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방 (赤い部屋) - 소설 전문(全文)
에도가와 란포 (江戸川乱歩)
기이한 흥분을 좇아 모인 일곱 명의 진지한 남자들이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일부러 이를 위해 꾸며놓은 '붉은 방'의, 붉은 벨벳으로 덮인 깊숙한 안락의자에 파묻혀 오늘 밤의 이야기꾼이 어떤 괴이한 이야기를 꺼낼지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다.
일곱 사람의 한가운데에는, 역시 붉은 벨벳으로 덮인 커다란 원탁 위에 고풍스럽게 조각된 촛대가 놓여 있었고, 거기에 꽂힌 세 자루의 굵은 양초가 아스라이 흔들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방의 사방에는 창문이나 출입문조차 가려둔 채, 천장에서 바닥까지 새빨갛고 묵직한 휘장이 풍성한 주름을 만들며 늘어져 있었다. 낭만적인 촛불의 빛이, 갓 정맥에서 흘러나온 피처럼 검붉은 색을 띤 휘장 표면에 우리 일곱 사람의 기이하게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리고 그 그림자들은 촛불의 불꽃을 따라, 마치 몇 마리의 거대한 곤충이라도 된 것처럼 휘장 주름의 곡선 위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며 기어 다니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 방은 나를, 마치 엄청나게 거대한 생물의 심장 속에 들어와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나에게는 그 심장이, 크기에 걸맞은 느릿한 속도로 쿵쾅쿵쾅 맥박 치는 소리조차 느껴지는 듯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촛불 너머로,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의 그림자 져 검붉게 보이는 얼굴을 그저 무심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 얼굴들은 신기하게도, 마치 가면처럼 무표정하게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윽고 오늘 밤의 이야기꾼으로 정해진 신입 회원 T씨가, 자리에 앉은 채로 가만히 촛불을 응시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명암의 조화로 인해 해골처럼 보이는 그의 턱이 말을 할 때마다 덜그럭덜그럭 스산하게 맞물리는 모습을, 기괴한 태엽 장치 인형을 보는 듯한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제 스스로는 확실히 제정신이라고 생각하고, 남들도 저를 그렇게 대우해 주고 있습니다만, 정말로 제정신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미치광이일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는 아니라 해도, 어떤 종류의 정신병자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요. 좌우간 저라는 인간은, 신기할 정도로 이 세상이 시시합니다.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나도 지루하고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남들처럼 이런저런 유흥에 빠져본 시절도 있었습니다만, 그 어떤 것도 제 타고난 지루함을 달래주지는 못했고, 오히려 '이제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라는 건 이것으로 끝인가, 아아 시시하다' 하는 실망감만 남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점점 저는 무언가를 하는 것 자체가 귀찮아졌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놀이가 재미있다, 분명 널 기쁘게 해 줄 거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들으면, '오, 그런 게 있었나, 당장 해봐야지' 하고 솔깃해하는 대신, 우선 머릿속으로 그 재미를 이것저것 상상해 보는 겁니다. 그리고 실컷 상상을 굴려본 결과는 언제나 '뭐, 별거 아니군' 하고 얕잡아 보게 되고 마는 것이죠.
그런 식으로 한때 저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밥을 먹거나 자고 일어나는 날들을 보냈습니다. 머릿속으로만 온갖 공상을 굴리며 이것도 시시하다, 저것도 지루하다며 닥치는 대로 깎아내리면서, 죽는 것보다 괴롭고, 그러면서도 남들 보기엔 더없이 편안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하루하루 빵(생계)에 쫓기는 처지였다면 오히려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억지로 하는 노동이라 할지라도 좌우간 뭔가 할 일이 있다면 행복한 법이니까요. 아니면 제가 엄청난 대부호였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분명 그 큰돈의 힘으로 역사상의 폭군들이 했던 엄청난 사치나, 피비린내 나는 유희, 그 밖의 온갖 즐거움에 빠져들 수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물론 그것도 이룰 수 없는 소원이라 치면, 저는 그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게으름뱅이처럼 차라리 죽어버리는 편이 나을 정도로 쓸쓸하고 나른한 하루하루를 가만히 누워서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은 분명 '그렇겠지, 그렇겠지. 하지만 세상일에 지루해하는 점에서는 우리도 자네에게 결코 뒤지지 않네. 그러니까 이런 클럽을 만들어서 어떻게든 이상한 흥분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게 아닌가. 자네도 지루해 견딜 수 없었기에 지금 우리 무리에 들어온 것이겠지. 새삼스럽게 듣지 않아도 자네가 지루해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네.'라고 말씀하실 게 틀림없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저는 굳이 장황하게 제 지루함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런 지루함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계시리라 믿었기에, 저는 오늘 밤 이 자리에 참석하여 저의 기묘한 신세 한탄을 들려드리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저는 이 아래층 레스토랑에 자주 드나들었기에 자연스레 이곳 주인과도 친해졌고, 꽤 오래전부터 이 '붉은 방' 모임에 대해 듣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번 가입을 권유받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 법한 지루함의 화신인 제가 오늘날까지 가입하지 않았던 이유는, 실례되는 말씀일지도 모르나, 제가 여러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깊이 지루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심하게 지루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범죄와 탐정 놀이입니까, 강령술이나 기타 심령에 관한 각종 실험입니까, 춘화(Obscene Picture) 동영상이나 실연, 혹은 관능적인 유희입니까, 형무소나 정신병원, 해부학 교실 참관입니까? 아직 그런 것들에 조금이라도 흥미를 가지실 수 있는 여러분은 행복한 분들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사형 집행을 훔쳐볼 계획을 세우고 계시다는 말을 들었을 때조차 조금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주인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무렵엔 이미 그런 뻔한 자극에 질려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유희, 라고 말하기엔 조금 끔찍한 기분도 듭니다만, 제게는 유희라고 해도 좋을 어떤 일을 발견하고 그 즐거움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유희라는 것은, 갑자기 말씀드리면 깜짝 놀라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살인입니다. 진짜 살인 말입니다. 게다가 저는 그 유희를 발견한 이후 오늘까지 백 명 가까운 남자와 여자, 아이들의 목숨을 단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목적으로 빼앗아 왔습니다. 여러분은 그럼 제가 지금 그 무서운 죄악을 뉘우치고 참회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고 지레짐작하실지 모르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조금도 후회 따윈 하지 않습니다. 저지른 죄를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아아 이 무슨 일입니까. 저는 최근에 이르러 그 살인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자극에조차 질려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남이 아니라 제 자신을 죽이는 일, 바로 그 아편을 피우는 일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저라도 목숨만은 아까웠던 모양인지 참고 참아왔습니다만, 살인조차 질려버렸으니 이제 자살이라도 계획하는 것 말고는 자극을 구할 방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저는 머지않아 아편의 독 때문에 목숨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적어도 앞뒤가 맞는 말을 할 수 있는 동안에 누군가에게 제가 해온 일들을 털어놓고 싶었습니다. 그러기엔 이 '붉은 방' 분들이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요.
그런 까닭에, 저는 사실 여러분의 동료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오직 제 이 이상한 이야기를 들어주시길 바라는 마음에 회원 중 한 명으로 끼워 달라고 한 것입니다. 다행히 신입 회원은 첫날밤에 반드시 모임의 취지에 맞는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기에, 이렇게 오늘 밤 제 소원을 이룰 기회를 잡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3년 전쯤의 일이었습니다. 그 무렵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온갖 자극에 질려 아무런 삶의 보람도 없이, 마치 '지루함'이라는 이름의 동물이라도 된 것처럼 뒹굴거리며 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만, 그해 봄, 아직 추울 무렵이었으니 아마 2월 말이나 3월 초쯤이었을 겁니다. 어느 날 밤 저는 하나의 묘한 사건과 맞닥뜨렸습니다. 제가 백 명의 목숨을 빼앗게 된 것은, 실로 그날 밤의 사건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어딘가에서 늦게까지 깨어 있던 저는, 한 1시쯤이었을까요. 술에 조금 취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추운 밤인데도 인력거도 타지 않고 어슬렁어슬렁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었습니다. 골목 하나만 더 돌면 우리 집이라는, 그 골목을 무심코 휙 돌았을 때, 맞은편에서 한 남자가 무언가 당황한 기색으로 허둥지둥 이쪽으로 오다가 저와 쾅 부딪혔습니다. 저도 놀랐지만 남자는 더 놀랐는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제 모습을 알아보자 다짜고짜 '이 근처에 병원 없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세히 들어보니, 그 남자는 자동차 운전기사인데, 방금 저기서 한 노인을 (이런 야밤에 혼자 돌아다니는 걸 보니 아마 노숙자였겠지요) 치어 큰 상처를 입혔다는 겁니다. 과연 보니, 바로 두세 발짝 앞쪽에 자동차 한 대가 서 있고, 그 곁에 사람 같은 것이 쓰러져 으으 하고 희미하게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파출소는 꽤 멀었고 게다가 부상자의 고통이 심해 보이니, 기사는 무엇보다 먼저 의사를 찾으려 했던 게 틀림없습니다.
저는 그 근처 지리에 관해선 저희 집 근처의 일이니 병원 위치 등도 잘 알고 있었기에 당장 이렇게 알려주었습니다.
'여기서 왼쪽으로 두 블록쯤 가면 왼쪽에 붉은 간판 등에 불이 켜진 집이 있소. M의원이라는 곳이오. 거기로 가서 문을 두드려 깨우시오.'
그러자 기사는 곧바로 조수의 도움을 받아 부상자를 그 M의원 쪽으로 옮겨갔습니다. 저는 그들의 뒷모습이 어둠 속에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만, 이런 일에 엮여봤자 귀찮기만 할 것 같아 이내 집으로 돌아왔고, (저는 독신입니다) 식모 아주머니가 깔아둔 이부자리에 들어가 술기운 때문인지 여느 때와 달리 금세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만약 제가 그대로 그 사건을 잊어버리기만 했다면, 그것으로 끝날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저는 전날 밤의 그 사소한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상자는 살았으려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까지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저는 문득 묘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뿔싸, 내가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구나.'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리 술에 취해 있었다고는 하나 결코 제정신을 잃었던 것은 아닌데, 나란 놈이 무슨 생각으로 그 부상자를 M의원 따위로 실려 가게 했을까요.
'여기서 왼쪽으로 두 블록쯤 가면 왼쪽에 붉은 간판 등에 불이 켜진 집이 있소…….'
하던 그때의 내 말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왜 그 대신,
'여기서 오른쪽으로 한 블록쯤 가면 K병원이라는 외과 전문 병원이 있소.'
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제가 알려준 M의원은 소문난 돌팔이 의사였고, 더구나 외과 치료를 할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M의원과는 반대 방향이면서 M보다 더 가까운 곳에 훌륭하게 설비가 갖춰진 K라는 외과 병원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알고 있었는데 어째서 잘못된 곳을 알려주었는가. 그때의 기이한 심리 상태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일시적인 착각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조금 마음에 걸려서 식모 아주머니에게 은근슬쩍 동네 소문 등을 알아보게 했더니, 아무래도 그 부상자는 M의원의 진찰실에서 죽은 모양이었습니다. 어느 병원이든 그런 중환자가 실려 오는 건 꺼리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한밤중 1시였으니 무리도 아닙니다만, M의원에서는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여간해선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끈 끝에 겨우 부상자를 옮겼을 무렵에는 이미 상당히 손쓰기 늦은 상태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그때 만약 M의원 원장이 '나는 전문의가 아니니 근처 K병원으로 데려가시오'라고 지시라도 했다면 혹시 부상자는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얼마나 무모한 일입니까. 그는 스스로 그 어려운 환자를 처리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실패한 것이죠. 소문에 따르면 M씨는 당황한 나머지 부당하게 오랜 시간 동안 부상자를 이리저리 건드리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왠지 기분이 참 묘해졌습니다.
이 경우 가엾은 노인을 죽인 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자동차 운전기사와 M의사 모두 각자 책임이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법적인 처벌이 따른다면 그것은 아마도 운전기사의 과실에 대해 이루어지겠지만, 사실상 가장 중대한 책임자는 바로 저 아니었을까요. 만약 그때 제가 M의원이 아니라 K병원을 알려주었다면, 조금의 실수도 없이 부상자는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운전기사는 단지 다치게 했을 뿐입니다. 죽인 것은 아닙니다. M의사는 의술이 떨어져서 실패한 것이니 이 또한 무작정 탓할 수만은 없습니다. 설사 그에게 책임을 져야 할 점이 있다 쳐도, 그 원흉을 따지자면 제가 부적절한 M의원을 알려준 것이 잘못입니다. 요컨대, 그때 저의 손가락질 하나에 따라 노인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었던 셈입니다. 상처를 입힌 것은 분명 운전기사이겠지만, 죽인 것은 이 제가 아니었을까요.
이것은 제 지시가 완전히 우연한 실수였다고 생각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만, 만약 그것이 실수가 아니라 그 노인을 죽여버리려는 저의 '고의'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는 사실상 살인죄를 저지른 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법률은 설령 운전기사를 벌할지언정, 사실상의 살인자인 저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마 의심조차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와 죽은 노인은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가령 의심을 받는다 해도, 저는 그저 외과 병원이 있었다는 것을 깜빡 잊었을 뿐이라고 대답하면 그만 아닙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마음속의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일찍이 이런 살인법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이 자동차 사건에서 처음으로 그 점을 깨달았습니다만,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은 참으로 위험천만한 곳 아닙니까. 언제 저 같은 놈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고의로 잘못된 병원을 알려주거나 해서, 그러지 않았다면 건질 수 있었을 목숨을 부당하게 잃어버리는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인 겁니다.
이건 그 후에 제가 실제로 해봐서 성공한 일입니다만, 시골에서 온 할머니가 전차 선로를 건너려고 막 선로에 한쪽 발을 디뎠을 때, 물론 그곳에는 전차뿐만 아니라 자동차나 자전거, 마차, 인력거 등이 얽히듯 엇갈려 다니고 있으니 할머니의 머릿속은 충분히 혼란스러울 게 틀림없습니다. 그 한쪽 발을 디딘 찰나에 급행 전차인가 뭔가가 질풍처럼 달려와 할머니에게서 두세 발짝 앞까지 다가왔다고 가정합시다. 그때 할머니가 전차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로 선로를 건너가 버리면 그만이지만, 누군가 큰 소리로 '할머니, 위험해요!' 하고 고함이라도 친다면, 할머니는 금세 당황해 그대로 돌파할까 아니면 뒤로 물러설까 잠시 우왕좌왕할 게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 전차가 너무 가까워서 급정거도 할 수 없었다고 친다면, '할머니, 위험해요!'라는 단 한마디가 그 할머니에게 큰 부상을 입히고, 나쁘게는 목숨까지 앗아가지 말란 법이 없는 겁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저는 어느 날 이 방법으로 한 시골 사람을 보기 좋게 죽여버린 적이 있습니다요."
(T씨는 여기서 잠시 말을 끊고 기분 나쁘게 웃었다.)
'오디오북으로 직접 감상해 보세요'
"이 경우 '위험해!' 하고 소리친 저는 명백히 살인자입니다. 하지만 누가 저의 살의를 의심하겠습니까? 아무런 원한도 없는 생면부지의 인간을 단지 살인의 흥미만을 위해 죽이려 하는 놈이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위험해!'라는 주의의 말은 어떻게 해석해 본다 한들 호의에서 나온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죽은 사람에게 감사받을지언정 결코 원망받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안전하기 짝이 없는 살인법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악행은 반드시 법에 걸려 응당한 처벌을 받는 것이라 믿고 어리석게도 푹 안심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법률이 살인자를 놓쳐줄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방금 말씀드린 두 가지 실례에서 유추할 수 있듯, 조금도 법률에 저촉될 염려가 없는 살인법이 생각해보면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세상이란 것의 무서움에 전율하기보다, 그런 죄악의 여지를 남겨둔 조물주의 여유를 더없이 유쾌하게 생각했습니다. 정말이지 저는 이 발견에 광희(狂喜)했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이 방법에 의존하기만 하면, 이 문명화된 태평성대에 저만큼은 이른바 '합법적인 처형권(斬捨て御免)'이나 다름없는 셈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이런 종류의 살인을 통해, 그 죽을 것 같은 지루함을 달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절대 법에 걸리지 않는 살인, 어떤 셜록 홈즈라도 꿰뚫어 볼 수 없는 살인, 아아 이 얼마나 완벽한 졸음 깨기입니까. 그 후 저는 3년 동안 사람을 죽이는 즐거움에 빠져, 어느새 그토록 심했던 지루함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웃지 마십시오. 저는 전국시대의 호걸처럼, 그 백 명 베기를, 물론 글자 그대로 벤다는 뜻은 아니지만, 백 명의 목숨을 빼앗을 때까지는 결코 도중에 이 살인을 멈추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했던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석 달 전쯤입니다. 저는 딱 99명을 해치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이 남았을 때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저는 그 살인에도 그만 질려버리고 말았습니다만, 그것은 차치하고, 그럼 그 99명을 어떤 식으로 죽였는가. 물론 99명 중 어느 한 사람에게도 조금의 원한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단지 남모르는 방법과 그 결과에 흥미를 가지고 벌인 짓이기에, 저는 단 한 번도 같은 방식을 반복한 적이 없었습니다. 한 명을 죽이고 나면, 다음번엔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로 해치울까, 그것을 궁리하는 것이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제가 저지른 99가지 다른 살인법을 일일이 전부 말씀드릴 시간도 없거니와, 게다가 오늘 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그런 개개의 살인 방식을 고백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런 극악무도한 죄악을 저지르면서까지 지루함을 벗어나려 했던, 그리고 결국에는 그 죄악에마저 질려버려 이번에는 저 자신마저 파멸시키려 하는, 세상의 상식에서 벗어난 제 심정을 말씀드리고 여러분의 판단을 구하고자 함이니, 그 살인 방법에 대해서는 그저 두서너 가지 실례만 말씀드리는 선에서 그칠까 합니다.
이 방법을 발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인데,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제 이웃에 맹인 안마사가 한 명 있었는데, 그가 장애인들에게 흔히 있는 지독한 고집쟁이였습니다. 타인이 친절하게 이것저것 주의를 주면 오히려 그것을 거꾸로 받아들여, 눈이 안 보인다고 사람 무시하지 마라 그 정도는 나도 다 안다는 식으로 반드시 상대방의 말에 거역하는 짓을 하는 겁니다. 이만저만 고집이 센 게 아니었죠.
어느 날이었습니다. 제가 어떤 큰길을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그 고집쟁이 안마사가 오고 있는 것과 마주쳤습니다. 그는 건방지게도 지팡이를 어깨에 메고 콧노래를 부르며 성큼성큼 걷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길에는 어제부터 하수도 공사가 시작되어 길 한쪽에는 깊은 구덩이가 파여 있었는데, 그는 시각장애인이다 보니 한쪽 통행금지 팻말 같은 게 보일 리 없어, 아무 생각 없이 그 구덩이 바로 옆을 태평하게 걷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 저는 문득 묘안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여보게 N군!' 하고 안마사의 이름을 부르며 (자주 안마를 부탁해서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어허 위험해, 왼쪽으로 붙어, 왼쪽으로!'
하고 고함쳤습니다. 그걸 일부러 조금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면, 그는 평소 성격상 분명 놀림을 받는 거로 지레짐작하고 왼쪽으로는 안 가고 일부러 오른쪽으로 붙을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에헤헤헤……. 농담도 참.'
하며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대꾸를 하면서 다짜고짜 반대편 오른쪽으로 두세 발짝 붙는 바람에, 순식간에 하수도 공사 구덩이 속으로 한쪽 발을 헛디뎌 앗 하는 사이에 1장(약 3미터)이나 되는 그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습니다. 저는 무척 놀란 체하며 구덩이 가장자리로 달려가,
'잘됐으려나' 하고 들여다보았는데, 그는 떨어질 때 부위를 잘못 맞았는지 구덩이 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고, 구덩이 주위에 튀어나온 날카로운 돌에 찧인 모양이었습니다. 짧게 깎은 머리에서는 검붉은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혀라도 깨물었는지 입과 코에서도 마찬가지로 출혈이 있었습니다. 안색은 이미 창백해졌고 신음 소리를 낼 기운조차 없어 보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안마사는, 그래도 그 후 일주일 정도는 숨이 붙어 살아 있었습니다만, 끝내 절명하고 말았습니다. 저의 계획은 보기 좋게 성공했습니다. 누가 저를 의심하겠습니까? 저는 이 안마사를 평소 단골로 자주 불렀을 정도라 살인의 동기가 될 만한 원한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게다가 표면상으로는 오른쪽에 함정이 있는 것을 피하게 하려고 '왼쪽으로 붙어, 왼쪽으로' 하고 가르쳐 준 셈이니 저의 호의를 인정하는 사람은 있어도 그 친절해 보이는 말 뒤에 무서운 살의가 담겨 있었다고 상상할 사람은 있을 턱이 없는 것입니다.
아아, 얼마나 무섭고도 즐거운 유희였던가요. 교묘한 트릭을 생각해 냈을 때의, 아마도 예술가의 그것에 필적할 만한 환희, 그 트릭을 실행할 때의 두근거리는 긴장감, 그리고 목적을 달성했을 때의 형언할 수 없는 만족감, 게다가 제 희생양이 된 남녀가 살인자가 눈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피투성이가 되어 미친 듯이 나뒹구는 단말마의 광경. 처음 얼마간은 그것들이 얼마나 저를 황홀하게 해 주었는지 모릅니다.
어느 날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여름의 잔뜩 흐린 날이었는데, 저는 어느 교외의 문화촌이라고나 할까요, 십여 채의 서양식 저택이 띄엄띄엄 서 있는 곳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그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콘크리트 서양식 저택의 뒤편을 지나가던 때입니다. 문득 묘한 것이 제 눈에 띄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그때 제 코끝을 스치며 기세 좋게 날아가던 참새 한 마리가, 그 집 지붕에서 지면으로 당겨진 굵은 철사에 잠깐 앉더니, 갑자기 튕겨 나가듯 밑으로 떨어져 그대로 죽어버린 것입니다.
이상한 일도 다 있네 하고 자세히 보니, 그 철사라는 것은 서양식 저택의 뾰족한 지붕 꼭대기에 세워진 피뢰침에서 내려오는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철사에는 피복이 입혀져 있었지만, 지금 참새가 앉은 부분은 어찌 된 일인지 그것이 벗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전기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어쩌다 공중 전기의 작용이라든가로 피뢰침 철사에 강한 전류가 흐르는 경우가 있다고 어디선가 들은 것을 기억하고, '옳다, 저거구나' 하고 눈치챘습니다. 이런 일에 맞닥뜨린 것은 처음이었기에, 신기하게 여겨 저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 철사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곳으로 서양식 저택 옆구리 쪽에서 병정놀이 같은 것을 하며 놀고 있는 듯한 아이들 한 무리가 왁자지껄 떠들며 나왔습니다. 그중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작은 사내아이가, 다른 아이들은 훌쩍 저쪽으로 가버렸는데 혼자 뒤에 남더니 뭘 하나 지켜봤더니, 방금 그 피뢰침 철사 앞의 약간 볼록하게 솟아오른 곳에 서서 앞섶을 걷어 올리곤 서서 오줌을 누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본 저는 또다시 하나의 묘책을 떠올렸습니다. 저는 중학 시절에 물이 전기의 도체라는 것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지금 아이가 서 있는 조금 높은 곳에서 철사의 피복이 벗겨진 부분에 오줌을 누는 건 일도 아닙니다. 오줌은 물이니 역시 도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습니다.
'얘야. 저 철사에 오줌을 눠 보렴. 닿겠니?'
그러자 아이는,
'뭐, 그까짓 거. 잘 봐요.'
그렇게 말하는가 싶더니 자세를 바꾸어 대뜸 철사의 밑바탕이 드러난 부분을 겨냥해 오줌을 갈겼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철사에 닿을락 말락 할 때, 무섭게도 아이는 폴짝 한 번 춤추듯 튀어 오르는가 싶더니 그 자리에 픽 쓰러져 버렸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피뢰침에 이렇게 강한 전류가 흐르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라고 합니다만, 이리하여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간이 감전되어 죽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이 경우에도 물론 저는 조금도 의심받을 걱정이 없었습니다. 그저 아이의 시신에 매달려 오열하는 어머니에게 정중한 조의의 말을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나기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이것도 어느 여름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 남자를 한 번 희생양으로 삼아주리라 눈독 들이고 있던 한 친구, 라고 해도 결코 그 남자에게 원한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오랜 세월 둘도 없는 절친으로 지냈을 정도의 친구입니다만, 제게는 오히려 그런 사이좋은 친구 등을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으면서 순식간에 시체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이상한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와 함께 보소 반도의 아주 외진 어느 어촌으로 피서를 간 적이 있습니다. 물론 해수욕장이라고 할 만한 곳은 아니었고 바다에는 그 마을의 구릿빛 피부를 한 꼬마들이 첨벙첨벙 놀고 있을 뿐, 도시에 온 손님이라고는 우리 두 사람 외에 화가 지망생으로 보이는 무리가 몇 명, 그마저도 바다에 들어간다기보다는 주변 해안을 스케치북을 한 손에 들고 돌아다니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름난 해수욕장처럼 도시 소녀들의 우아한 육체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숙소라고 해봤자 낡은 싸구려 여관 같은 곳이었으며 음식도 회 말고는 맛이 없어 입에 맞지 않는, 꽤나 쓸쓸하고 불편한 곳이었습니다만, 제 그 친구라는 녀석이 저와는 완전히 달라서 그런 시골 마을에서 고독한 생활을 맛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던 데다, 저는 저대로 어떻게든 이 녀석을 해치울 기회를 잡으려 안달하던 차였기 때문에 그런 어촌에서 며칠 동안이나마 머물러 있을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그 친구를 해안 마을에서 꽤 떨어진 곳에 있는 절벽처럼 생긴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다이빙하기엔 안성맞춤인 장소네' 따위의 말을 하며 제가 앞장서서 옷을 벗었습니다. 친구도 수영을 좀 할 줄 알았기에 '과연 여기 좋네' 하며 저를 따라 옷을 벗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그 절벽 끝에 서서 양손을 똑바로 머리 위로 뻗고 '하나, 둘, 셋!' 하고 힘껏 고함을 지른 뒤, 폴짝 뛰어오르자 멋진 호를 그리며 거꾸로 앞바다 수면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풍덩 하고 몸이 물에 닿았을 때 가슴과 배의 호흡으로 싹 물을 가르며 불과 2~3척(약 60~90cm)만 잠수한 뒤 날치처럼 저쪽 수면에 몸을 드러내는 것이 '다이빙'의 요령인데, 저는 어렸을 때부터 수영을 잘해서 이런 다이빙 같은 것도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그렇게 기슭에서 열네다섯 칸(약 25~27미터)이나 떨어진 수면으로 고개를 내민 저는 입영이라는 것을 하며 한 손으로 얼굴의 물을 툭 털어내고,
'어~이, 뛰어내려 봐!'
하고 친구에게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물론 아무 의심 없이,
'좋아!' 하고 말하며 저와 같은 자세를 취하고 기세 좋게 제 뒤를 쫓아 그곳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다로 잠수한 채, 그는 한참이 지나도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것을 예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바닷속에는 수면에서 1칸(약 1.8미터) 정도 깊이에 커다란 바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미리 그것을 더듬어 찾아두고, 친구의 솜씨로 다이빙을 하면 반드시 1칸 이상 잠수할 게 뻔하니 그 바위에 머리를 부딪힐 게 틀림없다고 계산하고 저지른 짓이었습니다. 아시겠지만 다이빙 기술은 능숙할수록 물에 잠기는 깊이가 얕아지기 마련인데, 저는 그것에 충분히 숙련되어 있었기에 바닷속 바위에 부딪히기 전에 교묘히 수면으로 떠 올랐지만, 친구는 다이빙에 관해서는 아직 완전한 초보였기에 곤두박질치듯 해저로 돌진하여 있는 힘껏 머리를 바위에 처박았음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그는 둥실하고 참치 시체처럼 해수면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파도에 이리저리 떠밀리고 있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기절한 것입니다.
저는 그를 안고 기슭으로 헤엄쳐 나와, 그대로 마을로 달려가 숙소 사람들에게 위급함을 알렸습니다. 그래서 고기잡이를 쉬고 있던 어부 등이 와서 친구를 구완해 주었습니다만, 머리를 너무 심하게 부딪힌 탓인지 이미 소생할 가망은 없었습니다. 보니 정수리가 대여섯 치(약 15~18cm) 찢어져 하얀 살이 부풀어 올라 있었습니다. 그 머리가 놓여 있던 바닥에는 엄청난 피가 검붉게 굳어 있었습니다.
전에도 후에도 제가 경찰의 조사를 받은 것은 딱 두 번뿐인데, 그중 하나가 이 경우였습니다. 워낙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니 일단 조사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저와 그 친구는 절친한 사이로 그전까지 다툼 한 번 한 적 없다는 것이 밝혀져 있고, 또 당시 상황상 저나 그나 그 해저에 바위가 있다는 것을 몰랐고, 다행히 저는 수영을 잘했기 때문에 위험을 피했지만 그는 수영이 서투른 바람에 이런 불상사를 일으켰다는 것이 명백해졌기에, 무난히 의심은 풀렸고 저는 오히려 경찰 사람들로부터 '친구를 잃어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습니까' 하고 위로의 말까지 듣는 지경이었습니다.
아니, 이런 식으로 일일이 실례를 늘어놓다가는 끝이 없겠습니다. 이 정도만 말씀드려도 여러분도 저의 이른바 '절대 법에 저촉되지 않는 살인법'을 대충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전부 이런 식입니다. 어느 때는 서커스 구경꾼 속에 섞여 있다가 갑자기, 여기서 말씀드리기 부끄러울 정도로 기이한 자세를 취해 높은 곳에서 줄타기하던 여자 곡예사의 시선을 빼앗아 그녀를 추락시켜 보기도 하고, 화재 현장에서 제 자식을 찾아 반미치광이가 되어 있던 어느 아주머니에게 아이는 집 안에 재워두었다며 '거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등 암시를 주어 그 아주머니를 맹화 속으로 뛰어들게 해 타 죽게 만들거나, 혹은 지금 막 투신자살을 하려는 처녀의 등 뒤에서 갑자기 '잠깐!' 하고 엉뚱한 소리를 질러 가만두었으면 자살을 그만두었을지도 모를 그 처녀를 깜짝 놀라게 한 바람에 물속으로 뛰어들게 해버리거나. 그런 것을 말씀드리자면 끝도 없습니다만, 이미 밤도 꽤 늦었고 여러분도 이런 잔혹한 이야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으실 테니 마지막으로 조금 별난 것을 하나만 말씀드리고 끝맺기로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로는 제가 늘 한 번에 한 사람씩만 죽인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채 3년도 안 되는 세월 동안, 그것도 조금도 법에 저촉되지 않는 방법으로 99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을 한 번에 죽인 것은, 그렇습니다. 작년 봄의 일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당시 신문 기사로 분명 읽으셨겠지만, 주오선(中央線) 열차가 전복되어 많은 부상자와 사망자를 낸 일이 있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뭐 바보스러울 정도로 손쉬운 방법이었습니다만, 그것을 실행할 장소를 찾는 데에는 꽤 수고가 들었습니다. 그저 처음부터 주오선 노선 주변이라는 정도만 가늠을 해두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노선은 저의 계획에 가장 편리한 산길을 지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열차가 전복되었을 경우에도 주오선은 평소 사고가 잦으니까 '아아 또인가' 할 정도로 다른 노선만큼 눈에 띄지 않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조건에 맞는 장소를 찾는 데에는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결국 M역 근처의 절벽을 이용하기로 마음먹기까지는 족히 일주일은 걸렸습니다. M역에는 자그마한 온천장이 있어서 저는 그곳의 어느 여관에 묵으며 매일매일 목욕을 하거나 산책을 하면서, 누가 보아도 장기 투숙하는 탕치객(온천 요양객)처럼 보이려 애썼습니다. 그로 인해 또 열흘 남짓을 낭비해야만 했습니다만, 이윽고 이제 괜찮겠지 하는 때를 보아 어느 날 저는 여느 때처럼 그 근처 산길을 산책했습니다.
그리고 여관에서 반 리(약 2km) 정도 떨어진 약간 높은 절벽 꼭대기에 다다라, 저는 그곳에서 가만히 땅거미가 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절벽 바로 밑에는 기차 선로가 커브를 그리며 달리고 있었고, 선로 건너편은 이쪽과는 반대로 깊고 험한 계곡이 되어 그 밑바닥에 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는 것이 아스라이 멀리 보였습니다.
잠시 후, 미리 정해둔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아무도 보는 이가 없었지만 일부러 짐짓 발이 걸려 넘어지는 듯한 시늉을 하며, 이것도 미리 찾아둔 커다란 돌덩이 하나를 걷어찼습니다. 그것은 살짝 차기만 하면 분명 절벽에서 선로 위쪽으로 굴러떨어질 만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저는 만약 실패하면 몇 번이고 다른 돌덩이로 다시 할 작정이었습니다만, 보니 그 돌덩이는 얄밉게도 레일 한 가닥 위에 떡하니 얹혀 있었습니다.
반 시간 후면 하행 열차가 그 레일을 지나는 것입니다. 그때쯤이면 이미 깜깜해져 있을 테고, 그 돌이 있는 장소는 커브 너머이므로 기관사가 알아차릴 턱이 없습니다. 그것을 확인한 저는 황급히 M역으로 되돌아가 (반 리짜리 산길이었으므로 족히 30분 이상을 허비했습니다) 역장실로 뛰어 들어가 '큰일 났습니다!' 하고 몹시 당황한 어조로 외친 것입니다.
'저는 여기 온천에 요양 온 사람인데, 아까 반 리쯤 떨어진 선로를 따라 난 절벽 위로 산책을 갔다가 비탈진 곳을 뛰어 내려오려던 찰나에 실수로 돌덩이 하나를 절벽 아래 선로 위로 차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만약 거기로 열차가 지나가면 무조건 탈선할 겁니다. 재수 없으면 계곡으로 떨어지는 일이 없으리란 법도 없습니다. 저는 그 돌을 치우려고 여러 길을 찾아보았습니다만 아무래도 낯선 산속이라 도무지 그 높은 절벽을 내려갈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물쭈물하느니 차라리 하고 이쪽으로 달려왔습니다만 어떡하죠? 시급히 저것을 치워주실 수 없겠습니까.'
하며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역장은 기겁을 하며,
'큰일이군, 방금 하행 열차가 통과한 참이오. 보통이라면 그 근처는 벌써 지나가 버렸을 무렵이지만…….'
하는 겁니다. 그것이 제 뜻대로 된 셈이죠. 그런 문답을 되풀이하고 있는 동안 열차 전복 사상자 부지기수라는 보고가, 간신히 사지를 벗어나 달려온 그 하행 열차의 차장에 의해 전해졌습니다. 자, 난리가 난 겁니다.
저는 사건의 경위상 하룻밤 M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만,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저지른 일입니다. 실수가 있을 리 만무하죠. 물론 저는 엄청 혼이 나긴 했지만 별도로 처벌을 받을 만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그때 제 행위는 형법 129조인가에도 해당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해당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500엔 이하의 벌금형에 불과합니다만.) 그런 까닭에 저는 돌덩이 하나로 조금도 처벌받지 않고 에- 그러니까 그게, 그렇습니다, 17명이었습니다. 17명의 목숨을 빼앗는 데 성공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런 식으로 99명의 목숨을 빼앗은 사나이입니다. 그리고 조금도 뉘우치기는커녕 그런 피비린내 나는 자극에조차 이젠 질려버려서, 이번에는 제 자신의 목숨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놈입니다. 여러분은 너무나도 잔혹한 저의 소행에 그렇게 눈살을 찌푸리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이것들은 보통 사람으로는 상상도 못 할 극악무도한 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대죄를 저지르면서까지 벗어나고 싶을 만큼 지독하고 끔찍한 지루함을 느껴야 했던 제 심정도 조금은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저라는 남자는, 그런 악행이라도 꾀하지 않고서는 이 인생에서 그 어떤 보람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부디 판단해 주십시오. 저는 미치광이입니까? 살인광이라는 것입니까?"
이렇게 해서 오늘 밤 이야기꾼의 끔찍하고도 기괴하기 짝이 없는 신세 한탄이 끝났다. 그는 다소 핏발 선, 그리고 흰자위가 많이 드러난 흐리멍덩한 미치광이 같은 눈으로 우리 청자들의 얼굴을 한 사람씩 둘러보았다. 하지만 누구 하나 이에 답하여 비판의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그곳에는 단지 으스스하게 명멸하는 촛불에 비친 일곱 명의 상기된 얼굴만이 미동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문득, 문 근처 휘장 표면에 반짝하고 빛난 것이 있었다. 보고 있자니 그 은빛으로 빛나는 것이 점점 커졌다. 그것은 은빛의 둥근 것으로, 마치 보름달이 짙은 구름을 뚫고 나타나듯 붉은 휘장 사이로 서서히 완벽한 원형을 그리며 나타나고 있었다. 나는 첫 순간부터 그것이, 우리들의 마실 것을 나르는 웨이트리스의 양손에 받쳐진 커다란 은쟁반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만물을 몽환화하지 않고는 배기지 않는 이 '붉은 방'의 공기는, 그 흔한 은쟁반을 마치 살로메 극의 낡은 우물 속에서 노예가 불쑥 내미는, 그 예언자의 잘린 머리가 얹힌 은쟁반인 양 환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은쟁반이 휘장 밖으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그 뒤에서 청룡도처럼 폭이 넓고 번쩍이는 칼이 불쑥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입술이 두툼한 반라의 노예 대신 늘 보던 아름다운 웨이트리스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가 무척이나 쾌활하게 일곱 남자 사이를 돌아다니며 음료를 돌리기 시작하자, 그 세상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환상의 방에 세상의 바람이 불어 들어온 것 같아 왠지 모르게 부조화스러운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 건물 아래층 레스토랑의 화려한 가무와 난음, 꺄악거리는 젊은 여자의 헤픈 비명 등을 그 몸 주변에 둥둥 떠돌게 하고 있었다.
"자, 쏜다."
갑자기 T가 지금껏 이야기하던 목소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오른손을 품속에 넣더니 반짝반짝 빛나는 물체 하나를 꺼내어 불쑥 웨이트리스 쪽으로 겨누었다.
'앗' 하는 우리들의 목소리와 '탕……' 하는 권총 소리와 '꺄악' 하고 기겁하는 여자의 비명이 거의 동시였다.
물론 우리는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아아 이 무슨 다행이란 말인가, 총에 맞은 여자는 아무 일 없이, 단지 이것만은 무참히 부서져 버린 음료 그릇을 앞에 두고 멍하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와하하하하……." T씨가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장난감이야, 장난감이라고. 아하하하……. 하나코, 아주 꼴 좋게 속았네. 하하하……."
그럼, 지금도 T씨의 오른손에서 하얀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저 권총은 장난감에 불과했단 말인가.
"어머, 깜짝 놀랐네……. 그거 장난감이에요?" T와 예전부터 친했던 듯한 웨이트리스는 아직 입술엔 핏기가 없었지만 그렇게 말하며 T씨 쪽으로 다가갔다.
"어디, 줘 봐요. 세상에, 진짜랑 똑같네."
그녀는 무안함을 감추려는 듯, 그 장난감이라는 6연발 리볼버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윽고
"분하니까, 그럼 나도 쏴줄게요!"
말이 떨어지섭게 그녀는 왼팔을 굽히고 그 위에 권총 총구를 얹은 뒤 건방진 자세로 T씨의 가슴팍에 조준을 했다.
"나한테 쏠 테면 쏴봐라." T씨는 씩 웃으며 조롱하듯 말했다.
"못 쏠 줄 알고!"
탕…….
아까보다 한층 날카로운 총성이 방안에 울려 퍼졌다.
"우우우우……." 형언할 수 없이 기분 나쁜 신음이 났는가 싶더니, T씨가 불쑥 의자에서 일어서다 바닥에 쿵 하고 쓰러졌다. 그리고 손발을 버둥거리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장난인가, 장난치고는 너무나도 실감 나는 몸부림이 아닌가.
우리는 무심코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 옆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탁상 위의 촛대를 집어 들어 고통스러워하는 자 위에 비추었다. 보니 T씨는 창백한 얼굴을 경련시키며 마치 상처 입은 지렁이가 구불구불 뛰어오르듯 온몸의 근육을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무아지경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리고 칠칠치 못하게 풀어 헤쳐진 가슴의 검게 보이는 상처 구멍에서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뚝뚝 새빨간 피가 하얀 피부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장난감인 줄 알았던 6연발 권총의 두 번째 발에는 진짜 총알이 장전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멍하니 그곳에 선 채 아무도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기괴한 이야기 뒤에 일어난 이 사건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격렬한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시계 눈금으로 치면 아주 짧은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때의 나에게는, 우리가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서 있는 시간이 몹시 길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그 찰나의 순간에 고통스러워하는 부상자를 앞에 두고도 내 머릿속에는 다음과 같은 추리가 작용할 여유가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뜻밖의 사건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이것은 처음부터 온전히 T의 오늘 밤 프로그램에 쓰여 있던 사항이 아니었을까. 그는 99명까지는 남을 죽였지만, 마지막 100명째만큼은 자기 자신을 위해 남겨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런 일에 가장 걸맞은 이 '붉은 방'을 마지막 죽을 장소로 택한 것은 아닐까. 이것은 이 남자의 기괴하기 짝이 없는 성격을 생각하면 그리 빗나간 상상도 아니다. 그렇다. 저 권총을 장난감이라 믿게 해 놓고 웨이트리스에게 쏘게 한 기교 등은, 다른 살인 사건들과 공통되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이 아닌가. 이렇게 해두면 하수인인 웨이트리스는 조금도 벌을 받을 염려가 없다. 이곳에는 우리 여섯 명이나 되는 증인이 있으니까. 즉, T는 그가 타인에게 했던 것과 같은 방법, 가해자가 조금도 죄가 되지 않는 방법을 그 자신에게 응용한 것이 아닌가.'
나 외의 사람들도 모두 각자의 감회에 젖어 있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내 생각과 같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 상황에서는 그 외에 다른 생각의 여지가 없으니까.
끔찍한 침묵이 좌중을 지배했다. 그곳에는 엎드린 웨이트리스가 슬프게 훌쩍이는 소리만이 구슬프게 들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붉은 방'의 촛불에 비친 이 한바탕의 비극 장면은 이 세상의 일이라기엔 너무나도 몽환적으로 보였다.
"크크크크크……."
돌연 여자의 흐느낌 외에 또 하나의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이미 발버둥을 멈추고 죽은 사람처럼 축 늘어져 있던 T씨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듯했다. 얼음 같은 전율이 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큭큭큭큭……."
그 소리는 순식간에 커져갔다. 그리고 앗 하는 사이에 빈사 상태의 T씨 몸뚱이가 비틀비틀 일어섰다. 일어서서도 여전히 '큭큭큭큭' 하는 이상한 소리는 멎지 않았다. 그것은 가슴 저 밑바닥에서 짜내는 듯한 고통의 신음 같기도 했다. 하지만…… 혹시…… 오오, 역시 그랬던 건가! 그는 뜻밖에도 아까 전부터 참을 수 없는 우스움을 꾹 참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 그는 이제 큰 소리로 웃어 젖히며 외쳤다.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이것이!"
그러자 아아, 이건 또 어찌 된 일인가. 방금 전까지 그토록 울고 있던 웨이트리스가 대뜸 명랑하게 일어서는가 싶더니, 이제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새우처럼 구부리며 그녀 역시 박장대소하는 것이었다.
"이건 말이죠," 이윽고 T씨는 어안이 벙벙해진 우리 앞에 자그마한 원통형 물건 하나를 손바닥에 올려 내밀며 설명했다. "소가죽 방광(오줌보)으로 만든 총알입니다. 안에 붉은 잉크가 가득 들어 있어서 명중하면 그게 흘러나오는 장치지요. 그리고 말입니다, 이 총알이 가짜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까부터 제가 떠든 신세 한탄이라는 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이만하면 제 연기가 제법 그럴싸하지 않았습니까? 자, 지루해하시는 여러분. 이런 정도면 여러분이 늘 찾고 계시는, 그 '자극'이란 게 되지 않았으려나 모르겠군요……."
그가 이렇게 속임수의 비밀을 털어놓는 동안, 지금까지 그의 조수 역할을 한 웨이트리스의 기지로 아래층 스위치가 켜졌는지 갑자기 대낮 같은 전등 빛이 우리 눈을 부시게 했다. 그리고 그 하얗고 밝은 광선은 순식간에 방 안을 감돌고 있던 그 몽환적인 공기를 일소해 버렸다. 그곳에는 폭로된 마술의 속임수가 흉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었다. 진홍빛 휘장도, 붉은 벨벳 카펫도, 테이블보며 안락의자, 나아가 그 사연 있어 보이던 은촛대까지 어찌나 초라해 보이던지. '붉은 방' 안에는 어느 구석을 뒤져봐도 더 이상 꿈도 환상도, 그림자조차 머물러 있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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