떻게 한꺼번에 나를 수 있었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에 대한 해답을 주는 것이 앞서 제시한 두 가지 증거물 중 아직 설명을 내리지 않은 "증거품으로 당국에 보관되어 있는 박사님의 구두 끈"입니다. 저는 같은 하인 아무개 씨의 기억을 통해, 그 구두가 압수되었을 당시 극장 신발장 관리인이 하는 것처럼 구두와 구두가 구두 끈으로 서로 묶여 있었다는 사실을 무척 고심하여 알아냈습니다. 형사 구로다 씨는 과연 이 점에 주의를 기울이셨을까요? 목적물을 발견한 기쁨에 들떠 어쩌면 간과하신 것은 아닐까요? 설령 간과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범인이 어떤 이유로 이 끈을 묶어서 퇇마루 밑에 숨겨두었다고 추측하는 선에서 안심해 버린 것은 아닐까요? 그렇지 않았다면 구로다 씨의 그 결론은 나오지 않았을 터입니다.

​이리하여 무서운 저주의 여인은 준비해 둔 독약을 마시고 선로에 누워, 명예의 절정에서 배척의 골짜기 밑바닥으로 내몰려 감옥 속에서 신음하게 될 남편의 환영을 향해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급행열차의 바퀴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약을 담았던 용기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독자가 그 선로 근처를 꼼꼼하게 뒤져본다면, 십중팔구 논의 진흙탕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부인의 품속에서 발견되었다는 유서에 관해서는 아직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만, 이 또한 구두 자국 등과 마찬가지로 두말할 나위 없이 부인이 만들어 둔 거짓 증거입니다. 제가 직접 그 유서를 본 것은 아니니 단순한 추측에 그치지만, 전문 필적 감정가에게 연구를 의뢰한다면 반드시 부인이 자기 자신의 필체 버릇을 흉내 낸 것이며, 거기 쓰인 문구는 실로 정직한 본심이었음이 판명될 것입니다. 그 외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일일이 반증을 들거나 설명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겠습니다. 그것은 이상의 진술을 통해 독자 여러분 스스로가 자연스레 깨닫게 되실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부인이 자살한 이유입니다만, 그것은 독자 여러분도 상상하시는 바와 같이 지극히 간단합니다. 제가 박사님의 하인 아무개 씨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그 유서에도 적혀 있듯 부인은 실제로 심각한 폐병 환자였습니다. 이 사실이 부인의 자살 원인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닐까요? 즉, 부인은 욕심 많게도 한 번의 죽음으로 염세적 자살과 연적(사랑)에 대한 복수라는 이중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저의 진술을 마칩니다. 이제는 오로지 예심 판사 OO 씨가 하루빨리 저를 소환해 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전날과 같은 레스토랑의 같은 테이블에 소다와 마쓰무라가 마주 앉아 있었다.
"하루아침에 인기스타가 되었구먼."
마쓰무라가 친구를 찬양하듯 말했다.
"그저 학계에 조금이나마 공헌할 수 있었던 것을 기뻐할 따름이야. 만약 장래에 도미다 박사님이 세계 학계를 놀라게 할 만한 저술을 발표하실 경우 말이야, 내가 그 서명란에 '소다 고로 공저'라는 금박 글씨를 덧붙여 달라고 박사님께 요구해도 무방하지 않겠나."
이렇게 말하며 소다는 덥석덥석 길러둔 긴 머리카락 속으로 마치 빗질이라도 하듯 손가락을 쫙 펴서 밀어 넣었다.
"그건 그렇고, 자네가 이렇게나 뛰어난 탐정일 줄은 정말 몰랐어."
"그 탐정이라는 말은 '공상가'로 정정해 주게. 사실 내 공상이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나도 모르거든. 이를테면 만약 그 용의자가 내가 숭배하는 대학자가 아니었다고 친다면, 도미다 박사 본인이 부인을 살해한 범인이라는 결론조차도 내 나름대로 공상해 냈을지 모를 일이지. 그랬다면 내 스스로가 가장 유력한 증거로 제시했던 것들을 모조리 부정해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이보게, 알겠나? 내가 그럴싸하게 늘어놓은 증거라는 것들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전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다른 경우마저 얼마든지 상상해 볼 수 있는 애매모호한 것들뿐이라네. 단 하나 확실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PL 상회의 영수증뿐인데, 그것마저도 말이야, 이를테면 문제의 돌멩이 밑에서 주운 것이 아니라 그 돌멩이 옆에서 주웠다고 한다면 어쩔 텐가?"
​소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씩 웃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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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의 번역 및 각색 원고는 '원아나의 책 읽는 TV'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무단 도용 및 상업적 배포를 금하며, 인용 시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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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 한 장의 기차표(영수증) - 사랑의 복수인가, 완벽한 알리바이인가? [원기범 아나운서의 책 읽는 TV 꿀잠 오디오북] 추리소설

 

일본 미스터리 소설의 아버지, 에도가와 란포(江戸川 乱歩)가 1923년 발표한 단편《한 장의 기차표(一枚の切符) (영수증)》입니다. 한 명문대 박사 부인의 투신자살 사건을 두고 벌어지는 두 청년의 지적 유희와 추리 대결을 다룹니다.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면서도 인간의 질투와 복수심이라는 보편적 테마를 정교한 트릭으로 풀어낸 명작입니다.





​줄거리 (Synopsis)

​평화로운 마을 외곽 철도 선로에서 도미다 박사의 부인이 열차에 치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현장에서 발견된 유서와 폐결핵이라는 정황은 명백한 '자살'을 가리키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예리한 구로다 형사는 현장의 발자국과 박사의 서재에서 발견된 글씨 연습 흔적을 토대로, 박사가 부인을 독살한 뒤 자살로 위장했다는 충격적인 결론을 내립니다.
​ (이하는 스포일러 주의해주세요) 




​모두가 박사를 살인마로 몰아갈 때, 사건 현장을 목격했던 청년 '소다'는 우연히 주운 '한 장의 기차표'와 박사네 애견 '존'의 행동을 근거로 전혀 다른 추리를 내놓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앞둔 부인이 남편을 파멸시키기 위해 스스로 설계한 '무서운 복수'였다는 것!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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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원고) [일기장_에도가와 란포] 전문(全文) 수록 [일본 미스터리 소설] 에도가와 란포 '일기장' - 죽은 동생의 일기장에 숨겨진 잔혹한 비밀 | 원아나의 책 읽는 TV 꿀잠 오디오북



☆원아나의 한마디☆
전해지지 못한 진심은 때로 가장 잔혹한 암호가 되어 돌아옵니다. 고요한 서재를 채우는 일기장 속 서늘한 고백, 그 마지막 한 문장이 선사하는 충격적인 여운을 아나운서의 정제된 목소리로 함께 마주해 보십시오.


소설 원고 전문(全文)

일기장

에도가와 란포


​마침 동생이 죽은 지 이레째 되는(초칠일) 밤의 일이었습니다. 나는 죽은 동생의 서재에 들어가, 그가 남긴 글 같은 것을 꺼내보며 홀로 상념에 잠겨 있었습니다.

​아직 밤이 그리 깊지도 않았는데, 온 집안은 눈물에 젖어 쥐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왠지 신파극 같기는 하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물건 파는 소리 등이 무척이나 구슬프게 울려 퍼졌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어릴 적의 차분하고 애틋한 기분이 들어 문득 그곳에 있던 동생의 일기장을 펼쳐 보았습니다.

​이 일기장을 볼 때마다, 나는 아마도 사랑조차 모른 채 세상을 떠났을 스무 살 동생이 가엾게 느껴져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내성적이고 친구도 적었던 동생은 자연히 서재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얇은 펜으로 꼼꼼하게 적어 내려간 일기장만 보아도 그런 그의 성격을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는 인생에 대한 의구심이라든가 신앙에 관한 번민이라든가, 그의 나이대라면 누구나 겪을 법한 이른바 청춘의 방황에 대해, 유치하긴 해도 무척이나 진지한 문장들이 쓰여 있었습니다.

​나는 내 과거의 모습을 바라보는 듯한 마음으로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그 페이지 곳곳에는, 쓰여 있는 문장 너머로 비둘기같이 겁 많아 보이는 동생의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3월 9일 자까지 읽어 내려갔을 때, 감회에 젖어 있던 내가 무심코 가벼운 탄성을 내뱉을 정도로 내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순결한 그 일기의 문장 속에 처음으로 불쑥, 화사한 여자의 이름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발신란'이라고 인쇄된 곳에 '기타가와 유키에(엽서)'라고 적힌 그 유키에 씨는, 나도 잘 아는 우리와 먼 친척뻘 되는 집안의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였습니다.

​그렇다면 동생은 유키에 씨를 사랑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왠지 모를 옅은 전율을 느끼며 계속해서 그 뒷장을 넘겨보았습니다만, 내 잔뜩 부푼 기대와는 달리 일기 본문에는 유키에 씨가 전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다음 날 수신란에 '기타가와 유키에(엽서)'라고 적힌 것을 시작으로, 며칠 간격을 두고 수신란과 발신란 양쪽에 유키에 씨의 이름이 적혀 있을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그것도 발신은 3월 9일부터 5월 21일까지, 수신 역시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어 5월 17일까지, 양쪽 모두 석 달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이어졌을 뿐입니다. 그 이후로는 동생의 병세가 악화되어 펜을 쥘 수조차 없게 된 10월 중순에 이르기까지, 그의 절필이라 부를 수 있는 마지막 페이지조차 유키에 씨의 이름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세어보니 동생 쪽에서는 8번, 유키에 씨 쪽에서는 10번 편지가 오갔을 뿐이며, 게다가 동생의 것에도 유키에 씨의 것에도 전부 '엽서'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면 남의 눈을 꺼릴 만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일기장 전체의 분위기로 미루어 보아, 실제로는 그 이상의 일이 있었는데도 그가 일부러 적지 않은 것이라고도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안심이랄지 실망이랄지 모를 묘한 기분으로 일기장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동생은 결국 사랑도 모른 채 죽었구나 싶어 쓸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윽고 문득 고개를 들어 책상을 바라본 나는 그곳에 동생이 생전에 아끼던 작은 문서 상자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살아생전 가장 소중한 물건들을 보관해 두었을, 돋을새김 무늬가 있는 고풍스러운 상자 안에는 어쩌면 나의 이 쓸쓸한 마음을 달래줄 무언가가 숨겨져 있지는 않을까. 그런 호기심에 나는 무심코 그 상자를 열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안에는 이 이야기와 관계없는 여러 서류 등이 들어 있었지만, 그 맨 밑바닥에서... 아아, 역시 그랬던가. 무척이나 소중한 듯 백지에 싸놓은 열한 장의 그림엽서가, 유키에 씨가 보낸 그림엽서가 나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낸 것이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소중하게 상자 밑바닥에 숨겨두듯 보관하겠습니까.

​나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그 열한 장의 그림엽서를 차례차례 살펴보았습니다. 어떤 감동 때문에 엽서를 쥔 내 손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일까요. 그 엽서들에는 어느 문장에서도, 혹은 그 문장들의 행간에서조차 연애편지다운 느낌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동생은 그 겁 많은 성격 탓에 마음속을 털어놓을 용기조차 내지 못하고, 그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온 아무 의미도 없는 이 몇 통의 그림엽서를 부적이나 되는 양 소중히 간직하며 가엾게도 그것으로나마 위안을 삼았던 것일까요. 그리고 결국 보답받지 못한 마음을 품은 채 이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일까요.

​나는 유키에 씨가 보낸 그림엽서를 앞에 두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찌 된 영문일까요. 이윽고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동생의 일기에는 유키에 씨로부터 받은 편지가 10번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그건 아까 세어보아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여기에는 열한 통의 그림엽서가 있지 않습니까. 마지막 엽서는 5월 25일 자로 되어 있습니다. 분명 그날 일기에는 수신란에 유키에 씨의 이름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일기장을 집어 들고 그 5월 25일 자를 펼쳐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나는 엄청난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확실히 그날의 수신란은 공백으로 남겨져 있었지만, 본문 속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편지에 대해 Y로부터 그림엽서 오다. 실망. 나는 너무 겁쟁이였다. 이제 와서는 돌이킬 수 없다. 아아."

​Y라는 것은 유키에 씨의 이니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외에 같은 이니셜을 가진 지인은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 문구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일기에 따르면, 그는 유키에 씨에게 엽서만 보냈을 뿐입니다. 설마 엽서에 연애편지를 썼을 리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기에는 적혀 있지 않은 밀봉된 편지(그것이 이른바 '마지막 편지'일지도 모릅니다)를 보낸 적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에 대한 답장으로 이 무의미한 그림엽서가 돌아왔다는 말일까요? 과연, 그 이후로 그도 유키에 씨도 연락을 끊은 것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유키에 씨가 보낸 마지막 엽서의 내용은 가령 거절의 의미를 담은 것이라 하더라도 너무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이미 그 무렵 동생은 병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병문안하는 문구만이 아름다운 글씨체로 적혀 있을 뿐이니까요. 게다가 발신과 수신을 이렇게나 꼼꼼히 기록하던 동생이 8통의 엽서 외에 밀봉된 편지를 보냈다면 그것을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 이 '실망' 어쩌고 하는 문구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그런 식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앞뒤가 맞지 않는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것은 죽은 동생이 남기고 간 하나의 수수께끼로서 조용히 묻어두어야 할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무슨 업보인지 나에게는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사실에 부딪히면 마치 탐정이 범죄의 흔적을 찾아 돌아다니듯 끝까지 그 진상을 밝혀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성질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 경우에는 그 수수께끼가 당사자에 의해 영원히 풀릴 기회가 없다는 사정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의 진위가 내 자신의 신상에도 큰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타고난 탐정 벽이 더욱 강하게 나를 사로잡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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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 따윈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수수께끼를 푸는 데 열중했습니다. 일기도 반복해서 읽어보았습니다. 그 밖에 동생이 쓴 글 등도 남김없이 찾아내어 조사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연애의 기록 같은 것은 단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동생은 지독히 수줍음을 타는 데다 더할 나위 없이 조심스러운 성격이었으니, 아무리 찾아본들 그런 것이 남아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아무리 생각해도 풀릴 것 같지 않은 수수께끼를 푸는 데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긴 시간이었습니다.

​이윽고, 갖가지 헛고생 끝에 문득 나는 동생이 엽서를 보낸 날짜에 의구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일기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순서입니다.

3월……9일, 12일, 15일, 22일,
4월……5일, 25일,
5월……15일, 21일,

​이 날짜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심리에 반하는 것은 아닐까요. 비록 연애편지가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연락이 뒤로 갈수록 뜸해진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유키에 씨가 보낸 엽서의 날짜와 대조해 보면 그 이상한 점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3월……10일, 13일, 17일, 23일,
4월……6일, 14일, 18일, 26일,
5월……3일, 17일, 25일,

​이것을 보면 유키에 씨는 동생의 엽서에 대해 (그것들은 모두 아무 의미 없는 내용이었지만) 각각 답장을 보낸 것 외에도 4월 14일, 18일, 5월 3일, 적어도 이 3번만큼은 그녀 쪽에서 적극적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만약 동생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면 왜 이 세 번의 편지에 대해 답장하는 것을 게을리했을까요. 그것은 그 일기장의 문구와 함께 생각해보면 너무 부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일기에 따르면 당시 동생은 여행을 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펜조차 쥘 수 없을 정도로 아팠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유키에 씨의 무의미한 문장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빈번한 연락은 상대가 젊은 남자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상하게 생각하려면 생각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양쪽 모두 짠 것처럼 5월 25일 이후로는 딱 끊어지듯 연락을 하지 않게 된 것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요.
​그렇게 생각하고 동생이 엽서를 보낸 날짜를 보니, 거기에 무언가 의미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혹시 그는 암호로 된 연애편지를 쓴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이 엽서의 날짜가 그 암호문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비밀을 좋아하는 동생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날짜의 숫자가 '가나다'나 '알파벳(ABC)' 등 어떤 문자의 순서를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일일이 시험해 보았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암호 해독에 약간의 경험이 있었거든요.

​그러자, 어찌 된 일일까요! 3월 9일은 알파벳의 아홉 번째인 I, 마찬가지로 12일은 열두 번째인 L, 그런 식으로 대입해 나가니 이 여덟 개의 날짜는 놀랍게도 'I LOVE YOU'라고 풀 수 있지 않습니까. 아아, 이 얼마나 아이 같으면서도 세상에서 제일 끈기 있는 연애편지란 말입니까. 그는 이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단 한마디를 전하기 위해 꼬박 석 달이라는 세월을 들인 것입니다. 정말이지 거짓말 같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동생의 특이한 성벽을 잘 알고 있던 나에게는 이것이 우연의 일치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추측하면 모든 것이 명백해집니다. '실망'이라는 의미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마지막 U자에 해당하는 엽서를 보낸 것에 대해 유키에 씨는 변함없이 무의미한 그림엽서로 답한 것입니다. 게다가 그때는 마침 동생이 의사로부터 그 끔찍한 병을 선고받은 무렵이었습니다. 가엾은 그는 이 이중의 타격에 더 이상 연애편지를 쓸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이겠죠. 그리고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당사자인 연인에게 털어놓기는 했지만 그 뜻이 통하지 않아 생긴 애달픈 마음을 안고 죽어간 것입니다.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두운 기분에 휩싸여, 가만히 그곳에 앉은 채 일어설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유키에 씨가 보낸 그림엽서를, 동생이 상자 밑바닥 깊숙이 간직하고 있던 그 그림엽서들을 아무 이유 없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오, 이 얼마나 뜻밖의 사실입니까! 쓸데없는 호기심이여, 저주받을진저. 차라리 모든 것을 모른 채 지내는 편이 얼마나 좋았을까. 이 유키에 씨가 보낸 그림엽서 앞면에는 예쁜 글씨로 동생의 이름이 적힌 옆에,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우표가 비스듬하게 붙어 있지 않습니까. 일부러 그러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정도로 아주 반듯하게, 비스듬히 붙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결코 우연한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아주 예전, 아마 초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문예 잡지에 우표 붙이는 방법에 따라 비밀 통신을 하는 방법이 적혀 있던 것을, 그때부터 이미 호기심 많은 소년이었는지라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사랑을 표현하려면 우표를 비스듬히 붙이면 된다는 대목은 사실 한 번 응용해 본 적도 있을 정도라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이 방법은 당시 젊은 남녀들의 인기를 끌어 꽤나 유행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옛날 유행을 요즘 젊은 여자가 알 리가 없겠지만, 마침 유키에 씨와 동생이 편지를 주고받던 무렵 우노 코지(宇野浩二)의 <두 사람의 아오키 아이자부로(二人の青木愛三郎)>라는 소설이 나왔고, 그 안에 이 방법이 자세히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우리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었을 정도니 동생도 유키에 씨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동생은 그 방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유키에 씨가 석 달 동안이나 같은 행동을 반복하다 결국 실망해 버릴 때까지도 그녀의 마음을 깨닫지 못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그 점은 나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우표 붙이는 방법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사랑에 푹 빠져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죠. 어찌 됐든 '실망' 따위의 말을 적은 것을 보면 그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나저나 요즘 세상에 이렇게나 고풍스러운 사랑이 다 있을까요. 내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그 사랑을 서로 호소하고 있으면서도, 양쪽 모두 조금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한 사람은 깊은 상처를 안고 이 세상을 떠났고, 다른 한 사람은 슬픈 실연의 아픔을 간직한 채 긴 생애를 살아가야만 하다니요.

​그것은 너무나도 겁 많고 소극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유키에 씨야 젊은 여자이니 참작할 만한 여지도 있지만, 동생의 수단에 이르러서는 겁이 많다기보다 차라리 비겁함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죽은 동생의 방식을 조금도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도리어 나는 그의 이런 특이한 성벽이 세상 무엇보다 애처롭게 느껴집니다.
​태어날 때부터 몹시 수줍음이 많고 겁쟁이이면서도 자존심은 꽤나 강했던 그는, 사랑을 할 때에도 먼저 거절당했을 때의 부끄러움부터 상상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동생 같은 기질을 가진 남자에게 있어서 보통 사람은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고통입니다. 그의 형인 나에게는 그것이 잘 이해됩니다.
​그는 이 거절당하는 수치를 예방하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을까요. 사랑을 고백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하지만 만약 고백했다가 거절당한다면 그 부끄러움과 어색함은 상대방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한 언제까지고 계속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만약 거절당했을 경우에 그것은 연애편지가 아니었다고 변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옛날 궁정 사람들은 어느 쪽으로든 뜻을 해석할 수 있는 '연가(恋歌)'라는 교묘한 방법을 통해 노골적인 거절의 고통을 누그러뜨리려 했습니다. 그의 경우도 딱 그것입니다. 단지 그는 평소 즐겨 읽던 추리소설에서 착안한 암호 통신을 통해 그 목적을 달성하려 했는데, 그것이 불행히도 너무 깊은 조심성 때문에 그토록 난해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나저나, 그는 자기 자신의 암호를 고안해 낸 치밀함과는 어울리지 않게 상대방의 암호를 푸는 데에는 어쩌면 이리도 둔감했던 것일까요. 지나친 자만심 때문에 터무니없는 실패를 저지르는 일은 세상에 종종 있지만, 이건 반대로 자만심이 너무 없어서 생긴 비극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요.
​아아, 나는 동생의 일기장을 펼쳐본 탓에 돌이킬 수 없는 사실에 닿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때의 심정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까요. 그것이 단지 젊은 두 사람의 가엾은 엇갈림을 슬퍼하는 것뿐이었다면 그나마 나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게는 또 하나의 더 이기적인 감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이 내 마음을 미칠 듯이 어지럽혔습니다.

​나는 뜨거워진 머리를 겨울밤의 얼어붙은 바람에 식히기 위해 그곳에 있던 나막신을 꿰어 신고 비틀비틀 마당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어지러운 마음 그대로 나무 사이를 빙글빙글 끝도 없이 걸어 다녔습니다.
​동생이 죽기 두 달쯤 전에 결정된, 나와 유키에 씨의 돌이킬 수 없는 약혼에 대해 생각하면서 말입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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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_소름 돋는 반전] 죽은 동생의 일기장에 숨겨진 잔혹한 비밀 | 에도가와 란포 단편 소설 『일기장』 (원기범 아나운서의 책 읽는 TV 꿀잠 오디오북)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 에도가와 란포가 그려낸 가장 슬프고도 잔인한 엇갈림. 죽은 동생의 서재에서 우연히 발견한 일기장과 11장의 엽서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요? 촘촘히 쌓아 올린 서사 끝에 기다리는 충격적인 결말을 '원아나의 책 읽는 TV'의 생생한 오디오북과 현대어 번역 전문으로 직접 확인해 보세요.


줄거리 

주인공인 '나'는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 동생의 서재를 정리하던 중, 동생의 일기장을 발견합니다. 지독하게 내성적이고 겁이 많았던 동생의 일기에는 먼 친척이자 아름다운 아가씨인 '유키에'와 짧은 기간 엽서를 주고받은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기장 내용이나 엽서의 문면 어디에도 흔한 사랑 고백 하나 없이 밋밋한 안부 인사뿐이었고, 동생은 일기에 "실망. 나는 너무 겁쟁이였다. 이제 와서는 돌이킬 수 없다"라는 수수께끼 같은 문구만을 남긴 채 눈을 감았습니다.

평소 탐정 기질이 다분했던 '나'는 동생이 남긴 엽서의 발신 날짜들을 분석하다가, 동생이 날짜의 알파벳 순서를 조합해 "I LOVE YOU"라는 치밀하고도 소심한 암호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동생은 유키에가 암호를 눈치채지 못했다고 생각해 상처받고 포기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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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읽는 것과는 또 다른 몰입감, 원아나의 목소리로 이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먼저 느껴보시는 건 어떨까요?

🚨 [주의! 이 아래부터는 이야기의 핵심 반전 및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말을 미리 알고 싶지 않으시다면 오디오북을 먼저 감상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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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반전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유키에가 동생에게 보낸 엽서들을 다시 살펴보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습니다. 유키에가 보낸 모든 엽서의 우표가 **'비스듬하게'** 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소설에 등장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의미의 비밀 통신법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끊임없이 마음을 전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서로의 암호를 눈치채지 못한 채 비극적인 엇갈림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깨달은 형 '나'는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절망과 혼란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동생이 죽기 두 달 전, **'나'와 유키에의 약혼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이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감상 포인트 

"가장 치밀한 암호가 불러온 가장 비극적인 결말"
에도가와 란포의 『일기장』은 피가 튀거나 끔찍한 범죄가 등장하는 자극적인 추리소설이 아닙니다. 대신 인간의 심리 기저에 깔린 '수줍음', '자존심', 그리고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극대화하여 가장 일상적인 소품(엽서와 우표)만으로도 소름 돋는 반전을 이끌어냅니다.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 날짜로 암호를 만든 남자와, 부끄러운 마음에 우표를 삐뚤게 붙여 마음을 전한 여자. 서로를 향한 사랑이 너무나 조심스러웠기에, 그들은 각자의 암호망에 갇혀 상대의 신호를 읽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가슴 아픈 로맨스를 단숨에 스릴러로 뒤바꿔버리는 마지막 단 한 줄의 문장.

*"동생이 죽기 두 달쯤 전에 결정된, 나와 유키에 씨의 돌이킬 수 없는 약혼에 대해 생각하면서..."*

이 마지막 독백은 독자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찜찜함과 씁쓸한 여운을 남깁니다. 형의 이기적인 감정이입과 잔혹한 운명의 장난이 교차하는 명작 단편소설, 여러분은 어떻게 들으셨나요?


저희 블로그에서 이 소설의 텍스트(원고)를 보실 수 있습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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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28일 화요일

​[에도가와 란포] '붉은 방' – 99명을 죽인 남자의 기괴한 고백, 법망을 피한 완전범죄의 실체 | 원기범 아나운서의 책 읽는 TV 꿀잠 오디오북 [일본 추리소설]


 


붉은 방 (赤い部屋) - 소설 전문(全文)
에도가와 란포 (江戸川乱歩)


​기이한 흥분을 좇아 모인 일곱 명의 진지한 남자들이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일부러 이를 위해 꾸며놓은 '붉은 방'의, 붉은 벨벳으로 덮인 깊숙한 안락의자에 파묻혀 오늘 밤의 이야기꾼이 어떤 괴이한 이야기를 꺼낼지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다.

​일곱 사람의 한가운데에는, 역시 붉은 벨벳으로 덮인 커다란 원탁 위에 고풍스럽게 조각된 촛대가 놓여 있었고, 거기에 꽂힌 세 자루의 굵은 양초가 아스라이 흔들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방의 사방에는 창문이나 출입문조차 가려둔 채, 천장에서 바닥까지 새빨갛고 묵직한 휘장이 풍성한 주름을 만들며 늘어져 있었다. 낭만적인 촛불의 빛이, 갓 정맥에서 흘러나온 피처럼 검붉은 색을 띤 휘장 표면에 우리 일곱 사람의 기이하게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리고 그 그림자들은 촛불의 불꽃을 따라, 마치 몇 마리의 거대한 곤충이라도 된 것처럼 휘장 주름의 곡선 위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며 기어 다니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 방은 나를, 마치 엄청나게 거대한 생물의 심장 속에 들어와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나에게는 그 심장이, 크기에 걸맞은 느릿한 속도로 쿵쾅쿵쾅 맥박 치는 소리조차 느껴지는 듯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촛불 너머로,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의 그림자 져 검붉게 보이는 얼굴을 그저 무심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 얼굴들은 신기하게도, 마치 가면처럼 무표정하게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윽고 오늘 밤의 이야기꾼으로 정해진 신입 회원 T씨가, 자리에 앉은 채로 가만히 촛불을 응시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명암의 조화로 인해 해골처럼 보이는 그의 턱이 말을 할 때마다 덜그럭덜그럭 스산하게 맞물리는 모습을, 기괴한 태엽 장치 인형을 보는 듯한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제 스스로는 확실히 제정신이라고 생각하고, 남들도 저를 그렇게 대우해 주고 있습니다만, 정말로 제정신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미치광이일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는 아니라 해도, 어떤 종류의 정신병자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요. 좌우간 저라는 인간은, 신기할 정도로 이 세상이 시시합니다.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나도 지루하고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남들처럼 이런저런 유흥에 빠져본 시절도 있었습니다만, 그 어떤 것도 제 타고난 지루함을 달래주지는 못했고, 오히려 '이제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라는 건 이것으로 끝인가, 아아 시시하다' 하는 실망감만 남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점점 저는 무언가를 하는 것 자체가 귀찮아졌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놀이가 재미있다, 분명 널 기쁘게 해 줄 거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들으면, '오, 그런 게 있었나, 당장 해봐야지' 하고 솔깃해하는 대신, 우선 머릿속으로 그 재미를 이것저것 상상해 보는 겁니다. 그리고 실컷 상상을 굴려본 결과는 언제나 '뭐, 별거 아니군' 하고 얕잡아 보게 되고 마는 것이죠.

​그런 식으로 한때 저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밥을 먹거나 자고 일어나는 날들을 보냈습니다. 머릿속으로만 온갖 공상을 굴리며 이것도 시시하다, 저것도 지루하다며 닥치는 대로 깎아내리면서, 죽는 것보다 괴롭고, 그러면서도 남들 보기엔 더없이 편안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하루하루 빵(생계)에 쫓기는 처지였다면 오히려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억지로 하는 노동이라 할지라도 좌우간 뭔가 할 일이 있다면 행복한 법이니까요. 아니면 제가 엄청난 대부호였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분명 그 큰돈의 힘으로 역사상의 폭군들이 했던 엄청난 사치나, 피비린내 나는 유희, 그 밖의 온갖 즐거움에 빠져들 수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물론 그것도 이룰 수 없는 소원이라 치면, 저는 그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게으름뱅이처럼 차라리 죽어버리는 편이 나을 정도로 쓸쓸하고 나른한 하루하루를 가만히 누워서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은 분명 '그렇겠지, 그렇겠지. 하지만 세상일에 지루해하는 점에서는 우리도 자네에게 결코 뒤지지 않네. 그러니까 이런 클럽을 만들어서 어떻게든 이상한 흥분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게 아닌가. 자네도 지루해 견딜 수 없었기에 지금 우리 무리에 들어온 것이겠지. 새삼스럽게 듣지 않아도 자네가 지루해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네.'라고 말씀하실 게 틀림없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저는 굳이 장황하게 제 지루함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런 지루함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계시리라 믿었기에, 저는 오늘 밤 이 자리에 참석하여 저의 기묘한 신세 한탄을 들려드리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저는 이 아래층 레스토랑에 자주 드나들었기에 자연스레 이곳 주인과도 친해졌고, 꽤 오래전부터 이 '붉은 방' 모임에 대해 듣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번 가입을 권유받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 법한 지루함의 화신인 제가 오늘날까지 가입하지 않았던 이유는, 실례되는 말씀일지도 모르나, 제가 여러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깊이 지루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심하게 지루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범죄와 탐정 놀이입니까, 강령술이나 기타 심령에 관한 각종 실험입니까, 춘화(Obscene Picture) 동영상이나 실연, 혹은 관능적인 유희입니까, 형무소나 정신병원, 해부학 교실 참관입니까? 아직 그런 것들에 조금이라도 흥미를 가지실 수 있는 여러분은 행복한 분들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사형 집행을 훔쳐볼 계획을 세우고 계시다는 말을 들었을 때조차 조금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주인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무렵엔 이미 그런 뻔한 자극에 질려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유희, 라고 말하기엔 조금 끔찍한 기분도 듭니다만, 제게는 유희라고 해도 좋을 어떤 일을 발견하고 그 즐거움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유희라는 것은, 갑자기 말씀드리면 깜짝 놀라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살인입니다. 진짜 살인 말입니다. 게다가 저는 그 유희를 발견한 이후 오늘까지 백 명 가까운 남자와 여자, 아이들의 목숨을 단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목적으로 빼앗아 왔습니다. 여러분은 그럼 제가 지금 그 무서운 죄악을 뉘우치고 참회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고 지레짐작하실지 모르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조금도 후회 따윈 하지 않습니다. 저지른 죄를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아아 이 무슨 일입니까. 저는 최근에 이르러 그 살인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자극에조차 질려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남이 아니라 제 자신을 죽이는 일, 바로 그 아편을 피우는 일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저라도 목숨만은 아까웠던 모양인지 참고 참아왔습니다만, 살인조차 질려버렸으니 이제 자살이라도 계획하는 것 말고는 자극을 구할 방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저는 머지않아 아편의 독 때문에 목숨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적어도 앞뒤가 맞는 말을 할 수 있는 동안에 누군가에게 제가 해온 일들을 털어놓고 싶었습니다. 그러기엔 이 '붉은 방' 분들이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요.

​그런 까닭에, 저는 사실 여러분의 동료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오직 제 이 이상한 이야기를 들어주시길 바라는 마음에 회원 중 한 명으로 끼워 달라고 한 것입니다. 다행히 신입 회원은 첫날밤에 반드시 모임의 취지에 맞는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기에, 이렇게 오늘 밤 제 소원을 이룰 기회를 잡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3년 전쯤의 일이었습니다. 그 무렵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온갖 자극에 질려 아무런 삶의 보람도 없이, 마치 '지루함'이라는 이름의 동물이라도 된 것처럼 뒹굴거리며 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만, 그해 봄, 아직 추울 무렵이었으니 아마 2월 말이나 3월 초쯤이었을 겁니다. 어느 날 밤 저는 하나의 묘한 사건과 맞닥뜨렸습니다. 제가 백 명의 목숨을 빼앗게 된 것은, 실로 그날 밤의 사건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어딘가에서 늦게까지 깨어 있던 저는, 한 1시쯤이었을까요. 술에 조금 취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추운 밤인데도 인력거도 타지 않고 어슬렁어슬렁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었습니다. 골목 하나만 더 돌면 우리 집이라는, 그 골목을 무심코 휙 돌았을 때, 맞은편에서 한 남자가 무언가 당황한 기색으로 허둥지둥 이쪽으로 오다가 저와 쾅 부딪혔습니다. 저도 놀랐지만 남자는 더 놀랐는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제 모습을 알아보자 다짜고짜 '이 근처에 병원 없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세히 들어보니, 그 남자는 자동차 운전기사인데, 방금 저기서 한 노인을 (이런 야밤에 혼자 돌아다니는 걸 보니 아마 노숙자였겠지요) 치어 큰 상처를 입혔다는 겁니다. 과연 보니, 바로 두세 발짝 앞쪽에 자동차 한 대가 서 있고, 그 곁에 사람 같은 것이 쓰러져 으으 하고 희미하게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파출소는 꽤 멀었고 게다가 부상자의 고통이 심해 보이니, 기사는 무엇보다 먼저 의사를 찾으려 했던 게 틀림없습니다.

​저는 그 근처 지리에 관해선 저희 집 근처의 일이니 병원 위치 등도 잘 알고 있었기에 당장 이렇게 알려주었습니다.
'여기서 왼쪽으로 두 블록쯤 가면 왼쪽에 붉은 간판 등에 불이 켜진 집이 있소. M의원이라는 곳이오. 거기로 가서 문을 두드려 깨우시오.'
그러자 기사는 곧바로 조수의 도움을 받아 부상자를 그 M의원 쪽으로 옮겨갔습니다. 저는 그들의 뒷모습이 어둠 속에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만, 이런 일에 엮여봤자 귀찮기만 할 것 같아 이내 집으로 돌아왔고, (저는 독신입니다) 식모 아주머니가 깔아둔 이부자리에 들어가 술기운 때문인지 여느 때와 달리 금세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만약 제가 그대로 그 사건을 잊어버리기만 했다면, 그것으로 끝날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저는 전날 밤의 그 사소한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상자는 살았으려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까지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저는 문득 묘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뿔싸, 내가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구나.'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리 술에 취해 있었다고는 하나 결코 제정신을 잃었던 것은 아닌데, 나란 놈이 무슨 생각으로 그 부상자를 M의원 따위로 실려 가게 했을까요.
'여기서 왼쪽으로 두 블록쯤 가면 왼쪽에 붉은 간판 등에 불이 켜진 집이 있소…….'
하던 그때의 내 말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왜 그 대신,
'여기서 오른쪽으로 한 블록쯤 가면 K병원이라는 외과 전문 병원이 있소.'
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제가 알려준 M의원은 소문난 돌팔이 의사였고, 더구나 외과 치료를 할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M의원과는 반대 방향이면서 M보다 더 가까운 곳에 훌륭하게 설비가 갖춰진 K라는 외과 병원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알고 있었는데 어째서 잘못된 곳을 알려주었는가. 그때의 기이한 심리 상태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일시적인 착각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조금 마음에 걸려서 식모 아주머니에게 은근슬쩍 동네 소문 등을 알아보게 했더니, 아무래도 그 부상자는 M의원의 진찰실에서 죽은 모양이었습니다. 어느 병원이든 그런 중환자가 실려 오는 건 꺼리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한밤중 1시였으니 무리도 아닙니다만, M의원에서는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여간해선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끈 끝에 겨우 부상자를 옮겼을 무렵에는 이미 상당히 손쓰기 늦은 상태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그때 만약 M의원 원장이 '나는 전문의가 아니니 근처 K병원으로 데려가시오'라고 지시라도 했다면 혹시 부상자는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얼마나 무모한 일입니까. 그는 스스로 그 어려운 환자를 처리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실패한 것이죠. 소문에 따르면 M씨는 당황한 나머지 부당하게 오랜 시간 동안 부상자를 이리저리 건드리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왠지 기분이 참 묘해졌습니다.
이 경우 가엾은 노인을 죽인 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자동차 운전기사와 M의사 모두 각자 책임이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법적인 처벌이 따른다면 그것은 아마도 운전기사의 과실에 대해 이루어지겠지만, 사실상 가장 중대한 책임자는 바로 저 아니었을까요. 만약 그때 제가 M의원이 아니라 K병원을 알려주었다면, 조금의 실수도 없이 부상자는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운전기사는 단지 다치게 했을 뿐입니다. 죽인 것은 아닙니다. M의사는 의술이 떨어져서 실패한 것이니 이 또한 무작정 탓할 수만은 없습니다. 설사 그에게 책임을 져야 할 점이 있다 쳐도, 그 원흉을 따지자면 제가 부적절한 M의원을 알려준 것이 잘못입니다. 요컨대, 그때 저의 손가락질 하나에 따라 노인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었던 셈입니다. 상처를 입힌 것은 분명 운전기사이겠지만, 죽인 것은 이 제가 아니었을까요.

​이것은 제 지시가 완전히 우연한 실수였다고 생각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만, 만약 그것이 실수가 아니라 그 노인을 죽여버리려는 저의 '고의'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는 사실상 살인죄를 저지른 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법률은 설령 운전기사를 벌할지언정, 사실상의 살인자인 저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마 의심조차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와 죽은 노인은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가령 의심을 받는다 해도, 저는 그저 외과 병원이 있었다는 것을 깜빡 잊었을 뿐이라고 대답하면 그만 아닙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마음속의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일찍이 이런 살인법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이 자동차 사건에서 처음으로 그 점을 깨달았습니다만,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은 참으로 위험천만한 곳 아닙니까. 언제 저 같은 놈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고의로 잘못된 병원을 알려주거나 해서, 그러지 않았다면 건질 수 있었을 목숨을 부당하게 잃어버리는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인 겁니다.

​이건 그 후에 제가 실제로 해봐서 성공한 일입니다만, 시골에서 온 할머니가 전차 선로를 건너려고 막 선로에 한쪽 발을 디뎠을 때, 물론 그곳에는 전차뿐만 아니라 자동차나 자전거, 마차, 인력거 등이 얽히듯 엇갈려 다니고 있으니 할머니의 머릿속은 충분히 혼란스러울 게 틀림없습니다. 그 한쪽 발을 디딘 찰나에 급행 전차인가 뭔가가 질풍처럼 달려와 할머니에게서 두세 발짝 앞까지 다가왔다고 가정합시다. 그때 할머니가 전차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로 선로를 건너가 버리면 그만이지만, 누군가 큰 소리로 '할머니, 위험해요!' 하고 고함이라도 친다면, 할머니는 금세 당황해 그대로 돌파할까 아니면 뒤로 물러설까 잠시 우왕좌왕할 게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 전차가 너무 가까워서 급정거도 할 수 없었다고 친다면, '할머니, 위험해요!'라는 단 한마디가 그 할머니에게 큰 부상을 입히고, 나쁘게는 목숨까지 앗아가지 말란 법이 없는 겁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저는 어느 날 이 방법으로 한 시골 사람을 보기 좋게 죽여버린 적이 있습니다요."
​(T씨는 여기서 잠시 말을 끊고 기분 나쁘게 웃었다.)

 


 '오디오북으로 직접 감상해 보세요'


​"이 경우 '위험해!' 하고 소리친 저는 명백히 살인자입니다. 하지만 누가 저의 살의를 의심하겠습니까? 아무런 원한도 없는 생면부지의 인간을 단지 살인의 흥미만을 위해 죽이려 하는 놈이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위험해!'라는 주의의 말은 어떻게 해석해 본다 한들 호의에서 나온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죽은 사람에게 감사받을지언정 결코 원망받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안전하기 짝이 없는 살인법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악행은 반드시 법에 걸려 응당한 처벌을 받는 것이라 믿고 어리석게도 푹 안심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법률이 살인자를 놓쳐줄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방금 말씀드린 두 가지 실례에서 유추할 수 있듯, 조금도 법률에 저촉될 염려가 없는 살인법이 생각해보면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세상이란 것의 무서움에 전율하기보다, 그런 죄악의 여지를 남겨둔 조물주의 여유를 더없이 유쾌하게 생각했습니다. 정말이지 저는 이 발견에 광희(狂喜)했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이 방법에 의존하기만 하면, 이 문명화된 태평성대에 저만큼은 이른바 '합법적인 처형권(斬捨て御免)'이나 다름없는 셈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이런 종류의 살인을 통해, 그 죽을 것 같은 지루함을 달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절대 법에 걸리지 않는 살인, 어떤 셜록 홈즈라도 꿰뚫어 볼 수 없는 살인, 아아 이 얼마나 완벽한 졸음 깨기입니까. 그 후 저는 3년 동안 사람을 죽이는 즐거움에 빠져, 어느새 그토록 심했던 지루함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웃지 마십시오. 저는 전국시대의 호걸처럼, 그 백 명 베기를, 물론 글자 그대로 벤다는 뜻은 아니지만, 백 명의 목숨을 빼앗을 때까지는 결코 도중에 이 살인을 멈추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했던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석 달 전쯤입니다. 저는 딱 99명을 해치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이 남았을 때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저는 그 살인에도 그만 질려버리고 말았습니다만, 그것은 차치하고, 그럼 그 99명을 어떤 식으로 죽였는가. 물론 99명 중 어느 한 사람에게도 조금의 원한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단지 남모르는 방법과 그 결과에 흥미를 가지고 벌인 짓이기에, 저는 단 한 번도 같은 방식을 반복한 적이 없었습니다. 한 명을 죽이고 나면, 다음번엔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로 해치울까, 그것을 궁리하는 것이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제가 저지른 99가지 다른 살인법을 일일이 전부 말씀드릴 시간도 없거니와, 게다가 오늘 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그런 개개의 살인 방식을 고백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런 극악무도한 죄악을 저지르면서까지 지루함을 벗어나려 했던, 그리고 결국에는 그 죄악에마저 질려버려 이번에는 저 자신마저 파멸시키려 하는, 세상의 상식에서 벗어난 제 심정을 말씀드리고 여러분의 판단을 구하고자 함이니, 그 살인 방법에 대해서는 그저 두서너 가지 실례만 말씀드리는 선에서 그칠까 합니다.
​이 방법을 발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인데,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제 이웃에 맹인 안마사가 한 명 있었는데, 그가 장애인들에게 흔히 있는 지독한 고집쟁이였습니다. 타인이 친절하게 이것저것 주의를 주면 오히려 그것을 거꾸로 받아들여, 눈이 안 보인다고 사람 무시하지 마라 그 정도는 나도 다 안다는 식으로 반드시 상대방의 말에 거역하는 짓을 하는 겁니다. 이만저만 고집이 센 게 아니었죠.

​어느 날이었습니다. 제가 어떤 큰길을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그 고집쟁이 안마사가 오고 있는 것과 마주쳤습니다. 그는 건방지게도 지팡이를 어깨에 메고 콧노래를 부르며 성큼성큼 걷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길에는 어제부터 하수도 공사가 시작되어 길 한쪽에는 깊은 구덩이가 파여 있었는데, 그는 시각장애인이다 보니 한쪽 통행금지 팻말 같은 게 보일 리 없어, 아무 생각 없이 그 구덩이 바로 옆을 태평하게 걷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 저는 문득 묘안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여보게 N군!' 하고 안마사의 이름을 부르며 (자주 안마를 부탁해서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어허 위험해, 왼쪽으로 붙어, 왼쪽으로!'
하고 고함쳤습니다. 그걸 일부러 조금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면, 그는 평소 성격상 분명 놀림을 받는 거로 지레짐작하고 왼쪽으로는 안 가고 일부러 오른쪽으로 붙을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에헤헤헤……. 농담도 참.'
하며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대꾸를 하면서 다짜고짜 반대편 오른쪽으로 두세 발짝 붙는 바람에, 순식간에 하수도 공사 구덩이 속으로 한쪽 발을 헛디뎌 앗 하는 사이에 1장(약 3미터)이나 되는 그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습니다. 저는 무척 놀란 체하며 구덩이 가장자리로 달려가,
'잘됐으려나' 하고 들여다보았는데, 그는 떨어질 때 부위를 잘못 맞았는지 구덩이 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고, 구덩이 주위에 튀어나온 날카로운 돌에 찧인 모양이었습니다. 짧게 깎은 머리에서는 검붉은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혀라도 깨물었는지 입과 코에서도 마찬가지로 출혈이 있었습니다. 안색은 이미 창백해졌고 신음 소리를 낼 기운조차 없어 보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안마사는, 그래도 그 후 일주일 정도는 숨이 붙어 살아 있었습니다만, 끝내 절명하고 말았습니다. 저의 계획은 보기 좋게 성공했습니다. 누가 저를 의심하겠습니까? 저는 이 안마사를 평소 단골로 자주 불렀을 정도라 살인의 동기가 될 만한 원한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게다가 표면상으로는 오른쪽에 함정이 있는 것을 피하게 하려고 '왼쪽으로 붙어, 왼쪽으로' 하고 가르쳐 준 셈이니 저의 호의를 인정하는 사람은 있어도 그 친절해 보이는 말 뒤에 무서운 살의가 담겨 있었다고 상상할 사람은 있을 턱이 없는 것입니다.
​아아, 얼마나 무섭고도 즐거운 유희였던가요. 교묘한 트릭을 생각해 냈을 때의, 아마도 예술가의 그것에 필적할 만한 환희, 그 트릭을 실행할 때의 두근거리는 긴장감, 그리고 목적을 달성했을 때의 형언할 수 없는 만족감, 게다가 제 희생양이 된 남녀가 살인자가 눈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피투성이가 되어 미친 듯이 나뒹구는 단말마의 광경. 처음 얼마간은 그것들이 얼마나 저를 황홀하게 해 주었는지 모릅니다.
​어느 날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여름의 잔뜩 흐린 날이었는데, 저는 어느 교외의 문화촌이라고나 할까요, 십여 채의 서양식 저택이 띄엄띄엄 서 있는 곳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그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콘크리트 서양식 저택의 뒤편을 지나가던 때입니다. 문득 묘한 것이 제 눈에 띄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그때 제 코끝을 스치며 기세 좋게 날아가던 참새 한 마리가, 그 집 지붕에서 지면으로 당겨진 굵은 철사에 잠깐 앉더니, 갑자기 튕겨 나가듯 밑으로 떨어져 그대로 죽어버린 것입니다.

​이상한 일도 다 있네 하고 자세히 보니, 그 철사라는 것은 서양식 저택의 뾰족한 지붕 꼭대기에 세워진 피뢰침에서 내려오는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철사에는 피복이 입혀져 있었지만, 지금 참새가 앉은 부분은 어찌 된 일인지 그것이 벗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전기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어쩌다 공중 전기의 작용이라든가로 피뢰침 철사에 강한 전류가 흐르는 경우가 있다고 어디선가 들은 것을 기억하고, '옳다, 저거구나' 하고 눈치챘습니다. 이런 일에 맞닥뜨린 것은 처음이었기에, 신기하게 여겨 저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 철사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곳으로 서양식 저택 옆구리 쪽에서 병정놀이 같은 것을 하며 놀고 있는 듯한 아이들 한 무리가 왁자지껄 떠들며 나왔습니다. 그중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작은 사내아이가, 다른 아이들은 훌쩍 저쪽으로 가버렸는데 혼자 뒤에 남더니 뭘 하나 지켜봤더니, 방금 그 피뢰침 철사 앞의 약간 볼록하게 솟아오른 곳에 서서 앞섶을 걷어 올리곤 서서 오줌을 누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본 저는 또다시 하나의 묘책을 떠올렸습니다. 저는 중학 시절에 물이 전기의 도체라는 것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지금 아이가 서 있는 조금 높은 곳에서 철사의 피복이 벗겨진 부분에 오줌을 누는 건 일도 아닙니다. 오줌은 물이니 역시 도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습니다.
'얘야. 저 철사에 오줌을 눠 보렴. 닿겠니?'
그러자 아이는,
'뭐, 그까짓 거. 잘 봐요.'
그렇게 말하는가 싶더니 자세를 바꾸어 대뜸 철사의 밑바탕이 드러난 부분을 겨냥해 오줌을 갈겼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철사에 닿을락 말락 할 때, 무섭게도 아이는 폴짝 한 번 춤추듯 튀어 오르는가 싶더니 그 자리에 픽 쓰러져 버렸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피뢰침에 이렇게 강한 전류가 흐르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라고 합니다만, 이리하여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간이 감전되어 죽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이 경우에도 물론 저는 조금도 의심받을 걱정이 없었습니다. 그저 아이의 시신에 매달려 오열하는 어머니에게 정중한 조의의 말을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나기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이것도 어느 여름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 남자를 한 번 희생양으로 삼아주리라 눈독 들이고 있던 한 친구, 라고 해도 결코 그 남자에게 원한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오랜 세월 둘도 없는 절친으로 지냈을 정도의 친구입니다만, 제게는 오히려 그런 사이좋은 친구 등을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으면서 순식간에 시체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이상한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와 함께 보소 반도의 아주 외진 어느 어촌으로 피서를 간 적이 있습니다. 물론 해수욕장이라고 할 만한 곳은 아니었고 바다에는 그 마을의 구릿빛 피부를 한 꼬마들이 첨벙첨벙 놀고 있을 뿐, 도시에 온 손님이라고는 우리 두 사람 외에 화가 지망생으로 보이는 무리가 몇 명, 그마저도 바다에 들어간다기보다는 주변 해안을 스케치북을 한 손에 들고 돌아다니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름난 해수욕장처럼 도시 소녀들의 우아한 육체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숙소라고 해봤자 낡은 싸구려 여관 같은 곳이었으며 음식도 회 말고는 맛이 없어 입에 맞지 않는, 꽤나 쓸쓸하고 불편한 곳이었습니다만, 제 그 친구라는 녀석이 저와는 완전히 달라서 그런 시골 마을에서 고독한 생활을 맛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던 데다, 저는 저대로 어떻게든 이 녀석을 해치울 기회를 잡으려 안달하던 차였기 때문에 그런 어촌에서 며칠 동안이나마 머물러 있을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그 친구를 해안 마을에서 꽤 떨어진 곳에 있는 절벽처럼 생긴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다이빙하기엔 안성맞춤인 장소네' 따위의 말을 하며 제가 앞장서서 옷을 벗었습니다. 친구도 수영을 좀 할 줄 알았기에 '과연 여기 좋네' 하며 저를 따라 옷을 벗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그 절벽 끝에 서서 양손을 똑바로 머리 위로 뻗고 '하나, 둘, 셋!' 하고 힘껏 고함을 지른 뒤, 폴짝 뛰어오르자 멋진 호를 그리며 거꾸로 앞바다 수면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풍덩 하고 몸이 물에 닿았을 때 가슴과 배의 호흡으로 싹 물을 가르며 불과 2~3척(약 60~90cm)만 잠수한 뒤 날치처럼 저쪽 수면에 몸을 드러내는 것이 '다이빙'의 요령인데, 저는 어렸을 때부터 수영을 잘해서 이런 다이빙 같은 것도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그렇게 기슭에서 열네다섯 칸(약 25~27미터)이나 떨어진 수면으로 고개를 내민 저는 입영이라는 것을 하며 한 손으로 얼굴의 물을 툭 털어내고,
'어~이, 뛰어내려 봐!'
하고 친구에게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물론 아무 의심 없이,
'좋아!' 하고 말하며 저와 같은 자세를 취하고 기세 좋게 제 뒤를 쫓아 그곳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다로 잠수한 채, 그는 한참이 지나도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것을 예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바닷속에는 수면에서 1칸(약 1.8미터) 정도 깊이에 커다란 바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미리 그것을 더듬어 찾아두고, 친구의 솜씨로 다이빙을 하면 반드시 1칸 이상 잠수할 게 뻔하니 그 바위에 머리를 부딪힐 게 틀림없다고 계산하고 저지른 짓이었습니다. 아시겠지만 다이빙 기술은 능숙할수록 물에 잠기는 깊이가 얕아지기 마련인데, 저는 그것에 충분히 숙련되어 있었기에 바닷속 바위에 부딪히기 전에 교묘히 수면으로 떠 올랐지만, 친구는 다이빙에 관해서는 아직 완전한 초보였기에 곤두박질치듯 해저로 돌진하여 있는 힘껏 머리를 바위에 처박았음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그는 둥실하고 참치 시체처럼 해수면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파도에 이리저리 떠밀리고 있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기절한 것입니다.
​저는 그를 안고 기슭으로 헤엄쳐 나와, 그대로 마을로 달려가 숙소 사람들에게 위급함을 알렸습니다. 그래서 고기잡이를 쉬고 있던 어부 등이 와서 친구를 구완해 주었습니다만, 머리를 너무 심하게 부딪힌 탓인지 이미 소생할 가망은 없었습니다. 보니 정수리가 대여섯 치(약 15~18cm) 찢어져 하얀 살이 부풀어 올라 있었습니다. 그 머리가 놓여 있던 바닥에는 엄청난 피가 검붉게 굳어 있었습니다.

​전에도 후에도 제가 경찰의 조사를 받은 것은 딱 두 번뿐인데, 그중 하나가 이 경우였습니다. 워낙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니 일단 조사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저와 그 친구는 절친한 사이로 그전까지 다툼 한 번 한 적 없다는 것이 밝혀져 있고, 또 당시 상황상 저나 그나 그 해저에 바위가 있다는 것을 몰랐고, 다행히 저는 수영을 잘했기 때문에 위험을 피했지만 그는 수영이 서투른 바람에 이런 불상사를 일으켰다는 것이 명백해졌기에, 무난히 의심은 풀렸고 저는 오히려 경찰 사람들로부터 '친구를 잃어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습니까' 하고 위로의 말까지 듣는 지경이었습니다.
​아니, 이런 식으로 일일이 실례를 늘어놓다가는 끝이 없겠습니다. 이 정도만 말씀드려도 여러분도 저의 이른바 '절대 법에 저촉되지 않는 살인법'을 대충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전부 이런 식입니다. 어느 때는 서커스 구경꾼 속에 섞여 있다가 갑자기, 여기서 말씀드리기 부끄러울 정도로 기이한 자세를 취해 높은 곳에서 줄타기하던 여자 곡예사의 시선을 빼앗아 그녀를 추락시켜 보기도 하고, 화재 현장에서 제 자식을 찾아 반미치광이가 되어 있던 어느 아주머니에게 아이는 집 안에 재워두었다며 '거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등 암시를 주어 그 아주머니를 맹화 속으로 뛰어들게 해 타 죽게 만들거나, 혹은 지금 막 투신자살을 하려는 처녀의 등 뒤에서 갑자기 '잠깐!' 하고 엉뚱한 소리를 질러 가만두었으면 자살을 그만두었을지도 모를 그 처녀를 깜짝 놀라게 한 바람에 물속으로 뛰어들게 해버리거나. 그런 것을 말씀드리자면 끝도 없습니다만, 이미 밤도 꽤 늦었고 여러분도 이런 잔혹한 이야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으실 테니 마지막으로 조금 별난 것을 하나만 말씀드리고 끝맺기로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로는 제가 늘 한 번에 한 사람씩만 죽인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채 3년도 안 되는 세월 동안, 그것도 조금도 법에 저촉되지 않는 방법으로 99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을 한 번에 죽인 것은, 그렇습니다. 작년 봄의 일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당시 신문 기사로 분명 읽으셨겠지만, 주오선(中央線) 열차가 전복되어 많은 부상자와 사망자를 낸 일이 있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뭐 바보스러울 정도로 손쉬운 방법이었습니다만, 그것을 실행할 장소를 찾는 데에는 꽤 수고가 들었습니다. 그저 처음부터 주오선 노선 주변이라는 정도만 가늠을 해두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노선은 저의 계획에 가장 편리한 산길을 지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열차가 전복되었을 경우에도 주오선은 평소 사고가 잦으니까 '아아 또인가' 할 정도로 다른 노선만큼 눈에 띄지 않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조건에 맞는 장소를 찾는 데에는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결국 M역 근처의 절벽을 이용하기로 마음먹기까지는 족히 일주일은 걸렸습니다. M역에는 자그마한 온천장이 있어서 저는 그곳의 어느 여관에 묵으며 매일매일 목욕을 하거나 산책을 하면서, 누가 보아도 장기 투숙하는 탕치객(온천 요양객)처럼 보이려 애썼습니다. 그로 인해 또 열흘 남짓을 낭비해야만 했습니다만, 이윽고 이제 괜찮겠지 하는 때를 보아 어느 날 저는 여느 때처럼 그 근처 산길을 산책했습니다.
​그리고 여관에서 반 리(약 2km) 정도 떨어진 약간 높은 절벽 꼭대기에 다다라, 저는 그곳에서 가만히 땅거미가 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절벽 바로 밑에는 기차 선로가 커브를 그리며 달리고 있었고, 선로 건너편은 이쪽과는 반대로 깊고 험한 계곡이 되어 그 밑바닥에 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는 것이 아스라이 멀리 보였습니다.
​잠시 후, 미리 정해둔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아무도 보는 이가 없었지만 일부러 짐짓 발이 걸려 넘어지는 듯한 시늉을 하며, 이것도 미리 찾아둔 커다란 돌덩이 하나를 걷어찼습니다. 그것은 살짝 차기만 하면 분명 절벽에서 선로 위쪽으로 굴러떨어질 만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저는 만약 실패하면 몇 번이고 다른 돌덩이로 다시 할 작정이었습니다만, 보니 그 돌덩이는 얄밉게도 레일 한 가닥 위에 떡하니 얹혀 있었습니다.

​반 시간 후면 하행 열차가 그 레일을 지나는 것입니다. 그때쯤이면 이미 깜깜해져 있을 테고, 그 돌이 있는 장소는 커브 너머이므로 기관사가 알아차릴 턱이 없습니다. 그것을 확인한 저는 황급히 M역으로 되돌아가 (반 리짜리 산길이었으므로 족히 30분 이상을 허비했습니다) 역장실로 뛰어 들어가 '큰일 났습니다!' 하고 몹시 당황한 어조로 외친 것입니다.
'저는 여기 온천에 요양 온 사람인데, 아까 반 리쯤 떨어진 선로를 따라 난 절벽 위로 산책을 갔다가 비탈진 곳을 뛰어 내려오려던 찰나에 실수로 돌덩이 하나를 절벽 아래 선로 위로 차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만약 거기로 열차가 지나가면 무조건 탈선할 겁니다. 재수 없으면 계곡으로 떨어지는 일이 없으리란 법도 없습니다. 저는 그 돌을 치우려고 여러 길을 찾아보았습니다만 아무래도 낯선 산속이라 도무지 그 높은 절벽을 내려갈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물쭈물하느니 차라리 하고 이쪽으로 달려왔습니다만 어떡하죠? 시급히 저것을 치워주실 수 없겠습니까.'
하며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역장은 기겁을 하며,
'큰일이군, 방금 하행 열차가 통과한 참이오. 보통이라면 그 근처는 벌써 지나가 버렸을 무렵이지만…….'
하는 겁니다. 그것이 제 뜻대로 된 셈이죠. 그런 문답을 되풀이하고 있는 동안 열차 전복 사상자 부지기수라는 보고가, 간신히 사지를 벗어나 달려온 그 하행 열차의 차장에 의해 전해졌습니다. 자, 난리가 난 겁니다.
​저는 사건의 경위상 하룻밤 M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만,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저지른 일입니다. 실수가 있을 리 만무하죠. 물론 저는 엄청 혼이 나긴 했지만 별도로 처벌을 받을 만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그때 제 행위는 형법 129조인가에도 해당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해당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500엔 이하의 벌금형에 불과합니다만.) 그런 까닭에 저는 돌덩이 하나로 조금도 처벌받지 않고 에- 그러니까 그게, 그렇습니다, 17명이었습니다. 17명의 목숨을 빼앗는 데 성공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런 식으로 99명의 목숨을 빼앗은 사나이입니다. 그리고 조금도 뉘우치기는커녕 그런 피비린내 나는 자극에조차 이젠 질려버려서, 이번에는 제 자신의 목숨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놈입니다. 여러분은 너무나도 잔혹한 저의 소행에 그렇게 눈살을 찌푸리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이것들은 보통 사람으로는 상상도 못 할 극악무도한 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대죄를 저지르면서까지 벗어나고 싶을 만큼 지독하고 끔찍한 지루함을 느껴야 했던 제 심정도 조금은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저라는 남자는, 그런 악행이라도 꾀하지 않고서는 이 인생에서 그 어떤 보람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부디 판단해 주십시오. 저는 미치광이입니까? 살인광이라는 것입니까?"
​이렇게 해서 오늘 밤 이야기꾼의 끔찍하고도 기괴하기 짝이 없는 신세 한탄이 끝났다. 그는 다소 핏발 선, 그리고 흰자위가 많이 드러난 흐리멍덩한 미치광이 같은 눈으로 우리 청자들의 얼굴을 한 사람씩 둘러보았다. 하지만 누구 하나 이에 답하여 비판의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그곳에는 단지 으스스하게 명멸하는 촛불에 비친 일곱 명의 상기된 얼굴만이 미동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문득, 문 근처 휘장 표면에 반짝하고 빛난 것이 있었다. 보고 있자니 그 은빛으로 빛나는 것이 점점 커졌다. 그것은 은빛의 둥근 것으로, 마치 보름달이 짙은 구름을 뚫고 나타나듯 붉은 휘장 사이로 서서히 완벽한 원형을 그리며 나타나고 있었다. 나는 첫 순간부터 그것이, 우리들의 마실 것을 나르는 웨이트리스의 양손에 받쳐진 커다란 은쟁반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만물을 몽환화하지 않고는 배기지 않는 이 '붉은 방'의 공기는, 그 흔한 은쟁반을 마치 살로메 극의 낡은 우물 속에서 노예가 불쑥 내미는, 그 예언자의 잘린 머리가 얹힌 은쟁반인 양 환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은쟁반이 휘장 밖으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그 뒤에서 청룡도처럼 폭이 넓고 번쩍이는 칼이 불쑥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입술이 두툼한 반라의 노예 대신 늘 보던 아름다운 웨이트리스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가 무척이나 쾌활하게 일곱 남자 사이를 돌아다니며 음료를 돌리기 시작하자, 그 세상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환상의 방에 세상의 바람이 불어 들어온 것 같아 왠지 모르게 부조화스러운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 건물 아래층 레스토랑의 화려한 가무와 난음, 꺄악거리는 젊은 여자의 헤픈 비명 등을 그 몸 주변에 둥둥 떠돌게 하고 있었다.
​"자, 쏜다."
갑자기 T가 지금껏 이야기하던 목소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오른손을 품속에 넣더니 반짝반짝 빛나는 물체 하나를 꺼내어 불쑥 웨이트리스 쪽으로 겨누었다.
​'앗' 하는 우리들의 목소리와 '탕……' 하는 권총 소리와 '꺄악' 하고 기겁하는 여자의 비명이 거의 동시였다.
​물론 우리는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아아 이 무슨 다행이란 말인가, 총에 맞은 여자는 아무 일 없이, 단지 이것만은 무참히 부서져 버린 음료 그릇을 앞에 두고 멍하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와하하하하……." T씨가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장난감이야, 장난감이라고. 아하하하……. 하나코, 아주 꼴 좋게 속았네. 하하하……."
​그럼, 지금도 T씨의 오른손에서 하얀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저 권총은 장난감에 불과했단 말인가.
"어머, 깜짝 놀랐네……. 그거 장난감이에요?" T와 예전부터 친했던 듯한 웨이트리스는 아직 입술엔 핏기가 없었지만 그렇게 말하며 T씨 쪽으로 다가갔다.
"어디, 줘 봐요. 세상에, 진짜랑 똑같네."
그녀는 무안함을 감추려는 듯, 그 장난감이라는 6연발 리볼버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윽고
"분하니까, 그럼 나도 쏴줄게요!"
말이 떨어지섭게 그녀는 왼팔을 굽히고 그 위에 권총 총구를 얹은 뒤 건방진 자세로 T씨의 가슴팍에 조준을 했다.
​"나한테 쏠 테면 쏴봐라." T씨는 씩 웃으며 조롱하듯 말했다.
"못 쏠 줄 알고!"
탕…….
아까보다 한층 날카로운 총성이 방안에 울려 퍼졌다.
​"우우우우……." 형언할 수 없이 기분 나쁜 신음이 났는가 싶더니, T씨가 불쑥 의자에서 일어서다 바닥에 쿵 하고 쓰러졌다. 그리고 손발을 버둥거리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장난인가, 장난치고는 너무나도 실감 나는 몸부림이 아닌가.
우리는 무심코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 옆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탁상 위의 촛대를 집어 들어 고통스러워하는 자 위에 비추었다. 보니 T씨는 창백한 얼굴을 경련시키며 마치 상처 입은 지렁이가 구불구불 뛰어오르듯 온몸의 근육을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무아지경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리고 칠칠치 못하게 풀어 헤쳐진 가슴의 검게 보이는 상처 구멍에서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뚝뚝 새빨간 피가 하얀 피부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장난감인 줄 알았던 6연발 권총의 두 번째 발에는 진짜 총알이 장전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멍하니 그곳에 선 채 아무도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기괴한 이야기 뒤에 일어난 이 사건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격렬한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시계 눈금으로 치면 아주 짧은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때의 나에게는, 우리가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서 있는 시간이 몹시 길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그 찰나의 순간에 고통스러워하는 부상자를 앞에 두고도 내 머릿속에는 다음과 같은 추리가 작용할 여유가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뜻밖의 사건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이것은 처음부터 온전히 T의 오늘 밤 프로그램에 쓰여 있던 사항이 아니었을까. 그는 99명까지는 남을 죽였지만, 마지막 100명째만큼은 자기 자신을 위해 남겨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런 일에 가장 걸맞은 이 '붉은 방'을 마지막 죽을 장소로 택한 것은 아닐까. 이것은 이 남자의 기괴하기 짝이 없는 성격을 생각하면 그리 빗나간 상상도 아니다. 그렇다. 저 권총을 장난감이라 믿게 해 놓고 웨이트리스에게 쏘게 한 기교 등은, 다른 살인 사건들과 공통되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이 아닌가. 이렇게 해두면 하수인인 웨이트리스는 조금도 벌을 받을 염려가 없다. 이곳에는 우리 여섯 명이나 되는 증인이 있으니까. 즉, T는 그가 타인에게 했던 것과 같은 방법, 가해자가 조금도 죄가 되지 않는 방법을 그 자신에게 응용한 것이 아닌가.'

​나 외의 사람들도 모두 각자의 감회에 젖어 있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내 생각과 같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 상황에서는 그 외에 다른 생각의 여지가 없으니까.
​끔찍한 침묵이 좌중을 지배했다. 그곳에는 엎드린 웨이트리스가 슬프게 훌쩍이는 소리만이 구슬프게 들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붉은 방'의 촛불에 비친 이 한바탕의 비극 장면은 이 세상의 일이라기엔 너무나도 몽환적으로 보였다.
​"크크크크크……."
돌연 여자의 흐느낌 외에 또 하나의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이미 발버둥을 멈추고 죽은 사람처럼 축 늘어져 있던 T씨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듯했다. 얼음 같은 전율이 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큭큭큭큭……."
그 소리는 순식간에 커져갔다. 그리고 앗 하는 사이에 빈사 상태의 T씨 몸뚱이가 비틀비틀 일어섰다. 일어서서도 여전히 '큭큭큭큭' 하는 이상한 소리는 멎지 않았다. 그것은 가슴 저 밑바닥에서 짜내는 듯한 고통의 신음 같기도 했다. 하지만…… 혹시…… 오오, 역시 그랬던 건가! 그는 뜻밖에도 아까 전부터 참을 수 없는 우스움을 꾹 참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 그는 이제 큰 소리로 웃어 젖히며 외쳤다.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이것이!"
그러자 아아, 이건 또 어찌 된 일인가. 방금 전까지 그토록 울고 있던 웨이트리스가 대뜸 명랑하게 일어서는가 싶더니, 이제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새우처럼 구부리며 그녀 역시 박장대소하는 것이었다.
​"이건 말이죠," 이윽고 T씨는 어안이 벙벙해진 우리 앞에 자그마한 원통형 물건 하나를 손바닥에 올려 내밀며 설명했다. "소가죽 방광(오줌보)으로 만든 총알입니다. 안에 붉은 잉크가 가득 들어 있어서 명중하면 그게 흘러나오는 장치지요. 그리고 말입니다, 이 총알이 가짜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까부터 제가 떠든 신세 한탄이라는 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이만하면 제 연기가 제법 그럴싸하지 않았습니까? 자, 지루해하시는 여러분. 이런 정도면 여러분이 늘 찾고 계시는, 그 '자극'이란 게 되지 않았으려나 모르겠군요……."

​그가 이렇게 속임수의 비밀을 털어놓는 동안, 지금까지 그의 조수 역할을 한 웨이트리스의 기지로 아래층 스위치가 켜졌는지 갑자기 대낮 같은 전등 빛이 우리 눈을 부시게 했다. 그리고 그 하얗고 밝은 광선은 순식간에 방 안을 감돌고 있던 그 몽환적인 공기를 일소해 버렸다. 그곳에는 폭로된 마술의 속임수가 흉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었다. 진홍빛 휘장도, 붉은 벨벳 카펫도, 테이블보며 안락의자, 나아가 그 사연 있어 보이던 은촛대까지 어찌나 초라해 보이던지. '붉은 방' 안에는 어느 구석을 뒤져봐도 더 이상 꿈도 환상도, 그림자조차 머물러 있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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