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폐인 (二癈人) 소설 전문(全文)
에도가와 란포
두 사람은 목욕을 마치고 바둑을 한 판 둔 뒤, 담배를 피우고 떫은 녹차를 마시며 여느 때처럼 두런두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온화한 겨울 햇살이 창호지 문 가득 퍼져, 여덟 다다미 남짓한 방을 포근하게 데워주고 있었다. 커다란 오동나무 화로에서는 은주전자가 졸음을 유발하는 듯한 소리를 내며 끓고 있었다. 꿈결처럼 한가로운 겨울 온천장의 오후였다.
무의미한 세상 이야기는 어느새 옛 추억담으로 이어졌다. 손님인 사이토 씨는 칭다오 전투 때의 실전 경험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방주인인 이하라 씨는 화로에 가볍게 손을 쬐며, 그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에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아련하게 들려오는 꾀꼬리 소리가 마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는 듯했다. 옛이야기를 나누기에 제격인 분위기였다.
사이토 씨의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흉터가 남은 얼굴은 그런 무용담의 화자로서는 지극히 어울렸다. 그는 포탄 파편에 맞아 생겼다는 오른쪽 얼굴의 일그러진 흉터를 가리키며 당시의 참상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그 밖에도 온몸에 여러 군데 칼자국이 있는데 겨울만 되면 쑤시고 아파서 이렇게 온천 요양을 오는 것이라며, 옷을 벗고 그 오래된 상처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래 봬도 저 역시 젊은 시절엔 나름대로 야망이 있었습죠. 하지만 이런 꼴이 되고 나니 다 끝이더군요."
사이토 씨는 이렇게 말하며 기나긴 전쟁 이야기의 끝을 맺었다.
이하라 씨는 이야기의 여운을 음미하듯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 남자는 전쟁 덕분에 평생을 망치고 말았군. 우리 둘 다 폐인인 셈이야. 하지만 이 남자는 그래도 명예라는 위안거리라도 있지. 하지만 나는…….'
이하라는 또다시 마음속의 해묵은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육체의 옛 상처로 고통받는 사이토 씨 정도면 아직 한참 행복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제 참회록을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용맹스러운 전쟁 이야기 뒤끝이라 조금 지나치게 음침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차를 새로 우려내어 한 모금 마신 뒤, 이하라 씨는 무언가 굳게 결심한 듯 이렇게 입을 열었다.
"아이고, 꼭 한 번 듣고 싶군요."
사이토 씨가 즉각 대답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이하라 씨 쪽을 힐끗 쳐다보았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하라 씨는 그 순간, '어라?' 하고 생각했다. 방금 자신을 힐끗 쳐다본 사이토 씨의 표정에서 왠지 낯익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사이토 씨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그래 봐야 불과 열흘 전 일이지만—어쩐지 두 사람 사이에 전생의 인연이라도 있는 듯한 묘한 얽힘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그 느낌이 짙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묵는 숙소도 다르고 신분도 다른 두 사람이 단 며칠 만에 이렇게 가까워질 리가 없다고 이하라는 생각했다.
'정말 이상하군. 이 남자의 얼굴은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어.' 하지만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 남자와 나는 아주아주 먼 옛날, 이를테면 철부지 어린 시절에 소꿉동무라도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또 그럴싸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아닙니다, 분명 무척이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지요. 그러고 보니 오늘은 왠지 옛날이 떠오르는 듯한 날씨 아닙니까."
사이토 씨가 재촉하듯 말했다.
이하라 씨는 이제껏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남에게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어떻게든 감춰두려 애썼다. 스스로도 잊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런데 오늘은 웬 바람이 불었는지 문득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어졌다.
"글쎄요,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저는 ××초의 제법 오래된 상인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이 너무 오냐오냐 키우신 탓이겠죠,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학교도 1~2년 늦게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이렇다 할 문제 없이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그리고 도쿄의 ××대학까지 남들보다는 늦었지만 그럭저럭 순탄하게 자랐습니다. 도쿄로 올라간 뒤로는 건강도 제법 좋아졌고, 전공 공부에 흥미도 붙었으며, 하나둘 친한 친구들도 생겨나면서 불편한 하숙 생활도 오히려 즐겁게 느껴질 만큼 아무런 구김살 없는 학생 시절을 보냈죠.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그때가 제 인생의 꽃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쿄에 올라온 지 일 년이 채 안 되었을 무렵이었습니다. 저는 문득 어떤 끔찍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말하자 이하라 씨는 왠지 모르게 가볍게 몸을 떨었다. 사이토 씨는 피우다 만 담배를 화로에 푹 꽂아 끄고는 열성적으로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제가 학교에 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같은 하숙집에 사는 친구가 제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제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기다리며 '어젯밤엔 대단한 열변이었어' 하고 놀리듯 말하는 게 아닙니까. 하지만 저는 그게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었죠. '열변이라니, 어젯밤에 내가 무슨 열변을 토하기라도 했단 말이야?' 하고 의아한 얼굴로 되묻자, 친구는 대뜸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리며 '너 오늘 아침엔 아직 세수도 안 한 모양이구나' 하고 놀려대는 겁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캐물어보니, 그 전날 밤늦은 시각에 제가 그 친구가 자고 있는 방으로 불쑥 들어가서는 친구를 두들겨 깨워 대뜸 논쟁을 시작했다는 겁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여성관을 비교하는 내용인가 뭔가를 청산유수처럼 떠들어 댔다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실컷 늘어놓고는 친구의 의견 따위는 듣지도 않은 채 휙 나가버렸다는 거죠. 정말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습니다.
'너야말로 꿈이라도 꾼 거 아니야? 난 어젯밤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 방금 전까지 세상모르고 잤는걸. 그런 일이 있었을 리가 없어.' 하고 제가 말하자, 친구는 '근데 꿈이 아니라는 증거가 있지. 네가 돌아가고 나서 내가 잠이 안 와서 한참 동안 책을 읽었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확실한 건, 자, 이 엽서를 봐. 그때 쓴 거야. 설마 꿈속에서 엽서를 쓰는 놈은 없을 테니까.' 라며 정색하고 우기는 겁니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어영부영 넘어가고 그날 학교에 갔는데, 교실에 들어가 강사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 친구가 심각한 눈빛으로 '너 혹시 예전부터 자다가 일어나 돌아다니는 버릇 같은 거 없었어?' 하고 묻더군요.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언가 끔찍한 것에 부딪힌 듯 무심코 숨을 들이켰습니다. ……제게는 그런 버릇이 있었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잠꼬대를 아주 심하게 했는데, 누군가 그 잠꼬대에 대고 장난을 치면 저는 잠든 채로 아주 또렷하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그걸 조금도 기억하지 못했고요. 워낙 신기한 일이라 동네에 소문이 날 정도였죠. 하지만 그건 초등학교 시절의 일이었고 머리가 굵어지면서 거짓말처럼 나았는데, 지금 친구의 질문을 받으니 왠지 그 어릴 적의 몹쓸 버릇과 어젯밤의 일이 무슨 연관이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털어놓자 친구는 '그렇다면 그게 재발한 거야. 즉, 일종의 몽유병인 거지.' 라며 안타까운 듯 말했습니다.
자, 저는 이제 걱정이 태산 같아졌습니다. 몽유병이 정확히 어떤 병인지는 당연히 몰랐지만, 몽중유행, 영혼 이탈, 몽중 범죄 같은 섬뜩한 단어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습니다. 무엇보다 젊은 저로서는 잠결에 헛짓거리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수치스러웠습니다. 만약 이런 일이 앞으로도 자주 일어난다면 어쩌나, 저는 이미 안절부절못할 지경이었죠. 그 일이 있고 나서 며칠 뒤, 저는 용기를 내어 아는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 말씀이 '몽유병 증세가 맞는 것 같긴 하지만, 한 번 발작한 것 가지고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네. 그렇게 신경을 쓰는 게 도리어 병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지. 마음을 편히 먹고, 느긋하게,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몸을 건강하게 만드시게. 그러면 자연히 그런 병도 나아버릴 테니.' 라며 아주 낙천적으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단념하고 돌아왔지만, 불행히도 저라는 인간은 타고나기를 지독한 신경질적인 성격이어서 한 번 그런 일이 생기니 걱정에 걱정이 꼬리를 물어 공부조차 손에 잡히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부디 이것으로 끝이길 바랐고 그 무렵 매일같이 전전긍긍하며 지냈는데, 다행히도 한 달가량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습니다. '휴, 이제 살았구나' 하고 마음을 놓으려는 찰나, 이게 웬걸, 그 안도감도 잠시뿐이었고 머지않아 이전보다 더 끔찍한 발작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에, 제가 꿈속에서 남의 물건을 훔쳐버린 겁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제 머리맡에 난생처음 보는 회중시계가 놓여 있는 게 아닙니까.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는데, 같은 하숙집에 사는 한 회사원이 '시계가 없어졌다, 시계가 없어졌다!' 하며 난리를 피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는 '아차' 하고 모든 상황을 깨달았지만, 너무나 무안하고 부끄러워서 사과하러 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의 그 친구에게 부탁해 제가 몽유병 환자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시계를 돌려주는 것으로 간신히 그 자리를 수습했습니다. 하지만 자, 그때부터 '이하라는 몽유병 환자다'라는 소문이 쫙 퍼져서, 심지어 학교 교실에서도 제 이야기가 안줏거리가 될 정도였습니다.
저는 어떻게든 이 부끄러운 병을 고쳐보고자 그 방면의 책을 사서 읽어보기도 하고, 온갖 건강법을 시도해 보기도 하고, 물론 의사도 여러 명 바꿔가며 진찰을 받아보는 등 할 수 있는 한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병이 낫기는커녕 갈수록 악화되기만 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심할 때는 두 번꼴로 반드시 예의 발작이 일어났고, 몽유병으로 돌아다니는 범위도 조금씩 넓어져 갔습니다. 게다가 그럴 때마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제 방으로 가져오거나, 아니면 제 물건을 제가 돌아다닌 곳에 흘리고 오는 겁니다.
그런 흔적만 남기지 않았더라면 다른 사람 모르게 넘어갈 수도 있었으련만, 불운하게도 대개 어떤 증거물이 남더군요. 아니면 어쩌면 흔적이 남지 않은 경우에도 여러 번 발작을 일으켰으나 증거물이 없어서 저조차 모르고 넘어갔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저 스스로도 오싹할 노릇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는 한밤중에 하숙집을 빠져나가 근처 절의 묘지를 배회한 적도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하필 그때 묘지 밖 길거리를 같은 하숙집에 사는 어떤 직장인이 회식 같은 것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지나가다가, 야트막한 생울타리 너머로 제 모습을 발견하고는 저기 묘지에 유령이 나타난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죠. 나중에 그게 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아주 대단한 이야깃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저는 아주 훌륭한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남들이 보기엔 그 유명한 소가노야 극단의 희극보다 더한 코미디였겠지만, 당시 당사자인 제게 그것이 얼마나 괴롭고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는지, 그 심정은 본인이 되어보지 않으면 절대 모를 겁니다. 처음에는 오늘 밤에도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까, 오늘 밤에도 잠꼬대로 돌아다니지 않을까, 그것이 무척이나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점차 단순히 '잠든다'는 사실 자체가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아니, 잠이 오든 안 오든, 밤이 되면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강박 관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되니 우스운 이야기지만, 내 이부자리가 아니더라도 침구나 이불 같은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불쾌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하루 중 가장 편안한 휴식 시간이 제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 된 것이죠. 얼마나 불행한 신세였겠습니까.
게다가 제게는 이 발작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한 가지 끔찍한 걱정거리가 있었습니다. 언제까지나 이런 촌극이 계속되어 그저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만약 이것이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낳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저는 몽유병에 관한 책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긁어모아 몇 번이고 되읽었기 때문에, 몽유병 환자의 범죄 사례도 수없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수많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피비린내 나는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었죠. 마음 약한 제가 그걸 얼마나 걱정했는지, 이부자리만 봐도 속이 메스꺼워졌다는 게 결코 엄살이 아니었습니다.
머지않아 저는 이대로 도저히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차라리 학업을 내팽개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죠. 그래서 어느 날, 첫 발작이 일어나고 이미 반년 남짓 지난 무렵이었는데, 부모님께 긴 편지를 써서 의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답장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글쎄, 제가 그토록 두려워하고 두려워했던 일이 기어코 현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제 일생을 완전히 산산조각 내버릴 만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사이토 씨는 미동도 하지 않고 정중히 경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은 이야기의 흥미에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 그 이상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 보였다. 정월 대목도 한참 지난 온천장은 탕치객도 적어 적막할 정도로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새들의 지저귐도 이제는 들려오지 않았다. 현실 세계로부터 멀찍이 단절된 세상 속에서 두 명의 폐인은 기이한 긴장감 속에 마주 앉아 있었다.
에도가와 란포_두 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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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바로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메이지 ××년 가을의 일입니다. 꽤 오래전 이야기죠.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왠지 집 안이 웅성거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 발 저린 놈이라고, 저는 또 무슨 사고를 친 것은 아닐까 덜컥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만, 잠시 누운 채로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도무지 예사 일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두려운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오싹 기어 올라오는 겁니다. 저는 쭈뼛거리며 방 안을 휙 둘러보았습니다. 그러자 왠지 모르게 묘한 위화감이 들더군요. 방 안이 어젯밤 제가 잠들었을 때와는 어딘지 모르게 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꼼꼼히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상한 물건이 눈에 띄었습니다.
방 입구 쪽에 난생처음 보는 작은 보따리가 놓여 있는 게 아닙니까. 그걸 본 저는 세상에, 대뜸 그 보따리를 움켜쥐고는 벽장 속에 휙 던져 넣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벽장문을 닫고는 도둑놈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죠.
마침 그때 소리도 없이 창호지 문이 열리며 한 친구가 고개를 쑥 내밀었습니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이봐, 큰일 났어.' 하며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속삭였습니다. 저는 조금 전의 제 수상한 행동을 들키지나 않았을까 조마조마해서 대답도 못 하고 가만히 있었더니, '주인 영감이 살해당했어. 어젯밤에 강도가 들었나 봐. 일단 잠깐 와 봐.' 그렇게 말하고는 친구는 가버렸습니다.
그 말을 듣자 저는 목구멍이 콱 막힌 듯 숨이 턱 막혀 한동안 옴짝달싹도 못 했지만,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살피러 방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저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던 것일까요. ……그때의 그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괴한 심정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특히나 그 노인의 섬뜩한 죽은 얼굴은 자나 깨나 제 눈앞에 아른거려 떨어질 줄을 모릅니다."
이하라 씨는 두려움을 견딜 수 없는 듯 주위를 힐끗 둘러보았다.
"그래서 그 사건의 요점만 추려 말씀드리자면, 그날 밤 마침 노인의 아들 내외가 친척 집에 묵으러 가 있었기 때문에 하숙집 주인 영감은 혼자 현관 옆방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늘 아침 일찍 일어나는 주인이 그날따라 언제까지고 일어나질 않으니, 하녀 중 한 명이 이상하게 여겨 그 방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노인이 이부자리 속에 반듯하게 누운 채, 잠잘 때 두르고 잤던 플란넬 목도리에 목이 졸려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는 겁니다.
조사 결과, 범인은 노인을 죽이고 노인의 돈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낸 뒤, 장롱 서랍을 열고 그 안에 있던 금고에서 거액의 채권과 주권을 훔쳐 달아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워낙 그 하숙집은 밤늦게 돌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언제나 대문 문단속을 하지 않았으니 도둑이 스며들기에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만, 그 대신 살해당한 주인 영감이 지독하게 귀가 밝은 사내라 설마 별일이야 있겠느냐며 다들 안심하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사건 현장에는 이렇다 할 단서가 발견되지 않은 모양이었습니다만, 단 하나 노인의 머리맡에 더러운 손수건 한 장이 떨어져 있어 그것을 경찰이 증거물로 가져갔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잠시 후, 저는 제 방 벽장 앞에 서서 저 문을 열까 말까, 손을 뻗었다 거뒀다 하며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벽장 안에는 아까 그 작은 보따리가 들어있으니까요. 그걸 열어봤는데 혹시라도 살해당한 노인의 재산이 들어있다면……. 아, 그때 제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정말이지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벼랑 끝이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그렇게 수명이 깎여나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차마 벽장문을 열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만, 마침내 마음을 굳게 먹고 보따리를 풀어보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눈앞이 핑 돌며 어지럼증을 느꼈고, 한동안 넋을 잃은 사람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있었습니다. 그 보따리 안에 채권과 주권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던 겁니다……. 현장에 떨어져 있던 손수건 역시 제 것이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고요.
결국 저는 그날 안으로 경찰에 자수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수사관에게 몇 번이고 취조를 받은 끝에, 지금 생각해도 오싹한 미결수 구치소에 갇히고 말았죠. 저는 백주대낮에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몽유병 환자의 범죄라는 것이 전례가 드문 일이었기에 전문의의 감정이라든가 하숙생들의 증언 등 꽤나 수고스러운 조사 과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나름 괜찮은 집안의 자제로 돈 때문에 살인을 저지를 리 만무하다는 점도 명백했고, 제가 몽유병 환자라는 사실 역시 친구들의 증언으로 입증된 사실이었습니다. 게다가 고향의 아버지가 상경하여 변호사를 세 명이나 선임해 백방으로 애써 주셨고, 처음 제 몽유병 증세를 발견했던 친구—기무라라는 친구였습니다—그 친구가 동기들을 대표해 발 벗고 나서서 구명 운동을 벌여주는 등, 저에게 유리한 여러 정황이 잘 맞아떨어진 덕분이기도 했겠지요. 기나긴 구치소 생활 끝에 마침내 무죄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하지만 무죄로 풀려나긴 했어도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은 명백히 남아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기구한 입장입니까. 저는 무죄 판결을 받고 기뻐할 기력조차 없을 만큼 지쳐버렸습니다.
저는 석방되자마자 아버지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집 문턱을 넘어서자, 그 전에도 반쯤 병자였던 저는 아예 진짜 병자가 되어버렸고, 반년가량 자리에 누워만 지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일들로 인해 저는 결국 제 인생을 통째로 허비하고 만 것입니다. 아버지의 가업은 동생에게 물려주고, 그 후로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이렇게 젊은 은거 노인 같은 처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요즘은 더 이상 번민조차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하하……."
이하라 씨는 힘없는 웃음소리로 길고 긴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맺었다. 그리고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라 지루하셨지요. 자, 따뜻한 차나 한 잔 더 내오겠습니다."
라며 다기를 끌어당겼다.
"그렇군요. 겉보기에 제법 번듯한 신분이신 것 같더니, 듣고 보니 당신도 결국 불행한 분이셨군요."
사이토 씨는 의미심장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데, 그 몽유병 증세는 완전히 완치되셨습니까?"
"참 묘한 노릇이지요. 그 살인 사건 이후로는 거짓말처럼 단 한 번도 재발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때 너무나 엄청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일 거라고 의사들은 말하더군요."
"그 당신의 친구분이셨다는 분…… 기무라 씨라고 하셨죠. ……그분이 처음 당신의 발작을 목격하셨다는 거군요. 그 뒤 시계 도난 사건이며, 공동묘지 유령 사건이며, ……그 외의 다른 사건들은 대략 어떤 양상이었습니까? 혹시 기억나신다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사이토 씨는 갑자기 말을 살짝 더듬거리며 이런 질문을 불쑥 던졌다. 그의 하나뿐인 눈이 기이한 빛을 띠며 번뜩이고 있었다.
"글쎄요. 다들 고만고만한 사건들이라 살인 사건을 제외하면 뭐, 묘지를 배회했던 때가 가장 유별난 일이었겠죠. 나머지는 대개 다른 하숙생의 방에 무단 침입했다는 식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물건을 가져오거나 흘리고 오는 흔적들로 인해 발각되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경우도 여러 번 있었을지 모르죠. 어쩌면 묘지 근처가 아니라 훨씬 더 먼 곳까지 쏘다니고 왔을지도 모를 일이고요."
"처음 기무라라는 친구분과 논쟁을 벌이셨을 때나, 묘지에서 직장인에게 목격되었을 때 말고, 그 외에 누군가에게 직접 목격된 적은 없으셨습니까?"
"아뇨, 꽤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밤중에 하숙집 복도를 돌아다니는 제 발소리를 들은 사람도 있고, 남의 방에 스며드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니까요. 근데 도대체 그런 걸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꼭 제가 무슨 취조라도 받고 있는 기분이군요."
이하라 씨는 순박하게 웃어 보였지만, 내심 살짝 불쾌하고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아이고,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결코 그런 의도로 여쭌 것은 아닙니다. 그저 당신같이 점잖고 훌륭한 인품을 가지신 분이 아무리 꿈속의 일이라지만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으리라고는 도무지 제 머리로는 상상이 가질 않아서 말입니다. 게다가 한 가지, 제게는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스러운 대목이 있습니다. 부디 노여워하지 마시고 들어주십시오. 저처럼 이렇게 불구의 몸이 되어 세상과 동떨어져 살다 보면, 무슨 일이든 괜히 의심부터 하는 버릇이 생기나 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당신은 이런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몽유병 환자라는 것은, 그 전조 증상을 본인 스스로는 절대로 알 수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한밤중에 돌아다니거나 떠들어대도 아침이 되면 까맣게 잊어버리지 않습니까. 요컨대 남들이 가르쳐 주고 나서야 비로소 '아, 내가 몽유병 환자였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의 일일 텐데요. 의사들 말에 따르면 여러 가지 신체적인 징후들도 있는 모양입니다만, 그것조차 무척이나 막연한 것이어서 실제로 발작이 동반되어야만 비로소 확진을 내릴 수 있는 정도의 것이라 하지 않습니까. 제가 워낙 의심이 많은 탓인지 몰라도, 저는 당신이 참으로 순진무구하게 자신이 병에 걸렸다고 덜컥 믿어버리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하라 씨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이토 씨의 논리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마주 앉은 상대의 끔찍한 몰골, 그리고 그 흉측한 외모 뒤에 도사리고 있는 그 무언가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불안감이었다. 하지만 그는 애써 불안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그야 저 역시 첫 발작 때는 그런 식으로 의심도 해 보았죠. 그리고 이게 그저 착각이기를 간절히 바랐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끊임없이 발작이 일어났으니 더 이상 그런 막연한 위안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당신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계신 듯합니다. 바로 당신의 발작을 목격한 사람이 지극히 적다는 점, 아니, 까놓고 말해 단 한 명뿐이었다는 점 말입니다."
이하라 씨는 상대방이 무언가 터무니없는 상상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실로 평범한 사람의 머리로는 미치지도 못할 만큼 무시무시한 상상이었다.
"단 한 명이라니요. 아니,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남의 방에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거나 복도의 발소리를 들은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공동묘지의 일만 해도,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어느 회사원이 분명히 제 모습을 목격하고는 제게 직접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정도니까요. 그것 말고도, 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어김없이 타인의 물건이 제 방에 있거나 반대로 제 물건이 엉뚱하게 먼 곳에 떨어져 있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지 않습니까. 물건이 제 발로 걸어서 자리를 바꿨을 리도 없으니까요."
"아니요, 바로 그런 식으로 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기가 막히게 증거물이 남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도리어 더 수상쩍은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물건들은 반드시 당신이 직접 손을 대지 않았더라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몰래 위치를 바꿔놓을 수도 있는 노릇이니까요.
그리고 목격자가 많았다고 말씀하시지만, 묘지 사건을 비롯해 당신의 뒷모습을 보았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애매모호한 구석이 있습니다. 당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보았을지라도 '이하라는 몽유병 환자다'라는 강렬한 선입견 때문에 한밤중에 조금 수상쩍은 사람 그림자만 보여도 대뜸 당신이라고 단정 지어버렸을지도 모르지요. 설사 그런 상황에서 잘못된 헛소문을 냈다고 한들 비난받을 염려도 없거니와, 게다가 사람의 본성이라는 게 이런 류의 일에는 새로운 사실 하나라도 자기 입으로 전하는 것을 마치 대단한 무용담이라도 되는 양 여기기 마련이니까요.
자, 이렇게 생각해 보면 당신의 발작을 목격했다는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나, 그 숱한 증거 물품들조차 모조리 어떤 한 남자의 치밀한 마술에서 빚어진 것이라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건 기가 막히게 솜씨 좋은 마술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해도 마술은 어디까지나 속임수일 뿐이니까요."
이하라 씨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 넋을 잃고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너무나 엄청난 추리에 생각을 정리할 힘마저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이것은 그 기무라라는 친구분의 무서우리만치 깊은 속셈에서 짜여진 거대한 속임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기무라는 어떤 연유로 인해 그 하숙집 주인 영감을 없애버리고 싶었다, 아무도 몰래 죽여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설령 제아무리 교묘한 수법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해도, 살인이 벌어진 이상 어떻게든 범인이 잡혀야만 사건이 무마될 테니, 누군가 다른 사람을 자기 대신 살인범으로 내세운다. 그것도 그 대역을 맡을 사람에게 가능한 한 피해가 덜 가는 방식을 택해서…….
만약, 만약에 말입니다, 그 기무라라는 사람이 이런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고 가정해 본다면, 당신처럼 남의 말을 잘 믿고 마음이 여린 사람을 몽유병 환자로 둔갑시켜 한바탕 연극을 꾸민다는 것은 참으로 완벽에 가까운 계획이 아닐까요.
우선 이런 가설을 세워놓고, 그것이 논리적으로 성립하는지 한번 따져봅시다.
자, 그 기무라라는 사람은 어느 날 기회를 틈타 당신에게 있지도 않은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자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당신이 어린 시절 잠꼬대를 심하게 하던 버릇이 있었다는 사실이 하나의 조력제가 되어, 그 시도가 의외로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고 칩시다.
그래서 기무라는 다른 하숙생의 방에서 시계나 다른 물건을 몰래 훔쳐내어 당신이 잠든 방 안에 툭 던져 놓거나, 당신이 눈치채지 못하게 당신 물건을 빼돌려 엉뚱한 장소에 떨어뜨려 둔다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이 당신인 양 꾸미고 묘지나 하숙집 복도 등을 배회하는 등, 온갖 술수와 기지를 발휘하여 당신이 품은 미신을 점점 더 확고하게 만들어 나갑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당신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을 믿게끔 교묘한 선전 공작을 벌이는 거죠.
그렇게 당신이 몽유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본인에게나 주변 사람들에게나 완벽한 기정사실로 굳어졌을 때, 가장 적절한 시기를 틈타 기무라 본인이 원수로 점찍어 둔 노인을 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재산을 슬쩍 당신 방에 밀어 넣어 두고, 미리 훔쳐두었던 당신의 소지품을 현장에 흘려놓고 간다. 자, 이렇게 상상해 보는 것이 오히려 훨씬 더 논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단 한 점의 불합리한 구석도 찾아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계획의 피날레는 당신의 자수로 장식되는 것이고요. 물론 그 일은 당신 입장에선 무척이나 괴롭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었겠지만, 형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무죄까지는 아니더라도 비교적 가벼운 형량으로 끝날 것이 뻔한 이치였습니다. 설령 당신이 어느 정도 형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당신 스스로는 병마에 씌어 저지른 죄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 뼛속까지 진짜 살인을 저지른 자보다는 마음의 짐이 훨씬 가벼웠을 겁니다. 적어도 기무라는 그렇게 굳게 믿었을 것입니다. 그가 당신에게 무슨 사적인 앙심이 있어서 그런 짓을 벌인 건 아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만약 그가 지금 당신이 털어놓은 그 고통스러운 고백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뼈저리게 후회했을 것입니다.
아이고, 참으로 무례한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 부디 언짢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도 다 당신의 가슴 아픈 참회록을 듣다 보니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에, 그만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이런 해괴망측한 궤변을 늘어놓고 말았군요. 하지만 당신의 마음을 이십 년 동안이나 옭아맸던 그 무거운 짐도, 차라리 이런 식으로 생각해 버리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습니까? 제가 드린 말씀이 어쩌면 엉뚱한 억측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설령 억측이라 한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훨씬 이치에도 맞고 당신의 마음도 편안해진다면, 그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기무라라는 사람이 도대체 왜 그 노인을 죽여야만 했는가. 그것이야 제가 기무라 본인이 아닌 이상 도저히 알 길이 없습니다만, 거기에는 필시 말 못 할 깊은 사연이 있었을 겝니다. 이를테면, 글쎄요, 복수라든가 하는……."
새파랗게 질린 이하라 씨의 안색을 눈치챈 사이토 씨는 문득 말을 멈추더니, 무언가를 두려워하듯 푹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마주 앉아 있었다. 겨울 해는 짧아 창호지에 드리운 햇살도 엷어지고, 방 안에는 어느덧 스산한 공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이윽고 사이토 씨는 조심스레 인사를 건네고는 도망치듯 돌아가 버렸다. 이하라 씨는 그 뒷모습을 배웅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원래 앉아 있던 자리에 붙박인 듯 앉아,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꾹꾹 짓누르고 있었다. 뜻밖의 끔찍한 발견에 이성을 잃지 않으려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의 무시무시했던 안색도 점차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쓰디쓴 자조의 웃음이 그의 입가에 맴돌았다.
"얼굴 생김새야 완전히 딴판이 되었지만, 저 자식은, 저 자식은……. 하지만 설령 저 사내가 기무라 본인이라 한들, 나는 무슨 증거로 복수를 한단 말인가. 나라는 멍청이는 손발이 다 묶인 채, 저 사내의 제멋대로인 동정심을 그저 감사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하라 씨는 뼈저리게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세상에 다시없을 기무라의 그 완벽한 속임수에 대해, 분노나 증오라기보다는 차라리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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