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10일 일요일

(소설 원고) [악인의_에도가와 란포] 텍스트 전문(全文) 수록 [일본 미스터리 소설] 에도가와 란포 '화승총' - 어느 맑은 날의 완벽한 알리바이와 범인 없는 살인 | 원아나의 책 읽는 TV 꿀잠 오디오북

☆원아나의 한마디☆
​​"정적만이 감도는 한낮의 별채,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총구가 스스로 불을 뿜으며 비극을 완성합니다. 인간의 악의가 아닌, 태양과 물병이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사물이 빚어낸 이 기묘한 '범인 없는 살인'은 과연 우연일까요, 혹은 운명의 장난일까요? 거장 에도가와 란포가 설계한 정교하고도 서늘한 미스터리의 실체를 지금 만나보시죠."

소설 원고 텍스트 전문

화승총 (火縄銃)
에도가와 란포 (江戸川乱歩)

​어느 해 겨울 방학, 나는 친구 하야시 이치로에게서 초대장 한 통을 받았다. 동생 지로와 함께 일주일쯤 전부터 이곳에 와서 매일 사냥을 하며 지내고 있는데, 둘이서만 있으니 재미가 없어서 시간이 나면 놀러 오지 않겠냐는 내용이었다. 봉투는 호텔 것이었고, 'A 산기슭 S 호텔'이라는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긴 겨울 방학을 어떻게 보낼지 막막해하며 지루한 나날을 주체하지 못하던 참이라, 나에게 그 초대는 무척 기뻤고 때마침 잘 됐다 싶어 당장 응하기로 했다. 평소 사이가 좋지 않은 의붓동생과 함께 있다는 점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다치바나를 꼬드겨서 둘이서 가기로 했다.

​며칠 전 내리던 비가 말끔히 개고 맑게 갠 12월의 포근한 날이었다. 딱히 차려입을 필요도 없었던 우리는 여행이라곤 하지만 아주 간편하게 몸만 기차에 오르면 그만이었다. 이날 다치바나는 제 취향인 듯 교복 위에 인버네스(소매 없는 외투)라는 이상한 차림을 하고 객실 구석에 깊숙이 파묻혀, 끊임없이 에드거 앨런 포의 '갈가마귀' 같은 것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인버네스 한쪽 소매에서 튀어나온 팔꿈치를 창틀에 얹고 스쳐 가는 창밖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무시무시한 괴조의 시를 흥얼거리는 그의 모습이 내게는 왠지 몹시 신비롭게 보였다.

​세 시간쯤 뒤 기차는 A 산기슭 역에 도착했다. 미리 알리지 않고 온 데다 역에는 당연히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곧장 역 앞의 인력거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 도착하자 우리를 맞이한 호텔 보이가 대답했다.

​"하야시 님이신가요? 동생분은 어디론가 나가셨고, 형님은 뒤쪽 별채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낮잠인가요?"
"네, 매일 점심때부터 한동안 주무시거든요. 그럼 별채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 별채는 본채에서 정원을 가로질러 십여 칸 정도 안쪽에 덩그러니 홀로 세워진 작은 양옥이었는데, 본채에서부터 긴 복도가 곧장 이어져 있었다.

​우리들을 방 앞까지 안내한 보이는 "항상 주무실 때는 안에서 자물쇠를 채워 두십니다"라고 말하며 굳게 닫힌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하지만 깊이 잠들었는지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번에는 조금 세게 두드렸지만, 그래도 하야시의 깊은 잠을 깨울 수는 없었다.

​"어이, 하야시! 일어나지 않을래?"
​그래서 이번엔 내가 큰 소리로 외쳐 보았다. 이쯤 되면 아무리 깊이 잠들었어도 깨어날 줄 알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다치바나도 합세해서 문을 더욱 세게 두드리며 소리쳤지만, 역시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왠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이, 아무래도 이상해. 무슨 일 생긴 거 아닐까?"
​내가 다치바나에게 그렇게 말하자, 그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보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하야시가 이 안에서 자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까?"
"네, 그야 뭐… 아무튼 안에서 열쇠도 잠겨 있으니까요."
"마스터키는 따로 없나요?"
"있습니다. 가져오겠습니다."
"이 정도로 두드려도 일어나지 않는 걸 보면 예사 일이 아닌 것 같아. 어쨌든 열쇠로 열고 안을 살펴보자고."
그래서 보이는 다시 돌아가 본채에서 예비 열쇠를 가져왔다.
​문이 열리자 맨 먼저 다치바나가 뛰어들어갔는데, 입구 정면 벽 쪽에 놓인 침대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던 그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앗!" 하고 작은 비명을 질렀다.

​침대 위에는 상의를 벗은 조끼 차림의 하야시 이치로가 왼쪽 가슴에 관통 총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었다. 생생한 핏물은 조끼에서 흘러내려 하얀 시트를 붉게 물들였고, 아직 채 마르지 않아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나는 이 뜻밖의 하야시의 모습을 보자,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멍하니 다치바나의 행동만 지켜보고 있었다.

​다치바나는 잠시 참혹하게 변해버린 하야시의 시신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끔찍한 일에 말문이 막혀 그저 파랗게 질린 채 떨고 있는 보이에게 어서 경찰에 알리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침대 곁을 떠나 다시 한번 방 안을 꼼꼼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앞서 말했듯이 이 별채는 독채로 된 양옥이었는데, 방의 구조를 대략 설명하자면 동쪽과 북쪽은 벽이고 그 구석에 침대가 놓여 있으며, 그 옆으로 양복장이 세워져 있다. 그 정면, 즉 서쪽 북쪽으로 치우친 곳이 이 방의 유일한 출입구로, 긴 복도를 지나 본채와 통하게 되어 있었다. 남쪽으로 향한 쪽에는 두 개의 창문이 있고, 그 서쪽 창문 아래에 커다란 테이블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묵직한 책꽂이가 놓여 있고 양서 몇 권이 꽂혀 있었다.

​그 책꽂이 옆에는 받침대에 올려진, 화병이겠지만 좀 특이하게 생긴, 둥근 공 모양의 유리병이 있었고 거기에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앞에는 아주 구식인 사냥총 한 자루가 무심하게 내던져져 있었다. 그 밖에는 펜과 잉크, 그리고 편지 한 통. 이것이 책상 위에 놓인 전부였다. 테이블 앞과 옆에는 정석대로 두 개의 의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창문은 양쪽 다 불투명 유리였는데 한쪽, 즉 책상 앞 창문은 어찌 된 일인지 반쯤 열려 있었고, 그곳으로 햇빛이 눈부실 정도로 책상 위를 가득 비추고 있었다.

​다치바나는 한동안 방 안을 둘러보다가 책상 앞 반쯤 열린 창가로 다가가서는 훌쩍 고개를 내밀어 창밖을 내다보고는, 고개를 들이밀고 책상 위 사냥총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다음엔 봉투를 집어 들어 슬쩍 훑어보고, 이번에는 양복 주머니를 뒤져 시곗줄에 달린 나침반을 꺼내더니, 그 나침반을 보며 또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하늘을 쳐다보거나 책상 위를 빤히 바라보거나, 뒤를 돌아 방구석 침대 쪽을 보거나 했다.

​그런 행동을 몇 번인가 반복하고 있을 때, 본채 쪽에서 복도를 타고 허둥지둥 뛰어오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치바나는 갑자기 서두르며 주머니에서 꺼낸 연필로 부리나케 책상 위 사냥총과 유리병 위치를 표시해 두었다. 반쯤 열린 창문에도 그 열린 정도를 똑같이 연필로 표시해 두었다.

​이윽고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방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온 것은, 보이의 다급한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 일행이었다. 제복 차림의 경부와 순경, 양복 차림의 형사와 경찰의, 그리고 그 뒤에는 이 호텔 주인과 우리를 처음 이 방으로 안내했던 아까 그 보이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대기하고 있었다.

​경찰의와 형사는 들어오자마자 곧장 침대 쪽으로 다가가 무언가 꼼지락꼼지락 조사하더니, 형사가 시신의 가슴팍에서 사슬이 달린 회중시계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당한 건 한 시 반이군."

​총알에 맞은 시곗바늘이 한 시 반에서 멈춰 있었던 모양이다. 형사가 그렇게 시신을 살피는 동안 경부는 보이를 불러 심문을 시작하고 있었다.
​"피해자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방으로 돌아갔다는 거지? 흠, 그래서 너는 무슨 총소리 같은 거 못 들었느냐?"
"그러고 보니 점심 지나서 뭔가 큰 소리가 났던 것 같기도 한데, 워낙 바로 뒷산에서 허구한 날 총소리가 나는 터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이 책상 위 총은… 화승총인 것 같은데 이건 어찌 된 거냐? 피해자의 것인가?"

​그렇게 말하며 경부는 그 화승총을 집어 들어 총구를 코에 가까이 대더니 무심코 중얼거렸다.
​"흥, 아직 화약 냄새가 남아 있군."
"아, 그거 말씀이십니까. 그건 이분 동생분 거라서요..."
​호텔 주인이 옆에서 거들었다.
​"동생?"
"네, 지로 님이라고, 역시 저희 호텔에 묵고 계신데 지금은 안 계십니다만, 본채 쪽에 방이 있습니다."
"그럼 저건? 저 총은?"
​경부는 몸을 반쯤 돌려 침대 위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최신식 연발총이 겨우 손이 닿을 만한 높이에 걸려 있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때까지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저건 형님 것으로, 저 총을 들고 매일 뒷산으로 사냥을 가셨습니다."
​그때 시신에서 떨어져 창밖을 바라보던 형사가 무얼 발견했는지 외쳤다.
​"앗, 이거다!"
​나도 그 소리에 이끌려 형사 뒤에서 창문 밑을 내려다보니, 어제 내린 비로 축축해진 그리 넓지 않은 마당에 나막신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형사는 무척이나 흡족한 듯 경부를 향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범행 경로는 아주 간단한 것 같습니다. 즉, 범인은 피해자의 낮잠 습관을 알고 있어서 딱 피해자가 잠들 무렵 이 창밖으로 몰래 다가와, 조용히 이 창문을 열고 저 화승총으로 저격한 겁니다. 그리고 총을 책상 위에 둔 채로 도주했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피해자의 일상생활을 잘 아는 자를 조사해 보면 범인은 금방 밝혀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때 복도에서 우당탕 다급한 발소리가 나더니 한 청년이 뛰어 들어왔다. 지로였다. 들어오자마자 침대 위 형의 시신 쪽으로 눈길을 돌렸는데, 그 얼굴은 공포로 심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왠지 지로의 모습을 보자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와서는 안 될 곳에 그 사람이 온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이 한 사람을 향해 '네가 범인이다'라고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화승총은 지로의 것이고, 창밖 발자국은 나막신 자국인데 지금 눈앞에 있는 지로는 기모노 차림에 나막신을 신고 있다. 게다가 나는 그들 형제의 가정 내 불화도 잘 알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들어오자마자 지로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소리쳤다.
​"당신이 지로 군이오?"
​형사가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지로는 거기에 늘어선 극도로 긴장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더니 더욱 파랗게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이건, 이 화승총은 당신 거겠죠?"

​형사는 책상 위 사냥총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것을 보자 지로는 흠칫 놀라는 듯했지만 그래도 태연하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게 왜요?"
​형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그쳤다.
​"지금까지 당신은 어딜 갔었소?"
​이 질문에 지로는 잠시 말문이 막혔으나, 이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또 말씀드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례지만 두 분, 친형제가 맞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형사의 얼굴에는 비꼬는 듯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아니요, 그렇진 않습니다."

​그 후로도 이래저래 많은 심문이 이어졌고, 경찰의의 검시가 있었고, 방 안팎의 현장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결국 지로는 끝내 그 자리에서 연행되고 말았다.

​그날 저녁, 다치바나와 나는 같은 호텔 방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시신 수습이나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우리는 호텔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너 아까 한참 안 보이던데, 어디 갔었어?"
​먼저 내가 입을 열었다. 평소 탐정 놀이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다치바나가 이런 사건에 맞닥뜨리고서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다. 오랫동안 모습을 감췄던 건 그사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칠 단서를 잡았거나 증거를 굳히기 위해 뛰어다녔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다치바나의 탐정 이야기가 듣고 싶어 그쪽으로 화제를 돌려본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나는 진지하게 다치바나의 명탐정 행세를 경청하려던 게 아니라, 이런 뻔한 살인 사건을 탐정광 다치바나가 얼마나 거들먹거리며 설명할지 내심 그게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자 다치바나는 갑자기 입을 쩍 벌리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하!"

​나는 영문을 몰라 도깨비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다치바나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혹시나 하야시의 급사로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 의심마저 들었다.
​"시골 형사치고는 재빠르게 움직여서 조사를 잘하는 것 같긴 하던데, 이 사건은 꼬치꼬치 캐기 좋아하는 시골 탐정 나리에게는 너무 간단한 사건 같아. 그래, 완전히 지나칠 정도로 너무나 단순한 사건이야."
​다치바나가 여전히 말을 이어가려던 참에, 보이의 안내를 받아 방금 소문을 올렸던 다치바나의 이른바 '시골 탐정'이 불쑥 나타났다.

​"아깐 실례했습니다. 잠시 여쭤볼 게 있어서요."
​형사가 인사를 건넸다.
​"아, 어떠십니까. 지로 군은 자백했나요?"
​내가 이렇게 묻자 형사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시치미를 뚝 뗐다.
​"그걸 당신들에게 말할 필요는 없소."
"그럼 무슨 용건으로 오신 겁니까?"
"그때의 정황을 한 번 더 자세히 듣고 싶어서요."
​형사가 그렇게 말하며 내게 다가오자, 곁에 있던 다치바나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꼬는 듯한, 또 득의양양한 알 수 없는 웃음을 띠며 형사에게 대꾸했다.

​"자세히 조사하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
​이 모욕적인 말은 명백히 형사의 화를 돋우었다.
​"뭐요? 조사할 필요가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난 직권을 가지고 조사하러 온 거요."
"조사하시는 건 자유지만, 전 그럴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어째서요?"
"당신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이 사건은 범죄가 아닙니다. 따라서 범인도 없고 범행을 조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다치바나의 뜻밖의 말에 형사도 나도 펄쩍 뛸 듯이 놀랐다.
​"범죄가 아니라고? 흠, 그럼 당신은 자살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군."

​형사의 말에는 '이 애송이가 무슨 건방진 소리냐' 하는 멸시의 울림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물론 자살도 아닙니다."
"그럼 과실사라도 된다는 거요?"
"그것도 아닙니다."
"아하하하하, 이거 참 재밌군. 타살도 아니고 자살도 아니고, 과실사도 아니다? 그럼 대체 그 남자는 어떻게 죽은 거요. 설마 당신이…."
"아니요, 전 그저 범죄가 아니라고 했을 뿐입니다. 타살이 아니라고는 안 했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군. 내 참…."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형사의 얼굴에는 여전히 다치바나를 조롱하는 듯한 비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 형사의 안색을 본 다치바나는 발끈했는지 매섭게 형사를 쏘아보며 말했다.

​"여기서 지금 제가 설명해 봤자 당신은 납득하지 못할지도 모르니, 내일 그 증거를 보여 드리죠."
"증거? 호오, 그런 진기한 증거가 있다면 꼭 한번 보고 싶군. 하지만 왜 하필 내일이요?"
"거기엔 중대한 이유가 있습니다. 내일이 아니면 보여드릴 수 없거든요. 어쨌든 내일 1시에 이곳으로 오십시오. 반드시 납득할 만한 증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설마 농담은 아니겠지. 좋소. 내일 1시라."
"하지만 만약 내일 비가 오거나 조금이라도 흐리면 안 된다고 알아두십시오."
"헤에, 흐리면 안 된다?"
"그렇습니다. 오늘처럼 맑은 날씨가 아니면 증거를 보여드릴 수 없습니다. 아, 그리고 오실 때 반드시 그 화승총을 가져오십시오."
"참 까다로운 조건이구려. 그럼 내일을 기대하도록 하고 오늘은 이만 가보겠소."

​형사는 버리는 말인지 뭔지 모를 말을 내뱉더니, 묘하게 씩 웃으며 나갔다. 형사가 나가자 다치바나는 나를 향해 중얼거렸다.
​"시골 형사 놈, 이번엔 날 의심하기 시작했군."
​비단 시골 형사뿐 아니라 사실 나조차도 다치바나의 언동이 너무나도 뜻밖이라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치바나가 말하는 증거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
​"너, 증거라니 도대체 뭘 말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 점을 묻자 다치바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 방 테이블 위에 특이한 꽃병이 있었지? 그게 바로 증거야."
​다치바나가 그렇게 확실히 말해주었음에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캐묻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나는 자신의 무능함을 한탄하며 자기혐오를 느낀 채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날 밤,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 방의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는데, 그때 창가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수상한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다음 날은 다행히도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였다.
어제 그 형사는 두 명의 순경을 대동하고 약속대로 1시 정각에 찾아왔다. 오른손에는 문제의 화승총을 꽉 쥐고 있었다. 다치바나는 형사 뒤를 따라오는 한 순경의 모습을 보더니 그쪽으로 다가가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며 웃으며 말했다.
​"간밤엔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 말을 듣자 형사는 당황하며 변명하듯 말했다.
​"사실 아직 이 호텔 안에 범인이 숨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망을 보게 했던 거요."

​알고 보니 내가 보았던 수상한 남자는 바로 이 순경이었던 모양이다.
​자, 사람들이 모두 별채에 모이자―이 안에는 호텔 주인과 보이도 있었다―오늘의 주역인 다치바나는 방 남서쪽 구석에 있는 테이블로 다가가서 그 위 물건들을 어제와 똑같이 나란히 놓았다. 형사에게 건네받은 화승총에는 미리 준비한 탄환과 화약을 장전하고 표시해 둔 원래 위치에 정확히 올려놓았고, 꽃병과 받침대도 예전 위치 그대로―이 부분은 가장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세팅했다.
​책상 위 물건들이 어제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자리에 놓이자, 이번에는 책상 앞 창문을 표시해 둔 곳까지 열어젖혔다. 그런 뒤 다치바나는 보이에게 무언가 귓속말을 했다. 보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을 나갔고 이내 사람 크기만 한 짚 인형을 안고 돌아왔다. 짚 인형에는 엉성하게 조끼가 입혀져 있었다. 다치바나는 보이에게서 인형을 건네받아 방구석 침대 위에 어제 하야시가 자고 있던 모습 그대로 눕혔다.

​준비가 모두 끝나자 다치바나는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걸로 이 방의 모습은 물건 하나하나 모두 어제 참극이 벌어졌을 때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중요한 물건 위치는 전부 표시를 해두었으니까요. 자, 저는 지금부터 어제 하야시 군이 어떻게 살해되었는지, 아니, 어떻게 가슴에 총탄을 맞았는지 그 상황을 여러분께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다치바나의 이토록 자신만만한 말을 듣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긴장했다.

​"그전에 저는 이 사건에 대해 제가 믿는 바를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경찰 분들은 지로 군을 범인으로 확신하는 듯하지만, 이는 사건의 진상을 단단히 오해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로 군뿐만 아니라 이 사건에는 하야시 이치로를 살해한 범인이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로 군에게 혐의를 둔 첫 번째 이유는 이 화승총이 그의 소유물이라는 점 때문인 것 같은데, 이는 털끝만큼도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아무리 멍청한 인간이라도 자기 총으로 사람을 죽이고 그것도 현장에 버려둔 채 도망가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겠죠. 오히려 이 사실은 지로 군의 무죄를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저 마당에 난 발자국인데, 이 역시 정반대의 증거를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나중에 조사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오가는 보폭이 똑같을 뿐만 아니라 그 보폭이 아주 좁습니다. 살인을 저지른 인간이 그렇게나 침착하게 걸어갈 수 있을까요? 혹시나 해서 어젯밤 그 발자국을 따라가 조사해 보았더니 어처구니없게도 이 호텔 뒷산의 미친 여자가 뒤쪽 생울타리를 빠져나와 마당에 숨어든 발자국으로 밝혀졌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지로 군이 사건 시간에 마침 부재중이었고 그 행선지를 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너무 자세한 이야기는 피하고 싶습니다만, 그저 보이의 말에 따르면 지로 군이 외출하자마자 2층에 머물고 있는 노신사의 따님이 외출했고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돌아왔다는 사실만 말씀해 두겠습니다. 이 일은 어쩌면 지로 군이 이미 경찰에 털어놓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러고서 다치바나는 말을 끊고 형사 쪽을 바라보았다. 형사는 고개를 끄덕여 암묵적으로 다치바나의 추측을 긍정했다. 다치바나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마지막으로 이치로 군과 지로 군이 친형제가 아니라는 사실도 의심하는 이유 중 하나인 것 같은데, 이 역시 근거로 삼기엔 너무나 빈약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설령 지로 군이 이치로 군에게 살의를 품고 있었다 쳐도 굳이 호텔같이 보는 눈이 많은 장소를 택하지는 않았을 테지요. 형제는 매일같이 뒷산으로 사냥을 갔으니 만약 해치우려 마음먹었다면 거기서 얼마든지 기회는 있었을 겁니다. 혹 재수 없게 현장을 누군가에게 들켰다 하더라도 그런 장소라면 새나 짐승 같은 걸 쏘려다 실수로 죽였다고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겠죠. 이렇게 파고들면 지로 군을 의심할 만한 이유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래도 지로 군이 살인범이겠습니까?"

​다치바나의 달변과 추리의 명쾌함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었고, 나는 마음속으로 '과연, 과연 그렇군' 하고 연신 외치고 있었다. 다치바나는 분위기를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처음엔 저도 화승총이 책상 위에 놓여 있거나 죽은 자의 조끼가 화약으로 까맣게 그을려 있었던 탓에 혹시 자살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책상 위에 있던 두 물건의 어떤 무서운 인과관계를 깨닫고는 이내 제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습니다. 다음으로 발자국이 이 사건과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므로, 이 사건에 범인이 존재한다고 상상할 수는 없게 된 셈이죠. 그렇다면 하야시 군의 죽음은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요. 범인 없는 타살 말고는 달리 생각할 방법이 없지 않을까요?"

​아아, 범인 없는 타살이라니. 그런 기묘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좌중은 침을 꼴깍 삼키며 다치바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제 상상이 틀리지 않았다면, 하야시 군은 어제 정오, 점심을 먹고 지로 군의 방에서 총알이 장전된 화승총을 들고나와 이 방으로 돌아왔고 책상에 기대어 그것을 만지작거렸을 겁니다. 그러다 문득 친구에게 편지를 써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라 총을 책상 위에 둔 채 편지를 쓰기 시작한 거죠.
 
그때 총의 개머리판이 마침 이 책꽂이 모퉁이에 닿아 있었다는 사실이 이 사건에 중대한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편지를 다 쓰고는 곧장 습관처럼 낮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웠습니다. 그 후 얼마나 지났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1시 30분이 되어 참으로 무서운 참극이 일어난 겁니다. 세상에도 신기한, 범인 없는 살인이 일어난 거죠."

​그렇게 말하며 다치바나는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자, 지금 1시 28분입니다. 이제 1~2분만 있으면 범인 없는 살인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의 진상이 명백히 밝혀지는 거죠. 책상 위 꽃병을 잘 주시해 주십시오."
​사람들은 마술사의 요술을 보듯 열두 개의 눈동자를 일제히 유리병에 쏟았다.

그때 내 머릿속에 어떤 사실이 번개처럼 스쳤다. 그렇다! 마술의 트릭을 알겠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다.
​아아, 그것은 태양과 유리병이 만들어낸 세상에서 가장 기이한 살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보라! 유리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강렬한 햇빛을 받아 불꽃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둥근 모양에 물이 가득 담긴 그 유리병을 관통한 태양 광선은 한층 강렬해져 책상 위 화승총을 향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저주의 초점을 만들기 시작했다.

​초점은 태양의 이동과 함께 조금씩 자리를 옮기더니 이제 막 점화구 정중앙에 백열의 빛을 쏘아내렸다.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총성이 방 안을 가득 울렸고 총구에서는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사람들은 일제히 시선을 침대 쪽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가슴에 총을 맞은 짚 인형이 매캐하게 연기를 내뿜으며 나뒹굴고 있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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