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혹 (疑惑) 소설 전문 (全文)
에도가와 란포 (江戸川 乱歩)
1. 그 다음 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며?"
"응."
"역시 사실이었구나. 그런데 오늘 아침 ○○신문 기사 읽어봤어? 도대체 그게 사실이야?"
"……."
"어이, 정신 차려. 걱정돼서 묻는 거잖아. 무슨 말 좀 해봐."
"응, 고마워. ……딱히 할 말은 없어. 그 신문 기사가 맞아. 어제 아침에 눈을 떠보니, 집 마당에 아버지가 머리가 깨진 채 쓰러져 계셨어. 그게 전부야."
"그래서 어제 학교에 안 온 거구나. ……범인은 잡혔어?"
"응, 용의자가 두세 명쯤 잡힌 것 같아. 하지만 아직 누가 진짜 범인인지는 몰라."
"아버지께서 그렇게 원한을 살 만한 일을 하셨어? 신문에는 원한에 의한 살인 같다고 나오던데."
"그건… 그랬을지도 몰라."
"사업상 문제로……?"
"그런 그럴싸한 게 아니야. 우리 아버지라면, 어차피 술김에 한 싸움이 원인이겠지."
"술김이라니, 아버지께서 술버릇이 나쁘셨어?"
"……."
"어이, 너 오늘 좀 이상한 거 아니야? ……아, 울고 있구나."
"……."
"운이 나빴던 거야. 그저 운이 없었어."
"……난 분해. 살아계실 때는 어머니와 우리를 그렇게 괴롭히시더니, 그것도 모자라 그런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시다니. ……난 슬프거나 하진 않아. 그저 분해서 견딜 수가 없어."
"너 오늘 정말 좀 이상하다."
"네가 이해 못 하는 것도 당연해. 아무리 그래도 내 부모 욕을 하는 건 싫었으니까, 난 오늘까지 너한테조차 그 일에 대해선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잖아."
"……."
"난 어제부터 뭐라 말할 수 없이 이상한 기분이야. 친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슬퍼할 수가 없어. ……아무리 그런 아버지라도 돌아가셨으니 당연히 슬플 줄 알았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그런데 난 지금 조금도 슬프지 않아. 만약 그렇게 불명예스러운 죽음만 아니었다면, 차라리 돌아가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야."
"친아들에게 그런 원망을 듣다니, 아버지도 참 불행한 분이시네."
"그래, 그게 어찌할 수 없는 아버지의 운명이었다고 생각하면 안된 사람이지. 하지만 지금 나에겐 그렇게 동정할 여유 따윈 없어. 그저 끔찍하고 화가 날 뿐이야."
"그렇게나……."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남겨주신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술과 여자에 탕진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어. 비참한 건 어머니였지. 어머니가 얼마나 견디기 힘든 고통을 참아 오셨는지, 그걸 지켜보며 우리 자식들이 아버지를 얼마나 증오했는지. ……이런 말 하긴 우습지만, 우리 어머니는 정말 대단한 분이야.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폭력을 참고 견뎌 오셨다고 생각하면 난 눈물이 나. 지금 내가 이렇게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것도, 우리 가족이 길거리에 나앉지 않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집에 살 수 있는 것도 다 어머니 덕분이야."
"그렇게 심하셨어?"
"너희들은 상상도 못 할 거야. 요새 들어 그게 더 심해져서 매일같이 끔찍한 부부 싸움, 부자 싸움이 벌어졌어. 나잇값도 못 하고 추레하게 취한 아버지가 어디선가 불쑥 돌아와. ――아버지는 이미 알코올 중독이라 아침부터 밤까지 술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어. ――그러고선 어머니가 마중을 안 나왔다느니, 표정이 이상하다느니 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다짜고짜 손을 올리는 거야. 최근 반년 동안 어머니 몸에는 생채기가 가실 날이 없었어. 그걸 보면 우리 형이 욱하는 성질이 있어서, 이를 갈며 아버지한테 덤벼드는 거지……."
"아버지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데?"
"쉰이셔. 그 연세에 설마 하겠지만, 실제로 아버지는 이미 반쯤 미쳐 있었는지도 몰라. 젊을 때부터 빠져 산 여자와 술의 독 때문에 말이야. ……밤에 아무 생각 없이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면, 그 앞 창호지에 빗자루를 치켜들고 버티고 선 형의 그림자가 비치곤 했어. 흠칫 놀라 멍하니 서 있으면, 우당탕하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초롱 상자가 창호지를 뚫고 날아와. 아버지가 집어 던진 거지. 세상에 이렇게 끔찍한 부자 지간이 또 어딨겠어……."
"……."
"형은 너도 알다시피 매일 요코하마로 출퇴근하며 ○○회사 통역을 맡고 있는데, 참 안됐어. 혼담이 들어와도 아버지 때문에 매번 깨지거든. 그렇다고 분가할 용기도 없어. 저렇게 비참한 어머니를 내버려 두고 떠날 수는 도저히 없다는 거야. 서른이 다 된 형이 아버지랑 멱살잡이를 한다고 하면 네 귀엔 우습게 들릴지 몰라도, 형 입장이 돼보면 정말 무리도 아니야."
"너무 심했구나."
"엊그제 밤이었지, 그래. 아버지가 웬일로 아무 데도 안 나가고, 대신 아침에 눈 뜨자마자 술을 마셨어. 하루 종일 투덜대며 주정을 부렸던 모양인데, 밤 10시쯤 되자 어머니가 참다못해 술 데우는 걸 조금 늦췄어. 그랬더니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더라고. 급기야 어머니 얼굴에 찻잔을 집어 던진 거야. 그게 하필 콧대에 정통으로 맞아서, 어머니는 잠시 정신을 잃었을 정도였어. 그러자 형이 갑자기 아버지에게 덤벼들어 멱살을 잡고, 여동생은 울고불고하며 그걸 말리고. 너, 이런 광경이 상상이나 돼? 지옥이야, 지옥이라고."
"……."
"만약 앞으로 몇 년이나 이런 상태가 계속됐다면, 우린 도저히 버티지 못했을지도 몰라. 어머니는 그 때문에 돌아가셨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 형제 중 누군가가 아버지를 죽여버렸을지도 몰라.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우리 가족은 이번 사건으로 구원받은 거나 마찬가지야."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어제 아침이라고 했지."
"발견한 게 새벽 5시쯤이었어. 여동생이 제일 먼저 잠에서 깼지. 정신을 차려보니 툇마루 문이 한 장 열려 있더래. 아버지 잠자리가 텅 비어 있어서, 틀림없이 아버지가 일어나 마당에 나가셨나 보다 생각했대."
"그럼 그쪽으로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 들어온 거구나."
"아니야. 아버지는 마당에서 당하셨어. 그 전날 밤에 어머니가 기절할 정도의 소동이 있었으니, 아무리 아버지라도 잠이 오지 않았던 모양이야. 한밤중에 일어나 마당으로 바람을 쐬러 나가신 것 같아. 옆방에서 자던 어머니나 여동생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렇게 한밤중에 마당에 나가 거기 있는 커다란 다듬잇돌 위에 걸터앉아 바람을 쐬는 게 아버지 버릇이었거든. 그러니까 그러고 계신 걸 뒤에서 당한 게 틀림없어."
"찔린 거야?"
"뒤통수를, 그다지 예리하지 않은 흉기로 내리쳤어. 도끼나 낫 같은 종류의 것이라는 게 경찰의 감정 결과야."
"그럼 흉기는 아직 못 찾은 거네."
"여동생이 어머니를 깨웠고, 두 사람이 한목소리로 2층에서 자던 형과 나를 불렀어. 그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난 아버지의 시신을 보기도 전에 이미 사건을 전부 알아차린 것 같았어. 예전부터 묘한 예감 같은 게 있었거든. 그래서 올 것이 왔구나 싶었지. 형과 둘이서 허둥지둥 내려가 보니, 열린 툇마루 틈 사이로 마치 그림처럼 밝은 마당의 한구석이 보였고, 거기에 아버지가 아주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웅크리고 계셨어. 묘한 일이지, 그런 상황에는. 난 한동안 연극을 보는 것처럼 아주 방관자적인 기분에 빠져 있었어."
"……그래서, 실제 범행이 일어난 건 언제쯤이래?"
"새벽 1시쯤이래."
"한밤중이네. 그럼, 용의자라는 건."
"아버지를 원망하던 사람은 많아. 하지만 죽일 만큼 미워했는지는 모르지. 굳이 의심하자면, 지금 거론되는 사람 중 한 명이 아닐까 싶어. 어떤 작은 선술집에서 아버지한테 맞아 크게 다친 남자인데, 치료비를 물어내라며 여러 번 찾아왔어. 그때마다 아버지는 호통을 치며 내쫓았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엔 어머니가 말리는데도 듣지 않고 순경을 불러 넘겨버리기까지 했지. 우린 비록 몰락하긴 했어도 동네에선 오래 산 집안이고, 그쪽은 초라한 노동자 같은 남자니까 그렇게 되면 싸움이 안 되거든. ……난 아무래도 그놈이 아닐까 싶어."
"하지만 이상하네. 한밤중에 가족이 여럿 있는 집에 몰래 숨어든다는 건 꽤 어려운 일이잖아. 단지 맞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을 죽일 마음을 먹을까. 게다가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집 밖에서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을 텐데. ……도대체 괴한이 밖에서 침입했다는 확실한 증거라도 있었어?"
"바깥 문단속이 안 되어 있었어. 빗장이 풀려 있었지. 그리고 그곳에서 마당으로 통하는 사립문에는 자물쇠가 없거든."
"발자국은?"
"그건 안 돼. 요새 날씨가 계속 좋아서 땅이 바싹 말라 있었으니까."
"……너희 집엔 고용인은 없었던 모양이네."
"없어. ……아, 그럼 넌 범인이 외부에서 들어온 게 아니라는 거구나. ……그런, 그런 일이. 아무리 그래도 그런 무서운 일이. 틀림없이 그놈일 거야. 아버지한테 맞았던 그 남자. 막일하는 목숨 내놓은 놈이라면 위험 따윈 생각 안 할 거라고."
"그건 모르지, 그래도……."
"아아, 이젠 이런 얘긴 그만하자. 뭐라고 해본들 이미 끝난 일이야. 이제 와서 어쩔 수 없잖아. 게다가 벌써 시간이 다 됐어. 슬슬 교실에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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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5일째
"그럼, 넌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너희 가족 중에 있다는 거니?"
"너, 요전에 범인이 밖에서 들어온 게 아니라는 식으로 넌지시 말했지? 그때는 그런 말을 듣기 싫어서 ――나도 어느 정도 그걸 느끼고 있었고, 아픈 곳을 찔린 기분이었거든―― 네 말을 중간에 끊어버렸지만, 지금 난 똑같은 의심에 시달리고 있어. ……이런 건 물론 남에게 할 얘기가 아니지. 할 수만 있다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려고 했어. 하지만 난 이제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어. 적어도 너한테만은 의논하고 싶어졌어."
"그래서, 즉 누구를 의심하고 있다는 거야?"
"형이야. 나에겐 피를 나눈 형제고, 돌아가신 아버지에겐 친아들인 우리 형을 의심하고 있어."
"용의자는 자백했어?"
"자백은커녕, 차례차례 반증이 나오고 있어. 경찰도 애를 먹고 있다는 거야. 형사들이 자주 찾아와서는 그런 얘기를 하고 가. 그것도 어찌 보면 경찰 쪽에서도 우리 가족을 의심하고 있어서 동태를 살피러 오는 건지도 몰라."
"하지만 너 너무 예민해진 거 아니니?"
"단순히 신경 문제라면 내가 이렇게 시달리진 않지. 사실이 있어. ……요전엔 그런 게 사건과 관계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고 거의 잊고 있을 정도라 너한테도 말 안 했지만, 난 그날 아침 아버지 시신 옆에서 구깃구깃 뭉쳐진 마 소재의 손수건을 주웠어. 꽤 더러워져 있었지만, 딱 이름표를 꿰맨 곳이 밖으로 나와 있어서 한눈에 알아봤어. 그건 형과 나 말고는 아무도 가지고 있을 리 없는 물건이었어. 아버지는 옛날 분이라 손수건을 싫어하셔서 수건을 접어 품에 넣고 다니는 버릇이 있었고, 어머니나 여동생은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지만 당연히 여자용 작은 거라 완전히 달랐거든. 그러니까 그 손수건을 떨어뜨린 건 형 아니면 나, 둘 중 하나가 틀림없어. 그런데 난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까지 4~5일 동안 마당에 나간 적이 없고, 최근에 손수건을 잃어버린 기억도 없어. 그렇다면 아버지 시신 곁에 떨어져 있던 손수건은 형의 물건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야."
"하지만, 아버지가 어떻게 하다가 그걸 가지고 계셨다거나 하는……."
"그럴 리 없어. 아버지는 다른 일엔 엉망이었어도 그런 소지품 같은 데엔 꽤나 꼼꼼한 분이셨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남의 손수건을 가지고 계신 걸 본 적이 없어."
"……그렇지만, 만약 그게 형의 손수건이었다고 해도, 반드시 아버지가 살해당했을 때 떨어뜨렸다고 단정할 순 없잖아. 전날 떨어뜨렸을지도 모르고. 더 전부터 떨어져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 마당은 이틀에 한 번꼴로 여동생이 깨끗하게 청소하기로 되어 있고, 마침 사건 전날 저녁에도 청소를 했어. 그리고 다들 잠자리에 들 때까지 형이 한 번도 마당에 내려가지 않았다는 것도 확실해."
"그럼 그 손수건을 자세히 조사해 보면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예를 들어……."
"그건 불가능해. 난 그때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바로 화장실에 버려버렸거든. 왠지 불길하고 불쾌한 기분이 들어서. ……하지만 형을 의심하는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야.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사실이 있어. 형과 나는 방은 다르지만 같은 2층에서 자는데, 그날 밤 1시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난 잠자리에서 깨어 있었어. 마침 그때 형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를 들었지. 당시엔 화장실에 갔나 보다 하고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다시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를 듣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의심하려고 마음먹으면 못 할 것도 없어.
그리고 또 하나, 이런 일도 있었어. 아버지의 변사가 발견되었을 때, 형과 나는 아직 자고 있었는데 어머니와 여동생의 다급한 부름에 놀라 뛰어나와 허둥지둥 아래로 내려갔어. 형은 잠옷을 벗고 겉옷만 걸친 채 띠도 매지 않고 한 손에 움켜쥔 채 툇마루 쪽으로 달려갔지. 그런데 툇마루 디딤돌 위에 맨발로 내려서자마자 왠지 모르게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는 거야.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버지의 시신을 보고 너무 놀라 주춤했나 싶기도 하지만, 그렇다 쳐도 왜 손에 쥐고 있던 병아띠(남자용 넓은 허리띠)를 디딤돌 위에 떨어뜨렸을까? 형이 그 정도로 놀랐던 걸까? 이건 평소 형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납득이 안 가는 일이야. 떨어뜨리기만 했다면 상관없어. 떨어뜨렸나 싶더니 황급히 주워 들었지. 그게 말이야, 내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주워 든 건 띠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아. 뭔가 작고 검은 물건이 (그건 한눈에 주인을 알 수 있는, 예컨대 지갑 같은 물건이었을지도 몰라) 돌 위에 떨어져 있었고, 찰나의 순간 우선 띠를 떨어뜨려 감춘 뒤 주울 때는 띠 위로 그 물건까지 한꺼번에 움켜쥔 것처럼 보였어. 나 역시 제정신이 아닌 상황이었고 정말 한순간의 일이었으니 어쩌면 내 착각일지도 몰라.
하지만 손수건 일이나, 마침 그 시간에 아래층으로 내려갔던 일이나, 무엇보다 요즘 형의 태도를 종합해 보면 이젠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집안 식구들이 전부 왠지 이상해. 그건 단순히 가장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과는 달라. 그 이상으로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쾌하고 섬뜩한, 일종의 기류가 감돌고 있어. 식사할 때 네 식구가 얼굴을 마주해도 아무도 말을 안 해. 묘하게 서로 얼굴만 힐끗거리고 있지. 그 모습이 아무래도 어머니나 여동생도 나처럼 형을 의심하고 있는 눈치야. 형은 형대로 창백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고. 정말이지 형언할 수 없는 아주 끔찍한 느낌이야. 난 이제 그런 집에 있는 건 견딜 수가 없어. 학교에서 돌아와 집 문턱을 넘어서면 오싹하고 음침한 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가장을 잃어 안 그래도 쓸쓸한 집안에, 어머니와 세 자녀가 입을 다물고 각자 무언가를 생각하며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 거야. ……아아, 미칠 것 같아."
"네 얘기를 듣고 있으니 나까지 무서워진다. 하지만 설마 그러겠어. 설마 형이……. 너 정말 너무 예민해진 거야. 기우라고."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내 기분 탓만은 아니야. 이유가 없다면 모를까, 형에게는 아버지를 죽일 만한 충분한 동기가 있어. 형이 아버지 때문에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그래서 아버지를 얼마나 증오했는지. ……특히 그날 밤은 어머니가 다치기까지 했어. 효심 깊은 형이 홧김에 문득 끔찍한 짓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없어."
"……."
"……."
"무서운 일이네. 하지만 아직 단정할 순 없잖아."
"그러니까 내가 더 견딜 수 없는 거야. 어느 쪽으로든, 설령 나쁜 쪽으로 결론이 나더라도 확실해지면 그나마 나아. 이런 애매하고 무서운 의혹에 갇혀 있는 건 정말 견딜 수 없는 일이야."
"……."
3. 10일째
"어, S 아니야? 어디 가?"
"어…… 별로……."
"얼굴이 엄청 초췌한데? 그 일, 아직 안 풀렸어?"
"응……."
"네가 하도 학교에 안 오길래, 오늘은 내가 너희 집에 가볼까 하던 참이었어. 어디 가는 길이야?"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야."
"그럼 산책이라도 하려고? 그렇다기엔 묘하게 휘청거리고 있잖아."
"……."
"잘됐다. 저기까지만 같이 걷지 않을래? 걸으면서 얘기하자. ……그래서, 아직 뭔가 고민하고 있는 거지? 학교도 안 나오고."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할 힘도 뭣도 다 잃어버렸어. 완전 지옥이야. 집에 있는 게 무서워……."
"아직 범인이 안 밝혀진 거구나. 그리고 역시 형을 의심하고 있는 거고?"
"제발 그 얘기는 그만해줘. 숨이 막힐 것 같아."
"혼자 끙끙 앓아봤자 소용없잖아. 털어놔 봐. 나한테 또 무슨 좋은 묘안이 있을지 모르잖아."
"말하라고 해도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야. 집안 식구들이 서로를 의심하고 있어. 네 사람이 한집에 있으면서 말도 안 섞고 노려보고만 있다고. 그리고 어쩌다 입을 열면, 형사나 재판관처럼 상대방의 비밀을 캐내려 들어. 그게 다 피를 나눈 혈육끼리 말이야. 그리고 그중 한 명이 살인자 ――존속살인이거나 남편을 죽인 범인――인 거지."
"그건 너무 심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딨어. 너 분명히 좀 이상해진 거야. 신경쇠약이 만들어낸 망상일지도 몰라."
"아니, 절대 망상이 아니야. 그랬으면 차라리 낫겠어."
"……."
"네가 안 믿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이런 지옥이 세상에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상상 못 할 테니까. 나 스스로도 악몽에 가위눌린 것 같은 기분이야. 내가, 아버지를 죽인 용의자로 형사에게 미행을 당하다니. ……쉿, 뒤돌아보지 마. 바로 저기 있어. 요 며칠 내가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꼭 뒤를 밟아."
"……무슨 소리야. 네가 의심받고 있다고?"
"나뿐만이 아니야. 형이든 여동생이든 모두에게 미행이 붙어. 가족 전체가 의심받고 있어. 그리고 집안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있고."
"그건 참……. 그런데 그렇게 서로 의심할 만한 새로운 정황이라도 생겼어?"
"확증 같은 건 하나도 없어. 그저 의심뿐이야. 외부 용의자들은 모두 풀려나 버렸거든. 남은 건 집안사람을 의심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는 거지. 경찰은 매일같이 찾아와. 그리고 집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 요전에도 장롱 속에서 피 묻은 어머니 유카타가 나왔을 땐 경찰이 어찌나 난리를 치던지. 뭐, 아무것도 아니었어. 사건 전날 밤에 아버지가 찻잔을 집어 던졌을 때 튄 피를 미처 빨지 못했던 것뿐이니까. 내가 그걸 설명해 주자 그 자리는 일단 수습됐지만, 그 이후로 경찰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버렸어. 아버지가 그렇게 난폭한 사람이었다면 가족들이 더더욱 의심스럽다는 논리 같아."
"요전엔 네가 형을 엄청 의심했던 것 같은데……."
"목소리 좀 낮춰줘, 뒤에 있는 놈이 듣겠어. ……그런데 그 형은 형대로 누군가를 의심하고 있어. 아무래도 어머니를 의심하는 것 같아. 형이 아주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어머니에게 물어본 적이 있거든. 어머니, 혹시 빗 잃어버리지 않으셨냐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깜짝 놀라 숨을 삼키면서,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하셨어. 그게 다야. 듣기에 따라서는 아무것도 아닌 대화지. 하지만 난 거기에 덜컥했어. 아, 요전에 형이 허리띠로 감춘 게 어머니의 빗이었구나 하고……."
"……."
"그 이후로 난 어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의 깊게 살피기 시작했어. 얼마나 끔찍한 일이야. 아들이 어머니를 탐정 노릇 하며 감시하다니. 난 꼬박 이틀 동안 뱀처럼 눈을 번뜩이며 구석에서 어머니를 감시했어. 무서운 일이지. 어머니의 태도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해. 왠지 모르게 안절부절못하며 불안해 보여. 너, 이 기분을 상상할 수 있겠어? 내 어머니가 내 아버지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난 정말 형에게 물어볼까 생각도 했어. 형은 나보다 뭔가를 더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도저히 그럴 용기가 안 나. 게다가 형 쪽에서도 내 질문을 두려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요새는 나를 피하고 있어."
"귀를 막고 싶어지는 얘기네. 듣는 나도 이런데, 말하는 넌 오죽 괴로울까."
"괴롭다거나 하는 감정은 이미 넘어서 버렸어. 요새는 세상이 뭔가 완전히 다르게 보여. 저렇게 길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의 태평하고 낙천적인 얼굴을 보면 항상 신기해. 저놈들도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 부모를 죽인 살인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 ……꽤 멀어졌다. 미행하는 놈, 사람 통행이 적어지니까 꽤 뒤처져서 오네."
"하지만 너, 분명 아버지가 살해당한 장소에 형의 손수건이 떨어져 있었다고 하지 않았어?"
"맞아. 그래서 형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야. 그리고 어머니에 대해서도 의심하는 게 맞는지 아닌지 확실히 몰라. 묘한 건,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또 누군가를 의심하고 있다는 거야. 완전 숨바꼭질이 따로 없어. 웃긴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로 다 할 수 없이 섬뜩한 의미로 말이야. ……어제저녁 일이었어. 이미 꽤 어두워졌을 때지. 아무 생각 없이 2층에서 내려오는데, 거기 툇마루에 어머니가 서 계셨어. 몰래 무언가를 엿보고 있는 눈치였지. 눈을 번뜩이면서 말이야. 그리고 내가 내려오는 걸 보시곤 화들짝 놀란 듯 아무렇지 않은 척 방 안으로 들어가 버리셨어. 그 모습이 하도 이상해서, 난 어머니가 서 계시던 자리로 가서 어머니가 쳐다보시던 방향을 봤어."
"……."
"너, 거기에 뭐가 있었다고 생각해? 그 방향에는 어린 삼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서 나뭇잎 사이로 이나리 신을 모신 작은 사당이 비쳐 보이는데, 그 사당 뒤편에 뭔가 붉은 게 언뜻언뜻 보였다 숨었다 하는 거야. 자세히 보니 그건 여동생의 허리띠였어. 무얼 하고 있는지 이쪽에선 띠 끝자락밖에 안 보이니까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사당 뒤편에 무슨 볼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 난 하마터면 소리를 내어 여동생 이름을 부를 뻔했어. 하지만 문득 떠오른 건 아까 어머니의 묘한 태도였어. 그리고 내가 사당 쪽을 쳐다보는 내내 등 뒤로 느껴지던 어머니의 시선, 이건 예삿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 어쩌면 모든 비밀이 저 사당 뒤에 감춰져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비밀을 여동생이 쥐고 있는 게 아닐까. 직감적으로 그런 걸 느꼈어."
"……."
"난 직접 그 사당 뒤를 파헤쳐 보려고 마음먹었어. 그리고 어제저녁부터 방금 전까지 필사적으로 기회를 엿보고 있었어. 하지만 도무지 기회가 안 나. 첫째로 어머니의 눈이 빈틈없이 내 뒤를 쫓고 있어. 화장실에 잠깐 다녀와도 꼭 어머니가 툇마루에 나와서 은근슬쩍 감시하고 있어. 이건 내 억측일지도 몰라.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믿고 싶어. 하지만 그게 우연일까? 어제부터 오늘 아침까지 내가 가는 곳마다 반드시 어머니의 시선이 따라다녀. 그리고 이상한 건 여동생의 태도야. ……
너도 알다시피 난 학교를 자주 빼먹잖아. 그래서 요새 계속 쉬고 있어도 아무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 안 해. 그런데 여동생 녀석이 '오빠는 왜 학교에 안 가?' 하고 묻는 거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걸 물어본 적이 없는데, 사건 이후로 두 번이나 같은 걸 물어봐. 그리고 그때 눈빛이 참 묘해. 마치 도둑들끼리 눈빛 교환을 하는 것처럼,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 없는 신호를 보내는 거야. 여동생은 틀림없이 나를 의심하고 있어. 그 여동생의 눈도 번뜩이고 있지. 간신히 어머니와 여동생의 눈을 피해 마당으로 나가보면 하필 2층 창문에서 형이 내려다보고 있어. 그런 식이라 도무지 기회가 나질 않아. ……
게다가 설령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사당 뒤를 파보는 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야. 막상 닥치면 무서워서 못 할지도 몰라. 누가 범인인지 모르는 것도 물론 미칠 노릇이지만, 혈육 중 누군가임이 틀림없는 범인을 내 손으로 확인한다는 건, 이것 또한 너무 두려운 일이야. 아, 난 도대체 어쩌면 좋지?"
"……."
"실없는 소리를 하는 사이에 엉뚱한 데로 와버렸네. 여긴 도대체 어느 동네지? 슬슬 되돌아가자."
"……."
4. 11일째
"난 결국 봤어. 그 사당 뒤를 확인했다고……."
"뭐가 있었어?"
"끔찍한 게 숨겨져 있었어. 어젯밤, 모두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난 큰맘 먹고 마당으로 나갔어. 아래층 툇마루에서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바로 곁에서 자고 있어서 도저히 나갈 수가 없지. 그렇다고 대문으로 돌아 나가려 해도 그들 머리맡을 지나가야만 해. 그래서 난 2층 내 방이 마침 마당을 향해 있는 걸 다행으로 여기고, 창문으로 지붕을 타고 땅으로 내려갔어. 달빛이 대낮처럼 환하게 비추고 있었지. 내가 지붕을 타는 수상쩍은 그림자가 땅바닥에 선명하게 드리워지는 거야. 왠지 내가 끔찍한 범죄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아버지를 죽인 것도 사실은 내가 아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까지 들었지. 몽유병 이야기가 떠올랐어. 언젠가 밤에도 역시 이런 식으로 지붕을 타고 아버지를 죽이러 간 건 아닐까. ……난 오싹 몸서리를 쳤어.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날 밤, 아버지가 살해당한 시각에 난 분명 내 방에서 깨어 있었으니까.
난 발소리를 죽이며 그 사당 뒤로 갔어. 달빛에 비춰 자세히 보니 사당 뒤편 땅에 파헤친 흔적이 있더라고. 요놈이구나 싶어서 손으로 흙을 파헤쳐 봤어. 한 치 두 치 파 내려갔지. 그랬더니 의외로 얕은 곳에 손끝에 닿는 게 있었어. 꺼내 보니 눈에 익은 우리 집 도끼였어. 붉게 녹슨 날 끝에, 달빛에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시커먼 핏덩이가 엉겨 붙어 있었어……."
"도끼가?"
"응, 도끼가."
"그걸, 네 여동생이 거기 숨겨뒀다는 거야?"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지."
"하지만 설마 여동생이 범인일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데."
"그건 몰라. 누구라도 의심하려면 할 수 있어. 어머니든, 형이든, 여동생이든, 아니면 나 스스로든, 모두가 아버지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어. 그리고 아마 모두가 아버지의 죽음을 바랐을 거야."
"네 말은 너무 지나쳐. 너나 형은 그렇다 쳐도, 어머니까지 오랜 세월 함께 산 남편의 죽음을 바랐을 거라니. 얼마나 끔찍한 사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혈육의 정이라는 게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해. 너 역시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에 와서는 그래도 슬플 거 아니야……."
"그게, 내 경우는 예외란 말이야. 조금도 슬프지 않아. 어머니든, 형이든, 여동생이든,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다고. 아주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이게 사실이야. 슬퍼하기보다 두려워하고 있어. 자신들의 혈육 중에서 남편을 죽였거나 부모를 죽인 중죄인이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두려워하고 있는 거라고. 다른 걸 생각할 여유 따윈 없어."
"그 점은 정말 동정하지만……."
"하지만 흉기는 찾았는데 하수인(범인)이 누구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어. 역시나 오리무중이야. 난 도끼를 원래대로 땅에 묻어두고 지붕을 타고 내 방으로 돌아왔어. 그리고 밤새 한숨도 못 잤어. 온갖 환영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거야. 어머니가 반야(질투와 원한에 찬 여자 귀신) 같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양손으로 도끼를 치켜들고 있는 모습이나, 형이 얼굴에 이시카리강 줄기 같은 핏대를 세우고 정체 모를 괴성을 지르며 흉기를 내리치는 모습이나, 여동생이 무언가를 등 뒤에 숨긴 채 살금살금 아버지 등 뒤로 다가가는 광경이나."
"그럼 너 어젯밤에 못 잔 거구나. 어쩐지 아까부터 흥분해 있더라니. 넌 평소에도 신경이 좀 예민한 편이잖아. 그렇게 흥분하면 몸 상해. 좀 진정해라. 네 얘기를 듣고 있으면 너무 생생해서 기분이 나빠질 정도야."
"난 태연한 척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여동생이 흉기를 땅에 묻은 것처럼, 이 발견을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버리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하지만 도저히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아. 물론 세상에는 절대 비밀로 해야겠지만, 적어도 나만은 사건의 진상을 알고 싶어. 모르면 도저히 안심할 수가 없단 말이야. 매일매일 집안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떠보는 듯한 생활은 이제 견딜 수가 없어."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넌 도대체 그런 무서운 일을 남인 나한테 털어놔도 되는 거니? 처음엔 내가 캐물은 거지만, 요새는 네 얘기를 듣고 있으면 무서워져."
"넌 괜찮아. 네가 날 배신할 리 없잖아. 게다가 누구한테 털어놓기라도 하지 않으면 난 정말 미칠 것 같아. 불쾌할지 모르겠지만 내 말동무 좀 되어줘."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래서, 넌 앞으로 어떡할 작정이야?"
"몰라. 아무것도 몰라. 여동생 자신이 살인범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어머니나 형 중 누군가를 감싸주려고 흉기를 숨겼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이해 안 가는 건 날 의심하는 듯한 여동생의 태도야. 대체 무슨 이유로 녀석은 날 의심하는 걸까? 그 애의 눈빛을 떠올리면 소름이 끼쳐. 나이가 어려서 민감한 여동생은 뭔가 분위기를 눈치채고 있는 건지도 몰라."
"……."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하지만 그게 뭔지 조금도 알 수가 없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중얼중얼 떠드는 놈이 있어. 그 소리를 들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 나 자신은 모르지만, 여동생만은 무언가를 알고 있는지도 몰라."
"너 점점 더 이상해진다. 수수께끼 같은 소리나 하고. 아까 너도 말했듯이 아버지가 살해당한 시각에 너 자신이 분명히 깨어 있었다고 한다면, 그리고 네 방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면, 네가 의심받을 이유는 조금도 없어야 하잖아."
"이치 따지자면 그렇긴 하지. 하지만 웬일인지 난 형이나 여동생을 의심하는 한편으로 나 자신까지 묘하게 불안해지기 시작했어. 전혀 아버지의 죽음과 관계가 없다고 단언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런 느낌이 어딘가에서 든단 말이야."
5. 약 한 달 후
"어찌 된 일이야? 몇 번을 병문안 가도 못 만난다고 하니 엄청 걱정했잖아. 혹시 미치기라도 한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야. 하하하하. 근데 살이 엄청 빠졌네. 너희 집 사람들도 이상해서 자세한 건 안 알려주던데, 도대체 어디가 아팠던 거야?"
"후후후후후. 완전 유령 같지? 나도 오늘 거울을 보고 무서워졌어. 정신적인 고통이라는 게 사람을 이렇게 참혹하게 만드는구나 싶어서 말이야. 난 이제 오래 못 살아. 이렇게 네 집까지 걸어오는 것도 간신히 왔어. 묘하게 몸에 힘이 없고 마치 구름 위에라도 떠 있는 기분이야."
"그래서 병명은?"
"뭔지 몰라. 의사는 대충 얼버무리고 있어. 신경쇠약이 심한 거래. 자꾸 묘한 기침이 나. 어쩌면 폐병일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이 아니야. 십중팔구 그렇다고 생각해."
"또 그 버릇 나오네. 너처럼 신경을 혹사시키면 병이 안 나고 배기겠어? 분명 또 예의 그 아버지 문제로 너무 깊게 생각한 거겠지. 그런 일, 이젠 적당히 잊어버리는 게 어때?"
"아니, 그건 이제 됐어. 완전히 해결됐어. 그것에 대해, 사실 너한테 보고하러 온 거거든……."
"아, 그래? 잘됐네. 깜빡하고 신문도 안 챙겨 봤는데, 요컨대 범인이 잡혔다는 거지?"
"그래. 그런데 그 범인이라는 게, 놀라지 마. 바로 나였어."
"뭐? 네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야,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 그보다 우리 저기 근처나 슬슬 산책할까? 그리고 좀 더 밝은 얘기나 하자고."
"아니, 아니, 이 사람아. 일단 앉아봐. 어쨌든 자초지종만이라도 얘기하게 해줘. 난 그걸 위해서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니까. 너 뭔가 내 정신 상태를 의심하는 눈치인데, 그 점은 걱정 안 해도 돼. 절대 정신이 나갔다거나 한 게 아니니까."
"그치만 네 입으로 패륜 살인의 범인이라니,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잖아. 그런 일은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전혀 불가능한 일이잖아."
"불가능? 넌 그렇게 생각해?"
"그렇잖아, 아버지가 돌아가신 시간에 넌 네 방 이부자리에서 깨어 있었다며. 한 사람이 동시에 두 곳에 있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불가능하잖아."
"그건 불가능하지."
"그럼 된 거 아니야. 네가 범인일 리가 없어."
"하지만 방 안 이부자리에 누워 있었다고 해서 밖에 있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법은 없어. 이건 쉽게 눈치채기 힘든 일이야. 나도 최근까지 전혀 그런 건 생각지도 못했거든. 그런데 불과 이틀 전 밤의 일이야. 문득 그 사실을 깨달았어. 뭐냐면, 역시 아버지가 살해당한 시각인 새벽 1시쯤이었는데, 2층 창밖에서 고양이가 요란하게 우는 거야. 고양이 두 마리가 오랫동안 아주 세상이 무너질 듯 심하게 떠들어대는 거지. 너무 시끄러워서 창문을 열고 내쫓을 요량으로 일어났는데, 그 순간 헉 하고 깨달았어. 인간의 심리 작용이란 건 참 묘해. 아주 중대한 일을 까맣게 잊고 태연하게 있거든. 그러다 어떤 우연한 기회에 문득 되살아나는 거야. 무덤 속에서 유령이 나타나듯 무섭고 거대하게, 끔찍한 형태로 떠오르는 거지. 생각해 보면 사람이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건 참 아슬아슬한 곡예야. 잠깐 발을 헛디디면 곧장 목숨을 건 큰 부상이지. 세상 사람들은 참 저렇게 태평한 얼굴로 잘도 살아간다 싶어."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된 건데?"
"일단 들어봐. 그때 난 아버지가 살해당하던 날 밤 새벽 1시쯤에 왜 내가 깨어 있었는지, 그 이유를 기억해 낸 거야. 이번 사건에서 이게 가장 중대한 포인트야. 원래 난 한 번 잠들면 아침까지 안 깨는 체질이야. 그런 내가 한밤중 1시쯤에 확실히 깨어 있었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어야만 해. 난 그때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고양이 울음소리를 듣고 완전히 기억해 냈어. 그날 밤에도 역시 똑같이 고양이가 소란을 피웠던 거야. 그래서 잠에서 깼던 거지."
"고양이가 뭔가 관계라도 있었어?"
"글쎄, 있었어. 그건 그렇고 넌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라는 걸 알아? 어쨌든 간단히 설명하자면, 우리 마음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욕망이라는 건 대부분 이루어지지 못한 채 묻혀버려. 어떤 건 불가능한 망상이기도 하고, 어떤 건 가능하더라도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욕망이기도 해서 말이지. 이 수많은 욕망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우리 스스로 무의식의 세계에 유폐시켜 버리는 거야. 즉, 잊어버리는 건데. 잊는다는 건 그 욕망을 아예 없애버리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가둬서 나오지 못하게 한 것에 불과해. 그러니까 우리 마음속 깊은 어둠 속에는 성불하지 못한 욕망의 망령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셈이지. 그리고 조금만 틈이 보이면 튀어나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우리가 잠든 틈을 타서 꿈속에 온갖 변장을 하고 나타나지. 그게 심해지면 히스테리가 되고 미치기도 하는 거야. 반대로 잘 풀려서 승화 작용을 거치면 위대한 예술이 되기도 하고 훌륭한 사업이 되기도 하고. 정신분석학 책을 한 권이라도 읽어보면 유폐된 욕망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는지 깜짝 놀랄 거야. 나도 예전에 그런 쪽에 흥미를 느껴서 조금 읽어본 적이 있거든.
그 학파의 학설 중에 '건망증의 심리'라는 게 있어. 너무나 빤한 사실을 문득 잊어버려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는, 흔히 말하는 망각이라는 현상이 있지. 그게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거야. 잊는다는 건 반드시 거기에 이유가 있어. 무언가 떠올리기엔 곤란한 이유가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그 기억을 유폐시켜 버린다는 거지. 여러 가지 실제 사례도 있지만,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가 있어.
과거에 어떤 사람이 스위스의 신경학자 '헤라구스'라는 이름을 잊어버려 도무지 떠올리지 못하다가, 몇 시간 뒤에 우연히 생각났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이름을 왜 잊어버렸을까 신기하게 여겨서 연상의 순서를 더듬어 봤더니, 헤라구스 ―― 헤라바트·바트(목욕탕) ―― 목욕 ―― 광천 ―― 이런 식으로 떠오르더라는 거야.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수수께끼가 풀렸지. 그 사람은 예전에 스위스에서 광천욕을 해야만 하는 병에 걸린 적이 있었어. 그 불쾌한 연상이 기억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진 거야.
또 정신분석학자 존스의 실험담 중에 이런 게 있어. 그 사람은 애연가였는데, 이렇게 담배를 피우면 안 되겠다 하고 생각하는 순간 파이프의 행방을 묘연히 잊어버리게 된대. 아무리 찾아도 안 나와. 그러다 잊을 만할 때쯤 뜻밖의 장소에서 불쑥 튀어나온대. 그건 무의식이 파이프를 숨긴 거지. ……왠지 설교같이 되어버렸는데, 이 망각의 심리학이 이번 사건을 푸는 열쇠야.
나 역시 실은 엄청난 걸 까맣게 잊고 있었어.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 바로 나였다는 사실을 말이야……."
"어휴, 배운 놈의 망상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니까. 세상에서 제일 어처구니없는 일을 아주 심각한 얼굴로 거창한 학설까지 들이밀며 설명하고 있잖아. 그런, 네가 살인을 까맣게 잊었다니, 그런 얼빠진 소리가 세상에 어딨어? 하하하하. 정신 차려. 너 정말 조금 이상해진 거야."
"가만, 내 얘기를 끝까지 듣고 나서 뭐라고 하든 해. 난 결코 너한테 농담하러 온 게 아니야. 그런데 고양이 울음소리를 듣고 내가 기억해 냈다는 건, 그날 밤에 똑같이 고양이가 소란을 피웠을 때 바로 지붕 너머에 있는 소나무로 뛰어오르지 않았나, 분명 뛰어올랐을 거다, 그러고 보니 뭔가 바스락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라는 사실이었어……."
"점점 더 이상한 소리네. 고양이가 소나무에 뛰어오른 게 사인과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데. 난 정말 걱정이다. 네 제정신이 말이야……."
"소나무라는 건 너도 알 거야. 우리 집의 표식 같은 그 엄청 키 큰 나무. 그리고 그 나무 밑동 자리에 아버지가 걸터앉곤 하던 다듬잇돌이 놓여 있지. ……이렇게 말하면 대충 너도 이야기의 맥락을 눈치챘겠지? ……즉, 그 소나무에 고양이가 뛰어오른 반동으로, 우연히 나뭇가지 위에 올려져 있던 어떤 물건을 건드려 그것이 아버지의 머리 위로 떨어진 게 아니냐는 거야."
"그럼 거기에 도끼가 올려져 있었다는 말이야?"
"그래. 정확히 올려져 있었지. 엄청난 우연이야. 하지만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니지."
"하지만 그렇다면 그건 우연한 사고일 뿐이지, 딱히 네 죄인 건 아니잖아."
"그런데, 그 도끼를 올려둔 게 바로 나라는 거야. 그걸 불과 이틀 전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지. 그게 바로 이른바 망각의 심리라는 거야. 생각해 보면, 도끼를 올려둔 것, 아니 나뭇가지 사이에 깜빡 잊고 두고 온 건 벌써 반년 전 일이야. 그 이후로 한 번도 기억난 적이 없어. 그 뒤로 도끼를 쓸 일이 안 생겼으니 자연히 떠올릴 기회도 없긴 했지만, 그렇다 쳐도 무슨 일상적인 순간에 생각날 법하잖아. 또 생각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강한 인상이 남아 있을 테고. 그걸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어야만 해.
올봄에 소나무 마른 가지를 치려고 도끼랑 톱을 들고 나무 위로 올라갔어. 가지에 걸터앉아 하는 위험한 작업이라 안 쓸 때는 도끼를 나뭇가지 사이에 얹어두고 일을 했지. 그 나뭇가지 사이라는 게 바로 예의 그 다듬잇돌의 정중앙 위쪽에 해당하는 자리야. 높이는 2층 지붕보다 약간 위쪽이고. 난 일을 하면서 생각했어. 만약 여기서 도끼가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분명 저 돌에 부딪힐 테지. 만약 누군가 저 돌 위에 걸터앉아 있다면 그 사람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면서 중학교 물리 시간에 배운 '자유 낙하의 법칙' 공식을 떠올렸어. 이 정도 거리에서 가속도가 붙는다면, 물론 사람의 두개골을 부술 정도의 힘은 나올 거라고.
그리고 그 돌에 걸터앉아 쉬는 게 아버지의 버릇이지. 난 나도 모르게 아버지를 살해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단지 마음속으로만 생각했을 뿐이지만, 난 나도 모르게 섬뜩해져서 창백해졌어. 아무리 몹쓸 인간이라도 명색이 부모를 죽일 생각을 하다니, 이런 인면수심이 다 있나! 빨리 그런 불길한 망상을 떨쳐버리자고 생각했어. 그래서 이 극악무도한 욕망이 무의식의 세계로 유폐된 셈이야. 그리고 그 도끼는 내 악한 마음을 이어받아 시치미 뚝 떼고 원래 나뭇가지 사이에서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이 도끼를 잊고 두고 왔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학설에 따르면 두말할 것 없이 내 무의식이 내린 명령인 거야. 무의식이라고는 해도 평범한 우연의 실수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분명히 나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된 거지. 저기에 도끼를 놓고 깜빡한 척하면, 언젠가 기회가 왔을 때 떨어질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만약 그때 아버지가 밑의 돌에 앉아 계신다면 죽일 수 있을 거다. 그런 치밀한 계획이 암묵 중에 포함되어 있었어. 게다가 그 악한 계획을 나 자신조차 모르고 있었지. 즉, 난 아버지를 죽일 장치를 마련해 두고서도 일부러 그것을 잊어버려 마치 선인인 척 가장하고 있었던 거야. 자세히 말하자면 내 무의식의 세계의 악당이 의식의 세계의 선인을 기만하고 있었던 거지."
"어휴, 어려워서 잘은 모르겠지만 왠지 일부러 악당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아니, 그렇지 않아. 네가 프로이트의 학설을 안다면 절대 그런 소린 못 할 거다. 첫째, 도끼에 대해 반년 동안 어떻게 까맣게 잊고 있을 수 있었나? 실제로 피 묻은 도끼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기까지 했잖아. 이건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둘째, 왜 그런 장소에, 더구나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도끼를 잊고 왔는가? 셋째, 왜 굳이 그 위험한 장소를 골라 도끼를 두었는가? 세 가지 부자연스러운 점이 겹쳐 있어. 이래도 악의가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단지 망각하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악의가 탕감될 수 있을까?"
"그래서, 넌 앞으로 어떡할 작정이야?"
"물론 자수할 생각이야."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어떤 재판관이라도 너한테 유죄 판결을 내릴 리는 없어. 그 점은 뭐 안심해도 되지만. 그래서, 요전부터 네가 말했던 여러 가지 증거물들은 어떻게 된 거야? 손수건이라든가 어머니의 빗이라든가."
"손수건은 내 거였어. 소나무 가지를 자를 때 도끼 자루에 감아두었던 걸 그대로 깜빡하고 두고 왔지. 그게 그날 밤 도끼와 함께 떨어진 거야. 빗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어머니가 처음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하셨을 때 떨어뜨렸을 거야. 그걸 형이 어머니를 감싸주려고 숨긴 게 틀림없어."
"그리고 여동생이 도끼를 숨긴 건?"
"여동생이 최초 발견자였으니 충분히 숨길 틈이 있었지. 한눈에 자기 집 도끼인 걸 알아봤을 테니 분명 가족 중 누군가가 범인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어쨌든 결정적인 첫 번째 증거물을 숨길 마음을 먹은 거겠지. 꽤 눈치 빠른 녀석이니까. 그리고 형사들의 가택 수색 등이 시작되자 평범한 은닉 장소로는 안심할 수 없게 되어 그 사당 뒤를 골라 다시 숨겨둔 게 틀림없어."
"집안 식구들을 다 의심한 끝에 결국 범인은 자신이라는 걸 알게 된 거구나. 도둑을 잡고 보니 자기 자신이라는 격이네. 왠지 희극 같지 않아? 이런 상황이지만, 난 이상하게 동정심 같은 게 일지 않아. 즉 네가 죄인이라는 게 아직도 실감이 안 난다는 거지."
"그 어처구니없는 착각 말이야. 그게 무서운 거야. 정말 희극이지. 하지만 희극으로 보일 만큼 얼빠진 구석이 있다는 게 단순한 건망증 따위가 아니라는 증거야."
"어찌 보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난 네 고백을 슬퍼하기보다 며칠 동안의 의혹 구름이 걷힌 걸 축하하고 싶은 기분이야."
"그 점은 나도 속이 다 후련해. 모두가 서로를 의심했던 건 사실 서로를 감싸주려 했던 거라, 아무도 그런 아버지를 죽일 만큼 악한 사람은 없었어. 하나같이 둘도 없는 선인들뿐이었지. 그중에서 유일한 악당은 모두를 의심했던 나였어. 그 의심하는 마음이 강했던 것 하나만으로도 난 의심할 여지 없는 악당이었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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