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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텍스트 전문(全文)
승패 (勝敗)
와타나베 온 (渡辺温)
1
형의 이름은 고이치, 동생의 이름은 미노루라고 한다.
고이치는 아버지가 남기고 간 재산과 가업을 물려받아 당주가 되었다. 미노루는 실질적인 업무를 싫어하기도 했거니와 대학 문과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폐병에 걸리는 바람에 늘 바닷가 별장에 머물며 제멋대로 살고 있었다.
형제의 사이는 결코 나쁜 편이 아니었다. 한 달에 한 번은 빠짐없이 형은 아내 사치코와 함께 동생이 원할 만한 선물을 미리 상의하여 챙긴 뒤, 멀리 떨어진 별장까지 놀러 가곤 했다.
그런데 고이치의 아내인 사치코는 어릴 적부터 고이치의 약혼녀로서 형제와 함께 자란 처지였는데, 아직 여학교에 다니던 시절 고등학교 학생이던 미노루와 사랑에 빠져 사랑의 도피까지 한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이 붙잡혀 돌아왔을 때, 고이치는 부모님을 졸라 그 사건을 묵인해 달라고 무마시켰다.
"네 죄는 묻지 않으마. 원래대로라면 사치코를 네게 양보해야 마땅하겠지만, 나는 그녀를 단념할 수가 도저히 없을 것 같아. 부디 부탁이니 손을 떼 다오."
고이치는 동생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미노루와 사치코는 엄격하게 떼어놓아졌고, 시간이 흐르며 두 사람의 열정도 점차 식어 의외로 쉽게 상황이 수습될 수 있었다.
고이치와 사치코의 결혼식 때, 미노루는 이미 폐병에 걸려 해안가로 요양을 간 상태였지만 일부러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우리 셋 다 어릴 적엔 진짜 남매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병수발로 수척해져 쓸쓸한 혈색이었으나, 미노루는 신혼부부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그렇게 말하고는 웃었다.
2
그해 가을로 접어들며 미노루의 병세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래서 사치코는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동생의 간호를 위해 별장에 머물게 되었다. 고이치도 거의 매주 주말이면 자고 갈 요량으로 놀러 왔다.
미노루 입장에서 보자면 형 내외야말로 유일한 피붙이였기에 더할 나위 없이 기뻐했다.
사치코는 숙식을 잊어가며 환자 간호에 정성을 다했다.
환자는 바다를 향해 유리문을 빙 둘러친 방에서, 열기 띤 이불에 파묻힌 가슴을 웅크린 채 바닷바람의 습기로 하얗게 녹슨 천장을 응시하며 마른기침을 콜록거리면서도 사치코의 정성에 깊이 감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병으로 인해 감정이 위태로울 만큼 예민해져 있었기에 때때로 사치코를 애먹였다.
"나는 사치코 씨가 그렇게까지 해주는 게 괴로워.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어. 아무리 생각해도 나 같은 건 군더더기일 뿐이니까."
"자꾸 그런 소리 하면 나 그냥 돌아갈 거예요."
"아아, 돌아가 줘!"
그럴 때면 열이 금세 올랐다. 그리고 그것이 사치코 때문이라며 그녀가 조금이라도 모습을 감추면 미노루는 더욱 흥분하여 간호사나 하녀들에게 호통을 치며 사치코를 불러 달라고 떼를 썼다.
밤이 깊어 얼음주머니를 갈아줄 때도 미노루는 눈을 크게 뜨고 살폈으며, 만약 사치코가 아닌 다른 사람이면 몹시 언짢아했다.
하지만 역시 고이치가 함께 있을 때면 그렇게 어리광을 부릴 수는 없었다. 고이치 앞에서는 참으로 고분고분하게 행동했다.
고이치는 할 일 없이 우울한 일요일을 온종일 동생의 머리맡에 엎드려 동생을 위해 사 온 신간 서적 등을 직접 읽어주며 보냈는데, 문득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면 미노루는 말없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이내 성가신 듯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3
화창한 날씨가 계속되며 날마다 푸른 하늘빛이 짙어져 갔다. 바다는 가장 아득한 섬의 실루엣조차 또렷하게 띄운 채 호수처럼 고요했다.
미노루의 병은 조금 호전된 듯한 기미를 보였다.
그날 오후, 미노루는 오랜만에 햇살이 가득 내리쬐는 마루 끝의 등나무 안락의자로 나와 보았다.
사치코는 마당으로 내려가 돌보는 이가 없어 제멋대로 자라나 쓰러질 듯한 코스모스 무리를 몇 움큼씩 모아 끈으로 묶고 있었다.
"우스운 꽃이야.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거면 이렇게 키를 키우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지."
"나도 거들어 줄까."
"그만둬요. 당신이 코스모스보다 훨씬 비실비실한 주제에."
미노루는 중국 전통 옷 같은 화려한 파자마를 입고 쪼그려 앉은 사치코의 어깨에서 옷깃 쪽으로 은밀히 시선을 보냈다.
"저기."
"왜요."
"내일 형이 오는 날이지."
"네, 살라미를 사 오실 거예요."
"내가 이렇게 일어나 있는 걸 보면 놀라겠지."
"그렇겠죠. 하지만 당신 기분 좋아졌다고 너무 무리하면 안 돼요."
사치코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던 찰나 미노루의 시선을 느끼고 몸을 굳혔다.
"저기."
"왜요?"
"난 행복해."
"……."
"사치코 씨가 딱 한 번 입 맞춰준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운이 나버렸다고 형한테 말해볼까."
"당신은 악당이에요."
"좋을 대로……."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라도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큰 착각이에요."
사치코는 꽃을 팽개치고 일어섰다.
"거짓말! 사치코 씨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 누구보다 나를 가장 사랑하고 있을 게 틀림없어. 한때 잠들어 있던 예전 우리의 사랑이 눈을 뜬 거야. 그렇게나 한결같았던 사람의 애정이 그리 쉽게 사라져 버릴 리가 없으니까. 나는 오랫동안 기다렸어……."
"나, 다 죽어가는 사람 따위와 사랑에 빠지진 않아요!"
사치코는 그 말을 내뱉고는 달려갔다.
미노루는 당황하여 마루에서 잔디밭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맨발인 채로 비틀거리며 기침으로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쳐 불렀다.
"사치 짱! 미안해, 미안해. ……사치코 씨!"
하지만 사치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뒷문을 지나 깎아지른 절벽의 소나무 숲 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미노루는 디딤돌 위의 나막신을 꿰어 신고 그 뒤를 쫓았다.
이내 미노루 혼자만 괴로운 듯 숨을 헐떡이며 돌아왔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어."
미노루는 집안사람들에게 고했다. 미노루는 고통스러워하다가 그 후 곧바로 자리에 누워버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저녁이 되어 이윽고 해변과 소나무 숲의 경치가 애처롭게 붉은빛으로 물들고 해가 저물어가도 사치코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차츰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치코가 들렀을 법한 극소수의 집들과 기차역에 수소문해 보았지만 전혀 알 길이 없었다.
밤을 꼬박 새우도록 사치코는 돌아오지 않았다.
미노루는 미노루대로 극심한 열이 나며 다량의 피를 토했다.
4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촛불이 다 타들어 가는 하얀 초롱을 든 수색대 마을 사람 중 한 명이 창백한 얼굴로 보고를 전해왔다. 사치코가 절벽 아래 바위틈에 떨어져 죽어 있다는 것이었다.
별장 사람들은 몹시 당황했다. 정작 중요한 미노루는 유독 위독한 상태라 그런 소식을 귀에 넣는 것조차 무척 위태로워 보였고, 어린 하녀나 간호사뿐이라 그야말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선 고이치에게 알려야 했지만, 하필 그날은 고이치가 오는 날이어서 전보를 쳐보았자 엇갈리기만 할 것이라 여겨 보류되었다.
검시는 아침 중에 끝났다. 사치코의 시신은 별장에서 3정(町)도 떨어지지 않은 절벽의 바로 아래, 반쯤 썰물이 되기 시작한 바닷물에 잠긴 채 가로누워 있었다. 이마와 가슴을 날카로운 바위 모서리에 부딪힌 것이 치명상인 듯했다. 명백히 익사는 아니었다.
절벽의 높이는 오장(五丈) 정도였는데, 3분의 1쯤 되는 곳에 자그마한 돌출부가 있었고 거기서 자라난 작은 소나무 가지에 그녀의 파자마 소매가 찢겨 바람에 나부끼며 걸려 있었다. 떨어지던 도중 그 돌출부에 부딪혀 거기서 한 번 튕겨 나간 뒤 곤두박질치듯 추락한 모양이었다.
사후 15~16시간이 경과해 있었으나, 공교롭게도 암초투성이인 갯바위라 여름철도 아니었고 고기잡이 소형 배가 돌아다니는 곳도 아니어서 쉽게 사람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최초로 발견한 마을 사람은 헛된 수색에 지쳐버린 채 그곳을 지나가다 문득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새벽의 어스름한 빛 속에 팔랑팔랑 나부끼는 검은 바탕에 새빨간 자수가 수놓아진 파자마의 한쪽 소매에 놀랐던 것이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짐작할 만한 마땅한 이유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담당 관리들은 간단히 과실사로 단정 지었다.
사치코의 시신은 우선 별장으로 옮겨져 새하얀 잠자리에 눕혀진 채 고이치의 도착을 기다렸다.
그런데 언제나 오기로 정해져 있던 정오 기차에 고이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대신 기차역으로 마중 나갔던 사람들이 허탕을 치고 돌아오기보다 한발 앞서 전보가 도착했다.
사정 여의치 않음 내일 감 — 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당황한 사람들은 즉시 시급 전보로 답신을 보냈다.
고이치는 막차를 타고 왔다.
"입찰이 있어서 늦었어."
겨울용 두꺼운 인버네스 코트의 깃을 세우고 입술을 떨면서 마중 나온 자에게 그렇게 말했다.
사치코의 시신은 이미 상처 부위를 붕대로 모두 감싸고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고이치는 차가운 아내의 얼굴에 볼을 비비며 눈물지었다.
승패_와타나베 온_추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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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장례식을 치르고 난 뒤, 고이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다시 한번 별장으로 돌아왔다. 당분간 조용히 휴양하고 싶기도 했고, 또 하나는 사치코가 마지막 날까지 기거하던 방에서 유품들 사이에 둘러싸여 사랑하는 아내의 자취를 아끼고 싶은 마음에서였으리라.
미노루는 그 이후로 완전히 쇠약해져 버려 이제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정신만은 비교적 또렷했다.
비가 내리고, 갑자기 겨울이 찾아온 듯 몹시 스산한 어느 날 밤이었다.
고이치는 동생과 나란히 잠자리에 들었으나, 거칠어진 파도 소리가 귓가를 맴돌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머리맡의 스탠드램프에는 사치코가 짠 구슬이 달린 레이스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형."
잠든 줄 알았던 미노루가 돌연 불렀다.
"왜 그래, 얼음이 필요하니?"
"아뇨, ……형, 형은 사치코 씨가 정말 실수로 떨어져 죽었다고 믿고 있습니까?"
"왜? 그 밖에 달리 생각할 도리가 없지 않니."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그녀에겐 자살할 만큼의 불만은 없었을 거다. 그녀는 힘껏 나를 사랑했고, 또 나에게 사랑받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어."
"거짓말이야. 그 사람이 사랑했던 건 형이 아니었어."
"너 설마, 사치코가 스스로 뛰어내려 죽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두 사람의 목소리는 깊은 밤의 공기 속으로 얽혀 들었다.
"그게 아니야. 사치코 씨는 살해당한 거야."
"뭐라고!"
"사치코 씨는 떠밀려 떨어진 거야. ……내가 사치코 씨를 밀어 떨어뜨렸어."
"쉿! 쓸데없는 소리 마라. 농담이라도 간호사가 듣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진다."
"누가 농담으로 이런 소리를 하겠어. 전부 다 털어놓지."
"부탁이야. 좀 더 조용한 목소리로 말해다오."
그래서 미노루는 형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나의 사치코 씨를 향한 애정은, 우리가 갈라선 이후로도 조금도 옅어지지 않았어. 아무리 포기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독여 보았자 결국 헛수고였지. 그리고 형을 원망했어. 우리 같은 처지에 놓여, 설령 사치코 씨가 형의 약혼녀였다고 한들 두 사람이 서로 모든 것을 내던지고 사랑하는 사이인데 그것을 떼어놓을 권리가 형에게 어디 있다는 말인가! 형이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건 정말이지 터무니없고 막무가내인 핑계일 뿐이야. 나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사치코 씨를 내 사람으로 만들고야 말겠다고 각오했었지.
하지만 슬프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당사자인 사치코 씨의 마음이 변한 것인지 허무하게 형의 아내가 되어버렸지. 나는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 마음속으로 복수를 맹세했어. 설마 죽이려고까지 계획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나 의리와 인정을 모르는 형 내외라면 그 절조 없는 형수를 상대로 과감히 불륜을 저지른다 한들 내 양심에 부끄러울 것은 조금도 없을 거라 생각하며 몰래 기회를 기다리기로 했어. 이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비열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 틀림없지만, 태생적으로 소심한 데다 병 때문에 한층 더 비굴해진 심성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거야. 형 내외가 결혼 후 둘이서 함께 나를 병문안 올 때마다 다정한 부부 사이를 보란 듯이 과시하는 바람에 내 치졸한 정욕은 갈수록 잔혹하게 채찍질 당했지.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어. 하지만 사치코 씨는 내가 생각했던 것 같은 헤픈 여자는 아니었는지 그런 기회는 도무지 올 것 같지 않았어. 그러는 사이 내 병은 점차 악화되었지. 내 천벌 받을 흉계 그 자체가 병세를 악화시킨 유력한 원인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어. 초가을에 접어들며 내가 기거하는 데조차 자유를 잃을 지경이 되자, 사치코 씨는 며칠씩 묵어가며 간호를 해주러 왔지.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제는 더 이상 단순한 정욕 따위의 만만한 것이 아니라, 한층 집요하고 순전한 복수의 형태로서 비록 자포자기가 될지언정 이 목적을 달성해야만 한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어.
나는 마침내 어느 날 밤, 주변에 사치코 씨 외에 아무도 없는 때를 틈타 사치코 씨를 향해, 내가 오랜 세월 동안 단 한순간도 사치코 씨를 잊은 적이 없으며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를 눈물로 털어놓았어. 그런데 내가 장황하게 하소연하는 걸 묵묵히 듣고 있던 사치코 씨는, 다짜고짜 나의 열병으로 바스락하게 마른 입술에 입을 맞춘 게 아니겠어? 그리고—'미안해요. 하지만 지금은 나 당신보다 고이치 씨가 더 좋은걸요.'라고 말하는 거야.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다시 한번 말했어. —'그건 나도 잘 알아. 게다가 나는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야. 결코 형을 버리고 옛날로 돌아가 달라는 게 아니야. 오히려 이렇게 사치코 씨의 간호를 받으며 죽을 수 있는 것을 무엇보다 기쁘게 생각하고 감사하고 있을 정도지.
하지만 그래서 말인데, 적어도 그 이상의 억지스러운 소원이라면 비록 찰나일지라도 사치코 씨가 내 온 세상을 건 연인이라고 믿으면서 저세상으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은 거야. 제발 부탁이니까 제발 다시 한번 옛날처럼 연인인 척 행동해 주지 않겠어? 물론 척을 해달라는 것이니 그저 겉모습만 꾸며내면 그만이야. 당연히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머지않아 흙으로 변해버릴 내 몸과 함께 사라져 버릴 비밀이지. 부디 이 철없고 부질없는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려나.'라고.
사치코 씨는 한참을 궁리하는 기색이더니 이윽고 그 눈망울에 커다랗고 아름다운 눈물방울이 맺히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요. ……나 사실은 역시 누구보다 미노루 씨를 좋아했어. 당신이야말로 나의 단 한 명의 연인이에요.'라고 말했지. 그리고 부드럽게 나를 안고 몇 번이고 내게 입을 맞춰주었어.
내 마음은 갑자기 묘해졌어. 사치코 씨의 그 태도가 과연 연극인지 진심인지 나는 판단이 서질 않았지. 사치코 씨와 나는 그 후로 줄곧 남의 눈을 피해 서로를 애무했어. 애초 내 계획은 두 사람의 밀회를 형에게 생생하게 보여주려는 속셈이었는데, 나는 거꾸로 형을 상대로 마치 간부(姦夫)처럼 조심하기 시작했지.
나는 한심하게도 내가 직접 써 내려간 연극 같은 사랑에 철없이 빠져들고 만 거야.
나는 소년 시절의 사랑을 새로이 복습하기 시작했어. 나는 즐거웠지. 그리고 점점 기운마저 차리게 되었어. ……그랬는데도, 나는 사치코 씨를 죽이게 되고 말았어.
그날도 특별히 평소와 다를 바는 없었는데, 뜰눈앞에서 그저 아주 잠깐 마음을 놓은 틈에 무심코 입을 놀린 농담이 뜻밖에 사치코 씨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어.
사치코 씨가 뜬금없이 달아나기 시작해서, 뭣 때문인지도 모르고 나도 그 뒤를 쫓아갔지. 사치코 씨는 소나무 숲 끝 절벽 낭떠러지에 서서 울고 있었어. 사치코 씨는 내 얼굴을 보더니 몹시 히스테릭해져서는 정말이지 증오스럽다는 듯이 소리쳤어. —'비겁자! 죽어버려! 누가 당신 따위를 사랑한대! 당신 스스로 나더러 연극을 해달라고 부탁했잖아. 그걸 이제 와서 적반하장이라니, 정말 악당이 따로 없네!'
나는 절망의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쳐져서 눈앞이 캄캄해졌어. 그래, 연극이었던 거야! ……내가 꾸며낸 천박한 연극이었던 거야! 나는 사치코에게 사과했어. 앞으론 절대 이렇게 주제넘은 짓은 하지 않을 테니 제발 조금만 더 참고 이 연극을 계속해 달라고 애원하고 매달렸어. 하지만 사치코는 냉혹하게 외면하고 승낙하지 않았지.
나는 거기서 결국 사치코에게 이렇게 말했어. —'좋아, 그럼 어쩔 수 없지. 이 연극의 결말은 수정한다. 변심한 얄미운 것! 내가 널 죽여버리겠어!'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끝맺기가 무섭게 새파래져서 옴짝달싹 못하는 사치코 씨를 절벽 위에서 밀어 떨어뜨려 버린 거야. 찰나의 순간, 나는 사랑하는 여자를 영원히 남의 손에 넘기지 않기 위해서는 내 손으로 죽여버리는 수밖에 없었어……."
미노루는 그리고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고이치는 말없이 이불을 뒤집어썼다.
바람 섞인 비가 덧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6
잠시 후, 고이치는 이불에서 얼굴을 내밀더니 차분한 어조로 미노루에게 말을 건넸다.
"미노루, 네 이야기는 거짓이 아닐 거라 생각한다."
미노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노루, 사치코를 죽인 건 적어도 네가 아니야. 과연 너는 죽일 작정으로 밀어 떨어뜨렸을지도 모르지만, 사치코는 추락하던 도중 소나무에 걸려 기절해 버렸단다. 그때는 아직 죽지 않았을뿐더러 기껏해야 가벼운 찰과상 정도만 입었을 테지.
그걸 너희들 뒤를 밟았던 한 남자가 사치코의 비명에 놀라 그곳으로 달려가 보니 이미 네가 달아나버린 뒤였지만 절벽 아래에 사치코가 걸려 있는 게 보였으므로, 곧장 어딘가로 가서 밧줄을 가져와 그걸 의지해 사치코가 있는 곳으로 내려갔지.
그리고 그 남자는 사치코를 구할 줄 알았던 예상과 달리, 거기서 한참을 망설이는 눈치더니 무슨 생각에서인지 다시 사치코의 몸을 아래로 걷어차 떨어뜨린 거란다. 그 남자라는 건 바로 나일세.
……어째서 또 내가 거기서 그런 식으로 사치코를 죽여야만 했느냐고? ……나는 처음부터 너희들 사이를 신용하지 않았어. 우리들처럼 서로 얽힌 관계에 놓여서 전혀 의심을 품지 않고 넘어가는 건 불가능하니까. 나는 점차 그 의심을 무거운 짐으로 느끼기 시작했지.
나는 겉으로는 평정을 가장하면서 사냥개처럼 너희들 주위를 코 킁킁거리며 맴돌았어. 하지만 진실로 너희 사이에 아직 아무 일도 없었던 건지, 아니면 너희들이 배우로서 한 수 위였던 탓인지 좀처럼 꼬리 비슷한 것도 잡을 수가 없었지. 나는 스스로도 우스울 만큼 묘한 초조함을 견딜 수 없게 되었어. 마치 처음부터 너희들의 불륜을 벼르고 있다가 오직 그 이유 하나만으로 너희들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계획적인 결혼을 감행하기라도 한 듯한 기분마저 들었지.
……그런데 이윽고 네 병이 깊어지자, 사치코는 며칠씩 묵으며 간호하러 가고 싶다고 말을 꺼냈지. 나는 당장 찬성했어. 나는 하녀 중 한 명을 스파이로 써서 너희들을 감시하게 했어.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어떻게든 너희들이 남의 눈을 피해 입을 맞추거나 껴안거나 하는 기색이 있는 것 같다는 보고가 들어왔지. 물론 이것이 네가 꾸며낸 연극이며 가엾은 사치코는 그저 다 죽어가는 너에 대한 연민 때문에 마음에 없는 역할을 연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 따위는 알 턱이 없었어.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너희들의 부정한 짓거리를 목격하고 싶었지. 그래서 그날은 금요일이었지만, 일부러 아무도 모르게 하루 일찍 출발해서 왔어. 나는 먼저 네 병실이나 뒷마당이 훤히 내다보이는 소나무 숲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쌍안경으로 동태를 살폈지. 마침 마당 앞과 마루 위에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너희들의 모습이 비쳤어.
너희들은 이내 무언가 한두 마디 언쟁을 벌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사치코가 달아나기 시작했어. 너도 허둥지둥 그 뒤를 쫓았지.
사치코는 뒷문을 열고 내가 숨어 있는 소나무 숲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왔어. 나는 너희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재빨리 소나무 숲 깊숙이 숨었지. 그런데 잠시 후 절벽 쪽에서 사치코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어. 이어서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네가 몹시 당황하며 숨을 헐떡거리며 모습을 드러내더니 다시 별장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 나무 틈새로 보였어.
나는 즉시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사치코의 비명이 들린 쪽으로 뛰어갔지.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사치코는 높은 절벽 중간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게 아니겠니. 나는 큰 소리로 구조를 요청하려다 그만두었어. 그리고 서둘러 소나무 숲을 빠져나와 가장 가까운 농가의 헛간에 숨어 들어가 마침 있던 우물 밧줄 한 다발을 안고 되돌아왔지.
나는 그 밧줄을 가까운 나무뿌리에 묶고 거기에 매달린 채 사치코가 있는 곳까지 무사히 내려갈 수 있었지만, 막상 기절한 사치코의 얼굴을 보니 갑자기 마음이 변했어.
—'일부러 이런 부정한 아내를 구해주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여자를 죽이고 그 간부를 살인죄로 빠뜨려 버리면 그걸로 된 게 아닌가. 미노루 자신이 이미 그녀를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쉬운 이야기는 없다. 여기서 그녀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오히려 신의 뜻을 무시하는 거나 다름없다.'
나는 그렇게 각오를 다지고 힘껏 그녀의 몸을 걷어찼지.
그녀는 파자마 한쪽 소매를 소나무 가지에 남긴 채 곤두박질치듯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 위로 떨어져 갔어. 나는 그 파자마 소매를 거두어 절벽 위에 올려두어, 마치 거기서 사치코와 너 사이에 격투라도 벌어진 것처럼 꾸며서 당국의 발견을 앞당길까도 생각했지만, 어설프게 그런 장난을 쳤다가 너 스스로 제삼자가 개입했음을 눈치채면 도리어 곤란하겠다 싶어 그만두었어.
나는 그러고 나서 밧줄을 원래 있던 농가에 몰래 돌려놓고 곧바로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지. 기차역에서는 내릴 때도 탈 때도 미리 평소의 나와 복장을 다르게 하고 검은 안경까지 쓰고 있었기 때문에 역무원들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지.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사치코 앞의 수신인으로 별장으로 늦는다는 전보를 쳤어. 결코 알리바이는 될 수 없겠지만 다소 혼동을 줄 효과가 없지도 않으니까.
그리고 다음 날이 되어 사치코가 변사했다는 전보를 접하고 허둥지둥하는 모습으로 별장에 찾아왔어. 그런데 너는 거의 의식 불명일 정도의 고열로 신음하고 있었지. 나는 네가 전날 마루 끝에서 사치코와 말다툼을 하고 그 뒤를 쫓았다는 혐의로 사치코 살해 용의자로 구속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랬더라면 나는 너와 사치코의 관계를 설명하여 완곡하게 네 유죄를 입증하는 역할을 할 참이었어.
그런데 사치코는 과실사로 단정되어버리고 말았지. 나는 조금 조잡하더라도, 예컨대 파자마 소매를 절벽 끝에 둔다든지 하여 명백하게 타살의 증거를 날조해 두었어야 했어. 나는 적잖이 실망했단다.
하지만 나는 다시 한번 고쳐 생각했지. ……빈사 상태의 환자를 살인죄에 빠뜨려 보았자, 게다가 그 자신이 그걸 분명히 의식하고 있는 경우라면 사실상 아무런 보람도 없는 짓이 아닐까. 그보다 오히려 사치코의 남편인 내가 그의 범죄를 속속들이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뜻밖에도 완수하지 못한 목적을 대신 이루어주었다고 털어놓는 쪽이 훨씬 효과적인 계획이 아닐까 하고……."
미노루는 낮은 신음 소리를 냈다.
"형, 사치코 씨는 그저 연극을 했을 뿐이야. 사치코 씨는 형만을 진심으로 사랑했어. 그걸 형은 알지도 못하고……."
미노루는 격렬하게 기침을 했다. 그리고 하얀 베개 위로 새빨간 피를 토했다.
"미노루,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런 의미가 아니야. 내 참, 미노루야……."
고이치는 동생의 등을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며 그렇게 말했다.
7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나 미노루가 죽었다. 고이치는 그 불길한 별장에 머무는 것을 견딜 수 없게 되어 도쿄로 철수하기로 했다. 그래서 고이치는 여러 가지 도구들을 정리했다. 그러자 미노루가 생전에 사용하던 책상 서랍 안에서 엉성한 크라프트지 봉투에 든 편지 같은 것이 나왔다.
봉투 겉면에는 형님께 —미노루 옆에 비(秘)라고 적혀 있었다. 고이치는 그것을 한 손에 들고 잠시 주저했다. 고이치는 그대로 불 속에 던져버릴까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큰맘 먹고 봉투를 뜯었다.
형님. 이 성질 고약한 장난을 용서해 주세요. 형님이 이 편지를 주저하며 뜯으셨다면, 형님은 정말로 사치코 씨나 저를 사랑해 주셨다고 믿겠습니다. 그 형님의 마음에 기대어, 신께 맹세코 마지막 진실을 말씀드립니다. 사치코 씨가 사랑했던 건 형님이 아니라 역시 저였습니다. 그날 사치코 씨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몹시 히스테릭해져 있었고, 그 절벽 위에서 제가 사치코 씨를 붙잡자 사치코 씨는 울면서 저와 함께 죽어달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형님을 사랑하기도 하거니와, 아무리 제가 오래 살지 못할 몸이라 해도 사치코 씨의 변덕스러운 감상에 편승해 동반 자살 따위를 하는 것은 싫었기 때문에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사치코 씨는 다짜고짜 무언가 소리치는가 싶더니 몸을 던져 절벽 아래로 뛰어들어 버렸습니다. 저는 사치코 씨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치코 씨를 죽인 것은 형님입니다!
그럼 왜 제가 제 손으로 사치코 씨를 죽였다느니 하는 말을 꺼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단지 형님이 죽은 사치코 씨의 추억이나 유품에만 애착을 갖는 모습이 제게는 몹시 애처롭게 여겨짐과 동시에 견딜 수 없을 만큼 반감을 느끼게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형님이 없는 세상에서 사치코 씨와 단둘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고이치는 성냥을 그어 그 편지에 불을 붙였다.
"그렇군. 미노루는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사치코를 자기 곁에 두고 싶었던 건가. 미노루에게서 사치코를 되찾아온 것은 두고두고 내 실수였어."
고이치는 툇마루로 나가, 아무도 없는 바다 풍경을 바라본 채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 소리쳐 불렀다.
"그렇지만 미노루야, 나는 그때의 광경을 처음부터 보고 알아. 부끄러운 일이지만, 너희들 뒤를 밟으며 엿보고 있던 나는 바로 옆 나무 그늘에서 모조리 다 보아버렸단다. 사치코는 네게 몰려 절벽 끝까지 나갔는데, 거기서 더 집요하게 쫓아드는 너를 피하려던 찰나에 발을 헛디뎌 추락한 거야. 너는 너무 놀란 나머지 사치코의 생사를 확인하지도 않고 도망쳐 돌아오지 않았니. 사치코는 그 절벽 중간의 돌출부에 그저 살짝 소매가 걸렸을 뿐, 그대로 곤두박질치고 만 거야. 네가 그녀를 죽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결코 그녀를 죽이지 않았어. 하지만 어쨌든 이 승부는 아무래도 네가 이긴 것 같네. ……안심하고 잠들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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