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그램 소설 전문(全文)
에도가와 란포
제가 다니던 어느 공장의 늙은 수위(그렇다고는 해도 아직 쉰 살이 채 되지 않은 사내였습니다만, 어딘지 모르게 노인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구리하라 씨와 친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구리하라 씨가 아껴두었던 이야기보따리였을 테고, 그는 누구에게든 속마음을 털어놓아도 괜찮을 만한 사이가 되면 애타게 기다렸다는 듯이 그 이야기를 꺼냈겠지만, 저 역시 어느 날 밤 수위실 난로를 둘러싸고 구리하라 씨의 기묘한 경험담을 듣게 되었습니다.
구리하라 씨는 말주변도 좋은 데다 꽤 소설가 같은 면모도 있어서, 이 우스개 같은 경험담에도 아무래도 꾸며낸 흔적이 엿보이기는 합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버리기 아까운 묘한 매력이 있어 저에게는 아직도 잊지 못하는 흥미로운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구리하라 씨의 말투를 흉내 내어 그 이야기를 한번 적어볼까 합니다.
"이런, 무슨 실없는 농담 같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먼저 결말을 말씀드리면 재미가 덜하겠지요. 뭐 그저 평범한, 에헤헴, 제 아내 자랑쯤으로 생각하고 들어주십시오.
제가 마흔을 바라볼 무렵, 그러니까 4, 5년 전의 일입니다. 늘 말씀드리다시피 저는 꽤 교육을 받았음에도 묘하게 쉽게 싫증을 내는 성격이라, 어떤 직업을 가져도 대개 1년을 채 넘기지 못했습니다. 이 일 저 일 전전하다가 결국 이런 수위 일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것입니다만, 그때도 역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다음 일자리를 찾던 중, 즉 실업자 시절이었죠. 아시다시피 이 나이가 되도록 아이도 없고, 신경질적인 아내와 좁은 집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자니 숨이 막히더군요. 그래서 저는 시간을 때우러 아사쿠사 공원에 자주 나가곤 했습니다.
거기엔 그런 사람들이 있죠. 공원이라고 해도 제6구의 구경거리 오두막 쪽이 아니라, 연못 남쪽 숲에 공용 벤치가 잔뜩 늘어선 곳 말입니다. 비바람에 맞아 페인트가 벗겨지고 하얗게 바랜 벤치나 버려진 돌, 나무 밑동 같은 곳에, 그 풍경에 딱 어울리게 세상의 비바람에 시달려 풀 죽은 사람들이 빈틈없이, 다들 수심에 잠긴 모습으로 앉아있습니다. 저도 그중 한 명으로서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여러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참으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서글픈 기분이 들곤 합니다.
어느 날, 저는 그 벤치 중 하나에 앉아 늘 그렇듯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마침 봄이었죠. 벚꽃은 이미 졌지만, 연못 너머 활동사진관 쪽은 엄청난 인파로 웅성거리는 소리, 악대 소리, 거기에 섞여 풍선 피리 소리나 아이스크림 장수의 외침이 날카롭게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저희가 있는 숲속은 마치 딴 세상처럼 고요했고, 아마 영화 볼 돈조차 없는 초라한 행색의 사람들이 굶주린 듯 나른한 눈빛을 교환하며 언제까지고 가만히 한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죄악이라는 것이 발효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실로 음울하고 서글픈 광경이었습니다.
그곳은 숲속의 둥근 공터로, 우리가 앉아 있는 앞을 우리와는 아무 상관 없는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한껏 차려입은 여자라도 지나가면 벤치의 낙오자들 얼굴이 일제히 그쪽을 향하곤 했죠. 그렇게 인적이 잠시 끊겨 공터가 텅 비었을 때였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저도 주의를 기울였겠지만, 한쪽 구석 아크등 철기둥 쪽에 불쑥 한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서른 전후의 젊은이였는데, 행색이 그리 초라하지 않은데도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적어도 얼굴 표정만큼은 행락객이 아니라 저희 같은 낙오자 무리에 속해 보였습니다. 그는 벤치에 빈자리라도 찾는 듯 잠시 그곳에 멈춰 섰지만, 어딜 봐도 꽉 차 있는 데다 자신의 차림새에 비해 너무나 지저분하고 험악한 사람들뿐이라 기가 질렸던 모양입니다. 체념하고 돌아서려던 찰나, 문득 그의 시선과 제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그러자 그는 겨우 안심한 듯이, 제 옆의 아주 좁은 벤치 틈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무리 속에서는 제 행색이, 낡은 명주옷 같은 걸 입고 있어서 이상한 말이지만 그나마 좀 나아 보였을 테고, 결코 다른 사람들처럼 험악해 보이지 않았으니 그것이 그를 안심시켰나 봅니다. 아니면, 이건 나중에야 깨달은 거지만, 그는 처음부터 제 얼굴을 알아봤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 그 이유는 곧 말씀드리죠.
이런, 제 버릇 때문에 이야기가 길어지면 안 되는데. 아무튼 그 남자는 제 옆에 앉더니 소매에서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는데, 그러는 사이 점점 이상한 예감 같은 것이 저를 덮쳐왔습니다. 묘하다 싶어 유심히 보니, 남자가 담배를 피우며 곁눈질로 힐끔힐끔 저를 쳐다보는데, 그 눈빛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무언가 의미심장하더군요.
상대가 병약해 보이고 얌전한 인상이라 섬뜩하기보다는 호기심이 앞서서, 저는 은근히 그의 행동을 주시하며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 시끄러운 아사쿠사 공원 한복판에 있어서 온갖 소음이 분명 들려오는데도, 신기하게도 아주 고요한 느낌으로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습니다. 상대 남자가 당장이라도 무슨 말을 꺼낼까 기다리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러자 마침내 남자가 입을 열더군요. "어디서 뵌 적이 있죠?" 하고 머뭇거리는 작은 목소리였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터라 별로 놀라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런 남자,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거든요.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저는 전혀 뵌 기억이 없는데요." 하고 대답했는데도 상대는 아무래도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또다시 저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게 아닙니까? 혹시 이 녀석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싶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어디서 만났습니까?" 하고 다시 한번 물었죠.
"글쎄요, 저도 그게 기억이 안 납니다." 남자가 말하더군요. "이상하네, 참 이상해." 고개를 갸웃하며 "최근 일은 아닙니다. 아주 예전부터 종종 뵈었던 것 같은데, 정말 기억 안 나십니까?" 그렇게 말하며 오히려 저를 의심하듯 하더니, 이번엔 묘하게 반가운 기색으로 싱글벙글 웃으며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게 아니겠습니까.
"사람 잘못 보셨어요. 당신이 아는 그분은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하고 묻자 그게 또 이상했습니다. "저도 아까부터 애써 떠올리려 하고 있는데 어째선지 생각이 안 납니다. 하지만 이름을 잊어버릴 만한 분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구리하라 이치조라고 합니다." 접니다.
"아, 그러십니까? 저는 다나카 사부로라고 합니다." 이게 남자의 이름입니다.
에도가와 란포 [모노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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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렇게 아사쿠사 공원 한복판에서 통성명을 했는데, 묘하게도 저도 그렇고 상대방 남자도 그 이름에 전혀 기억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이가 없어져서 우리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자 상대 남자의, 즉 다나카 사부로의 웃는 얼굴이 문득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저까지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 겁니다. 게다가 아주 친한 구면이라도 만난 것처럼 묘하게 반가운 느낌이 들었죠.
그래서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다시 한번 다나카라는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동시에 다나카 쪽에서도 딱 웃음을 거두더니 역시나 웃어넘길 일이 아니라는 표정이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더 이상 이야기를 섞지 않고 헤어졌겠지만, 아까 말한 실업자 시절이라 따분해 죽을 지경이었고, 계절도 한가로운 봄이었습니다. 게다가 겉보기에 저보다 번듯한 젊은 남자와 이야기하는 것이 나쁘지도 않았기에, 시간 때우기 삼아 기묘한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이런 식으로요.
"묘하군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저도 왠지 당신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건 접니다.
"그렇죠? 역시 그렇다니까요. 게다가 길에서 스쳐 지나갔다거나 잠깐 얼굴을 마주친 정도가 아니에요,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고향이 어디십니까?"
"미에현입니다. 최근에 처음으로 이곳에 올라와서 지금 일자리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 역시 일종의 실업자였던 겁니다.
"저는 도쿄 사람입니다만, 상경하신 건 언제쯤입니까?"
"아직 한 달밖에 안 됐습니다."
"그사이에 어디선가 만났을지도 모르겠군요."
"아니요, 그런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분명 몇 년 전부터, 당신이 지금보다 젊었을 때부터 알고 지냈습니다."
"그래요, 저도 그런 기분이 듭니다. 미에현이라... 저는 워낙 여행을 싫어해서 젊을 때부터 도쿄를 떠난 적이 거의 없고, 특히 미에현 같은 곳은 관서 지방이라는 것만 알지 지리도 잘 모르는 처지라 고향에서 만났을 리는 없고. 당신도 도쿄는 처음이라고 했죠?"
"하코네 이쪽으로는 정말 처음입니다. 오사카에서 교육을 받고 줄곧 그쪽에서 일했으니까요."
"오사카입니까? 오사카라면 간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인데."
"그럼 오사카도 아니겠군요. 저는 7년 전까지, 즉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고향에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좀 장황하게 들리겠지만, 그때는 서로 꽤 긴장해서 몇 년부터 몇 년까지 어디 있었고, 몇 년 몇 월에는 어디로 여행을 갔는지 시시콜콜 떠올리며 맞춰봐도 단 하나도 일치하는 게 없었습니다. 어쩌다 같은 지방으로 여행을 갔나 싶으면 연대가 전혀 달랐고요. 자, 이렇게 되니 신기해서 견딜 수가 없더군요. 사람을 잘못 본 거 아니냐고 해도 상대는 이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이 둘이나 있을 리 없다고 우겼고, 그게 한쪽만 그러면 몰라도 저 역시 낯이 익은 것 같았으니 무턱대고 사람을 잘못 봤다고 단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상대가 옛 친구처럼 느껴지는데도, 대체 어디서 만났는지는 갈수록 오리무중이었습니다. 이런 경험 없으십니까? 참으로 기묘한 기분입니다. 신비롭고, 그래요, 뭔가 신비로운 느낌이었죠. 시간 때우기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렇게 의문이 점층적으로 고조되자 어떻게든 끝까지 알아내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이겠지요.
하지만 결국 알 수 없었습니다. 다소 초조해하며 기억을 떠올리려 할수록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어, 두 사람이 예전부터 아는 사이라는 건 너무나도 확실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아무리 이야기를 해봐도 요령부득이라, 우리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안 났지만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서로 호감을 느끼게 되어, 예전 일은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그 자리부터는 잊기 힘든 사이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 후 다나카가 사는 차를 마시며 카페에서 잠시 우리의 기묘한 인연에 대해 이야기한 뒤, 그날은 아무 일 없이 헤어졌습니다. 헤어질 때는 서로의 주소를 교환하고, 조만간 놀러 오라고 인사를 나눌 정도의 사이가 되었죠.
그게 그것으로 끝났다면 굳이 말씀드릴 것도 없겠지만, 그로부터 4, 5일 뒤에 묘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나카와 제가 역시 어떤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게 밝혀진 겁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제 아내 자랑이라는 건 이제부터입니다. (구리하라 씨는 여기서 살짝 웃어 보입니다.) 다나카 쪽에서는 취직 자리 알아보느라 바쁜지 통 찾아오지 않았지만, 저는 늘 그렇듯 시간 때울 궁리에 골몰하던 차에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나서 그가 묵고 있는 우에노 공원 뒷골목의 하숙집을 찾아갔습니다. 이미 저녁 무렵이었고 그는 마침 외출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는데, 제 얼굴을 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뜸 "알았습니다, 알아냈어요!" 하고 소리치는 겁니다.
"그 일 말입니다. 전부 알아냈습니다. 어젯밤입니다. 어젯밤 잠자리에서 번쩍 생각난 겁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역시 제 착각이었습니다. 한 번도 뵌 적이 없더군요. 하지만 뵌 적은 없어도 전혀 인연이 없는 건 아닙니다. 혹시 선생님, 기타가와 스미코라는 여성을 아시는지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격의 질문에 깜짝 놀랐지만, '기타가와 스미코'라는 이름을 듣자 아득하고 먼 옛날의 화사한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오는 듯한 기분이 들며 며칠 동안의 미스터리가 어느 정도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압니다. 하지만 꽤 오래전 일입니다. 14, 5년 전쯤 될까요? 제 학생 시절이었으니까요."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학창 시절엔 꽤나 마당발이어서 여자 친구들도 여럿 있었는데, 기타가와 스미코는 그중 한 명으로 유독 제 기억에 깊이 남은 여성이었습니다. XX 여학교에 다녔죠. 미인이라 우리 무리의 카드놀이 모임 같은 곳에서는 언제나 최고의 인기인, 아니 여왕벌이었습니다. 미인인 대신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운 면이 있어 쉽게 다가가기 힘든 느낌의 여자였습니다. 그 여자에게 (구리하라 씨는 잠시 머뭇거리며 머리를 긁적입니다) 사실 저는 반해 있었습니다. 게다가 부끄럽지만 짝사랑이었죠. 그리고 제가 결혼한 사람은 역시 같은 여학교를 졸업한, 우리 무리에서는 2류 미인, 아니 지금은 미인은커녕 감당 안 되는 신경질 환자입니다만, 당시는 그럭저럭 평범했던, 아시다시피 '오소노'입니다. 만만한 곳에서 타협해 버린 셈이죠. 즉, 기타가와 스미코라는 여자는 제 옛 첫사랑이자, 아내에게는 학교 친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스미코를 미에현 출신인 다나카가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또 그렇다고 해서 왜 제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차근차근 캐물어 보니 참으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나카의 말에 따르면, 바로 전날 밤 잠자리에서 불현듯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는 겁니다. 왜 제 얼굴을 낯익어 했는지에 대해서요. 그래서 모든 의문이 풀렸기에 당장 그 사실을 제게 알리려 했지만 공교롭게도 그날은 취직 문제로 선약이 있어 저를 찾아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변명을 늘어놓은 뒤 다나카는 책상 서랍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며 "이걸 아시지 않을까 해서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보니 그것은 무척이나 예쁜 회중거울이었습니다. 꽤 유행이 지난 물건이긴 했지만 무척 고급스럽고, 젊은 여성이 지녔을 법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전혀 모른다고 대답하자,
"하지만 이것만은 아시겠죠."
다나카는 그렇게 말하며 어딘지 의미심장하게 제 얼굴을 쳐다보더니, 그 반으로 접히는 회중거울을 열어 덧댄 천에 박힌 거울을 능숙하게 빼내고는 그 뒤에 숨겨져 있던 사진 한 장을 꺼내 제 눈앞에 불쑥 들이밀었습니다. 그게, 놀랍게도 제 젊은 시절의 사진이 아니겠습니까!
"이 회중거울은 죽은 제 누님의 유품입니다. 그 죽은 누님이란 분이 방금 말씀드린 기타가와 스미코입니다. 놀라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만, 실은 이런 사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나카의 설명을 들어보니, 그의 누나 스미코는 어떤 사정으로 어릴 때부터 도쿄의 기타가와 가문에 수양딸로 들어가 그곳에서 XX 여학교까지 다닐 수 있었지만, 그녀가 여학교를 졸업할 즈음 기타가와 가문에 큰 불행이 닥쳐 어쩔 수 없이 고향의 친가, 즉 다나카의 집으로 돌아왔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도 하기 전에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저도 제 아내도 아둔하게도 그런 사연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거죠. 참으로 뜻밖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스미코가 남기고 간 유품 중에 작은 서류함이 하나 있었고, 그 안에는 아기자기한 물건들이 가득 들어있었는데, 그것을 다나카는 누나의 유품으로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 사진을 발견한 건 누님이 돌아가시고 1년도 더 지난 무렵이었습니다." 다나카가 말하더군요. "이렇게 회중거울 뒤에 숨겨두었으니 쉽게 알 턱이 없죠. 그때 아마 한가하게 서류함 안의 물건들을 들여다보다가 이 회중거울을 만지작거리는 중에 우연히 비밀을 발견해 낸 겁니다. 그래서 어젯밤 잠자리에서 그 사진이 생각났고,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린 겁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후로도 기회 있을 때마다 선생님의 사진을 꺼내 보며 죽은 누님을 떠올렸으니까요. 그러니 선생님은 제게 있어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아주 낯익은 분임에 틀림없죠. 며칠 전 만났을 때는 그걸 깜빡 잊고, 사진이 아니라 실제 선생님을 본 적이 있다고 착각했던 겁니다. 또한 선생님으로서도" 다나카는 씩 웃더군요. "자신의 사진까지 준 여자의 얼굴을 잊으셨을 리 없고, 그 여자의 남동생이니 제게 누님의 면모가 남아 있어, 그걸 역시 예전에 만난 적이 있다고 오해하신 게 아닐까요?"
듣고 보니 다나카의 말이 틀림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납득이 가지 않는 건, 사진이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준 적이 있으니 스미코가 가지고 있어도 이상할 건 없지만, 그것을 그녀가 회중거울 뒤에 몰래 숨겨두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왠지 그녀와 제 입장이 뒤바뀐 것 같은 기분이 들더군요. 짝사랑을 하던 제 쪽에서야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있겠지만, 스미코가 제 사진 따위를 소중히 간직할 턱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다나카의 입장에서 보면 저와 스미코 사이에 뭔가 묘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단정해 버리고, 그 관계를 털어놓으라며 다그치는 겁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누나의 사인은 물론 주로 육체적인 질병 때문인 건 틀림없지만, 남동생인 자신이 보기에는 그 외에 뭔가 있지 않았나 싶다고. 예컨대 생전에 들어왔던 혼담에 누나가 완강하게 반대했던 일 등을 생각하면, 마음에 깊이 품고 있는 사람이 있었고, 그 뜻대로 되지 않자 그런 마음고생이 누나의 죽음을 재촉한 게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실제로 스미코는 고향에 돌아온 뒤 일종의 우울증을 앓았고, 그것이 이어지는 듯 병에 걸렸다고 하니 다나카의 말도 일리가 있긴 했습니다.
자, 그렇게 되니,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제 심장도 갑자기 고동치기 시작하더군요. 뻔뻔하게 생각하자면 짝사랑은 저 혼자만 한 게 아니라, 스미코 역시 똑같이 차마 말하지 못한 사랑을 품고 원망스럽게 우리들의 결혼을 지켜보았던 거라고 상상할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 아름다운 스미코가 그렇게 죽어갔다면, 저는 대체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기뻤습니다. 왠지 이렇게 눈물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를 정도로 기뻤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일이 과연 사실일까' 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스미코는 저 같은 놈을 사랑하기에는 너무 아름답고 너무 고결한 여성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저와 다나카 사이에 묘한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저는 조심스러운 마음에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 다나카는 "그럼 이 사진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하고 몰아붙였죠. 그렇게 옥신각신하는 사이 저는 점점 감상에 젖어 들었고, 마침내는 제 짝사랑을 털어놓으며 이런 사정이니 스미코 쪽에서 저를 마음에 품고 있었을 리 만무하다고, 사실은 그 반대이길 간절히 바라면서도 억지 주장을 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며 내내 회중거울을 만지작거리던 다나카가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으로 "역시 그렇군요!" 하고 외치는 겁니다. 무언가 엄청난 걸 발견한 거였습니다. 회중거울의 케이스는 아까도 말했듯 비단으로 만든 접이식이었는데, 그 표면의 삼잎 무늬 사이에 스미코가 심심풀이로 수놓은 듯 눈에 띄지 않는 색실로 영어 알파벳 자수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I' 자를 'S'가 감싸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저는 여태껏 이 알파벳의 의미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다나카가 말했죠. "S는 과연 스미코(Sumiko)의 머리글자일지도 모르겠지만, I 쪽은 친가인 다나카(Tanaka)에도 양가인 기타가와(Kitagawa)에도 맞아떨어지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번뜩 든 생각이, 선생님 성함이 구리하라 이치조(Ichizo)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치조의 머리글자인 I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사진도 그렇고 알파벳도 그렇고, 이걸로 누님이 마음에 품었던 분이 누군지 완전히 확실해졌습니다."
거듭되는 증거품에 저는 기쁜 건지 슬픈 건지 묘하게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러고 보면 십수 년 전 기타가와 스미코의 여러 가지 몸짓들이 이제 와서는 하나하나 의미심장하게 떠오르더군요. 그때 그런 말을 한 건 나를 향한 수수께끼였나, 그때 그런 태도를 보인 건 역시 마음이 있어서였나 하고, 주책맞다고 비웃지는 마십시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콤한 추억에 잠겨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의 하루 종일, 다나카는 누나와의 추억을, 저는 학창 시절의 옛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미 아득한 과거의 일인 만큼 생생한 아픔도 없었고, 또 씁쓸함도 없이 그저 그립게 이야기를 나누었죠. 그리고 헤어질 때 저는 다나카에게 졸라 그 회중거울과 스미코의 사진을 얻어 소중히 품속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신기한 인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연히 아사쿠사 공원의 벤치에서 만난 남자가 옛 첫사랑의 남동생이었고, 게다가 그 남자에게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녀의 마음을 알게 되다니. 그것도 우리가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면 그리 신기할 것도 없지만,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이에서 쌍방이 상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으니까요.
그 일이 있은 후 한동안 저는 스미코 생각만 하고 지냈습니다. 그때 왜 내게 좀 더 용기가 없었나 하는 아쉬움도 물론 없지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세월이 많이 흐른 일이고 제 나이도 나이인지라, 그런 현실적인 문제보다는 그저 막연히 기쁘고 또 슬퍼서 아내 몰래 유품인 회중거울과 사진을 들여다보며 꿈결같이 아스라한 추억에 젖어 지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참 묘하지 않습니까? 제 마음은 결코 현실적인 것이 아니었는데도, 신경질 환자이긴 해도 여태껏 딱히 싫은 줄 몰랐던 아내 오소노가 유달리 꼴 보기 싫어지고, 스미코가 잠들어 있는 미에현의 시골 마을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기에 신기하게도 더욱 그립게 느껴지는 겁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순례자처럼 조촐하게 여행을 떠나 스미코의 성묘를 해보고 싶다는 소망까지 품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씀드리면 이제 와서는 제 몸이 다 꼬일 정도로 민망합니다만, 당시는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정말로 굳게 마음먹었더랬습니다.
다나카에게서 들은, 그녀의 아리따운 법명이 새겨진 비석 앞에 꽃을 바치고 향을 피우며 그곳에서 그녀에게 한마디 건네보고 싶다. 그런 감상적인 공상마저 그렸습니다. 물론 이것은 공상에 지나지 않았죠. 설령 실행하려 한들 당시 생활 형편으로는 여비를 마련할 여유조차 없었으니까요…….
자, 이야기가 여기서 끝난다면 흔히 말하는 마흔 살 사내의 동화로서, 비록 자기 자랑이라 할지라도 제법 흥미로운 추억임이 틀림없겠습니다만, 그런데 실은 이 이야기에는 뒷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드리면 엄청난 환멸이라, 그저 어처구니없는 우스개 이야기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저도 끝까지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사실은 사실이니 어쩔 수 없지요. 뭐, 그런 일로 우쭐해져 버린 제게는 좋은 본보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그런 식으로 죽은 스미코의 환영을 그리워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잠깐 방심한 틈에, 문제의 회중거울과 스미코의 사진을 제 신경질쟁이 아내에게 들키고 만 겁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큰일 났다 싶었죠. 이걸로 또 한 4, 5일 동안은 격렬한 발작 시중을 들어야겠구나 하고 아예 각오를 다졌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두 물건을 앞에 두고 제 낡은 책상 앞에 앉은 아내는 전혀 신경질을 부릴 기색이 없는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싱글벙글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어머, 당신 사진이잖아요? 어떻게 이런 걸 갖고 있었어요? 게다가 어머나 반가운 회중거울, 꽤 오래된 거네요. 내 짐가방에서 나왔어요? 오래전에 잃어버렸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말을 들은 저는 왠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아직 무슨 소린지 잘 몰라서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아내는 무척이나 반가운 듯 회중거울을 만지작거리며,
"내가 이 알파벳 자수를 놓은 건 학교 다닐 때였어요. 당신, 이거 알아보고..." 그렇게 말하며 서른 살 아내가 묘하게 요염한 표정을 짓는 겁니다. "이치조의 I죠? 소노의 S고요. 아직 당신과 하나가 되기 전, 서로의 마음이 변치 않기를 비는 의미로 수놓은 거예요. 알아보고 가져온 거 맞죠? 어쩌다 찾았어요? 학교 수학여행으로 닛코에 갔을 때 중간에 도둑맞았다고 생각했는데."
라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즉 그 회중거울은 제가 철석같이 믿었던 스미코의 것이 아니라, 제 신경질쟁이 아내 오소노의 것이었던 겁니다. 오소노(Sono)도 스미코(Sumiko)도 머리글자는 똑같이 S여서 엄청난 착각을 한 셈이죠. 그렇다 치더라도 오소노의 물건이 어째서 스미코에게 있었는지, 그 부분은 아무래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이것저것 캐물어 본 결과, 결국 이런 사실이 판명되었습니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그 수학여행 때 회중거울은 지갑 등과 함께 핸드백 안에 넣어 들고 다녔는데, 도중 여관에서 누군가에게 도둑맞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무래도 같은 반 학생 소행인 것 같았다고 하더군요. 저도 어쩔 수 없이 스미코의 남동생과 우연히 만난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만, 그러자 아내는 "그럼 이건 스미코가 훔친 게 틀림없네.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스미코 손버릇 나쁜 건 반 친구들 중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어. 그럼 분명 그 애 짓이야."라고 하는 겁니다.
아내의 말이 엉터리나 착각이 아니라는 증거로, 아내는 그때는 이미 빠져서 없어졌던, 거울 뒷면에 있던 제 사진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것 역시 아내가 넣어둔 것이었습니다. 아마 스미코는 죽을 때까지 이 사진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지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걸 그녀의 남동생이 심심풀이로 만지작거리다 우연히 찾아내 엄청난 착각을 한 것이겠죠.
결국, 저는 이중의 실망을 맛봐야 했습니다. 첫째로 스미코가 결코 저 따위를 마음에 품고 있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만약 아내의 상상이 사실이라면 그토록 제가 애타게 그리워했던 그녀가 보기와는 달리 좀도둑 아가씨였다는 것.
하하하하하, 어설픈 이야기라 지루하셨죠? 저의 바보 같은 추억 이야기는 이걸로 끝입니다. 결말을 말씀드리고 나면 이보다 더 시시할 수가 없지만, 그 사실을 알 때까지 저도 꽤나 긴장했었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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