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27일 월요일

(소설 원고) [호반정 사건_에도가와 란포] 전체 수록 [일본 추리 미스터리] 에도가와 란포 '호반정 사건' - 호젓한 여관을 발칵 뒤집은 기이한 살인극 (원아나의 책 읽는 TV 제공)



 


호반정 사건 (湖畔亭事件)
저자: 에도가와 란포 (江戸川 乱歩)

​제1장
​독자 여러분은 몇 해 전 H산 속 A호숫가에서 일어난, 세상에서도 기이한 살인 사건을 혹시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외딴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도심의 여러 신문에도 보도될 만큼 대단히 기괴한 사건이었습니다. 어떤 신문은 'A호반의 괴사건'이라는 제목으로, 또 어떤 신문은 '시체 분실'이라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꽤 비중 있게 다루었습니다.
​주의 깊은 독자 여러분은 이미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른바 그 'A호반의 괴사건'은 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끝내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범인은 물론이고 기이하게도 피해자가 누구인지조차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이미 두 손을 들고 포기한 상태입니다. 그토록 떠들썩하게 사건을 대했던 호숫가 마을 사람들조차 어느새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합니다. 이대로라면 사건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언제까지나 미해결 상태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넓은 세상에 단 두 사람, 그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는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바로 저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왜 진작 그 사실을 발표하지 않았느냐고 독자 여러분은 저를 꾸짖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깊은 사정이 있습니다. 부디 저의 고백을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그동안 얼마나 뼈저린 인내심으로 침묵을 지켜왔는지 부디 헤아려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제2장
​자,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저는 우선 저 자신의 평범하지 않은 성향에 대해, 그리고 제 스스로 '렌즈광'이라 부르는 기묘한 취미에 대해 말씀드려야만 합니다. 독자 여러분은 으레 그 신기한 사건이란 대체 무슨 일이며, 결국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이야기의 결말을 서둘러 묻고 싶으시겠지만, 이 한 편의 이야기는 앞서 말씀드린 저의 기묘한 취미부터 이야기하지 않으면 너무나 엉뚱하고 믿기 힘든 것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게다가 저로서는 제 자신의 비정상적인 성향에 대해서도 조금 자세히 털어놓고 싶습니다. 부디 잠시 동안, 어리석은 자의 푸념이라 여기시고 저의 보잘것없는 신세 한탄을 너그럽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웬일인지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음침하고 내성적인 아이였습니다. 학교에 가도 신나게 뛰어노는 동급생들을 구석에서 부러운 듯 곁눈질로 쳐다만 보았고, 집에 돌아오면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기는커녕 제 방으로 쓰던 별채의 작은방에 홀로 틀어박혔습니다. 아주 어릴 적에는 여러 장난감을, 조금 커서는 앞서 말씀드린 '렌즈'를 마치 단짝 친구라도 되는 양 유일한 놀상대로 삼으며 지냈습니다.
​저는 참으로 이상하고 기분 나쁜 아이였습니다. 생명이 없는 장난감들에게 마치 살아있는 생물에게 하듯 말을 걸기도 했습니다. 때에 따라 그 상대는 인형이기도 했고, 강아지 모형이기도 했으며, 환등기(슬라이드 영사기) 속 다양한 인물들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마치 연인에게 말을 건네듯, 상대의 대답까지 대신 연기하며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누곤 했습니다. 어느 날은 그 모습을 어머니에게 들켜 크게 혼이 난 기억도 있습니다. 그때 웬일인지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저를 꾸짖으면서도 그녀의 두 눈이 무언가에 겁을 먹은 듯 커다랗게 뜨여 있던 것을 어린 마음에도 참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저의 관심사는 평범한 장난감에서 환등기로, 환등기에서 다시 렌즈 그 자체로 점차 옮겨갔습니다. 작가 우노 고지(宇野浩二) 씨였던가요, 누군가의 글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만, 저 역시 벽장 속 어둠 속에서 환등기를 비추며 노는 아이였습니다. 그 캄캄한 벽 위로 악몽처럼 짙은 색채의, 그러면서도 태양 빛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광선으로 다양한 그림이 나타날 때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매혹적이었습니다. 저는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기름 냄새나는 벽장 속에서 알 수 없는 대사를 중얼거리며 하루 종일 환등기 그림에 푹 빠져 지내곤 했습니다. 그러다 어머니에게 들켜 벽장 밖으로 끌려 나올 때면, 달콤한 꿈의 세계에서 끔찍한 현실 세계로 억지로 끌려 내려온 듯한 기분이 들어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습니다.

​그런 환등기 광신도였던 저도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 되자 조금 부끄러워졌는지 벽장에 들어가는 짓은 그만두었고, 애지중지하던 환등기도 언제부턴가 망가뜨려 버렸습니다. 하지만 기계는 망가졌어도 '렌즈'만은 남았습니다. 제 환등기는 평범한 장난감 가게에 있는 것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대형이었기에, 렌즈 역시 지름이 6센티미터 정도 되는 아주 두껍고 묵직한 물건이었습니다. 그 두 개의 렌즈는 문진(종이누르개) 대신으로 쓰이며 그 후로도 오랫동안 제 책상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루는 원래 늦잠을 자는 버릇이 있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아무리 깨워도 건성으로 대답만 하며 따뜻한 이불 속을 나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등교 시간을 놓치고 나니 학교에 가는 것 자체가 너무나 싫어졌고, 어머니에게 꾀병까지 부려가며 하루 종일 이불속에서 뒹굴었습니다. 병이 났다고 해버렸으니 좋아하지도 않는 죽을 먹어야 했고, 무언가 하고 싶어도 이불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늘 그렇듯 새삼스레 학교에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내심 제 기분에 맞춰 방 안을 어둡게 하려고 일부러 덧문을 굳게 닫아 두었습니다. 그래서 문틈이나 옹이구멍을 통해 들어온 바깥 풍경이 창호지에 거꾸로 비치고 있었습니다. 크고 작은, 선명하거나 흐릿한 수많은 같은 풍경들이 전부 거꾸로 맺혀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누워서 그것을 바라보다가 문득 사진기 발명가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 옹이구멍의 영상처럼 사진에도 색을 입힐 수 없을까' 하는, 아이들이나 할 법한 꿈같은, 그러나 스스로는 제법 과학자다운 공상에 빠져들었습니다.

​이윽고 창호지에 맺힌 그림자가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자 이번에는 새하얀 햇빛이 옹이구멍과 문틈을 통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뚜렷한 이유 없이 학교를 쉬었다는 죄책감에 저는 두더지처럼 햇빛을 두려워했습니다. 형언할 수 없이 불쾌한 기분으로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눈앞에 어른거리는 수많은 노란색, 보라색 고리들을 달콤하면서도 꺼림칙한 기분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독자 여러분, 제 이야기가 살인 사건과는 거리가 멀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질책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이런 식의 화법은 제 오랜 버릇입니다. 게다가 이런 어린 시절의 추억조차도 그 살인 사건과 전혀 무관한 일은 아니니까요.

​어쨌든 저는 다시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보니 제 얼굴 바로 아래 톡 떨어지듯 빛나는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옹이구멍으로 들어온 햇빛이 창호지의 찢어진 틈을 통과해 다다미 위에 둥근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방 전체가 어두웠던 탓도 있겠지만, 저는 그 둥근 빛이 너무나도 새하얗고 눈부시게 빛나는 것이 조금 신기했습니다. 저는 무심코 근처에 굴러다니던 그 렌즈를 집어 들어 둥근 빛줄기 위에 대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장에 비친 괴물 같은 그림자를 본 순간, 헉하고 놀라 하마터면 렌즈를 떨어뜨릴 뻔했습니다. 그곳에 비친 영상은 그토록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비록 흐릿하긴 했지만 천장에는 아래쪽 다다미의 결이 골풀 한 가닥 굵기가 무려 60센티미터 크기로 확대되어 작은 먼지까지 선명하게 비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렌즈의 이 기묘한 작용에 공포를 느끼는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저의 렌즈 장난이 시작된 것은.
​저는 마침 방에 있던 손거울을 가져와 렌즈의 그림자를 굴절시켜 보았습니다. 다다미 대신 여러 가지 그림이나 사진 등을 벽에 비추어 보았고, 그것은 훌륭하게 성공했습니다. 나중에 상급생이 되어 물리 시간에 그와 똑같은 원리를 배우고 또 훗날 유행했던 실물 환등기 등을 알게 되면서 그때 저의 발견이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만, 당시에는 무슨 대단한 발명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에 그 후로는 오직 렌즈와 거울만 가지고 노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저는 틈만 나면 두꺼운 도화지나 검은 천 등을 사 와서 여러 가지 모양의 상자를 만들었습니다. 렌즈와 거울의 수도 점점 늘어났습니다. 어느 때는 긴 U자형으로 굴절된 암상자를 만들고 그 안에 여러 개의 렌즈와 거울을 장치하여 불투명한 물체 너머를 마치 아무 장애물도 없는 것처럼 투시해 보는 장치를 만들어 놓고는 '투시술'이라며 가족들을 신기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 어느 때는 마당 가득 오목거울을 설치해 놓고 그 초점으로 모닥불을 피우기도 했으며, 집안 곳곳에 다양한 형태의 암상자를 설치하여 안방에 가만히 앉아서도 현관에 온 손님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현미경이나 망원경도 제 나름대로 만들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작은 거울의 방을 만들어 그 안에 개구리나 쥐 등을 넣고 그들이 자신들의 모습에 겁에 질려 떠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한 적도 있습니다.
​이러한 저의 기묘한 취미는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이어졌습니다만, 상급 학교에 진학하면서 하숙 생활을 하게 되고 공부도 바빠지면서 어느샌가 렌즈 장난도 잊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예전보다 몇 배나 강렬한 매력으로 다시 부활한 것은,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딱히 직장을 구해야 할 형편도 아니어서 그저 목적 없이 빈둥거리며 놀고 지내던 시절이었습니다.

​제3장
​여기서 제가 가진 어떤 끔찍한 병적인 버릇을 고백해야겠습니다. 소년 시절의 음침한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했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코밑에 의젓하게 짧은 수염까지 기른 다 큰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남의 비밀을 몰래 엿보는 일에 더할 나위 없는 쾌감을 느끼는 인간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이런 성향은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있는 것이지만, 제 경우는 그것이 극단적이었습니다. 게다가 더욱 끔찍한 것은 그 엿보기의 대상이 남에게 말하기조차 부끄럽고 기괴하며 불쾌한 것들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느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그 친구의 아주머니뻘 되는 사람 중에도 몰래 엿보기를 즐기는 병적인 성향을 가진 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마침 뒷마당 판자 울타리 너머로 이웃집 방안이 훤히 보이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심심할 때마다 그 판자 울타리의 옹이구멍을 통해 이웃집의 동정을 엿보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별달리 하는 일도 없는 은퇴한 노인네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마치 소설책이라도 읽는 기분으로 이웃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손님이 몇 명 왔고 그 손님은 어떤 옷차림을 하고 있었으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저 집에서 아이가 태어나 곗돈을 타서 무엇무엇을 샀는지, 식모가 찬장을 열고 무엇을 주워 먹었는지 등등. 자기 집안일보다 더 자세하게, 심지어 이웃집 주인들조차 모르는 일까지 샅샅이 관찰해서는 제 친구들에게 이야기해 주곤 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할머니가 손주들에게 신문 연재소설을 읽어주듯이 말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아, 세상에는 나와 비슷한 병을 앓는 사람이 또 있구나' 싶어 바보 같지만 내심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제 병은 그 아주머니의 것보다 훨씬 더 질이 좋지 않은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제가 가장 먼저 했던 장난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저는 제 방과 식모방 사이에 앞서 말한 렌즈와 거울로 만든 다양한 형태의 암상자를 설치하여, 잘 익은 과일처럼 통통한 스무 살 식모의 비밀을 엿보려고 계획했습니다. 엿보기라고는 하지만 제 방식은 지극히 겁이 많고 간접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식모방에서 눈에 띄지 않는 곳, 예를 들어 천장 구석 같은 곳에 제가 발명한 거울과 렌즈 장치를 몰래 설치합니다. 그리고 천장 뒤의 빈 공간을 통로 삼아 암상자로 빛을 유도하여, 식모방 거울에 비친 영상이 제 방 책상 위 거울에 그대로 나타나도록 장치한 것입니다. 잠수함 안에서 해상을 내다보는 잠망경, 바로 그 장치와 동일한 원리입니다.

​그렇게 해서 무엇을 보았냐고요? 대부분은 여기서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종류의 일들입니다만, 예를 들면 스무 살짜리 식모가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트렁크 밑바닥에서 편지 몇 통과 사진 한 장을 꺼내어 사진을 한 번 보고 편지를 읽고, 다시 편지를 읽고 사진을 바라보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 때는 그 사진을 자신의 풍만한 가슴에 꼭 껴안고 눕는 모습을 보며 '아, 저 아이에게도 연인이 있구나' 하고 깨닫는 식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겉보기와 달리 그녀가 눈물이 아주 많은 성격이라는 점, 짐작했던 대로 주전부리가 심하다는 점, 잠버릇이 고약하다는 점, 그리고 훨씬 더 노골적이고 다양한 광경들이 제 가슴을 뛰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시도에 맛을 들이면서 제 병적인 버릇은 눈에 띄게 심해졌습니다. 하지만 식모 외에 다른 가족들의 비밀을 캐는 것은 묘하게 불쾌했고, 그렇다고 이 장치를 다른 집으로까지 확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한동안 꽤나 난감했습니다. 그러다 이윽고 저는 하나의 묘안을 떠올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렌즈와 거울 장치를 휴대하기 편하게 조립식으로 만들어서 여관이나 찻집, 혹은 요정 같은 곳에 가지고 가 즉석에서 엿보기 도구를 설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렌즈의 초점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해야 했고, 암상자를 최대한 가늘고 작게 만들어 눈에 띄지 않게 세공해야 하는 등 여러 가지 난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 저는 날 때부터 그런 정밀한 수작업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에, 며칠 동안 끈질기게 그것에만 매달린 끝에 마침내 나무랄 데 없는 휴대용 엿보기 안경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가는 곳마다 사용했습니다. 그럴싸한 구실을 만들어 친구 집에 묵으면서 주인의 방에 이 장치를 설치하여 격정적인 광경을 엿본 적도 있습니다. 그런 비밀 관찰의 기록만 적어 내려가도 족히 소설 한 편은 나올 것 같습니다만, 서론은 이쯤에서 멈추고 드디어 본론인 살인 사건의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초여름의 일입니다. 저는 당시 신경쇠약증을 앓고 있었고 도심의 번잡함이 견디기 힘들어 가족들의 권유에 따라 피서를 겸해 H산 속 A호숫가에 있는 '호반정(湖畔亭)'이라는 묘한 이름의 여관에 홀로 며칠 묵게 되었습니다. 피서철로는 조금 이른 시기라 넓은 여관은 사람의 기척 없이 텅 비어 있었고, 맑은 산 공기가 묘하게 스산하게 느껴졌습니다. 호수에서의 뱃놀이도, 숲 속 산책도 익숙해지니 영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도시로 돌아가기도 왠지 마음이 내키지 않아, 저는 여관 2층 방에서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문득 떠올린 것이 바로 그 엿보기 안경이었습니다. 다행히 습관이 된 탓에 그 도구는 제 트렁크 바닥에 얌전히 놓여 있었습니다. 쓸쓸하다고는 해도 여관에는 몇 팀의 손님이 있었고, 여름 성수기를 대비해 새로 고용한 하녀들도 열 명 가까이 있었습니다.
​"자, 그럼 오랜만에 장난을 좀 쳐볼까."
​저는 인적이 드물어 들킬 염려도 없다는 사실에 쾌재를 부르며,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그 장치 조립에 착수했습니다. 과연 제가 그곳에서 무엇을 엿보려 했을까요? 그리고 그 엿보기를 통해 뜻하지 않게 어떤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을까요? 이제부터 이 이야기의 진정한 본론이 시작됩니다.

​제4장
​호반정은 H산 꼭대기에 있는 유명한 호수 남쪽 고지대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길쭉한 건물의 북쪽은 곧바로 호수의 절경과 마주하고 있었고, 남쪽은 호숫가 작은 마을을 사이에 두고 아득히 첩첩산중의 산맥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제 방은 호수와 마주한 북쪽 끝에 있었습니다. 방 앞에는 테라스 느낌이 나는 넓은 퇇마루에 방 하나당 두 개 정도의 비율로 등가구가 놓여 있었고, 그곳에 앉으면 여관 뜰의 잡목림을 넘어 호수의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푸른 산에 둘러싸인 고요한 호수의 풍경은 처음 얼마 동안 저를 무척이나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맑은 날이면 근처 산봉우리들이 호수 수면에 거꾸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그 위를 작은 돛단배가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정취. 비가 오는 날이면 산꼭대기를 숨긴 채 가까이 다가온 구름 사이로 은빛 실선이 흩어지며 호수 표면에 아름다운 파문을 일으키는 모습. 그 쓸쓸하면서도 상쾌한 풍광이 탁해질 대로 탁해진 뇌수를 씻어내 주어, 한때는 저를 그토록 괴롭히던 신경쇠약마저 깨끗이 잊어버릴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신경쇠약이 조금씩 호전됨에 따라 저는 역시 번잡한 도시에 길들여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쓸쓸하고 한적한 산속 생활이 점차 견디기 힘들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호반정은 그 이름이 보여주듯 유람객을 위한 여관인 동시에, 근처 읍내나 마을에서 당일치기로 놀러 오는 사람들을 위한 요정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손님이 원하면 가까운 산기슭 마을에서 매춘부 따위를 불러들여 주위의 고즈넉한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란스러운 술판을 벌일 수도 있었습니다. 저는 무료함을 달래고자 두어 번 그런 놀음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미지근한 자극이 어찌 저를 만족시킬 수 있었겠습니까. 돌아서면 또다시 산이요, 돌아서면 또다시 호수뿐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나도록 여관방들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어쩌다 들려오는 소리라곤 시골 기생의 음정 안 맞는 샤미센 소리가 전부였습니다. 그렇다고 도시의 집으로 돌아간들 딱히 재미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예정된 체류 기간은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곤경에 처한 저는 앞서 잠시 언급했던 엿보기 안경의 유희를 문득 떠올리게 된 것입니다.

​제가 그것을 생각해 낸 한 가지 동기는 제 방이 아주 적절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제 방은 2층 구석에 있었는데, 한쪽 둥근 창문을 열면 바로 발아래 호반정의 번듯한 목욕탕 지붕이 내려다보이는 구조였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엿보기 장치를 통해 참으로 다양하고 기괴한 장면들을 엿보아 왔지만, 과연 목욕탕만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저의 호기심은 맹렬히 끓어올랐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벌거벗은 여인이 목욕하는 노골적인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이라면 깊은 산속 온천장이나 심지어 도시 한복판의 특정 장소에서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호반정의 목욕탕은 애초에 남탕과 여탕의 구분조차 없는 혼욕탕이었습니다.

​제가 진정 보고 싶었던 것은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거울 앞에 선 벌거벗은 여인의 모습이었습니다. 혹은 벌거벗은 남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대중목욕탕 같은 곳에서 벌거벗은 인간을 흔히 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이 있는 앞에서의 알몸'입니다. 그들은 우리 눈앞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아직 '수치심이라는 옷'까지 벗어던진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남의 시선을 의식한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모습에 불과합니다. 저는 그간의 엿보기 경험을 통해 인간이란 주위에 타인이 있을 때와 온전히 혼자 남겨졌을 때 그 모습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달라지는지를 뼈저리게 알고 있었습니다. 남 앞에서는 잔뜩 긴장하고 빈틈없어 보이던 표정이, 혼자가 되면 거짓말처럼 풀려버려 소름 끼칠 정도로 얼굴이 변하는 법입니다. 어떤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만큼이나 극명한 차이를 보이기도 합니다. 표정뿐만이 아닙니다. 자세나 이런저런 몸짓 등 모든 것이 변해버립니다. 저는 일찍이 남 앞에서는 대단한 낙천가이자 오히려 광적일 만큼 쾌활하던 사람이, 혼자 있을 때는 정반대로 극단적인 염세주의자로 변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 적도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많든 적든 이런 이중적인 면모가 있는 듯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은 사실 그 정체의 반대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벌거벗은 인간을 거울 앞에 단 혼자 남겨두었을 때, 그가 자신의 알몸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관찰하는 것은 참으로 흥미진진한 일이 아닐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이유로 저는 엿보기 안경의 한쪽 끝을 목욕탕 안이 아니라, 그 옆방에 해당하는 커다란 전신 거울이 있는 탈의실에 설치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제5장
​그날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려, 저는 은밀하고도 기묘한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먼저 트렁크 바닥에서 엿보기 안경 도구를 꺼낸 다음, 여러 겹으로 겹쳐지는 두꺼운 도화지 원통을 길게 이어 붙였습니다. 그리고 둥근 창문 밖 지붕으로 몰래 빠져나가 남의 눈에 띄지 않을 만한 장소를 골라 가느다란 철사로 그것을 단단히 묶었습니다. 다행히 그쪽 빈터에는 키가 큰 삼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그 일대 벽면을 완전히 가려주고 있었으므로, 날이 밝아도 제 장치가 발각될 염려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곳은 건물 뒤편에 해당하는 후미진 장소라 평소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마치 좀도둑처럼 나뭇가지를 타고 건너가거나 목욕탕 창문으로 몰래 잠입하며, 저는 어둠 속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장장 세 시간이 넘는 수고 끝에 마침내 제가 원하는 완벽한 장치를 설치할 수 있었습니다. 렌즈 안경의 한쪽 끝은 둥근 창문에서부터 방안 장식장 기둥 뒤편으로 교묘하게 이어져 있어, 제가 그곳에 엎드리기만 하면 언제든 탈의실을 엿볼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기둥 쪽에는 제 소매 없는 겉옷을 슬쩍 걸쳐두어 청소하는 하녀들이 장치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위장했습니다.

​자, 다음 날부터 저는 그 기묘한 거울의 세계에 완전히 탐닉하기 시작했습니다. 벽구석에 설치한 쥐색 암상자 안에는 사방 6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거울이 비스듬히 놓여 있었고, 그 위쪽 렌즈를 통해 탈의실의 정경이 생생하게 비치고 있었습니다. 광선이 여러 번 굴절된 탓에 영상 자체는 꽤나 흐릿하고 어두웠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일종의 몽환적인 분위기가 더해져 저의 병적인 취향을 그지없이 만족시켜 주었습니다.
​제 방은 2층이었으므로 목욕탕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고, 둥근 창문으로 내려다보아도 목욕탕 지붕만 보일 뿐 내부의 상황을 짐작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언제 탈의실에 사람이 올지 아는 방법은 오직 거울 표면을 유심히 지켜보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치 낚시꾼이 찌가 움직이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며 그곳만 뚫어지게 바라보듯,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방구석에 엎드려 그 작은 거울만을 뚫어지게 응시했습니다.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람의 그림자가 거울 위로 어른거렸을 때, 제 가슴이 얼마나 거세게 뛰었는지 모릅니다. 그 사람이 옷을 벗는 동안, 그리고 목욕을 마치고 나와 몸을 닦는 동안, 지금 당장이라도 무슨 기이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행여 놓치지는 않을까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던가요.
​하지만 저의 기대는 번번이 배신당했습니다. 거울 속에 나타난 남녀들은 그저 그 신비롭고 어두침침한 유리 표면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흥미로움 외에는 별달리 이상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초여름이라지만 산 위는 아직 아침저녁으로 꽤 쌀쌀할 때였으므로 투숙객도 두세 팀에 불과했고, 술을 마시고 소란을 피우러 오는 손님도 사흘에 한 번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목욕을 하러 오는 사람도 극히 적었고, 제 거울 속 세계는 창밖 호수 풍경만큼이나 고요하고 쓸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나마 저를 위로해 준 것은 여관에서 일하는 열 명 남짓한 하녀들의 목욕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들 중 몇몇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탈의실에 나타났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십중팔구 음탕한 뒷담화라도 나누고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낄낄거리고 장난을 치며 옷을 벗고, 서로의 살결을 비교해 보거나 상대의 통통하게 살찐 배를 찰싹 때리는 모습 등이 손에 잡힐 듯 훤히 들여다보였습니다. 그 모습들이 거울 표면 위로 마치 활동사진처럼 앙증맞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면 그녀들은 꽤 오랜 시간 거울 앞에서 화장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여자의 화장이라는 행위에 묘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는데, 이토록 벌거벗은 여인이 노골적인 태도로 과감하게 화장하는 모습은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남자들은 결코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또 어떤 하녀는 탈의실에 홀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 경우에는 훨씬 더 호기심을 자극하는 경치와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순진한 얼굴로 제 시중을 들던 여자가 단 혼자 전신 거울 앞에 섰을 때 어찌 그리도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지. 과연 여자는 알 수 없는 요물이구나, 하고 저는 몇 번이나 감탄사를 내뱉곤 했습니다.

​제6장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평범한 경치에 완전히 지루해하던 저를 기뻐 날뛰게 할 만한 인물이 제 거울의 세계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그런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몇 배나 더 놀라운 사건이 거울 속에서 일어났습니다만) 그것은 최근 여관에 투숙한, 도쿄의 부유층에 속하는 듯한 가족 중 한 명으로, 열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아주 화려한 옷차림의 아가씨였습니다. 그녀가 처음 제 거울에 나타났을 때, 저는 그 어두침침한 유리 속에 새빨간 양귀비꽃이라도 피어난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옷차림에 걸맞게 세상에서도 보기 드문 아름다운 용모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용모보다도 그녀의 육체는 더욱 훌륭했습니다. 서양인처럼 풍만한 육체, 벚꽃 잎처럼 미묘한 살결의 색,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저를 놀라게 했지만, 게다가 그녀에게는 거울 앞에서 보이는 묘한 버릇조차 있었던 것입니다. ………………………………
​복도 등에서 마주쳤을 때의 얌전하고 새침한 모습과는 정반대로, 단 혼자 전신 거울 앞에 설 때면 그녀는 마치 딴 사람처럼 대담해졌습니다. ………………………………
​저는 태어나 처음으로 젊은 여자가 자기 자신의 육체에 넋을 잃고 감탄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너무나도 대담한 몸놀림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 하나하나를 설명하는 것은 이 이야기의 본줄거리와 관계없는 일이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만, 어쨌든 저는 그녀의 출현 덕분에 드디어 지루함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저는 엿보기 안경의 효과를 더욱 높이기 위해, 또다시 한밤중에 목욕탕에 숨어들어 높은 통풍용 창문 틈으로 내밀어 둔 렌즈 끝에 망원경 같은 렌즈 장치를 하나 더 추가하여, 그 전신 거울의 중앙 부분만이 가깝게 비치도록 개조했습니다. 그 결과, 제 방의 사방 6센티미터짜리 거울 속에는 탈의실 전신 거울에 비친 사람의 그림자가, 운이 좋으면 전신이, 때로는 신체의 일부분만이 마치 활동사진의 클로즈업처럼 꿈틀거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기이한 느낌인지, 그 고작 6센티미터짜리 거울에 비친 인간의 신체 일부가 얼마나 거대하게 느껴지는지, 아마 저와 같은 유희를 직접 해본 사람이 아니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곳에는 어두침침한 수족관의 유리 수조 표면에 새하얗고 뜻밖의 물고기 배가 나타나는 느낌으로, 정확히 그 느낌으로 돌연 불쑥 인간의 살결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기분 나쁘면서도 동시에 고혹적인 것이었는지요. …………저는 그렇게 매일매일 싫증도 내지 않고 바라보며 지냈습니다.

​제7장
​그리고 어느 날의 일이었습니다.
​매일 빠짐없이 목욕탕에 오던 아가씨가 어찌 된 일인지 그날은 밤이 되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아, 보고 싶지도 않은 다른 사람들의 몸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어느덧 밤이 깊었습니다. 이미 목욕하는 손님도 끊기고, 평소 같으면 앞으로 밤 12시 무렵 하녀들이 목욕하러 올 때까지 한두 시간 동안은 거울 표면에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날 일이 없었습니다.

​저는 이미 포기하고 아까부터 깔아둔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습니다. 그러자 여태껏 신경 쓰지 않았던, 한 방 건너편 방의 소란스러운 연회가 시끄럽게 귀에 거슬려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시골 기생의 낡은 샤미센 소리에 천박한 유행가를 여자의 새된 목소리와 남자의 탁한 목소리가 합창하고, 거기에 북소리까지 섞여 들려왔습니다. 드물게 큰 연회인 듯 복도를 달리는 하녀들의 발소리도 바쁘게 울려 퍼졌습니다.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저는 또다시 이불을 빠져나와 거울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혹시 그 아가씨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무심코 거울 표면을 보았을 때, 어느새 왔는지 그곳에는 어떤 여자의 뒷모습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그 아가씨가 아니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지만, 그 밖의 누구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여자의 목 아래부터가 거울 구석에 치우쳐 희미하게 비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몸의 살집으로 판단하건대 꽤 젊은 여자처럼 보였습니다. 방금 탕에서 나와 얼굴이라도 닦고 있는 듯한 자세였습니다.
​그때, 돌연 여자의 등 뒤에서 무언가가 번쩍하고 빛났습니다. 흠칫 놀라 자세히 보니, 실로 끔찍한 것이 그곳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거울 구석에서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팔 하나가 쑥 뻗어 나와 단도를 쥐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의 통통한 몸과, 원근감 때문에 그 앞쪽에서 몹시 거대하게 보이는 남자의 한쪽 팔이 거울 표면을 가득 채우고, 그것이 마치 수족관의 수조처럼 거무스름하게 보였습니다. 찰나의 순간, 저는 환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습니다. 사실 제 신경은 그토록 병적으로 흥분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한참을 지켜보아도 결코 환영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번쩍번쩍 기괴하게 빛나는 단도가 조금씩 조금씩 여자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남자의 손은 아마도 흥분 탓인지 기분 나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그것을 모르는 듯 침착하게 여전히 얼굴을 닦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꿈도 환영도 아닙니다. 틀림없이 지금 목욕탕에서 살인이 저질러지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서둘러 그것을 막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거울 속 그림자를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빨리, 빨리, 빨리! 제 심장은 터질 듯이 고동쳤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소리치려 했지만 혀가 굳어버려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번쩍! 일순간 거울 표면이 번개처럼 빛나는가 싶더니, 새빨간 것이 마치 거울 표면을 타고 흐르듯 뚝뚝 흘러내렸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때의 기묘한 느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한쪽 방에서는 한껏 달아오른 유행가 합창이 북과 손뼉, 발 구르는 소리와 어우러져 방이 떠나갈 듯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것과 제 눈앞 어둠 속, 희부연 거울 표면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어찌나 기이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던지요. 그곳에서는 하얀 여자의 몸이 등에서 새빨갛고 끈적끈적한 것을 흘리며, 스윽하고 걸어 나가듯 거울 표면에서 사라졌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곳에 쓰러졌겠지만, 거울에는 소리가 없습니다. 뒤에 남은 남자의 손과 단도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이윽고 이 역시 뒷걸음질 치듯 거울에서 그림자를 감추어버렸습니다. 그 남자의 손등에 비스듬히 나 있던, 상처 자국 같은 검은 선이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제 눈에 맴돌았습니다.

​제8장
​한동안 저는 거울 속의 피비린내 나는 그림자 연극을 현실의 사건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저의 병적인 착각이거나 엿보기 장치가 만들어낸 환영이라도 본 것처럼 멍하니 그대로 엎드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아무리 쇠약해진 제 머리라 해도 설마 그렇게까지 생생하게 환영을 볼 이가 없습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살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무언가 그와 비슷한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귀를 기울이고 당장이라도 아래층 복도에서 심상치 않은 발소리나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을까 긴장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러는 동안 무심코 손목시계를 보았는데, 바늘은 정확히 10시 35분경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어떤 이상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옆방의 소란스러운 연회도 웬일인지 뚝 소리를 죽이고 있어서, 일순간 집안 전체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고 제 손목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렸습니다. 저는 환영을 쫓기라도 하듯 다시 한번 거울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물론 그곳에는 탈의실의 차가운 대형 거울이 근처 벽이나 선반 등을 비추며 허옇게 둔탁한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토록 무서운 기세로 단도가 꽂히고 그토록 많은 피가 흘렀으니, 피해자는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반드시 치명상을 입었을 것입니다. 거울 속 영상에 소리는 없었지만, 그녀는 틀림없이 끔찍한 비명을 질렀을 것입니다. 저는 부질없게도 단단한 거울 표면에서 그 비명의 여운이라도 찾아내려는 듯 뚫어지게 그곳을 응시했습니다.

​그나저나 여관 사람들은 어째서 이토록 쥐 죽은 듯 조용한 걸까요. 어쩌면 그들은 그 비명을 듣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목욕탕 입구의 두꺼운 문과 그곳에서 하녀들이 있는 주방까지의 거리가 소리를 차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끔찍한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은 넓은 호반정 안에서 오직 저 혼자뿐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당연히 저는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야만 합니다. 하지만 뭐라고 말하며 알려야 할까요? 그러려면 엿보기 안경의 비밀을 털어놓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 그런 부끄러운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부끄러운 것만이 아닙니다. 이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기괴한 장치가 어쩌면 살인 사건과 연관되어 의심을 받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태생적으로 겁이 많고 우유부단한 저로서는 도저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저는 거의 5분 동안 난생처음 겪어보는 초조함에 시달리며 안절부절못하다가, 이윽고 견딜 수 없어져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무작정 방을 나와 곧장 넓은 계단을 뛰어 내려갔습니다. 계단 아래는 복도가 T자형으로 되어 있어 한쪽은 목욕탕 쪽으로, 한쪽은 현관 쪽으로, 그리고 다른 한쪽은 안쪽 객실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황급히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안쪽 객실로 통하는 복도에서 불쑥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보니 제법 실업가 티가 나는 양복 차림에, 차분한 색조의 넉넉한 봄 외투를 펄럭이고 열어젖힌 가슴팍에서는 굵은 금사슬이 번쩍거렸습니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꽤 무거워 보이는 커다란 트렁크 하나를, 왼손에는 금장식이 달린 굵직한 지팡이를 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밤 11시가 가까운 시각, 짐을 싸서 떠나려는 듯한 그 모습도 그렇고 무거운 트렁크를 직접 들고 있는 것도 생각해 보면 기묘했습니다만, 그보다 더 이상한 것은 마주친 순간이었습니다. 저 역시 꽤 놀라긴 했지만 상대방이 놀라는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헉하고 놀란 듯 갑자기 뒤로 돌아서려 하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는 지극히 부자연스럽게 시치미를 뚝 떼며 제 앞을 지나쳐 현관 쪽으로 서둘러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그의 수행원으로 보이는, 행색이 조금 초라한 남자가 역시 양복 차림으로 비슷한 트렁크를 들고 따라갔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내성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앞서 누차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따라서 여관에 묵으면서도 좀처럼 방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고, 다른 투숙객들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예의 그 화려한 도시 아가씨와 또 한 명의 청년(그가 얼마나 놀라운 사내인지는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독자 여러분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외에는 거의 무관심했습니다. 물론 엿보기 안경을 통해 모든 투숙객을 보았을 테지만, 누가 어느 방에 묵고 있으며 어떤 얼굴과 행색을 하고 있는지 통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마주쳐 저를 놀라게 한 신사 역시 한 번쯤 본 적이 있는 것 같긴 해도 딱히 깊은 인상이 남아 있지 않았고, 따라서 그의 기이한 행동에도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때의 저는 때아닌 시각에 떠나는 손님 따위를 의심할 여유조차 없었고, 그저 가슴이 두근거려 그 복도를 어디로 가야 할지조차 모르는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용기를 쥐어짜 보아도 그 사건을 여관 사람들에게 알릴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엿보기 안경 때문인지라, 마치 제 자신이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켕기는 기분이 들었던 것입니다.

​제9장
​하지만 그러고만 있을 수도 없어서, 저는 여하튼 목욕탕을 조사해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두침침한 복도를 따라 그곳에 가보니, 입구의 두꺼운 서양식 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겁 많은 저로서는 그 문을 여는 것이 얼마나 으스스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시간이 꽤 지났기에 간신히 용기를 내어 조금씩 조금씩 문을 열고 틈새로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대체 저는 무엇을 그토록 두려워했던 걸까요? 당연하게도 그곳에는 이미 괴한 같은 것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혹시나 했던 여자의 시체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텅 빈 탈의실은 새하얀 전등 빛에 비춰져 무덤처럼 고요했습니다.
​그제야 안심한 저는 문을 활짝 열고 탈의실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그토록 참혹한 칼부림이 있었으니 바닥에는 엄청난 피가 흘러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윤이 반질반질 나는 나무 바닥에는 핏자국 비슷한 흔적조차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목욕탕과의 경계인 불투명 유리문을 열어볼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어안이 벙벙해진 저는 그저 멍하니 그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마치 여우에게 홀린 것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아아, 내 머리가 드디어 어떻게 되어버린 모양이구나. 그런 기분 나쁜 환영을 보고선 그걸 진짜 사건인 양 착각해서 이 소란을 떨다니. 애초에 왜 이상한 엿보기 안경 같은 걸 만들었을까. 어쩌면 그 장치를 고안해 냈을 때부터 난 이미 미치광이였는지도 몰라."
​아까와는 다른, 훨씬 근본적인 공포가 저를 전율케 했습니다. 저는 허둥지둥 제 방으로 돌아와 깔려 있던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 이 모든 일이 제발 꿈이기를 기도하며 눈을 감았습니다.
​한동안 멈췄던 근처 방의 소란스러운 연회가 제 어리석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또다시 시끄럽게 울려 퍼졌습니다. 이불을 뒤집어써도 그 소리가 끈질기게 귓가를 맴돌아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새 저는 다시 아까 본 환영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환영이라고 단정 지어버리는 것은 곧 제 머리가 미쳤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라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게다가 차분히 생각하면 할수록, 아무리 쇠약해진 제 머리라 해도 설마 그렇게까지 생생한 환영을 보았을 리 만무했습니다. "혹시 누군가의 장난은 아니었을까?" 어리석게도 저는 그런 상상까지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바보 같은 장난을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한단 말입니까. 저를 놀래주려고? 이 호반정에는 그럴 만큼 친한 지인도 없습니다. 게다가 제 엿보기 안경의 비밀조차 아직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그 단도, 그 피, 그것이 어찌 장난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역시 환영이란 말인가. 하지만 제게는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탈의실에 피가 흐르지 않았던 것은 마침 피해자의 발아래 옷 같은 것이 깔려 있어 피가 거기로 스며들었거나, 혹은 바닥에 흐를 만큼 출혈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쳐도 칼에 찔린 사람이 그 깊은 상처를 안고 대체 어디로 사라질 수 있었을까요. 비명은 2층의 소란에 묻혀 여관 사람들도 눈치채지 못했을 수 있지만, 그 부상자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이곳을 빠져나갔을 리는 만무합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당장 의사가 필요한 상태였으니까요.
​그런 생각들을 이리저리 굴려보느라 그날 밤은 끝내 뜬눈으로 지새우고 말았습니다. 여관 사람들에게 알리기만 하면 속이 편할 것을, 엿보기 안경이라는 약점이 잡혀 있으니 그럴 수도 없고 쓸데없는 마음고생만 한 셈입니다.

​제10장
​이튿날 아침, 날이 밝고 아래층이 소란스러워지자 저는 그제야 조금 기운을 차리고, 세수라도 하면 기분이 나아질까 싶어 수건을 들고 계단을 내려와 세면장으로 갔습니다. 세면장이 마침 그 목욕탕 근처에 있었기에, 저는 아침햇살 속에서 다시 한번 탈의실을 살펴보았습니다만 역시나 아무런 이상도 없었습니다.
​세수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저는 호수 쪽 창문을 열고 아침 공기를 배불리 들이마셨습니다. 얼마나 화창한 풍경인지요. 끝없이 펼쳐진 호수 수면에는 비단결 같은 잔물결이 일고, 산등성이 위로 솟아오른 아침햇살이 하얗게 반짝반짝 반사되고 있었습니다. 배경으로는 그늘진 산등성이가 장엄한 그림자를 접어두고, 그 검은빛과 호수의 은빛, 그리고 산과 호수의 경계를 따라 흐르는 한 줄기 아침 안개. 긴 체류 기간 동안 늦잠꾸러기인 제가 처음으로 그런 경치를 본 것이었습니다. 그 풍경에 비하면 저의 간밤의 공포는 어찌나 구질구질해 보였던지요.
​"일찍 일어나셨네요."
​뒤에서 놀리는 듯한 하녀의 목소리가 들리며 아침상이 들어왔습니다. 입맛은 전혀 없었지만 일단 밥상 앞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젓가락을 들다가 문득, 다시 한번 어젯밤의 일을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침의 맑은 공기가 제 입을 어느 정도 쾌활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너 혹시 아는 거 없니? 어젯밤에 목욕탕 쪽에서 이상한 비명 소리 같은 걸 들은 것 같은데, 무슨 일 없었어?"

​저는 일부러 실없는 농담을 던지듯 말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말로 슬쩍 떠보았지만, 하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손님 중에는 당연히 다친 사람도 없고, 근처 마을 사람들에게서도 그런 소문은 듣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 부상자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 귀밝은 하녀들에게까지 소문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어젯밤의 일은 정말로 한바탕 악몽에 불과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또다시 제 자신의 신경을 걱정해야만 했습니다.
​그 후 한참 동안 새삼 다시 누울 수도 없어 방에 앉은 채 우울한 생각에 잠겨 있던 제 앞에 한 명의 방문객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앞서 잠시 언급했던 안면이 있는 청년으로, 역시 같은 여관에 묵고 있는 고노(河野)라는 사내였는데, 그가 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할 만한 인물이니 여기서 잠시 그에 대해 설명해 두어야겠습니다.

​저는 그와 목욕탕 안이나 호숫가 등에서 두세 번 마주친 것이 전부였지만, 그 역시 저처럼 다소 우울한 성격인 듯 언제나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대화를 나누어 보았는데, 서로의 성격에는 어딘가 비슷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사람들 틈에 섞여 떠들기보다는 혼자 생각에 잠기거나 책을 읽는 데 몰두하는 편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그런 점에 은근히 호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저 같은 이른바 허무주의자는 아니었고, 인간 상호 간의 관계에 대해 무언가 이상을 품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독선적인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착실하고(따라서 사회적으로는 위험한) 실천적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아무튼 괴짜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그는 직업이나 물질적인 면에서도 저와는 꽤 달랐습니다. 그의 전공은 서양화였는데, 풍채 등으로 보아 결코 부유층에 속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본인의 말로는 그림을 팔아가며 이렇게 여행을 다니고 있는 듯했습니다. 여관방도 그는 복도 구석의 가장 불편한 곳을 배정받아 쓰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토록 끌렸는지 그는 이전에도 종종 이 H산에 왔던 모양으로, 근처 사정에 꽤 밝았습니다. 이번에도 기슭의 Y마을에 잠시 머물다 저보다 조금 먼저 호반정에 왔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여행을 다니며 그는 여러 지방의 인심과 풍속을 조사하는 듯했고 다양한 진기한 사실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행의 틈틈이 그는 지니고 다니는 서적을 즐겨 읽는 듯, 손때 묻어 까맣게 변한 어려운 책 서너 권이 늘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아, 이러면 이야기가 너무 딱딱해지는 것 같군요. 고노의 소개는 이쯤 해두고, 그가 그날 아침 제 방을 찾아온 때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그는 제 방으로 들어오더니 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안색이 몹시 안 좋아 보이는데요."
​"어젯밤에 통 잠을 못 자서요."
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습니다.
​"불면증이십니까? 그거 안 좋군요."
그리고 우리는 한동안 평소처럼 논쟁인지 세상 이야기인지 모를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내 저는 그런 태평한 대화를 견디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걸핏하면 어젯밤의 일이 머릿속을 꽉 채워, 고노의 아는 체하는 논쟁 따위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초조해하던 중에 저는 문득 '이 남자에게 털어놓고 그의 판단을 들어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라면 어느 정도 저를 이해해 주기도 하니 왠지 이야기하기 편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젯밤의 자초지종을 전부 그에게 털어놓고 말았습니다. 엿보기 안경의 비밀을 밝힐 때는 꽤나 부끄러운 심정이었습니다만, 상대가 워낙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탓에 어느새 겁쟁이인 제가 다변가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제11장
​고노는 제 이야기에 대단한 흥미를 느낀 눈치였습니다. 특히 엿보기 안경 장치는 그를 황홀하게 만들 정도였습니다.
​"그 거울이라는 게 어떤 겁니까?"
그는 무엇보다 먼저 그것을 물었습니다. 제가 여름 외투를 걷어내고 예의 그 장치를 보여주자,
​"호오, 과연, 과연. 아주 기발한 생각을 하셨군요."
그는 연신 감탄하며 직접 그것을 들여다보았습니다.
​"확실히, 여기에 그런 영상이 비쳤다는 말씀이군요. 아까 말씀하신 대로 환영이라고 하기엔 좀 이상합니다. 하지만 그 여자가 (아마 여자겠죠) 적어도 큰 상처를 입었을 텐데, 그것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하긴 하네요."

​그리고 잠시 동안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모습이더니, 이내 입을 열었습니다.
"아니, 반드시 불가능한 일만은 아닙니다. 만약 피해자가 그저 다치기만 했다고 한다면 이상하지만, 그 여자가 죽어버렸다고 한다면 시체를 숨기고 남은 피 따위는 닦아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그것을 본 게 10시 35분이고, 그 후 목욕탕에 가기까지 5, 6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시체를 숨기거나 청소를 할 수 있을까요?"
​"상황에 따라서는 불가능할 것도 없죠." 고노는 의미심장하게 말했습니다. "예를 들면…… 아니, 상상 따윈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다시 한번 목욕탕을 조사해 봅시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고집했습니다. "아무도 사라진 사람이 없다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자가 죽었다는 것도 이상해요."
​"그건 모를 일이죠. 어젯밤엔 투숙하지 않는 손님들도 꽤 많아 상당히 혼잡했던 모양이니, 누군가 행방불명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순 없어요. 게다가 여관 사람들은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의 일이라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찌 됐든 목욕탕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굳이 가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았지만, 고노의 호기심이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 것입니다.
​탈의실에 들어선 우리는 문을 닫고, 여관 목욕탕치고는 사치스러울 만큼 넓은 나무 바닥을 둘러보았습니다. 고노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의 눈은 때때로 아주 예리하게 빛나곤 했습니다) 그 주변을 샅샅이 훑어보았습니다.
​"이곳은 아침 일찍 청소를 하게 되어 있으니 피자국이 있다 하더라도 얼핏 봐서는 알 수 없게끔 닦아놓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말했습니다. "어라, 이거 이상하네요. 이 매트는 평소에 거울 앞에 있지 않았는데. 원래 제자리는 저기 목욕탕 입구 쪽에 있어야 맞거든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발끝으로 종려나무로 만든 폭넓은 매트를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밀어냈습니다.
​"앗, 이것 좀 보세요!"
​그가 묘한 소리를 내어 놀라서 쳐다보니, 지금까지 매트에 가려져 있던 바닥 널빤지에 거의 60센티미터 사방의 넓이로 끈적끈적하고 검붉은 얼룩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핏자국을 닦아낸 흔적이라는 것은 한눈에 척 보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제12장
​고노는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 피로 보이는 얼룩을 벅벅 문질러 보았으나, 워낙 잘 닦아낸 탓인지 손수건 끝이 아주 연하게 붉어질 뿐이었습니다.
​"아무래도 피가 맞나 봅니다. 잉크나 물감 색과는 달라요."
그는 여전히 그 주변을 조사하며 돌아다니다가 말했습니다.
​"이것 좀 보십시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매트로 가려져 있던 곳 외에도 군데군데 점점이 핏자국 같은 것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기둥이나 벽의 아랫부분, 또는 나무 바닥 위에 잘 닦아낸 탓에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지만 막상 주의 깊게 살펴보니 그런 혈흔 같은 것이 꽤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점점이 이어진 혈흔을 따라가 보면 부상자 혹은 사망자가 분명히 목욕탕 안으로 들어간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대체 어디로 갔는지, 어디로 옮겨졌는지 끊임없이 물이 흐르는 콘크리트 바닥이라 전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어쨌든 장부에 알리러 갑시다."
고노가 의욕적으로 나섰습니다.
​"네, 하지만" 저는 몹시 난처해하며 대답했습니다. "부탁이니 그 엿보기 안경에 대한 것만큼은 제발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지만 그건 아주 중요한 단서라고요. 피해자가 여자였다는 사실이라든가 단도의 형태라든가."
​"그래도 제발 그것만은 비밀로 해주십시오.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런 범죄에 쓰일 법한 장치를 해놓았다면 왠지 저 자신이 의심받을 것 같아 걱정스러워서 그렇습니다. 단서는 이 혈흔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 뒤로는 제 증언 따위가 없어도 경찰이 알아서 잘해 주겠죠. 제발 그것만은 봐주십시오."
​"그렇습니까. 정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건 말하지 않기로 하죠. 그럼 일단 알리고 오겠습니다."
고노는 말을 남기고 카운터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남겨진 저는 그저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제가 본 것은 꿈이나 환영이 아니라 진짜 살인이었던 것입니다. 이 혈흔의 양으로 보아 아까 고노가 추측한 대로 아마도 피해자는 죽었을 테지만, 범인은 대체 그 시체를 어디로 가져갔다는 말입니까? 아니, 그것보다 살해당한 여자는, 그리고 살인을 저지른 남자는 (아마 남자일 것입니다)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지금까지도 여관 사람들이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걸 보면, 투숙객 중에 행방불명된 사람도 없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누가 일부러 외부에서 이런 곳까지 상대를 끌고 와 살인을 저지르겠습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알 수 없는 일투성이였습니다.

​이윽고 복도 쪽에서 여러 명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고노를 선두로 여관 주인, 지배인, 하녀 등이 목욕탕으로 들어왔습니다.
​"제발 소란 피우지 마십시오. 손님 장사 아닙니까. 별일 아닌 일로 소문이라도 나면 장사 망칩니다."
뚱뚱한 호반정 주인은 들어서자마자 귓속말로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그리고 혈흔을 보더니,
​"아유, 이건 무슨 국물을 엎지른 거겠지요. 살인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비명 소리를 들은 사람도 없고 손님들 중에 안 보이는 사람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는 억지로 부인하듯 말하면서도 내심 잔뜩 겁을 먹은 기색으로,
​"오늘 아침, 여기 청소한 게 누구지?"
하고 하녀를 돌아보며 다그쳤습니다.
​"산조(三造)입니다요."
"그럼 산조를 이리 불러와. 조용히 시키고."
​산조라는 사람은 이 여관에서 불을 때는 사내였습니다. 하녀의 손에 이끌려 온 모습을 보니, 평소 사람 좋고 약간 모자란다는 소문을 듣던 그는 마치 자신이 살인범이라도 된 것처럼 새파랗게 질려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너, 이거 눈치채지 못했냐?"
주인이 호통을 쳤습니다.
​"예, 전혀……"
"청소는 네가 한 거 맞지?"
"예."
"그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잖아. 분명 대충 했겠지. 여기 있던 깔개를 치워보지도 않은 거냐. 그런 식으로 청소하는 놈이 어딨어! 왜 그렇게 꾀를 부려. ……뭐, 그건 그렇고, 너 어젯밤에 여기서 무슨 이상한 소리 같은 거 못 들었냐? 계속 그 불 때는 곳에 있었을 거 아니야. 비명이라도 질렀으면 들렸을 텐데."
​"예, 딱히 이렇다 할 건……"
"못 들었다는 거냐?"
"예."
​대충 이런 식이었습니다. 평소 눈웃음을 치며 아양을 떨던 주인이 고용인들에게는 이렇게 거만하게 구는 것을 보고 저는 적잖이 반감을 느꼈습니다. 그나저나 산조라는 사내는 참으로 우유부단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제13장
​그러고 나서 "혈흔이다", "아니다, 혈흔이 아니다"라며, 주인은 끝까지 여관 평판이 깎일까 두려워 일을 키우지 않으려 했고, 고노 역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 뜻하지 않게 기묘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선생님도 참 이상한 분이시네요. 이렇게 뭐가 엎질러진 건지도 모를 자국을 보고 마치 살인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단정 짓는 말씀은 좀 그렇지 않습니까? 저희 여관에 트집이라도 잡고 싶으신 겁니까?"
​주인은 아예 싸우려는 기세였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저는 행여 고노가 엿보기 안경 이야기를 꺼내지나 않을까 안절부절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완고한 주인이라도 그 사실을 털어놓으면 납득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바로 그때, 한 하녀가 황급히 뛰어 들어왔습니다. 그녀들은 벌써 혈흔에 대한 소문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두의 일거수일투족이 정상을 벗어나 있었습니다.
​"사장님, 나카무라야(中村家)에서 전화가 왔는데요!"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습니다. "저기, 조키치(長吉)가 아직 안 돌아왔다고 합니다요."
​이 갑작스러운 보고가 국면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습니다. 아무리 주인이라도 더 이상 침착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조키치라는 것은 근처 기슭 마을의 기생 이름이었습니다. 어젯밤 호반정에 불려 왔는데, 오긴 왔지만 그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것입니다. 나카무라야에서는 간밤에 호반정에 묵고 간 줄 알고 (시골에서는 그런 점이 꽤나 느슨한 편이었습니다) 별 걱정 없이 있다가 이제야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습니다.
​"예, 그게, 큰 연회 손님들을 보내드리고 다른 집 기생들과 함께 그 아이도 분명 자동차에 탔을 텐데요."
주인의 추궁에 지배인이 횡설수설하며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신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때 소란을 듣고 안주인도 달려왔고, 하녀들도 여럿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조키치를 보았네 못 보았네 저마다 떠들어댔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나중에는 조키치라는 기생이 과연 어젯밤에 오긴 온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워졌습니다.
​"아뇨, 온 건 확실해요." 그러자 한 하녀가 뭔가 생각난 듯 말했습니다. "10시 반쯤이었어요. 제가 술병을 들고 2층 복도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11호실 문이 왈칵 열리더니 조키치가 뛰쳐나오더라고요. 걔가 불려간 곳은 연회장이잖아요. 이상해서 뒷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마치 뭔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둥지둥 저쪽으로 달려갔어요."
​"맞아 맞아, 생각났어." 또 다른 하녀가 거들었습니다. "딱 그쯤이었어. 내가 아래층 화장실 앞을 지나가는데, 11호실 손님 있잖아, 그 수염 기른 사람, 그 사람이 와서는 방금 여기로 조키치 지나가지 않았냐고 엄청 무서운 얼굴로 묻는 거야. 모른다고 했더니 일부러 화장실 안까지 들어가 문을 열고 찾아보더라고. 너무 이상해서 똑똑히 기억해."
​그 말을 듣고 저 역시 짚이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심코 대화에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11호실 손님이라는 게, 혹시 양복 입은 두 사람에 커다란 트렁크를 들고 다니던 사람 아니오? 그리고 어젯밤 늦게 여길 떠난."
​"예, 맞아요. 큰 트렁크를 하나씩 들고 계셨어요."

​그래서 잠시 동안 11호실 손님에 대해 분주한 대화가 오갔습니다. 지배인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출발 준비를 하고 내려와 카운터에서 숙박비를 계산하자마자 허둥지둥 자동차도 부르지 않고 나갔다는 것입니다. 물론 호숫가 마을에는 승합 자동차 정류장이 있어서 특별 요금만 내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차를 낼 수 있기에, 그들은 정류장까지 걸어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출발할 때의 당황한 기색이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가 보았던 그들의 기묘한 거동과 방금 지배인의 말, 그리고 조키치의 행방불명, 목욕탕의 혈흔, 게다가 거울 속 그림자와 그들이 떠난 시간의 기이한 일치. 아무래도 그 사이에 연관성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제14장
​이후의 처리는 집주인인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당신들은 일단 방으로 돌아가고, 제발 소문내지 말아 달라고 주인은 끝까지 은폐하려는 태도였습니다. 고노와 저 역시 방해꾼 취급을 받으면서까지 이 사건에 참견할 이유가 없었기에, 일단 제 방으로 물러났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예의 엿보기 안경 장치가 걱정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대낮에 그것을 떼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뭘, 여기서도 그 사람들이 뭘 하는지 잘 보이는데요."
제 속도 모르고 고노는 덮어둔 외투를 치우고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장치 아닙니까. 이보쇼, 보세요. 주인장의 그 똥 씹은 얼굴이 아주 크게 비치네요."
어쩔 수 없이 저도 그곳을 들여다보니, 과연 거울 속에서는 뚱보 주인의 옆얼굴이 두툼한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 말하고 있는 참이었습니다. 그것이 거울의 거의 3분의 1 크기로 확대되어 비치고 있었습니다.
​앞서 말했듯 엿보기 안경으로 보는 경치는 마치 물속에 잠겨 눈을 뜬 세계처럼 기묘하게 탁해서, 형언할 수 없는 섬뜩함을 더했습니다. 때가 때인지라 어젯밤의 끔찍한 기억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제게는, 거울에 비친 문둥병자 같은 주인의 얼굴에서 당장이라도 피가 뚝뚝 흐를 것만 같아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잠시 후 고노가 거울에서 고개를 들며 말했습니다. "만약 정말 조키치라는 기생이 행방불명된 거라면 아무래도 11호실 손님이라는 작자들이 수상하지 않습니까? 전 알고 있습니다만, 그 두 남자는 4, 5일 전부터 묵고 있었어요. 밖에도 잘 안 나가고, 가끔 기생을 불러도 큰 소리를 내는 법도 없이 대체로 쥐 죽은 듯 조용히 뭘 하는지 알 수가 없었죠. 전혀 유람객 같지가 않았어요."
​"하지만 그들이 수상하다 치더라도 이 고장 기생을 죽인다는 것도 이상하고, 게다가 설령 죽였다 한들 시체를 대체 어디에 숨길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어떤 끔찍한 생각을 지우고 또 지우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습니다.
​"그건 호수에 던져버렸을지도 모르죠. 아니면 또…… 그들이 가지고 있던 트렁크가 어느 정도 크기였습니까?"
​저는 흠칫 놀라면서도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보통 트렁크 중에서도 제일 큰 사이즈였습니다."
​고노는 그것을 확인하더니 무언가 신호라도 보내듯 제 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역시 저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습니다. 그것은 입 밖으로 내기에는 너무나도 무시무시한 상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보통 트렁크에는 사람 한 명이 통째로 들어갈 수는 없죠."
이윽고 고노가 창백해진 눈 밑을 파르르 떨며 말했습니다.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아직 누가 죽였다고도, 아니 살인이 일어났다는 것조차 확실하지 않은데."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선생님도 역시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우리는 또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가장 끔찍한 것은 한 사람을 두 개의 트렁크에 나누어 담았다는 상상이었습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목욕탕 하수구 쪽에서 시체를 처리할 수는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곳에서는 아무리 많은 피가 흘러도 전부 호수로 빠져나가 버리니까요. 하지만 그곳에서 그들은 조키치의 시체를 두 동강으로 자른 것일까요?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저는 등골에 도끼날이 꽂힌 듯 서늘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대체 무엇으로 시체를 토막 냈단 말입니까? 미리 흉기를 준비했던 걸까요, 아니면 마당 구석에서 도끼라도 훔쳐 온 것일까요.

​한 명은 입구 문 쪽에서 망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은 하수구 쪽에서 요염한 여자의 시체를 앞에 두고 도끼를 치켜들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독자 여러분, 저의 지나치게 과민한 상상을 비웃지 말아 주십시오. 나중에 돌이켜보면 우스꽝스러운 일일지 몰라도, 그때의 우리는 그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눈앞에 생생하게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하튼 그날 오후가 되자 사건은 점차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조키치의 행방은 나카무라야에서도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습니다. 호반정 카운터에는 마을 주재소 순사를 비롯해 산기슭 읍내의 경찰서장과 형사들이 속속들이 몰려왔습니다. 소문은 벌써 마을 전체에 퍼졌고, 여관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주인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호반정 살인 사건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말았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고노와 저는 사건의 발견자로서 엄중한 심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먼저 고노가 혈흔을 발견할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진술하고 물러나자, 다음으로 제가 서장 앞으로 불려 나갔는데, 저는 그곳에서 고노가 한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심문이 대충 끝나갈 무렵 서장은 문득 생각난 듯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대체 왜 목욕탕에 가본 거요? 아직 물도 데워지지 않았다던데, 그곳에 뭘 하러 들어간 거요?"
​저는 헉하고 말문이 막혔습니다.

​제15장
​만약 이때 사실을 털어놓지 않는다면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나까지도 이 살인 사건에 무슨 연관이 있는 것처럼 의심받지는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엿보기 안경의 비밀을 밝혀버리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탈의실을 엿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호반정 사람들에게 알려졌을 때의 수치심을 상상하니 이 또한 견딜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찰나의 순간 저는 둘 중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몹시 망설였지만, 내성적인 성격 탓에 결국 수치심이 앞서 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만 거짓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탈의실에 제 비누를 두고 온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만요. 아침에 세수를 하려는데 비누가 없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탈의실에 들어가 본 겁니다. 그러다 우연히 그 핏자국을 발견한 거고요."
​저는 그렇게 말하며 곁에 있던 고노에게 은근슬쩍 눈짓을 보냈습니다. 만약 그가 나중에 사실을 말해버리면 큰일이니 그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눈치 빠른 그는 두말할 필요 없이 제 미묘한 눈의 움직임을 알아챈 듯했습니다.
​그 후 호반정 주인을 비롯하여 지배인, 하녀, 하인, 나아가 투숙객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일차적인 조사를 받았습니다. 검사 등은 아직 도착하지 않아 그저 임시 조사 같은 것이라 따로 사람을 물리지 않고 한 방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을 차례로 심문했기에, 저는 거의 모든 진술을 곁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고노는 제 무언의 애원을 받아들여 제 거짓말에 입을 맞춰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주인을 비롯한 여관 사람들의 진술에도 별로 새로운 사실은 없었고, 모두 우리가 미리 들어서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것들을 종합해 보니 경찰 역시 트렁크 신사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듯 보였습니다.
​또한 범죄 현장이 지극히 면밀하게 조사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건 발견자로서 거기에 입회할 수 있었는데, 노련한 형사 한 사람은 나무 바닥의 얼룩을 보자마자 단번에 혈흔이 틀림없다고 감정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담당 검사의 의견도 있어서 만약을 위해 그 혈흔을 닦아내어 지방 의과대학에 보내 검사를 의뢰한 결과, 이 형사의 감정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음이 밝혀졌습니다. 그것은 짐승 따위의 피가 아니라 정확히 인간의 혈액이 맞다는 판명이 나온 것입니다.
​이어 형사가 추정한 바에 따르면, 혈흔의 양으로 미루어 피해자는 아마도 죽었을 것이고, 범인은 그 시체를 목욕탕 콘크리트 바닥에서 처리했음이 틀림없다는 등 전부 비전문가인 우리들이 상상했던 것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혹시 흉기나 유류품이 없는지 목욕탕 주변, 그리고 용의자인 신사가 묵었던 11호실 등도 빠짐없이 조사되었으나 단서가 될 만한 물건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추정 피해자인 조키치의 신원에 대해서는 마침 그녀가 속해 있던 나카무라야의 안주인이 호반정으로 달려왔기에 그녀로부터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엄청나게 수다를 떨며 이런저런 사실들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요컨대 저희가 생각하기에도 이렇다 할 수상한 점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조키치는 1년쯤 전에 같은 지방의 N이라는 마을에서 나카무라야로 소속을 옮겨온 것으로, 이전 일은 차치하고 나카무라야에 온 이후로는 그녀에게 아무런 이상한 점도 없었으며, 화류계 여자치고는 좀 지나치게 음울한 성격이라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일 정도였습니다. 치정 관계 역시 평범한 단골손님 이상의 관계는 없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어젯밤엔 이쪽 큰 연회 자리에 불려 왔고, 마침 여기 있는 츠타야(蔦屋)의 시메지(〆治)도 함께였습니다만, 8시쯤 마을을 나설 때도 별달리 이상한 낌새는 없었던 것 같고, 연회장에서도 평소처럼 있었다고 하더군요."
​안주인의 진술은 결국 이런 두서없는 내용에 불과했습니다. 그때 서장은 조키치와 트렁크 신사 (숙박 장부에는 마츠나가 누구누구로 되어 있었습니다. 종업원으로 보이는 남자는 분명 기무라라고 했던가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그 이후로 종적을 감췄으니 이름을 굳이 명확히 밝혀둘 필요까지는 없겠죠)의 관계에 대해 그녀에게 뭔가 짚이는 점이 없냐고 캐물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도 그녀는 조키치가 두세 번 마츠나가의 방에 불려갔다는, 이미 알려진 사실 외에는 덧붙일 말이 없었습니다. 여관 지배인과 시메지라는 기생의 증언에 따르면, 마츠나가와 조키치의 관계는 그저 술동무로 불려가는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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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결국 그 심문을 통해 밝혀진 사실은, 우리가 미리 알고 있던 내용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엿보기 안경에 대한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으니, 경찰들은 어떤 의미에서 이 사건에 대해 우리보다 훨씬 무지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범행 시간만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10시 35분경이라고 꽤 정확하게 밝혀져 있는 반면, 그들은 하녀가 조키치나 마츠나가의 수상한 거동을 목격한 시간으로 미루어 범행도 아마 그쯤 벌어졌을 것이라고 막연히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우선 용의자인 마츠나가의 행방을 수색하기로 결정이 났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때까지는 아직 살인이 벌어졌는지조차 확실히 판명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탈의실의 혈흔과 조키치의 행방불명, 마츠나가의 수상쩍은 출발 등의 정황이 들어맞아 간신히 그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누가 생각해도 마츠나가의 행방 수색이 선결 문제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고노가 마을 순사와 안면을 튼 덕분에, 우리는 나중에 경찰 측의 의견이나 수색의 실제 상황을 어느 정도 상세히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만, 호반정에서의 조사가 끝나자마자 즉각 실시된 마츠나가의 행방 수색은 결국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저와 여관 지배인이 진술한 그들의 출발 당시 인상착의를 바탕으로 가도 주변의 읍내와 마을들을 샅샅이 뒤졌건만, 신기하게도 '양복 차림에 트렁크를 든 자'라는 조건에 들어맞는 인물은 종적을 감춘 듯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특징이랄 게 마츠나가가 뚱뚱한 체격에 콧수염을 길렀다는 정도뿐이니, 만약 그들이 트렁크를 어딘가에 숨기고 교묘하게 변장을 해버렸다면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도망치는 것이 마냥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도주에 가장 큰 방해물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눈에 띄는 커다란 트렁크였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도중에 남몰래 그것을 처분했을 것입니다. 경찰도 그 점을 깨닫고 가능한 한 탐문해 보았지만, 역시나 만족스러운 결과는 얻지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근처 산속은 물론 호수 밑바닥까지 거의 빈틈없이 수색이 진행되었으나(호숫가와 가까운 쪽은 수심이 비교적 얕고 물이 맑아 배를 띄워 들여다보기만 해도 바닥에 있는 것이 손에 잡힐 듯 보입니다), 여전히 아무런 단서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건이 영영 미해결로 끝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상은 표면적인 사실에 불과했고, 그 이면에서는 한층 더 불가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사건 다음 날, 호반정에서 경찰 조사가 있던 밤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비록 발각될 위기는 한 차례 모면했지만, 저는 어떻게든 엿보기 안경이 신경 쓰여 견딜 수 없었기에 밤을 틈타 그 장치를 완전히 철거해 버릴 작정으로 사람들이 잠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경찰들이 목욕탕 주변을 조사할 때 제가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나무에 가려져 있다 한들, 지붕 밑으로 들어가 올려다보기만 하면 그 쥐색 원통은 반드시 의심을 샀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형사들은 무언가 떨어져 있지 않은지, 발자국이라도 찍혀 있지 않은지 바닥만 살피고 위쪽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덕분에 이 기묘한 장치는 가까스로 발각을 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내일이 되면 또다시 더 정밀한 조사가 이루어질 테니, 이대로 영원히 무사할 리는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오늘 밤 안에 떼어내지 않으면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밤은 사건 탓에 집안이 왠지 모르게 어수선하여 평소보다 훨씬 늦게까지 두런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12시가 넘어가자 겨우 사람들도 잠든 기색이었습니다. 저는 그래도 조심하는 편이 낫겠다 싶어 새벽 1시가 가까워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거울을 들여다보며 탈의실에 사람 그림자가 비치지 않을까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자, 드디어 창밖으로 몰래 빠져나가 비밀 작업에 착수하려던 찰나 무심코 다시 한번 그곳을 들여다본 저는 일순간이긴 했으나 거울 바닥에 끔찍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전날 밤에 보았던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어떤 남자의 손끝이 클로즈업된 영상이었습니다. 손등에는 역시 비슷한 흉터 같은 것이 보였고, 굵고 억센 손가락의 생김새 등 전체적인 인상이 어젯밤의 기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언뜻 비치는가 싶더니 헉하는 사이에 사라져버렸습니다. 결코 꿈이나 환영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뜻밖의 사실과 그 두려움에, 더 이상 아무 그림자도 없는 거울 표면을 응시한 채 한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17장
​잠시 후 넋을 차린 저는 즉시 목욕탕으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전날 밤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습니다. 특히 사건 때문에 물도 데우지 않았고 사람들도 기분 나빠하며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기에, 탈의실은 한층 더 쓸쓸하고 허옇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언뜻 보아서는 검은 나무 바닥과 구별도 되지 않을 정도의 예의 그 혈흔만이 묘하게 으스스한 느낌을 자아내며 제 시선을 끌어당겼습니다.

​한참 귀를 기울여 보아도 당연히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집안 전체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그 무시무시한 손목의 주인을 제외하고는 아마 깨어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터였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는 거울에 비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어쩌면 아직 이 근처 구석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밀려와 저는 도망치듯 목욕탕을 빠져나왔습니다.
​하지만 방으로 돌아와서도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여관 사람들을 깨워 이 사실을 알리려면 역시 엿보기 안경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고, 저는 새삼스레 낮에 조사를 받을 때 왜 그걸 말해버리지 않았던가 몹시 후회해야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도 없었기에 렌즈 장치를 철거하는 것은 뒷전으로 미루고, 저는 황급히 유일한 의논 상대인 고노의 방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그를 무례하게 깨워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속삭이는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그거 참 이상하군요." 고노도 의아한 얼굴을 하며 말했습니다. "범인이 일부러 돌아올 리가 없는데요. 게다가 손목을 본 것만으로 어제 가해자라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 질문을 받고서야 저는 처음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어리석게도 아직 한 번도 손목의 상처에 대해 그에게 말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마츠나가라 자칭하는 남자나 그 동행인의 손목에 과연 같은 흉터가 있었는지에 생각이 미치자, 그 중대한 사실을 한 번도 고려해 보지 않은 제 어리석음이 새삼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런 표식이 있었군요."
고노는 몹시 놀란 눈치였습니다.
​"네, 그건 아마 오른손이겠지만 비스듬하게 일자로 굵은 선이 검붉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게 선생님의 착각이 아니라면 더더욱 이상하네요." 고노는 다소 의심스러운 듯이 말했습니다. "저도 여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투숙객들도 유심히 관찰했습니다만, 손등에 상처가 있는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문제의 트렁크를 든 남자에게도 그런 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손등의 음영이 상처처럼 보인 건 아닐까요?"
​"아니요, 그림자 치고는 색이 짙었습니다. 상처가 아니라도 무언가 그와 비슷한 거겠죠. 결코 잘못 본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건 대단히 중요한 단서군요. 그 대신 사건은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어가지만요."
​"이런 일이 생기니 저는 저 비밀 장치가 걱정돼 견딜 수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떼어내고 싶지만, 왠지 아직 이 근처에 살인범이 숨어 있을 것만 같아 섬뜩해서요."
​"끝까지 비밀로 해두실 작정이군요. 아주 좋은 단서인데 말이죠. 하지만 뭐, 저에게만이라도 알려주셔서 다행입니다. 사실 전 이 사건을 제가 직접 추리해 볼 생각이었거든요. 갑자기 이런 말씀을 드리면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예전부터 범죄라는 것에 일종의 흥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건 저의 억측일지도 모르지만, 고노는 오히려 엿보기 안경의 비밀을 경찰에 알리지 않고 자신의 독점물로 남겨두기를 바라는 듯 보였습니다. 그 증거로 "정 그러시다면 제가 도와드리죠."라며 렌즈 장치 철거 작업을 흔쾌히 도와줄 정도였으니까요.

​그것은 매우 위험한 작업이었습니다. 한밤중인데다 근처에 사람이 있는 방도 없으니 그 점은 안심이었지만, 방금 본 그 손목의 사내가 어두운 정원에 숨어 있다가 해를 가할지도 모를 일이고 경찰 형사들이 잠복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마치 원숭이처럼 나뭇가지를 타고 이동하며 쉴 새 없이 정원 쪽을 경계하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두꺼운 도화지 원통이 군데군데 얼기설기 묶여 있을 뿐이었으므로 떼어내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마침내 작업을 모두 마치고 방 쪽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지붕 위를 기어가던 때였습니다.
​"누구냐!"
​제 뒤에서 갑자기 나지막하지만 힘이 실린 외침이 들렸습니다. 고노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소리친 것입니다.
보니, 정원 건너편 구석에 호수의 희미한 빛을 배경으로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누구냐!"
고노가 다시 한번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그림자 속의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일어서더니 휙 건물 뒤로 몸을 숨기고는 쏜살같이 도망치는 듯했습니다. 딱히 삼엄한 담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호숫가를 따라가면 어디로든 달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자 고노는 단박에 지붕에서 뛰어내려 사내의 뒤를 쫓았습니다.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헉하는 사이에 쫓는 자도 쫓기는 자도 모습을 감추어버렸습니다.
저는 놀란 나머지 지붕 위에 엎드린 채 볼품없는 자세로 오랫동안 꼼짝도 못 하고 있었지만, 생각해 보니 방금 고노가 뛰어내릴 때 난 쿵 하는 소리를 여관 사람들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저는 한시라도 빨리 제 방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이상한 도화지 원통이 남의 눈에 띄었다간 그간의 고생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아니, 그보다 한밤중에 지붕 위를 기어 다니고 있던 것을 대체 무어라 변명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저는 허둥지둥 방으로 들어가 안고 있던 물건들을 트렁크 바닥 깊숙이 쑤셔 넣고, 곧바로 그곳에 깔려 있던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여관 사람들이 소동을 피우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참을 그러고 있어도 딱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아무도 눈치챈 사람은 없는 듯했습니다. 저는 겨우 안심하면서도 그 대신 갑자기 걱정되기 시작한 고노의 안위를 또다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허탕이었습니다."
이윽고 나뭇가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창문 쪽에 무사한 고노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방으로 들어오더니 제 머리맡에 앉아 추적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엄청나게 발이 빠른 놈이라 결국 놓쳐버렸어요. 하지만 그 대신 좋은 걸 하나 주웠습니다. 또 하나의 증거물을 손에 넣은 셈이지요."

​제18장
​고노는 그렇게 말하며 아주 소중한 듯이 품속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습니다.
​"이겁니다. 이 지갑 말입니다."
​보니 금장식이 달린 꽤 고급스러운 반지갑이었습니다. 그것이 아주 불룩하게 부풀어 있었습니다.
"이게 그놈이 도망친 자리에 떨어져 있었어요. 너무 어두워서 괴한의 행색 같은 건 잘 분간할 수 없었지만, 이 지갑은 마침 운 좋게도 목욕탕 뒷문 쪽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바닥에 떨어져 있어서 눈에 띈 겁니다. 물론 그놈이 흘린 게 틀림없죠."
​그리하여 우리는 대단한 호기심을 안고 지갑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무심코 그 내용물을 꺼내 보았을 때, 우리는 또다시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곳에는 기대했던 명함이나 소유주를 나타낼 만한 물건은 단 하나도 없고, 지폐로만, 그것도 손이 베일 듯 빳빳한 10엔짜리 지폐로 약 500엔(당시로서는 상당한 거액)이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이걸 보면 아까 그 남자는 혹시 그 트렁크 신사일지도 모르겠네요. 그 남자라면 이 지갑의 주인으로서 꽤 그럴싸하니까요."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생각이 제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돌발적인 상황에서 우선 그런 상상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군요. 그가 살인범 본인이라 쳐도, 지금 이 시간에 뭣 하러 이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는 걸까요? 도망친 걸 보면 형사 따위는 아니고 범죄에 관련된 자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래도 이상합니다."
고노는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습니다.
​"괴한의 인상착의는 조금도 보지 못하셨습니까?"
"네, 헉하는 순간 도망쳤으니까요. 어둠 속을 박쥐 같은 게 날아간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건 즉 기모노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모자는 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체격은 굉장히 덩치가 큰 사내 같기도 하고, 또 엄청 작아 보이기도 해서 신기하게도 기억이 안 납니다. 호숫가를 따라 정원 밖으로 나가더니 저편 숲속으로 도망쳐 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 깊은 숲이니까요. 쫓아간들 도저히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트렁크 남자는 (마츠나가라고 했죠) 살이 찐 남자였는데,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까?"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다른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건 제 직감입니다만, 이 사건에는 우리가 모르는 제삼자가 개입해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고노는 무언가를 어렴풋이 눈치챈 듯한 말투였습니다. 그 말을 듣자 묘한 오한을 느끼면서 저 역시 그와 똑같은 느낌을 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사건에는 어떤 사람도 아직 알지 못하는 끔찍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발자국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틀렸습니다. 요 이삼일 계속 날이 가물어 흙이 바짝 말라 있고, 정원 밖은 풀이 무성해서 도저히 분간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현재로서는 이 지갑이 유일한 단서군요. 이것의 소유자만 밝혀내면 되는 셈이니까요."
"맞습니다. 날이 밝으면 당장 사람들에게 물어봅시다. 누군가 낯익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는 거의 밤을 새워가며 이 격정적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의 관심은 그저 아이들이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하듯, 무서운 것을 보고 싶어 하는 호기심에 불과했지만, 고노는 범죄 사건의 추리에 깊은 흥미를 느끼고 있는 듯, 말끝마다 그의 판단력의 비범한 예리함이 언뜻언뜻 엿보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사건의 발견자일 뿐만 아니라, 엿보기 안경의 영상부터 시작해 오늘 밤의 일, 그리고 지갑이라는 확실한 물증까지 손에 넣어 경찰도 모르는 여러 단서들을 쥐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한층 더 흥분시켰습니다.
​"유쾌하겠는데요. 만약 우리 손으로 범인을 밝혀낼 수 있다면 말입니다."
저는 엿보기 안경이라는 걱정거리가 사라지자 다소 우쭐해진 기분에 고노의 역할을 빼앗기라도 하듯 이런 말도 해보는 것이었습니다.

​제19장
​"그럼 이 지갑은 제가 맡아두도록 하죠. 그리고 아침이 밝으면 즉시 지배인이나 하녀에게 주인이 누군지 물어보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남기고 고노가 자기 방으로 돌아간 것은 이미 동이 틀 무렵이었습니다. 저로서는 당연히 모든 탐문을 고노에게 맡기고 그 결과만 들으면 그만이므로, 그가 새로운 보고를 가져올 때까지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려고 잠옷 차림으로 이불 위에 앉아 대화에 열중하던 것을 원래대로 베개에 머리를 뉘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한 번 흥분해 버린 머리는 잠을 청하면 청할수록 오히려 말똥말똥해지고, 그러는 사이 주위는 점점 밝아오고 아래층에서는 하녀들의 청소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여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안절부절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가장 먼저 장치가 설치되어 있던 창문 쪽으로 가서 문을 열고 눈에 띌 만한 렌즈 장치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지 않은지 아침햇살 속에서 다시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머리가 피곤했던 탓인지 괜찮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문득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것만 같아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 기우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도화지 원통을 묶었던 철사조차 한 가닥도 남김없이 치워버려 그곳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안심한 저는 이번에는 어젯밤 이상한 인물이 서 있던 장소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2층 창문에서는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고노의 말대로 발자국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은 듯했습니다.
​"하지만 혹시 진흙처럼 무른 땅이 있을지도 몰라. 그곳에 괴한의 발자국이 찍혀 있지 않으리란 법은 없지."
묘하게도 상대인 고노가 범인 추리에 열중하는 것을 보니 저도 그에게 지지 않으려는 마음에 문득 그 발자국을 조사해 보고 싶어진 것입니다. 게다가 간밤의 걱정과 수면 부족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바깥의 상쾌한 공기에 쐬고 싶기도 하여, 저는 그대로 세수도 하지 않고 아래층 툇마루를 거쳐 뒷마당으로 나서 산책을 하는 척하며 목욕탕 뒷문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과연 땅은 바짝 말라 굳어 있었고, 간혹 무른 곳이 있나 싶으면 풀이 자라 있어서 선명한 발자국 따위는 단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호숫가를 따라 정원 끝자락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담장 대신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삼나무 숲속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고, 헉하는 사이 그것이 이쪽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른 아침인 데다 이런 볼일 없는 곳에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저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마치 그 남자가 어젯밤의 괴한이라도 되는 양 겁먹은 눈으로 상대의 거동을 지켜보았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는 수상한 자가 아니라 호반정의 목욕탕 불 때는 사내, 산조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안녕하십니껴. 헤헤헤헤."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바보 같은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했습니다.
​"아, 안녕."
저는 대답을 하면서도 문득 '이 사내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대로 가버리려는 산조를 불러 세우고 무심코 말을 걸었습니다.
"탕을 안 끓이니 한가하겠네. 그래도 참 큰일이 났지?"
"예에, 곤란하게 됐습니더."
"넌 정말 아무것도 눈치 못 챘어? 살인 사건 말이야."
"예에, 전혀요."
"그저께 밤에 목욕탕 안에서 무슨 소리 안 났어? 불 때는 곳이랑은 벽 하나 사이고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구멍까지 나 있는데 뭔가 눈치챘을 법도 한데."
"예에, 깜빡 졸고 있었던지라."
​산조는 사건에 얽히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어제부터 무슨 질문을 받아도 단 하나도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기분 탓인지 제 눈에는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넌 보통 어디서 자지?"
저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이런 식으로 물어보았습니다.
"예에, 저기 불 때는 곳 옆에 있는 세 다다미짜리 방입니더."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목욕탕 건물 뒤편에 석탄 따위가 쌓여 있는 어두침침한 흙바닥이 있고, 그 옆에 미닫이문도 아무것도 없는 마치 거지 움막 같은 다다미가 깔린 곳이 보였습니다.
​"어젯밤에도 저기서 잤지?"
"예."
"그럼 새벽 2시쯤에 무슨 이상한 일 없었어? 난 무슨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예에, 별일 없었습니더."
"잠을 안 깼다고?"
"예."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괴한 추적 소동조차 이 어리석은 자의 단잠을 깨우지는 못했던 모양입니다.
더 이상 물어볼 것도 없었지만 저는 왠지 그 자리를 떠나기 아쉬운 기분에 산조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상대인 산조 쪽에서도 무언가 머뭇거리며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깃에 '호반정'이라 물들인 낡은 겉옷을 입고 무릎이 튀어나온 헐렁한 메리야스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 초라한 행색에 어울리지 않게 수염을 말끔하게 깎은 얼굴이 묘하게 제 주의를 끌었습니다. '이 사내도 수염을 깎을 때가 있구나.' 저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모자란 자였지만, 그렇게 차려입고 보니 밋밋한 얼굴의 제법 반반한 사내였습니다. 좁은 M자형 이마가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요.

​제20장
​어찌 된 영문인지, 그 후 저는 그의 손목으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딱히 흉터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저는 사건 이후 묘하게 사람들의 손목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버릇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물론 이 어리석은 산조를 의심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상대를 바라보는 동안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제부터 여러 번 질문을 받아도 이 남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만 하는데, 그건 물어보는 방식이 잘못된 건 아닐까? 묻는 사람들은 아무도 시간을 말해주지 않았다. 살인이 일어난 시간을 말해주지 않고 그저 무슨 소리가 안 났냐고만 묻고 있다. 그러니 대답할 방도가 없는 것이지. 만약 시간만 확실히 일러준다면, 이 남자는 좀 더 다른 대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저는 과감히 산조에게만 시간의 비밀을 털어놓아 보기로 했습니다.
"살인이 일어난 건 그저께 밤 10시 반쯤이 아닐까 싶어." 저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말이지, 딱 그쯤에 내가 목욕탕 쪽에서 이상한 비명 같은 걸 들었거든. 넌 못 느꼈어?"
​"예에, 10시 반쯤." 그러자 산조는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듯 표정이 조금 뚜렷해지더니, "10시 반이라면, 아아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더. 손님, 딱 그 시간에 저는 목욕탕에 없었습니더. 주방 쪽에서 야식을 묵고 있었지예."
​듣자 하니 그는 업무 특성상 취침 시간이 늦어지므로, 당연히 식사도 다른 고용인들보다 훨씬 늦게, 투숙객들의 목욕이 한 차례 끝날 무렵 눈치를 보아 먹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야식이라고 해봐야 대단한 시간도 아닐 텐데, 그 짧은 시간에 그만한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만약 네가 주의를 기울였다면 밥 먹기 전이나 후에 무슨 소리라도 들었을 텐데."
"예에, 그게 전혀."
​"그럼 말이야, 네가 주방에 가기 바로 전이나 주방에서 돌아온 후에 목욕탕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은 기척은 없었어?"
"예에, 그러고 보이 주방에서 돌아왔을 때 누가 안에 있는 것 같았습니더."
"들여다보지는 않았고?"
"예."
"그럼 그건 언제쯤이었지? 10시 반쯤 아니야?"
"잘은 모르겠지만 10시 반보다는 늦었다고 생각합니더."
​"어떤 소리가 났는데? 물을 흘려보내는 소리 같았어?"
"예에, 무지막지하게 물을 쓰는 것 같았습니더. 그렇게 물을 펑펑 쓰는 분은 우리 사장님 말고는 없습니더."
"그럼 그때 있던 건 여기 사장님이었단 말이야?"
"예에, 아무래도, 또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고예."
"그렇지만도 않다니, 그건 어떻게 알았어?"
"헛기침 소리가 아무래도 사장님 같지 않아서예."
​"그럼 그 목소리는 네가 모르는 사람 목소리였어?"
"예에, 아이고, 왠지 고노 선생님 목소리인 것 같았습니더."
"뭐, 고노라니, 저기 26호실 쓰는 고노 선생님 말이야?"
"예에."
"그거, 진짜야? 중요한 일이라고. 확실히 고노 선생님 목소리였어?"
"예에, 그거야 뭐, 확실합니더."

​산조는 의기양양하게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바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도 좋을지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처음의 애매한 태도에 비해 지금의 단정적인 대답은 조금 뜬금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재차 질문을 던지며 산조의 위태로운 기억을 확인하려 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그때의 입욕자가 고노였다는 것을 맹목적으로 주장할 뿐 그것에 대해 아무런 확증도 없어 결국 저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제21장
​저는 이 사건에 대해 처음부터 하나의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지금 산조의 고백을 듣고 나니 한층 더 깊어졌습니다. 설령 상대가 바보 같은 산조라 하더라도, 그곳에는 목욕탕 관리인 전용의 작은 출입구도 있고 손님에게 물 온도를 묻기 위한 작은 엿보기 구멍도 있는데, 만약 그가 불 때는 곳에 있었다면 반드시 범행을 들켰을 게 뻔합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 대대적인 살인(혹은 시체 토막)을 저지른다는 것은 너무나도 무모한 짓이 아닐까요?

​아니면 범인은 미리 산조가 자리를 비운 것을 확인해 두고 범행을 저지른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 쳐도 야식을 먹고 있던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그 엄청난 작업을 해낼 수 있었을까요? 그 점이 왠지 모르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산조가 들었다는 물 쓰는 소리는, 범인이 관리인이 돌아온 것도 모르고 목욕탕 콘크리트 바닥의 핏자국을 씻어내던 소리였을까요? 그런 터무니없는, 악몽 같은 일이 정말로 있었을까요? 게다가 한층 더 불가사의한 것은 산조의 말에 따르면 그 물을 씻어내던 남자가 고노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주 어처구니없는 상상이지만, 범인은 다름 아닌 고노이며 그는 자기 자신을 추리하려는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생각하면 할수록 이 사건은 점점 더 불가사의하게만 보였습니다.

​저는 그곳에 우두커니 선 채 오랫동안 기괴한 상념에 잠겨 있었습니다.
"여기 계셨군요. 아까부터 찾았습니다."
​그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그곳에는 언제 자리를 떴는지 산조의 모습은 없고, 대신 고노가 서 있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그는 힐끗힐끗 제 얼굴을 살피며 물었습니다.
​"아아, 어젯밤 그놈의 발자국을 찾으러 왔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안 남아 있더군요. 마침 여기에 불 때는 산조가 있길래 그 녀석에게 이것저것 묻고 있던 참입니다."
​"그렇습니까? 뭐라던가요, 그 녀석?"
고노는 '산조'라는 이름을 듣자 몹시 흥미를 느낀 듯 열성적으로 되물었습니다.
"아무래도 애매해서 잘 모르겠던데요."
​저는 고노에 관한 부분만 쏙 빼놓고 산조와의 문답 대강을 반복해 들려주었습니다.
"그 녀석 좀 이상하네요. 엄청난 거짓말쟁이일지도 모릅니다. 함부로 믿을 게 못 됩니다." 고노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지갑 말입니다. 주인을 알아냈습니다. 이 여관 주인의 것이었습니다. 4, 5일 전에 잃어버려서 찾고 있던 중이었다고 하더군요.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아쉽게도 본인은 전혀 기억을 못 한다고 합니다만, 어쨌든 하녀나 지배인에게 물어보아도 주인의 물건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 그걸 어젯밤 그놈이 훔쳤다는 거군요."
"뭐, 그렇겠죠."
"그럼 그게 저 트렁크 남자와 동일 인물일까요?"
"글쎄요. 만약 그렇다면, 한번 도망쳤던 그 남자가 왜 어젯밤에 여기로 돌아왔는지... 왜 그럴 필요가 있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게 되네요."
​그렇게 우리는 또다시 한동안 논쟁을 벌였지만, 사건은 새로운 발견이 있을 때마다 오히려 점점 더 복잡하고 불가해해질 뿐 조금도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22장
​저는 드디어 살인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든 셈이었습니다. 안경 장치를 떼어내기 전까지만 해도 예정된 체류 기간이고 뭐고 빨리 이 꺼림칙한 장소를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그 장치도 사라지고 내 한 몸에 대한 걱정이 걷히고 나니, 이번에는 타고난 호기심이 불쑥 솟아올라 고노와 함께 오직 우리들만의 단서로 범인 수색을 해보겠다는 대담한 소망마저 품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에는 근처 재판소에서 담당 관리들도 파견을 나오고, 목욕탕 얼룩이 인간의 혈액이라는 것도 밝혀져 Y마을 경찰서에서는 이미 대대적인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수색 작업은 그 거창한 규모에 비해 전혀 진척이 없었습니다. 고노와 안면이 있는 마을 순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문외한인 저희들조차 답답해질 지경이었습니다. 그 경찰의 무능함이 한편으론 저를 부추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고노의 열성적인 추리 행각이 적잖이 제 호기심을 자극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저는 방으로 돌아와 지금 목욕탕 관리인 산조에게서 전해 들은 사실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산조가 식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목욕탕 안에 누군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가 범죄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은 시간상으로 볼 때 거의 확실했습니다. 그런데 산조의 말에 따르면 그것이 바로 저와 함께 아마추어 탐정 행세를 하고 있는 저 고노였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노가 살인범 본인이란 말인가?'

​문득 저는 형언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습니다. 만약 목욕탕에 그토록 많은 피가 흐르지 않았거나, 혹은 피가 흘렀더라도 그것이 물감이라든가 다른 짐승의 피였다면, 고노의 괴짜 같은 성격과 결부시켜 그의 장난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혈흔이 명백히 사람의 피라는 것이 판명되었고, 그 양도 닦아낸 흔적으로 미루어보아 피해자의 목숨을 앗아가기에 충분하다는 것이 밝혀진 이상, 그때 목욕탕에 있던 것이 고노가 확실하다면 그야말로 무서운 범죄자인 것입니다.
​하지만 고노는 대체 왜 조키치를 죽였을까요? 또, 그 시체를 어떻게 처분할 수 있었을까요?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가 범인이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첫째로 지난밤의 수상한 사람 그림자 하나만 보아도 그의 무죄를 증명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보통 사람이라면 살인을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현장에 머물면서 탐정 흉내 따위를 낼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산조는 단지 헛기침 소리만 듣고 그것이 고노였다고 주장하는데, 사람의 귀는 잘못 듣는 일도 허다하고, 하물며 들은 사람이 바보인 산조이니 이것은 분명 어떤 착각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 목욕탕에 누군가 있었다는 것만은 사실인 듯싶습니다. 산조는 "그렇게 물을 쓰는 분은 여기 사장님밖에 없습니더"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고노가 아니라 호반정의 주인이 아니었을까요?
​생각해 보면 그 그림자 사내가 떨어뜨리고 간 지갑도 그 주인의 물건이었습니다. 비록 고용인들이 주인의 지갑이 분실된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그림자 사내와 주인이 동일 인물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억지일지 모르지만, 산조의 말이나 주인의 꿍꿍이 있는 듯한 인품을 보면 거기에 뭔가 의심스러운 그림자가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수상한 것은 예의 그 트렁크 신사입니다. 시체 처리…… 두 개의 대형 트렁크…… 그곳에 끔찍한 의혹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산조가 들었던 사람의 기척은 고노도, 여관 주인도 아닌 역시나 그 트렁크 남자였을까요?
​그 트렁크 신사에 대해서는 경찰 측에서도 유일한 용의자로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 조사했습니다만, 심야에 호반정 현관을 나선 이후 그들이 어떤 변장을 하고 어디로 어떻게 도망쳤는지 전혀 오리무중이었습니다. 트렁크를 든 양복 남자를 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멀리 도망쳐버린 것일까요? 아니면 아직 이 산속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일까요? 지난밤의 수상한 사람 그림자 같은 것을 보면, 어쩌면 숨어 있는 쪽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 어딘가 구석에서(아주 가까운 곳일지도 모릅니다) 살인을 저지른 극악무도한 자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제23장
​그날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저는 문득 생각이 나서 기슭 마을에서 츠타야의 시메지라는 기생을 불렀습니다. 딱히 샤미센 소리가 듣고 싶어서도, 시메지라는 여자에게 흥미를 느껴서도 아니었습니다. 하녀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가 죽은 조키치와 가장 친한 사이였다고 하기에, 조키치의 신상에 대해 조금 물어볼 요량이었습니다.
​"오랜만이네요."
전에 한 번 부른 적이 있는 것을 기억하고, 연륜 있는 기생 시메지는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거리낌 없이 말을 건넸습니다. 제 목적을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보다 다행이었습니다.
​"샤미센 같은 건 저쪽에 치워두고, 편하게 오늘 밥이나 먹으면서 이야기나 나누지."
저는 곧장 그런 식으로 말을 꺼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시메지는 잠시 웃음을 거두고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제 목적을 대충 눈치챘는지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미소로 바뀌어 스스럼없이 밥상 맞은편에 앉았습니다.

​"조키치, 정말 가여운 일을 당했지 뭐예요. 저랑은 참 친했거든요. 그 목욕탕의 핏자국은, 선생님과 고노 선생님께서 발견하셨다면서요? 전 징그러워서 도저히 못 보겠더라고요."
​그녀 자신도 저처럼 살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눈치였습니다. 그녀는 피해자의 동료이고, 저는 사건의 발견자입니다. 저는 그렇게 그녀와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아무런 부자연스러움 없이 당초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자네, 용의자인 트렁크를 들고 다니던 두 남자 알지? 그 손님과 조키치는 어떤 관계였나?"
때를 보아 저는 이런 식으로 요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11호실 손님은 조키치 단골이었어요. 자주 불려 갔던 모양이에요."
"자고 간 적도 있었고?"
"그건 한 번도 없다고 하던데요. 전 조키치한테 그 사람들 소문을 자주 들었는데, 살해당할 만큼 깊은 관계 같은 건 전혀 아니었어요. 첫째로 그 사람들은 여기 처음 온 손님이고, 온 지도 일주일이 채 안 됐을 거예요. 그런 관계가 생길 리가 없죠."
"난 잠깐 얼굴만 봤는데, 어떤 남자들이었나, 그 두 사람. 혹시 조키치한테 들은 얘기 없어?"
​"특별히 이렇다 할 건, 뭐 평범한 손님들이었죠. 근데 대단한 부자 같다고 하더라고요. 틀림없이 지갑이라도 봤겠죠. 돈이 썩어나게 많아서 조키치가 깜짝 놀랐대요."
"호오, 그렇게 부자였어? 그에 비하면 별로 사치스럽게 놀지도 않던 것 같던데."
"그러게요. 항상 조키치 혼자만 부르고, 게다가 샤미센도 안 켜게 하고 음침하게 이야기만 나눴대요. 매일 방에 틀어박혀서 산책 한 번 안 하는 이상한 손님이라고 지배인님도 그러더라고요."
​트렁크 신사에 대해서는 그 이상 별다른 이야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에는 조키치 본인의 신상으로 화제를 돌렸습니다.
​"어차피 조키치에게도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겠지?"
"아유, 그거예요." 시메지는 눈웃음을 치며, "조키치라는 사람은 무척 과묵하고, 게다가 이쪽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저라 해도 그 사람 속마음 같은 건 전혀 몰라요. 어딘가 맘을 열지 않는 구석이 있었거든요. 손해 보는 성격이죠. 그래서 깊은 속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엔 그렇게 좋아하는 남자 같은 건 없었던 것 같아요. 이런 장사에도 안 어울리는, 꼭 양갓집 규수 같은 애였어요."
"정해진 기둥서방 같은 건?"
​"마치 요전번 형사님 같네." 시메지는 너스레를 떨며 웃었습니다. "그건 있었죠. 마츠무라(松村) 씨라고. 이 근처 산주(山主)의 아들인데, 아주 정신을 못 차렸죠. 아니, 그 아들 쪽이요. 그래서 말인데, 요새 조키치를 첩으로 들어앉히겠다는 이야기까지 오가고 있었거든요. 근데 조키치 쪽에서 그걸 또 엄청 싫어해서, 죽어도 응하려 하지 않았대요."
​"그런 일이 있었나?"
"네, 그날 밤에도요, 조키치가 살해당한 밤 말이오. 2층 큰 연회 손님들 중에 그 마츠무라 씨가 있었는데, 평소엔 점잖은 사람인데 술버릇이 나빠서 사람들 앞에서 조키치를 몹시 괴롭혔대요."
"괴롭히다니?"
"아유, 그야, 시골 사람들은 난폭하잖아요. 때리거나 꼬집거나 했다는군요."
​"설마 그 사람이." 저는 농담하듯 말했습니다. "조키치를 죽인 건 아니겠지?"
"어머, 깜짝 놀라게 왜 그러세요." 내 말투가 나빴는지 시메지는 몹시 겁먹은 듯, "그건 확실해요. 저, 형사님한테도 말했는데요, 마츠무라 씨는 연회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어요. 그리고 돌아갈 때는 저랑 같은 차를 탔으니까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제가 시메지로부터 알아낸 바는 대략 이상이 전부였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또다시 한 명의 의심스러운 인물을 발견한 것입니다. 마츠무라라는 남자는 시메지의 증언에 따르면 연회 도중 한 번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술기운이 난무하는 대연회에서 그녀 역시 아마 취해 있었을 테니 시메지의 말을 그대로 믿어도 될지 의심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시메지를 돌려보낸 뒤, 저는 어질러진 밥상을 앞에 두고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뇌리에는 트렁크의 남자를 시작으로 고노에게 쫓기던 그림자 사내, 호반정의 주인, 방금 들은 마츠무라 청년, 끝내는 그 고노의 모습까지가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물론 이렇다 할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마다 왠지 모르게 의심스럽고 묘하게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제24장
​자, 그날 밤의 일입니다. 한때 출입이 금지되었던 문제의 목욕탕은, 손님 장사에 지장을 준다는 호반정 주인의 간청이 받아들여져 마침 그날부터 탕을 끓이게 되었는데, 시메지를 돌려보내고 한참 상념에 잠겨 있던 저는 밤 9시쯤 되어 오랜만에 그 목욕탕에 들어가 볼 마음이 생겼습니다.
​탈의실 나무 바닥의 혈흔은 깨끗하게 깎여 나갔지만, 그 깎아낸 자리에 하얗게 나뭇결이 드러난 모습은 오히려 묘하게 기분 나빠 지난밤의 피비린내 나는 사건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손님이라고 해봐야 살인 소동에 간담이 서늘해져 대부분 여관을 떠나버렸고, 남아 있는 것은 고노와 저 외에 세 명의 남자 손님 일행뿐이었습니다. 예의 그 엿보기 안경의 꽃이었던 도시의 아가씨 일가족 등은 사건 다음 날 서둘러 떠나버렸습니다. 그렇게 손님이 적은 데다 다수의 고용인들은 아직 목욕을 하지 않았기에, 욕조는 맑게 가라앉아 있었고 그 안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발톱 하나하나까지 다 들여다보일 정도였습니다.

​남녀 구별이야 없지만 도시의 대중목욕탕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널찍한 욕조, 휑한 씻는 곳, 높은 천장, 그 중앙에 하얗게 매달린 전등, 전체적인 분위기가 여름임에도 묘하게 스산하여, 문득 그 콘크리트 바닥에 인체 절단 광경 같은 것이라도 보일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쓸쓸한 김에 요 며칠 사이 안면을 튼 산조가 벽 하나 너머 불 때는 곳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예의 그 작은 엿보기 구멍 덮개를 열고 그의 모습을 찾았습니다.
"산조 씨."
​말을 건네자,
"예이."
하고 대답하며, 커다란 아궁이의 한구석에서 그의 얼빠진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석탄의 강렬한 화기에 비춰져 붉고 검게 번쩍이는 모습이, 이 또한 기이한 느낌이었습니다.
​"물이 좋네."
"에헤헤헤헤헤헤."
산조는 어두운 곳에서 바보처럼 웃었습니다.

​저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구멍 덮개를 닫고, 서둘러 욕조를 나와 씻는 곳에 서서 몸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눈앞 창문의 불투명 유리가 조금 열려 있어, 전날 밤 괴한이 도망쳤다는 깊은 숲의 한 자락이 보였고, 그 새카만 어둠 속에 오직 한 점 하얗게 빛나는 것이 반짝반짝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무언가 잘못 본 것은 아닐까 하여 한동안 손을 멈추고 지켜보는 사이, 이번에는 위치를 조금 바꿔서 또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아무래도 누군가가 숲속을 헤매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한 상황이었으니 저는 곧바로 전날 밤의 괴한을 연상했습니다. 만약 그 남자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다면 모든 의문은 눈 녹듯 사라질 것입니다. 저는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둘러 옷을 주워 입고는 우회하여 정원에서 숲 쪽으로 나아갔습니다. 도중에 고노의 방에 들러보았으나 어딜 갔는지 그의 방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별빛 하나 없는 암야였습니다. 그 속을 희미하게 명멸하는 불빛 하나에 의지해 더듬더듬 나아가는 것입니다. 겁쟁이인 제가 어찌 그런 대담한 짓을 할 수 있었는지, 나중에는 스스로도 신기하게 여길 정도였지만, 그때의 저는 일종의 공명심으로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였습니다. 그렇다고 괴한을 잡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그에게 접근해 그 정체만을 확인할 작정이었습니다.

​앞서 말했듯 호반정 정원을 나서면 바로 숲의 입구였습니다. 저는 큰 나무 밑동에서 밑동으로 몸을 숨기며, 조심조심 불빛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조금 가다 보니 과연 어렴풋이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회중전등을 비추며 열심히 땅바닥을 살피는 듯 보였습니다. 무언가, 뭐랄까 물건을 찾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자인지, 아직 멀어서 잘 분간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더욱 용기를 내어 남자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다행히 나무 기둥들이 겹겹이 늘어서 있어 소리만 내지 않으면 들킬 염려는 없었습니다.
이윽고 저는 상대의 옷의 줄무늬 패턴부터 이목구비 형태까지 어스름하게 보일 만큼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제25장
​수상쩍은 사내는 노인처럼 등을 구부리고 조그만 회중전등에 의지해 무언가를 찾는 듯 풀숲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전등 위치에 따라 그는 새카만 그림자가 되기도 하고, 허연 유령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문득 전등을 바꿔 쥘 때면 주변 나뭇가지가 기분 나쁜 생물처럼 일렁였고, 때로는 제 자신이 불빛에 직접 노출되어 무심코 나무 기둥 뒤로 몸을 숨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말해도 콩알만 한 회중전등 불빛인데다, 게다가 그 스스로 그것을 휘두르고 있었기에 그 모습을 똑똑히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저는 절대적으로 안전한 위치를 골라, 마치 적에게 접근하는 병사들이 지형지물에서 지형지물로 몸을 숨기며 나아가듯 나무 기둥을 누비며 조금씩 조금씩 전진했습니다.

​이 야심한 밤에 숲속에서 물건을 찾는다는 것도 이상하고, 그가 이 근처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도시풍 남자라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저는 전날 밤의 수상한 남자, 고노가 쫓아가다 놓친 남자를 떠올렸습니다. 저놈과 이놈이 동일 인물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도저히 그 얼굴 생김새를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거의 2미터 남짓한 곳까지 다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둠 속인지라 답답하게도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은 바람이 몹시 불어 숲 전체가 술렁거렸으므로 조금쯤 소리를 내도 들릴 염려가 없었고, 그 때문인지 상대는 조금도 저를 눈치채지 못한 채 물건 찾기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좌우로 오락가락하는 회중전등 불빛에 의지해 저는 끈기 있게 남자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무리 찾아도 목적한 물건을 발견하지 못한 모양인지 남자는 끝내 포기한 듯 허리를 펴더니 덥석 회중전등을 끄고는 바스락바스락 어딘가로 떠나려는 기색이었습니다.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저는 즉각 그의 뒤를 밟기 시작했습니다. 미행이라고는 해도 어둠 속이니 그저 희미하게 풀을 밟는 발소리에 의존해 상대의 위치를 가늠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지금 말한 거센 바람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아 무섭기도 하고 이런 일에 익숙지 않은 저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그렇게 허둥대는 사이 희미한 발소리마저 끊어지고 저는 마침내 그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지고 말았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상대를 놓쳐버리다니 여태껏의 고생이 수포로 돌아간 셈입니다. 설마 숲속 깊은 곳으로 도망친 것은 아니겠지요. 그놈은 제게 들킨 것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으니 필시 가도(街道) 쪽으로 나갔을 게 분명합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저는 지체 없이 호반정 앞을 지나는 마을 길로 달려갔습니다.
​산골 마을인지라 여관 말고는 불빛이 새어 나오는 집조차 없고, 새카만 가도에는 인적조차 없습니다. 멀리서 마을 청년이 불어대는 솜씨 없는 퉁소 소리가 바람 소리에 섞여 왠지 모르게 구슬프게 들려왔습니다.
​저는 그 한길에 서서 한동안 숲 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렇게 떨어져서 보니 괴물 같은 거목들이 바람에 요동치는 모습은 한층 섬뜩하여 더욱 향수병을 자아낼 뿐이었고, 아까 그 이상한 인물은 아무리 기다려도 나올 기미가 없었습니다.
​십 분쯤 그렇게 있었을까요, 이제 영영 글렀다고 포기하면서도 왠지 아쉬움이 남아, 이참에 다시 한번 고노의 방을 찾아가 그가 있다면 함께 숲속을 찾아보리라 마음먹고 황급히 숨을 헐떡이며 여관 현관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나막신을 벗는 것도 답답해하며 복도를 미끄러지듯 걸어 그의 방에 다다르자 다짜고짜 방문을 왈칵 열어젖혔습니다.

​제26장
​"아, 들어오시죠."
다행히 고노는 돌아와 있었고, 제 얼굴을 보더니 여느 때처럼 미소로 맞이했습니다.
​"선생님, 지금 숲속에 말입니다, 또 그 이상한 놈이 있습니다. 잠깐 나가보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다급하게, 그러나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요전번 그 남자 말입니까?"
"그럴지도 모릅니다. 숲속에서 회중전등을 켜고 뭔가 찾고 있더라고요."
"얼굴은 보셨습니까?"
"도저히 알 수가 없었어요. 아직 그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잠깐 나가보실까요?"
​"선생님은 앞쪽 가도 쪽으로 나가셨습니까?"
"맞습니다. 다른 도망갈 길은 없으니까요."
"그럼 지금 가봐야 헛수고일 겁니다. 괴한이 가도 쪽으로 도망칠 리가 없으니까요."
고노는 의미심장하게 말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무언가 알고 계시군요."
저는 무심코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네, 사실 어느 정도까지 범위를 좁힐 수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있으면 전부 밝혀집니다."
고노는 무척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범위를 좁혔다니요?"
"이번 사건의 범인은 결코 외부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말은, 여관 사람 중에 범인이 있다는……."
"뭐, 그렇습니다. 여관 사람이라면 숲에서 뒷문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 가도 쪽으로는 도망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런 걸 아셨습니까? 대체 누굽니까? 사장입니까, 고용인입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저는 오늘 아침부터 그 일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충 목표를 정할 수 있었죠. 하지만 섣불리 지목하는 건 삼가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고노는 평소와 달리 의미심장하고 묘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저는 적잖이 불쾌했지만 그보다 호기심이 앞서 계속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관 사람이라니 이상하군요. 실은 저도 어떤 사람을, 아마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그 사람일 거라고 봅니다만, 일단 의심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풀리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시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가 불분명합니다."
​"바로 그겁니다." 고노도 고개를 끄덕이며 "저 역시 그 점만을 아직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말하는 투로 보아 그가 의심하고 있는 것은 문제의 지갑 주인인 호반정 주인이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필시 그는 제가 아는 것 이상의 확실한 증거라도 잡았겠지요.
​"게다가 예의 그 손등의 흉터 말입니다. 저는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는데, 여관 사람들이나 투숙객들 누구의 손에도 그것이 없습니다."
"흉터 건은, 저 나름대로 해석을 내렸습니다. 아마 맞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직 확실한 건 모릅니다."
​"그럼 트렁크의 남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재로선 누구보다 그 두 사람이 수상하지 않습니까? 조키치가 그들의 방에서 도망쳐 나온 것이나, 트렁크의 남자가 조키치의 행방을 찾아 헤맨 것이나, 그들의 갑작스러운 출발, 그리고 두 개의 대형 트렁크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아니, 그건 아무래도 우연의 일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전 오늘 아침에 그 사실을 깨달았는데, 선생님이 살인 광경을 본 것이 10시 35분경이었지요? 그리고 계단 아래서 그들과 마주쳤을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선생님 말씀으로는 5분이나 10분 정도인 것 같습니다만."
"그렇습니다. 길어야 10분 정도겠죠."
​"바로 그거요! 그게 착각의 원인입니다. 저는 만약을 위해 그들이 출발한 시간을 지배인에게 물어보았는데 지배인의 대답 역시 마찬가지로, 그 사이에는 5, 6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시체를 처리해서 트렁크에 쑤셔 넣는 곡예가 가능할까요? 설령 트렁크에 넣지 않는다 쳐도, 사람을 죽이고 핏자국을 닦아내고 시체를 숨기고 출발 준비를 한다? 그 모든 일이 5분이나 10분 만에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트렁크 남자를 의심하다니 정말 바보 같은 짓이죠."
​듣고 보니 과연 고노의 말이 맞았습니다. 대체 저는 얼마나 바보 같은 망상을 품고 있었던 걸까요. 경찰 측에서는 제 착각 따위는 눈치채지 못하니, 하녀들의 증언에만 의지하여 힘없이 트렁크 남자를 의심해 버린 것입니다.

​"조키치를 쫓아다닌 것 따위야 기생과 취객 사이에는 흔히 있는 일입니다. 이상한 눈으로 보니까 일이 꼬이는 거죠. 불시의 출발이라 해도 그들에게 어떤 급한 일이 생겼는지 모를 일이고, 선생님과 마주쳐서 놀랐다는 것도 누구라도 그런 뜻밖의 상황에선 깜짝 놀라지 않겠습니까."
고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습니다.
​그 후로 한동안 우리는 그 엄청난 착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크나큰 실책에 고노에게도 면목이 없어 "바보 같았군, 바보 같았어."를 연발할 뿐, 그 이상 진범을 파헤칠 여유도 없이 흐지부지 제 방으로 물러났습니다.
그때 저는 고노의 말투에서 그가 의심하는 대상이 여관 주인이 틀림없다고 단정 짓고 저 역시 그럴 줄 알고 응대했었는데, 나중에 보니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저라는 인간은 이 이야기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광대 역할을 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탐정 흉내는커녕 말입니다.

​제27장
​자, 이야기는 조금 건너뛰어 그로부터 3, 4일 뒤 밤의 일로 넘어갑니다. 그사이 딱히 말씀드릴 만한 사건은 없었습니다. 고노는 매일 어딘가로 나가는 듯 제가 찾아갈 때마다 방에 없어서, 저를 배제하는 듯한 그 태도에 반감이 생기기도 했고, 또 하나는 예의 그 착각이 멋쩍어서 저는 예전처럼 아마추어 탐정 흉내를 낼 마음이 싹 가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건을 내버려 두고 여관을 떠나자니 그것도 아쉬워,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고노의 말을 믿고 여전히 체류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경찰 측에서는 앞서 말한 대대적인 트렁크 수색 작업을 시작으로 숲속, 호숫가를 샅샅이 뒤졌으나 결국 아무런 소득이 없는 눈치였습니다. 그런 헛수고를 끼칠 것 없이 그저 시간의 착오에 대해 한마디만 했으면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고노가 "시체 수색도 겸하는 것이니 말릴 필요까지는 없겠지" 하기에 저도 그 말에 동의하여 경찰에 대해서는 끝까지 비밀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관 주인의 동태를 살피는 것과 고노의 방을 찾아가는 것을 일과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거동에는 이렇다 할 수상한 점이 없었고 고노는 번번이 외출 중이었습니다. 참으로 기다림에 지친, 지루한 며칠이었습니다.
​그날 밤도 어차피 또 없겠거니 하고 지레짐작하며 고노 방의 문을 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는 주인공인 고노뿐만 아니라 마을 주재소 순사의 얼굴도 보였고 무언가 열띠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아, 마침 잘 오셨습니다. 들어오시죠."
제가 머뭇거리고 있는 것을 보자 고노는 서글서글하게 말을 건넸습니다. 저는 평소 같으면 자리를 피해야 마땅하나, 아무래도 사건에 관한 이야기인 듯하여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하라는 대로 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친하게 지내는 분입니다. 믿을 만한 분이니 계속 말씀하시죠."
고노는 저를 소개하며 말했습니다.

​"방금도 말했듯이, 이 호수 건너편 마을에서 온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순사는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저는 이곳으로 오던 중 우연히 거기를 지나치다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걸 들었는데요. 아무래도 이틀 전 한밤중의 일이라는 겁니다. 이상한 냄새가 났다는군요. 알아챈 건 그 남자뿐만 아니라 같은 마을의 여러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대체 무슨 냄새냐 하면, 그게 화장장 냄새라는 겁니다. 이 근처에는 화장장 같은 건 없으니까요. 아무래도 이상한 거죠."
​"사람을 태우는 냄새라는 거군요."
고노는 대단히 흥미가 동한 듯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태우는 냄새요. 그 형언할 수 없는 지독한 냄새 말입니다. 그걸 듣고 저는 문득 이번 살인 사건을 떠올렸습니다. 마침 시체가 사라져서 곤란하던 참이니까요. 사람을 태우는 냄새라고 하니 뭔가 연관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요 며칠 바람이 몹시 불었지요." 고노는 뭔가 짚이는 데라도 있는지 기세를 올려 "남풍이군요. 그래 남풍이 계속 불었다는 점이 핵심이야."
"무슨 뜻입니까?"
"그 냄새가 났다는 마을은 마침 이 마을의 정남쪽 아닙니까?"
"정남쪽입니다."
"그럼 이 마을에서 사람을 태우면, 그건 거센 남풍을 타고 호수를 건너 건너편 마을까지 냄새가 퍼져나갈 테죠."
​"하지만 그렇다면, 건너편 마을보다는 여기서 냄새가 더 심하게 났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호숫가에서 태웠다고 가정하면, 바람이 거세게 불었으니 냄새는 전부 호수 쪽으로 날아가 버려서 정작 이 마을에서는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바람이 부는 방향의 위쪽이니까요."
​"그렇다 해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사람을 태우다니,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요."
"어떤 조건하에서는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목욕탕 아궁이 속 같은 데서라면……"
"예? 목욕탕이라고요?"
"네, 목욕탕 아궁이입니다. ……저는 오늘까지 두 분과는 별개로 저 혼자 이 사건을 추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범인을 밝혀냈지만, 단 하나 시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 경찰에 알리는 것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금 그 이야기를 듣고 모든 것이 명확해진 것 같습니다."
​고노는 우리가 놀라는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뒤로 돌아 가방을 끌어당기더니 그 안에서 단도 한 자루를 꺼냈습니다. 칼집은 없고 새카맣게 때가 탄 15센티미터 남짓한 백목 자루의 칼이었습니다. 그것을 보자 저는 헉하고 어떤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거울 표면에서 살인 그림자를 보았을 때 남자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것이 바로 그런 단도였던 것입니다.
​"이것 본 적 없으십니까?"
고노는 저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네, 그런 모양의 단도였습니다."
저는 무심코 입을 놀렸다가 그곳에 순사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아차 싶었습니다. 엿보기 안경의 비밀이 탄로 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어떻습니까, 이참에 털어놓으시는 게." 고노는 제 실언을 기회 삼아 "어차피 알려질 일이고, 게다가 엿보기 안경 건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제 이야기가 거짓말이 되어버리니까요."
생각해 보면 그의 말이 맞았습니다. 이 단도를 본 적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손등의 흉터 건이나 트렁크 남자의 무죄를 증명하는 시간 문제, 혹은 엿보기 안경을 떼어낼 때 발견한 수상한 그림자에 대해서나, 그 외 여러 가지 점에서 그것을 털어놓지 않으면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실은 쓸데없는 장난을 쳤습니다."
저는 궁지에 몰려 이런 식으로 말을 꺼냈습니다. 고백할 바에야 고노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저 스스로, 적어도 완곡하게나마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여관 목욕탕 탈의실에 기묘한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거울과 렌즈의 작용으로 제 방에서 그곳을 엿볼 수 있게 한 겁니다. 딱히 악의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워낙 무료해서 학교에서 배운 렌즈의 원리를 한번 응용해 본 것뿐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저의 변태적인 성향 등에는 닿지 않게 담백하게 설명했습니다. 순사는 너무나 엉뚱한 이야기라 조금 납득이 가지 않는 눈치였으나, 반복해서 설명하는 사이 이야기의 줄거리만은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중요한 시간 문제 등을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던 것은 참으로 죄송합니다만, 첫 조사 때 하마터면 말할 기회를 놓쳐버린 데다가, 또 하나는 그런 이상한 장치를 해놓은 탓에 혹여 제가 범죄에 관련된 것처럼 오해라도 받을까 걱정되어서 그랬습니다. 하지만 방금 고노 군의 말로는 이제 범인도 밝혀졌다고 하니 그럴 염려는 없겠군요. 정 그러시다면 나중에 실물을 보여드려도 좋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저의 범인 수색 전말입니다만." 고노가 교대하여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우선 첫째로 이 단도입니다. 보십시오. 칼끝에 묘한 얼룩이 묻어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혈흔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전체가 더러워지고 거무스름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 칼끝에는 검게 피로 보이는 자국이 묻어 있었습니다.
​"거울에 비친 것과 같은 형태의 단도고, 그 끝에 피가 묻어 있으니 이것이 살인의 흉기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 단도를 어디서 발견했는지 아십니까?"
고노는 다소 뜸을 들이며 말을 끊고는, 우리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제28장
​고노가 더러워진 단도를 한 손에 들고 우리들의 얼굴을 둘러보았을 때, 찰나의 순간 제 머릿속에는 그 단도의 주인이어야 할 용의자들의 모습이 차례차례 나타났다 사라졌습니다. 트렁크의 남자, 여관 주인, 조키치의 스폰서라던 마츠무라, 회중전등의 사내……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역시나 저 탐욕스러운 호반정의 주인이었습니다. 지금 고노의 입에서 나올 이름은 반드시 그일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고노는 뜻밖에도 저를 비롯해 여태껏 의심해 본 적도 없는 엉뚱한 한 사람을 지목한 것이 아닙니까?

​"이 단도는 목욕탕 불 때는 곳 구석의 어두침침한 선반 위에서 찾아냈습니다. 그 선반에는 산조의 소지품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쌓여 있는데, 거기에 더러운 양철 상자 하나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장소죠. 상자 안에는 묘한 것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아직 그대로 두었지만, 예쁜 여성용 지갑이나 금반지, 수많은 은화, 그리고 이 피비린내 나는 단도까지. ……말할 필요도 없이 이 단도의 주인은 목욕탕 관리인 산조입니다."
​마을 순사도 저도 말없이 고노의 다음 말을 기다렸습니다. 그 정도 사실만으로는 그 바보 같은 산조가 범인이라는 것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범인 역시 산조입니다." 고노는 침착하게 이어갔습니다. "이 사건에는 의심해야 할 인물이 많습니다. 첫째는 트렁크의 남자, 둘째는 마츠무라라는 청년, 셋째는 이 여관의 주인. 첫 번째 용의자에 대해서는 경찰에서도 전력을 다해 수색을 한 모양입니다만 현재로선 전혀 오리무중이죠. 하지만 그 두 사람을 의심하는 건 근본적으로 잘못된 일입니다."

그곳에서 고노는 예전에 제게 설명했던 시간적 불합리에 대해 다시 설명했습니다.
​"두 번째 마츠무라 청년은 이 역시 경찰에서 일단 조사를 한 것 같습니다만, 아무런 의심스러운 점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기생 시메지와 한 차를 타고 귀가했고 그 이후로 의심스러운 행동이 없었으니, 그에게 시체를 처리할 여유가 없었고 따라서 범인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애당초 푹 빠져 있는 여자를 죽일 만한 동기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의 괴한이 떨어뜨리고 간 지갑은, 과연 이 여관 주인의 소지품이긴 했습니다만 그것뿐이었고, 그 후 조사해 보니 그는 사건 발생 시각에 자기 방에서 자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부인을 비롯해 고용인들의 진술이 딱 맞아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 그것을 뒷받침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죠."
​여기서 고노는 또 한 번 전날 밤의 괴인물에 대해 일단의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즉, 우리가 의심했던 용의자들은 모두 진범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된 겁니다. 우리는 종종 너무 가까이 있는 것을, 가깝기 때문에 간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록 백치에 가까운 바보라 하더라도, 경찰들은 어째서 불 때는 산조를 의심해 보지 않은 걸까요? 아무리 잡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목욕탕에 부속된 도구가 아니라 역시 사람입니다. 목욕탕 출입구는 양쪽에 다 있습니다. 불 때는 곳에서도 자유롭게 탈의실로 올 수 있죠. 그리고 그 짧은 시간, 10시 30분부터 5분이나 10분 사이에 시체를 처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는 산조를 제쳐두고는 다른 이가 없습니다. 그는 일단 불 때는 곳의 석탄 더미 뒤에 시체를 숨겨두었다가, 심야를 틈타 느긋하게 인육 요리(시체 훼손)를 벌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고노는 점점 연설조가 되어 의기양양하게 떠들어댔습니다.
"하지만 그 바보입니다. 게다가 정직하기로 소문난 산조입니다. 저도 설마 했습니다. 그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입니다. 어제 목욕탕 뒤에서 산조와 마주쳤을 때 문득 깨달은 건데, 그의 손등에 검은 줄이 그어져 있었고, 당연히 저는 범인의 손에 난 상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죠. 뚜렷하게, 일자로 굵게 그어진 선이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과 너무나 비슷했습니다. 저는 아차 싶어서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왜 그러느냐'고 묻자, '예에' 하고 예의 그 얼빠진 대답을 하며 산조는 연신 손등을 문질렀지만 좀처럼 그 선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불 때는 곳의 그을음 묻은 물건에 세게 스친 자국 같았습니다."

​고노는 여기서 또 순사를 위해 엿보기 안경의 영상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거울에 보였다는 흉터는, 사실 이와 같은 그을음 자국에 불과했던 게 아닐까. 저는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워낙 흐릿한 영상이니 그을음 한 줄이 상처로 보이지 않았다고는 단정할 수 없죠.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고노의 의견을 듣고 저는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찰나의 일이었으니 어쩌면 잘못 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 머릿속에는 아직 그 흉터의 인상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아무래도 그을음 자국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거울에 비친 게 이런 손 아니었습니까?"
그러자 고노는 돌연 자신의 오른손 등을 제 눈앞에 불쑥 내밀었습니다. 보니 그곳에는 손등 가득 비스듬하게 검은 선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너무나도 거울에서 본 것과 흡사하여 저는 무심코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겁니다, 그거예요! 선생님은 어쩌다 그런 상처가 났습니까?"
​"상처가 아닙니다. 역시 그을음입니다. 묘하게 비슷하죠?" 고노는 감탄한 듯 자기 손을 바라보며 "그런 이유로 산조가 의심스러워져서 저는 아까 말한 불 때는 곳의 선반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물론 산조가 없을 때 말입니다. 그러자 예의 그 양철 상자가 나왔죠. 단도를 비롯해 산조에게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반을 뒤질 때 말입니다, 그곳에는 이단으로 선반이 있는데 간격이 좁아서 아래 선반 안쪽으로 손을 넣으면 위쪽 선반 뒷면 받침대에 손등이 스치게 됩니다. 거기가 모서리 부분이라 거기에 쌓인 그을음 때문에 이런 자국이 남게 된 거죠."
​고노는 손짓을 섞어가며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이쯤 되면 드디어 산조가 의심스러워지죠? 그리고 또 하나, 저는 산조의 버릇에 대해 아무도 모르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꽤 오래전, 제가 이곳에 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의 일입니다. 우연히 산조가 겉보기와 달리 나쁜 놈이라는 것을 발견했죠. 그 녀석 은근히 손버릇이 나쁩니다. 탈의실에 분실물 같은 걸 두면 몰래 훔쳐 가는 겁니다. 저는 그 현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대단한 물건도 아니어서 들춰내지 않고 그냥 넘어갔습니다만, 양철 상자를 보고 놀랐습니다. 이건 완전 대도(大盜)입니다. 바보처럼 정직한 놈이라고 방심하다 보면 왕왕 이런 놈이 있습니다. 그런 방심이 그를 사악한 길로 이끄는 하나의 동기가 되었겠지요. 게다가 백치 등에는 종종 도벽이 동반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제29장
​"그렇다면 빨리 산조를 잡아야……" 저는 목욕탕 쪽으로 마음이 쏠려, 고노의 장황한 설명을 답답하게 여겼습니다. 시골 순사란 참으로 태평해서 전혀 서두르는 기색 없이 느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고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설명은 나중에 해도 좋으련만 여전히 길게 떠들어댈 작정이었습니다.
​"시체를 처리하기에 가장 편리한 위치에 있다는 점, 손등의 그을음 자국, 피 묻은 단도, 수많은 장물들, 즉 그가 겉보기와 다른 악당이라는 점. 이만큼 증거가 갖춰지면 이제 그를 범인으로 볼 수밖에 없겠죠. 그날 아침 탈의실을 청소하면서 매트의 위치가 바뀐 것을 바로잡지 않은 점 등도 손에 꼽을 수 있습니다. 단지 살인의 원인은 저도 잘 모르겠지만, 저런 백치에 가까운 자이니 우리가 상상도 못 할 동기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술에 취한 여자를 보고 순간적인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을지도 모르죠. 아니면 그 나쁜 짓을 조키치에게 들켜 그녀의 입을 통해 발각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분별력을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상상의 영역이 아니지만,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그가 범인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조키치의 시체를 목욕탕 아궁이에서 태워버렸다는 말씀이십니까?"
순사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을 끊었습니다.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죠. 보통 사람에게는 상상도 못 할 잔혹함이지만, 저런 자에게는 우리 조상의 잔인성이 다량으로 남아 있지 않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발각될 것을 우려하는 이성적인 판단력이 결여되어 있으니까요. 뜻밖에 해치울 수 있는 일입니다. 그는 목욕탕 불 때는 사내니까요. 시체를 숨겨야 할 필요에 직면했을 때, 생각이 그쪽으로 미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게다가 범인이 시체 은폐 수단으로 그것을 소각한 사례는 드물지 않습니다. 유명한 웹스터 교수가 친구를 죽이고 실험실 난로에 태운 이야기나, 푸른 수염 랑드뤼가 다수의 피해자를 유리 공장의 용광로나 시골 별장의 난로에 태운 이야기 등은 아마 두 분도 들어보셨을 겁니다. 여기 목욕탕 아궁이는 정식 보일러이므로 충분한 화력이 있습니다. 한꺼번에 다 태울 수는 없더라도 사나흘 걸려 팔은 팔, 다리는 다리, 머리는 머리 등 조금씩 태워나간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다행히 거센 남풍이 불고 있었습니다.(백치인 그는 그런 것조차 생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시간은 모두가 잠든 한밤중입니다. 그는 좀처럼 사람이 오지 않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조금의 부자연스러움도 없이 그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생각이 너무 비약적입니까? 그렇다면 저 건너편 마을 사람들이 느낀 화장장 냄새를 무어라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하지만, 정작 여기서는 전혀 냄새가 나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군요."
순사는 반신반의하며 다시 물었습니다. 저 역시 왠지 이 가설은 선뜻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태운 것은 사람들이 잠든 한밤중이 틀림없습니다. 약간 냄새가 남아 있더라도 아침이면 거센 바람에 다 날아가 버립니다. 아궁이의 재는 늘 호수 속에 버리니 뼈든 뭐든 아무것도 남지 않죠."
​참으로 터무니없는 상상이었습니다. 과연 화장장의 냄새가 났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있었지만, 그만한 근거로 고노처럼 단정 지어버리는 것은 너무 비약이 아닐까요. 저는 훗날에 이르기까지 이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좌우간 시체의 처분이 어떠했든 간에, 산조가 범인이라는 것은 고노가 조사해 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판명되었습니다.
​"당장 산조를 잡아다 심문해 봅시다."

고노의 연설이 한 단락 끝나자 마을 순사가 마침내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습니다.
​우리 세 사람은 정원을 가로질러 목욕탕 아궁이 쪽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이미 밤 10시쯤이었습니다. 여전히 바람이 거센 암야입니다. 저는 형언할 수 없는, 공포인지 연민인지 모를 감정에 가슴이 뛰는 것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불 때는 곳 문 앞에 이르자 순사는 시골 순사라 할지라도 역시 관록 있는 경찰관답게, 전문가다운 일종의 자세를 취함과 동시에 재빨리 문을 확 열어젖히며 다짜고짜 안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산조!"
낮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그런데 모처럼의 기세가 아무 소용도 없었던 것이, 그곳에는 산조의 그림자조차 없고 낯익은 심부름꾼 영감이 붉게 타오르는 아궁이 앞에 멍하니 걸터앉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산조 말입니껴? 산조라면 초저녁부터 안 보입니더. 어디로 갔는지 당최 행방을 알 수가 없네예. 그래서 제가 대신 여기 불침번을 서게 됐습니더."
영감은 얼빠진 얼굴로 순사의 물음에 대답했습니다.
​그 후 한바탕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순사가 산기슭 경찰서로 전화를 걸고, 수색대가 조직되고, 그것이 가도를 오르내리며 날아다녔습니다. 이것으로 산조의 유죄는 더욱더 움직일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된 셈이었습니다.

​본격적인 수색은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진행되었습니다. 가도에서 벗어나 숲속, 계곡 사이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고노와 저도 여기까지 온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조를 나누어 수색대에 합류했습니다. 그 소동이 정오 무렵까지 계속되었을까요. 드디어 산조의 행방이 밝혀졌습니다.
​호반정에서 가도를 따라 5, 6백 미터 남짓 간 곳에 산길로 향하는 좁은 나무꾼 길이 있습니다. 그것을 몇 번이나 굽이돌아 십여 리를 걸어가면 어느 강의 상류인지 깊은 계곡이 나옵니다. 계곡을 따라 위태로운 잔도(棧道)가 이어지는데, 그 가장 위험한 지점에 조금 흙이 무너져 내린 것을 순사 중 한 명이 발견한 것입니다.
​수십 척 낭떠러지 아래, 문제의 산조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아래는 온통 바위투성이입니다. 아마도 어스름한 초저녁, 잔도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졌을 것입니다. 바위에는 검붉은 피가 기분 나쁘게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범인은 어떠한 고백도 하지 못한 채, 이것이 천벌일까요,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고 만 것입니다.
​시체의 품속에서는 고노가 양철 상자에서 보았다는 여러 장물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산조가 도망치던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은 명백해 보였습니다.
시체의 운반, 검사들의 임검, 마을 가득한 소문들로 하루가 소란 속에 저물었습니다. 산조의 방이었던 아궁이 근처도 충분히 조사한 모양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체 소각의 흔적에 대해서는 끝내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사건은 급전직하로 매듭지어지는 듯했습니다. 피해자의 소실, 살인의 동기에 대해 다소 애매한 점이 있다 한들, 산조의 범행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대적인 트렁크 수색이 아무런 성과도 없어 다소 이 사건을 버거워하던 재판소는, 산조의 죽음으로 구원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검사들은 이내 기슭의 마을로 철수했습니다. 경찰은 수색을 소리 소문 없이 중단하는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호반의 마을은 다시 예전의 정적을 되찾았습니다.
​가장 바보가 된 것은 호반정입니다. 한동안은 호기심 많은 손님들이 문제의 목욕탕을 구경 삼아 오기도 했으나, 이내 조키치의 유령이 나왔다든가 산조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는 둥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근처 사람들조차 호반정을 기피하게 되었고 끝내는 단 한 명의 손님도 없는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다른 여관이 들어서, 그토록 유명했던 호반정은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쓸쓸히 쇠락해 버렸다고 합니다.

​독자 여러분, 이상이 호반정 사건의 표면적인 이야기입니다. A호반 마을 사람들의 소문이나 Y마을 경찰서의 기록에 남아 있는 사실은 아마 이 이상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들려드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은 사실 지금부터입니다. 그렇다고 지루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은 고작 원고지 2, 30매면 끝날 분량이니까요.
​사건이 일단락되자 우리는 지체 없이 이 기분 나쁜 장소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사건 이후 한층 가까워진 고노와 저는 방향이 같다는 이유로 같은 기차에 탔습니다. 저는 말할 것도 없이 T시까지, 고노는 그보다 훨씬 앞선 I라는 역에서 내릴 예정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각자 꽤 큰 가방을 들고 있었습니다. 저는 예의 엿보기 안경을 숨겨둔 각진 가방을, 고노는 낡고 가로로 길쭉한 가방을, 복장은 두 사람 다 기모노 차림이었습니다만 그렇게 호반정을 출발하는 광경이 왠지 모르게 저 트렁크의 두 사내와 닮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트렁크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그 연상에서 무심코 고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글쎄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연히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이 마을을 빠져나간 것 아닐까요? 어찌 되었든 이제 그 일당을 수소문할 필요는 없겠네요. 이번 범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을 테니까요."
그렇게 우리의 상행선 열차는 추억 많은 호반의 마을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제30장
​"아아, 이제야 앓던 이가 빠진 것 같군요. 참 아름다운 경치 아닙니까. 그런 사건에 얽혀 있는 동안 우린 이런 걸 완전히 잊고 있었네요."
창밖을 스쳐 가는 초여름의 풍경을 바라보며 고노는 아주 후련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완전히 다른 세상 같군요."
저도 장단을 맞추어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이 사건의 너무나도 싱거운 결말에 왠지 납득이 가지 않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시체 소각이라는 평범하지 않은 상상에 그것을 뒷받침하는 화장장의 냄새가 떡하니 준비되어 있다든가, 범인을 찾았나 싶더니 그때는 이미 시체가 되어 있다든가, 트렁크의 남자(적어도 트렁크 그 자체의) 행방이 완전히 묘연해졌다든가, 생각하면 할수록 기이한 느낌이 듭니다. 조금 더 가까운 일을 말하자면, 지금 제 앞에 앉아 있는 고노 본인의 낡은 손가방, 그 안에는 아마 책 몇 권과 그림 도구, 그리고 옷가지 몇 벌이 들어 있을 뿐일 그 가방을 그는 대체 왜 저렇게 애지중지하는 것일까요? 잠깐 열 때마다 일일이 자물쇠를 풀고 그 열쇠를 주머니 속에 감추는 것일까요? 저는 묘하게 고노의 낡은 가방이 신경 쓰였습니다. 그것과 결부되어 고노 자신의 태도마저 왠지 모르게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래서인지 제 모습에 약간 이상한 점이 보였나 봅니다. 고노 쪽에서도 은근히 경계하는 듯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층 더 이상한 것은, 아주 교묘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꾸미고는 있지만 제게는 그의 눈이(라기보다 그의 마음 그 자체가) 머리 위 그물 선반에 올려둔 낡은 가방에 무서운 힘으로 끌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기묘한 변화였습니다. 호반정에서의 십여 일, 당해 범죄 사건과 얽혀 있는 동안에는 일찍이 그런 의심의 조각조차 느끼지 못했던 제가, 지금 사건이 어쨌든 해결되어 도쿄로 돌아가려는 기차 안에서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낀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세상의 의심이라는 것은 대개 그런 뜬금없는 계기에서 솟아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만약 그때 고노의 낡은 가방이 선반 위에서 떨어지는 우연한 사고가 없었더라면, 제 그 있을 듯 말 듯한 의구심은 시간과 함께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아마 급한 커브를 돌 때였을 것입니다. 그 심한 차체의 흔들림은 고노에게 있어서 완전히 저주스러운 우연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낡은 가방이 굴러떨어졌을 때, 공교롭게도 잠갔다고 생각했던 자물쇠가 어찌 된 영문인지 제대로 채워져 있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지독한 불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방은 정확히 제 발밑으로 굴러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내용물이 눈앞에 벌어진 가방 입구로 하마터면 쏟아져 내릴 뻔했습니다. 아니, 어떤 물건은 떼굴떼굴 제 발밑으로 굴러 나오기까지 했습니다.
​독자 여러분, 그것이 과연 무엇이었을지 짐작이 가십니까? 잘게 토막 낸 조키치의 시체? (아니, 설마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실은 몇만 엔일지 모를 막대한 지폐 다발이었습니다. 그리고 발밑으로 굴러온 물건은, 이 또한 묘하게도 의사가 쓰는 유리로 된 주사기였습니다.
​그때 고노의 당황하는 모습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헉하고 얼굴이 붉어지더니 다음 순간에는 새파랗게 질려서, 황급히 떨어진 물건들을 주워 담고 가방 뚜껑을 닫더니 의자 밑으로 밀어 넣어버렸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고노라는 사내가 이성으로만 똘똘 뭉친 강철 같은 인간인 줄 알았습니다만, 이 허둥대는 모습은 또 어찌 된 일입니까. 그는 아슬아슬한 곳에서 약점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고노가 아무리 재빠르게 가방 뚜껑을 닫았다 한들, 그 안의 물건을 제가 못 보고 지나쳤을 리는 만무합니다. 고노 역시 당연히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도 그는 이내 안색을 고치더니 아주 태연한 얼굴로 앞선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막대한 지폐와 주사기. 이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너무나 뜻밖이어서 저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31장
​하지만 고노가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든, 혹은 직업과 무관한 의료 기기를 소지하고 있든 그것은 그저 뜻밖이라는 데 그칠 뿐 딱히 탓할 만한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수수께끼를 수수께끼로 남겨둔 채 헤어지는 것도 몹시 미련이 남는 일입니다. 저는 어떻게 이 곤란한 질문을 꺼내야 할지 요리조리 궁리에 빠졌습니다.
​고노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아무렇지도 않은 척 꾸미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선생님, 엿보기 안경은 잊지 않고 챙기셨겠지요?"
그는 뜬금없이 그런 것을 묻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그 자신의 당황함을 감추기 위한 의미 없는 말에 불과했겠지만,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당신도 그런 비밀을 가지고 있잖아!" 하는 협박의 말로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무언의 갈등을 싣고 기차는 어느새 수십 리의 산천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고노가 내려야 할 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역을 깜빡 잊고 있다가 발차 호각이 울리고 나서야 퍼뜩 정신이 들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고노는 태연하게 내릴 기색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자네, 여기서 내리는 거 아니었나?"
저로서는 여기서 내려버리면 곤란하지만, 돌발적인 상황에서 무심코 이렇게 말을 건네자 고노는 왠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아아, 그랬죠. 뭐 괜찮습니다. 다음 역까지 타고 가죠. 이제, 도저히 내릴 수가 없으니."
라며 변명하듯 말했습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그는 일부러 내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니 저는 적잖이 섬뜩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마일 남짓 떨어진 다음 역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왔습니다. 그 역의 신호 표지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 고노는 머뭇거리며 묘한 말을 꺼냈습니다.

"선생님,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기차를 한 대 늦춰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이 역에서 내려서 다음 상행선이 올 때까지 3시간 정도 여유가 있죠. 그동안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는 없을는지요."
​저는 고노의 뜻밖의 제안에 당황하기도 하고 기분 나쁘기도 했지만, 그가 워낙 열성적으로 부탁하는 터라 설마 위험한 일이야 있겠나 싶었고, 호기심을 억누르기 힘든 점도 있어서 어찌 됐든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기차에서 내린 뒤 역 앞의 어느 여관에 들어가 잠시 쉬게 해 달라고 말하고는 구석진 방 하나를 빌렸습니다. 옆방에 손님이 있는 기색도 없어 밀담을 나누기에는 안성맞춤인 방이었습니다.
​주문한 술과 안주를 나르고 하녀가 물러가자, 고노는 몹시 말하기 힘든 듯 머뭇거렸고 쑥스러움을 감추려는 듯 제게 술을 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창백해진 뺨의 근육을 파르르 경련시키며 결심한 듯 입을 열었습니다.
​"선생님은 제 가방 안의 물건을 보셨습니까?"
그렇게 그가 뚫어지게 바라보자, 아무 두려울 게 없어야 할 저조차도 아마 새파랗게 질렸을 것입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겨드랑이 밑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보았습니다."
저는 상대를 자극하지 않도록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하지만 사실대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심스러웠습니까?"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선생님은 사랑이라는 것의 가치를 아십니까?"
"아마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치 학교의 구두시험이나 법정의 심문 같았습니다. 평소 같으면 당장이라도 웃음을 터뜨렸겠지만, 그 우스꽝스러운 문답을 우리는 마치 결투라도 하듯 진지하게 이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위한 어떤 과실, 그것은 어쩌면 범죄일지도 모릅니다. 조금도 악의가 없는 남자의 그런 과실을, 선생님은 용서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마 할 수 있겠죠."
저는 충분히 상대를 안심시킬 만한 어조로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때도 고노에게 호감을 느낄지언정 결코 반감을 품고 있지는 않았으니까요.
​"자네가 그 사건과 관련이 있었나? 혹시 자네야말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 아닌가?"
저는 과감히 물었습니다. 십중팔구 제 예상이 틀리지 않았으리라 확신하면서.
"그럴지도 모르죠." 고노의 핏발 선 눈이 깜빡이지도 않고 저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렇다 치면 선생님은 경찰에 신고하시겠습니까?"
"아마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네." 저는 즉석에서 대답했습니다. "이미 그 사건은 매듭지어지지 않았나. 이제 와서 새로운 희생자를 낼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면" 고노는 어느 정도 안심한 듯 "제가 어떤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선생님은 그것을 선생님 가슴속에만 묻어두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제 가방 안에 있던 묘한 물건들에 대해서도 잊어버려 주시겠습니까?"
"우린 친구 사이 아닌가? 누구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친구를 죄인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네."
저는 짐짓 가벼운 어조로 내뱉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제 진심이기도 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고노는 오랫동안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지만, 점차 울상을 짓더니 끝내는 울기 직전의 표정이 되어 이렇게 말을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저 우발적으로 시작한 일이 뜻밖에 커져버렸습니다. 저는 그것을 어찌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 정도의 일도 분간하지 못하다니, 저는 대체 얼마나 바보였을까요. 사랑에 눈이 멀었던 겁니다. 정말 마에 씌었던 거죠."
​고노에게 이런 나약한 이면이 있을 줄은 참으로 뜻밖이었습니다. 호반정에서의 고노와 지금의 그, 얼마나 큰 차이입니까. 묘한 일이지만, 이 고노의 약점을 알게 되자 저는 예전보다 한층 더 그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 자네가 죽인 거로군?"
저는 다과회에서 이야기라도 나누는 듯한 어조로, 최대한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게끔 물었습니다.
​"네, 제가 죽인 거나 다름없습니다."
"다름없다니?" 저는 무심코 의문을 표했습니다.
"제가 직접 손을 대서 죽인 것은 아닙니다."
점점 이야기가 알 수 없게 되어갔습니다. 그의 손으로 죽인 것이 아니라면 그 거울에 비친 남자의 손은 도대체 누구의 것이란 말입니까?
​"그럼 직접적인 하수인은?"
"하수인 같은 건 없습니다. 그 녀석은 자기 자신의 과실로 죽은 거니까요."
"과실이라니……" 문득 저는 엄청난 착각을 깨달았습니다. "아아, 자네 산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
"물론입니다."
그 명확한 대답을 듣자 제 머릿속은 오히려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제32장
​"그럼 자네가 죽였다고 하는 것은 그 산조를 말하는 것이었나?"
"그렇습니다. 누구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기생 조키치지! 이 사건에 조키치 외에 살해당한 사람은 없지 않나?"
"아, 그래, 그랬죠, 그랬군요."
저는 어안이 벙벙해져 고노의 엉뚱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도대체 어찌 된 영문입니까. 이 사건에는 무언가 근본적인 큰 착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조키치는 죽지 않았습니다. 찰과상 하나 입지 않았어요. 그저 모습을 감췄을 뿐입니다. 저는 제 생각만 하느라 정작 중요한 사실을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군요. 죽은 건 산조 한 명뿐입니다."
​이것은 엿보기 안경의 영상에 놀랐을 때, 저도 한 번쯤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연극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고. 하지만 그때도 설명했듯이, 여러 정황이 도저히 그런 상상을 허락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지금 고노의 그 아무렇지 않은 듯한 말을 듣고는 오히려 조롱당하는 기분이 들어 선뜻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까?" 저는 반신반의하며 되물었습니다. "그렇게 죽지도 않은 사람을 위해 경찰이 그런 대소동을 벌였단 말입니까? 저는 도무지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고노는 황송해하며 말했습니다. "제가 쓸데없는 계략을 부린 탓에 아무것도 아닌 일이 뜻밖에 큰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사람 한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까지 벌어진 겁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이야기해 주지 않겠나?"
저는 어디서부터 물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그에게 이렇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다 말씀드릴 작정입니다. 우선 저와 조키치의 깊은 관계부터 말씀드려야겠군요. 그 여자와 저는 사실 소꿉친구입니다. 이 정도만 말씀드려도 대충 상상이 가시겠죠. 소꿉친구를 잊지 못하던 저는 그녀가 다른 마을로 일을 나간 뒤에도 종종 밀회를 거듭했습니다. 다만 가난한 저에게는 (여기서 저는 그의 가방 안에 있던 막대한 지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자주 그녀를 찾아갈 여유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이렇게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는 신세라 때로는 반년, 일 년씩 얼굴도 보지 못하고 지낼 때도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1년쯤 전에 이 지방으로 옮겨왔다는 소문은 들었지만(그것이 저를 이 산속으로 이끈 하나의 동기였음은 틀림없습니다), 어느 마을에 어떤 이름으로 나가 있는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조키치가 다름 아닌 제 연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사건이 일어나기 딱 하루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전에도 그 여자는 호반정에 여러 번 왔었을 텐데, 어찌 된 영문인지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그 전날, 우연히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다 서로를 알아보고는, 실례, 저는 몰래 그녀를 제 방으로 데려와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던 겁니다.

​자세한 건 시간이 없으니 생략하겠지만, 그때 그녀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죽고 싶다, 죽고 싶다'고 하더니 끝내는 제게 같이 죽자고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내성적인 성격에 다소 히스테리도 섞여 있었겠지만, 애초에 기생 노릇이 싫었던 데다 Y마을로 옮겨온 이후 변변한 친구도 없고 동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일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 포주가 악독하여, 최근 불거진 그 마츠무라라는 부자의 첩으로 들어앉히려는 이야기가 점점 심해져 응하든가 빚을 배로 늘려 다른 곳으로 팔려 가든가 둘 중 하나의 벼랑 끝에 몰려 있었습니다. 죽고 싶다는 것도 그녀의 성질로 보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사정도 사정이지만, 무엇보다 저를 무아지경에 빠뜨린 것은 그녀가 아직도 저를 연모해 주고 있는 진심이었습니다. 저는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손을 잡고 이 세상 끝까지라도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다행인지 불행인지 기묘한 일이 돌발했습니다. 설령 그 돌발 사건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또 다른 조건이 없었다면 그런 소동까지는 되지 않았을 텐데, 아무래도 불운한(이라고 하기엔 염치없는 이야기지만) 상황이 맞아떨어졌던 것이죠. 또 하나의 사정이라는 건 사실 선생님의 엿보기 안경입니다. 저는 그 장치를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이게 제 나쁜 버릇인데, 남의 비밀을 캐는, 탐정병이라고 할까요, 그런 성향이 다분해서 그 장치 역시 초반부터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선생님이 방을 비운 틈에 몰래 들어가 거울을 들여다보기까지 했습니다."
​"잠깐만 기다리게."
저는 고노의 말이 잠시 끊기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의 고백이 언제까지고 제 의문의 핵심에 닿지 않는 답답함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조키치가 죽지 않았다는 건 아무래도 불합리하게 느껴져서 말이야. 탈의실의 그 엄청난 핏자국은 누구 피인가? 인간의 피라는 걸 의과대학 박사가 증명하지 않았나. 그만한 피를 도대체 어디서 가져왔다는 건가?"
​"아, 그렇게 서두르지 마십시오. 순서대로 말씀드리지 않으면 저도 헷갈린단 말입니다. 그 피에 대해서도 금방 말씀드릴 테니까요."
고노는 제 참견을 막고는 다시금 기나긴 고백을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제33장
​"그런 까닭에 나는 탈의실의 대형 전신 거울 어디쯤 서면 신체의 어느 부분이 엿보기 안경에 비치는지 알고 있었던 겁니다. 마침 그 당시 엿보기 안경이 망원경 같은 장치로 바뀌어서 거울 중앙 부분만 크게 확대되어 보였지요. 저는 선생님이 안 계실 때 입욕자들의 알몸이 클로즈업된 모습을 몰래 훔쳐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선생님도 그러셨겠지만, 저는 그 꿈같은 기괴한 영상에 일종의 묘한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만약 저 물밑처럼 탁한 거울 면에 무언가 피비린내 나는 광경이, 예를 들어 풍만한 알몸 여인의 어깨에 번쩍이는 단도가 꽂히고 거기서 새빨간 피가 흘러내리는 광경 같은 것이 비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는 상상마저 그렸습니다. 물론 그것은 그저 변덕스러운 망상에 불과했고, 앞서 말한 또 하나의 돌발 사건이 없었더라면 제가 직접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날 밤, 10시가 넘었을 무렵이던가요, 아무튼 살인 사건 직전인데 잠자리에 누워 있던 제 방으로 갑자기 조키치가 뛰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구석으로 몸을 웅크리며 '숨겨주세요, 숨겨주세요' 하고 들뜬 목소리로 애원하는 겁니다. 보니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고 가쁜 숨을 몰아쉬느라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 저는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는데, 이내 복도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나더니 '조키치 어디 갔어!' 하고 묻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목소리의 주인은 아무래도 트렁크의 두 사내 중 한 명인 것 같았습니다.
​그 후 꽤 사방을 찾아다녔던 모양이지만, 설마 조키치와 제가 연인 사이이고 제 방으로 도망쳐 들어왔으리라고는 하녀들도 상상조차 못 했을 겁니다. 트렁크 남자는 결국 헛걸음을 치고 돌아간 듯했습니다. 저는 영문을 몰라 일단 안심하고 방 한가운데로 나온 조키치를 붙잡고 자초지종을 캐물었습니다. 그러자 조키치 말로는 마침 그날 밤에도 문제의 스폰서 마츠무라 아무개가 연회에 왔는데, 술김에 너무 심한 짓을 하거나 심한 말을 해서 조키치가 자리에 있지 못하고 몰래 빠져나와 목적 없이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지나가는 길에 트렁크 남자의 방 미닫이문이 열려 있고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자, 조키치는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린 겁니다.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조키치는 트렁크 남자에게 자주 불려 갔었고, 어떤 기회에 그 트렁크 안에 거액의 돈이 숨겨져 있는 것을 알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손이 베일 듯한 지폐 다발이 몇만 엔인지 모를 만큼 들어 있는 것을 본 것이죠. 네, 맞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 가방 안에 있는 것이 바로 그 돈입니다만, 그게 어떻게 제 손에 들어왔는지는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조키치는 그 돈을 떠올리고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틈타 나쁜 마음을 먹은 겁니다. 그중 단 한두 다발만 있으면 내일부터라도 자유의 몸이 되어 끔찍한 마츠무라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츠무라의 난폭함에 다소 이성을 잃고 있었던 탓인지, 그녀는 훌쩍 방으로 들어가 트렁크를 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자물쇠가 채워져 있으니 여자의 가녀린 팔로 열릴 리가 없죠. 그래도 그녀는 이미 정신이 나간 상태라 뚜껑의 모서리를 억지로 들어 올려 그 틈으로 손가락을 넣어 간신히 수십 장의 지폐를 빼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에 서툰 그녀는 고작 지폐 한 다발을 빼내는 데 꽤 오랜 시간을 허비한 모양으로,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등 뒤에 트렁크의 주인이 무서운 기세로 버티고 서 있었던 겁니다.

​조키치가 제 방으로 도망쳐 온 것은 대충 그런 연유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은 트렁크 주인의 태도였습니다. 보통 같으면 조키치가 사라졌다는 걸 알면 즉시 여관 카운터에 알려 색출해야 마땅한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습니다. 조키치가 너무 불안해하기에 제가 몰래 트렁크 남자의 방에 가서 동태를 살폈더니, 묘하게도 그자들은 허둥지둥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것은 필시 그들 쪽에도 뭔가 비밀이 틀림없다. 조키치에게 돈을 도둑맞은 것에 분노하기보다는 그녀에게 트렁크 안의 내용물을 들킨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키치가 봤다는 막대한 지폐 다발, 게다가 그것을 트렁크에 넣고 들고 다닌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한 점투성이입니다. 그들은 혹시 대도둑이거나 아니면 위조지폐범이 아닐까? 자연스레 저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방으로 돌아와 보니 조키치는 이미 엎드려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특유의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키며 또다시 '같이 죽어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저까지도 도무지 돌이킬 수 없는 벼랑 끝에 몰린, 광기 어린 기분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악몽 같은 기분에서 저는 문득 터무니없는 생각을 떠올린 겁니다. '정 그렇다면, 널 죽여주마.' 저는 그렇게 말하며 조키치를 목욕탕으로 데려갔습니다. 불 때는 곳을 엿보니 다행히 산조는 없었습니다. 그곳 선반 위에는 그의 단도가 올려져 있었습니다. (이건 제가 미리 봐두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아시다시피 그 범행이 연출된 것입니다."

​제34장
​"그런 위급한 상황이었으면서도, 내게는 그 격정적이고 아름다운 광경을 자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거네. 어쩌면 조키치를 도망치게 하는 것보다 그쪽이 더 큰 동기였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마침 그때 자네가 안경을 엿보고 있었는지 어쨌는지, 만약 엿보지 않았다면 모처럼의 연극이 아무 소용도 없게 되는 셈이니까. 그래서 나는 좀 더 현실적인 증거로써 미리 탈의실 나무 바닥에 피를 흘려두기로 생각했네. 하지만 이것 역시 정말 변덕스럽고 연극적 취향이 다분한 찰나의 충동에 불과했지.
​나는 어느 여행지에서 친구에게 주사기를 하나 얻은 적이 있었네. 내 버릇인데, 그런 의료기기 등에 형언할 수 없는 애착을 느끼거든. 장난감처럼 항상 가지고 다녔다네. 그래서 그 주사기로 조키치의 팔에서 조금, 내 팔에서 조금, 두 사람 합쳐 찻잔으로 한 잔 정도의 피를 뽑아 그것을 해면으로 나무 바닥에 발라둔 거라네. 연인의 피를 뽑아 내 피와 섞는다, 그 극적인 발상이 나를 그야말로 황홀경에 빠뜨려버린 거야."

​"하지만 고작 찻잔 한 잔의 피가 어떻게 그렇게 많아 보였단 말인가? 사람 하나가 죽을 만큼의 양으로 보였단 말이지." 저는 무심코 끼어들었습니다.
​"그게 포인트입니다." 고노는 다소 득의양양하게 대답했습니다. "그건 그저 닦아낸 것과 넓게 펴 바른 것의 차이입니다. 누구든 설마 핏자국을 일부러 펴 바른 놈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하니까요. 닦아냈다고 가정하면 그 정도의 흔적은 확실히 사람 하나를 죽이기에 족한 양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마치 닦아낸 흔적인 양 위장하면서 실제로는 최대한 넓게 펴 바른 겁니다. 직업인 화가의 솜씨를 발휘해 기둥이나 벽에 튄 자국까지 아주 공들여 꾸며내고, 남은 피를 단도 끝에 발라 그 양철 상자 안에 넣어둔 겁니다. 물론 조키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도망치게 해 주었습니다. 그녀 입장에서는 도둑년이라는 오명을 쓰느냐 자유의 몸이 되느냐 하는 기로에 섰으니 무서워할 겨를이 없었죠. 산을 타고 어둠을 틈타 Y마을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렸습니다. 물론 은신처는 미리 약속해 두었고요."
​저는 너무나도 싱거운 진상에 약간 허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의문은 이것으로 모두 풀린 것일까요? 아니, 그것이 단순한 연극이었다고 한다면 갈수록 불가해한 점들이 생겨납니다.
"그럼 사람을 태우는 냄새는 대체 어디서 났다는 건가?" 저는 성급히 물었습니다. "또, 산조는 왜 변사했지? 그리고 그게 왜 자네 책임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이제 말씀드리죠." 고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어갔습니다. "그 이후의 일은 선생님도 대충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다행히 트렁크의 남자가 제 짐작대로 어떤 범죄자였던 모양인지 밤사이에 모습을 감추어 아무리 찾아도 행방을 알 수 없는 탓에 제 연극이 한층 진실처럼 보였고, 피해자 조키치, 가해자 트렁크 남자로 굳어져 경찰을 비롯해 그 누구도 의심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건의 주동자인 저로서는 소동이 커지면 커질수록 걱정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와서 그게 장난이었다고 신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 있자니 언제 트렁크 남자가 잡혀 진상이 폭로될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한순간의 충동에 이끌려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구나 하고 제가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그런 사정이니 조키치가 약속 장소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건이 어느 한쪽으로 결말이 나기 전까지는 도저히 호반정을 떠날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요 열흘 남짓, 겉으로는 괴로우면서도 태연한 척 위장했지만 제가 어떤 지옥을 맛보고 있었는지 국외자들은 상상조차 못 하실 겁니다.
​저는 탐정 행세를 하며 선생님과 함께 여러 가지 일을 꾸몄지만, 사실은 어디서 제 연극이 들통날지 조마조마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예의 엿보기 안경을 떼어낼 때 돌연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타났습니다. 그날 밤의 수상한 그림자를 전 짐짓 감춰두었지만, 다름 아닌 불 때는 사내 산조였습니다. 그가 여관 주인의 지갑을 떨어뜨리고 간 것은 앞서 말한 그의 도벽을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닙니다만, 이상한 것은 그 안에 든 500엔입니다. 주인은 자기 돈이라고 했습니다만 어딘지 태도가 이상했습니다. 그는 소문난 구두쇠 노인네니까 믿을 만한 게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산조가 이 사건과 관련해 무언가 비밀을 쥐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목표를 정하고, 그의 주변을 맴돌며 탐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제35장
​"산조는 예의 그 큰 트렁크 두 개를 모두, 대체 어디서 주워왔는지, 불 때는 곳의 석탄 더미 속에 숨겨두고 있었습니다. 트렁크 남자들은 아마도 표적이 될 것을 두려워해 트렁크를 산속에 숨기고 몸만 빠져나갔을 텐데, 산조가 그것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나중에 숲속에 마른 가지를 주우러 갔다가 우연히 발견했을지도 모르죠. 어찌 됐든 그는 내용물인 막대한 지폐와 함께 트렁크를 훔친 겁니다. 이것으로 그 지갑 속의 500엔도 설명이 되는 셈이죠. 하지만 트렁크 주인이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었다고는 해도 그 큰돈을 아낌없이 버리고 갔다는 건 조금 이상합니다. 역시 위조지폐였을까요? 아니면 훗날 찾으러 올 생각으로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묻어두기라도 했던 걸까요? 그 거센 바람이 불던 밤에 회중전등으로 숲속을 헤매던 남자는 어쩌면 그들의 명령을 받고 트렁크를 찾으러 온 일당 중 하나였을지도 모릅니다.

​사건은 점점 복잡해졌습니다. 어떻게 될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습니다. 저의 무모한 장난이 이처럼 큰 사건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에, 당연히 걱정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그런데 4, 5일 전, 경찰의 대대적인 트렁크 수색이 시작될 무렵 산조 역시 자신의 행위에 두려움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유일한 증거품인 트렁크를 목욕탕 아궁이에 태워버리기로 생각한 겁니다. 사람들이 잠든 때를 틈타 트렁크를 부숴 조금씩 태워 없애는 것입니다. 저는 실제로 그것을 엿보고 있었지만 설마 대안 마을까지 가죽 타는 냄새가 날아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것이 시체 타는 냄새로 오인된 것이죠. 저는 언젠가 외국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시골 외딴집 굴뚝에서 매연이 맹렬히 뿜어져 나오고 화장장 냄새가 나자 마을 사람들이 시체를 태우는 줄 알고 소동을 벌였는데 조사해 보니 웬걸, 낡은 구두 따위를 난로에 던져 넣은 것으로 밝혀졌다는 겁니다. 그 집 주인이 마침 살인 사건의 용의자였기 때문에 벌어진 소동이었죠.

​하지만 저는 당시 거기까지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입니다. 만약 이 바보의 경솔한 행동 때문에 일의 진상이 탄로 나기라도 한다면, 그것이 첫째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발각을 늦추려는 생각에 저는 산조를 도망치게 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경찰에서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은연중에 비쳐 그를 겁먹게 만들었죠. 악당이라 해도 바보인지라, 제 계획을 간파하기는커녕 트렁크를 훔쳤다는 사실만으로 곧장 살인 용의까지 뒤집어쓸 줄로만 믿고는, 마침 마을 순사가 저를 찾아왔던 날 돈다발만 보따리에 싸서 그의 고향인 산속 깊은 곳으로 도망친 것입니다. 저는 계획이 보기 좋게 성공한 것을 기뻐하며 오히려 그를 호위하는 듯한 마음으로 뒤를 밟았습니다.
​그런데 그 도중 저 잔도에서 뜻밖의 사고가 일어난 겁니다. 너무 길을 서두른 나머지 산조는 절벽에서 미끄러져 변사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서둘러 아래로 내려가 간호해 보았지만 이미 소생할 가망이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불쌍한 남자입니다. 악당이라고는 하나 그것은 그의 백치와 마찬가지로 그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타고난 천성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저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도망치라고 권한 탓에, 그는 더 살 수 있었던 목숨을 허망하게 잃고 만 것입니다. 저는 크나큰 죄를 지은 것 같아 참혹한 시체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그저 돈 보따리만 주워 들고 이 급보를 알리기 위해 여관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저는 문득 어떤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산조는 가엾긴 하지만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다. 만약 모든 죄를 그에게 덮어씌울 수 있다면 조키치는 영원히 죽은 사람으로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일생을 보낼 수 있고, 따라서 나 역시 처음 꿈꾸었던 행복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거기에는 마침 단도며, 손등의 자국이며, 산조의 평소 도벽이며 형편에 맞게 유리한 조건들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돌연 산조의 변사를 알리기를 그만두고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궤변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침 그때 마을 순사가 예의 그 냄새에 관해 알려주었습니다. 진영이 완벽히 짜인 셈이죠. 저는 순사와 선생님 앞에서 생각했던 논리를 진술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지폐는 언뜻 보아서는 위조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만약 진짜라면 저는 일약 큰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욕심에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막상 태워버리기가 아까워 여하튼 가방 밑바닥에 넣어둔 것입니다. 그것을 선생님께 들키고 말았으니 이대로 헤어져서는 어찌어찌 선생님 입에서 진상이 폭로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고, 차라리 사실을 고백해 버리는 편이 안전하겠다 싶어 이렇게 발길을 붙잡은 것입니다. 요컨대 이 사건에는 범죄라 할 만한 것은 단 하나도 없고, 조키치의 히스테리와 저의 변덕에서 출발해 몇 가지 우연이 겹치면서 대단히 피비린내 나는 대형 범죄 같은 것이 만들어져 버린 것입니다."
​고노는 한숨과 함께 긴 이야기를 끝맺었습니다. 저는 이면에 숨겨진 사실의 의외성에 한동안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런 사정이니 부디 이 일은 선생님 가슴에만 묻어두시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만약 이것이 들통나 원래 포주에게 불려가기라도 한다면 조키치는 필시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저 또한 세상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됩니다. 부디 제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저는 고노의 태도에 끌려, 무척이나 침통한 어조로 대답했습니다. "결코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부디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한시라도 빨리 조키치가 있는 곳으로 가서 그 사람도 안심시켜 주십시오. 저는 뒤에서나마 두 분의 행복을 빌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일종의 감격에 젖어 고노에게 작별을 고했습니다. 고노는 제 기차가 떠날 때 감사를 담은 눈빛으로 오랫동안 배웅해 주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그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고노와는 두세 번 편지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그들의 사랑이 어떤 결실을 맺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고노에게서 귀한 장문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길게 지난날 제 호의에 감사를 표한 뒤 연인 조키치의 죽음을 알렸고, 그 자신도 친구의 사업과 관련하여 남양(南洋)의 어느 섬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그는 아마 두 번 다시 일본 땅을 밟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사건의 진상을 발표해도 무방한 때가 온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이것으로 제 지루한 이야기는 끝을 맺었습니다. 예의 그 막대한 지폐가 진짜였는지 어땠는지는 미처 물어볼 기회가 없었지만, 아마 위조지폐는 아니었으리라 짐작합니다.
​다만, 여기에 중대한 의문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저는 고노와 헤어진 이후, 날이 갈수록 짙어지는 그 의문에 형언할 수 없는 괴로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제 상상이 맞다면, 저는 끔찍한 살인자를 까닭 없이 눈감아 준 셈이 됩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그 의심을 노골적으로 입 밖에 낼 시기가 아닙니다. 고노는 살아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조국을 위해 머나먼 타국으로 돈을 벌러 나간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죽어버린 어리석은 산조를 위해 굳이 이제 와서 또 다른 희생자를 낼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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